본관 연혁
연일(延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포항시 영일읍(迎日邑)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오량지현(烏良支縣)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하고, 의창군(義昌郡: 興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일현(迎日縣: 延日)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慶州府)에 내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조선 초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대에 다시 병마첨절제사로 고쳤다가 후에 현감만을 파견하였다. 1732년(영조 8)에 통양포(通洋浦) 아래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해 함경도 진휼(賑恤)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함경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영일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연일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일군은 연일면 등 5개면으로 분면되어 흥해·장기·청하군과 함께 영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80년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영일군이 포항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연일오씨(延日吳氏) 시조 오연경(吳延慶)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큰아들로 성품이 강직하여 연일(延日)로 유배, 그 곳에 살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해주에서 분적하여 관향을 연일로 삼았다고 한다.
오연경에게는 오치(吳治), 오흡(吳洽), 오순(吳洵)의 세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오치는 아들 오수창(吳壽昌)과 함께 화천(華川)에서 해주오씨를 계승하였고, 오흡·오순 두 아들이 다 같이 연일오씨의 일세가 되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시조를 오흡으로 그 선계는 분명하지 않고 연일에 세거하던 토착사족이라고 하기도 한다.
분적종 및 분파
연일오씨는 해주오씨 오연경이 연일로 유배되면서 분적한 성씨이다.
주요 세거지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청용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연일오씨는 113가구 총 39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