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용문사(龍門寺)
울창한 거목들 사이에 서 있는 일주문은 고색이 완연하다.
이곳을 지나면 풍경 소리, 목탁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져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산사의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현재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16동의 전각이 세워져 있는 규모로 보아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가장 큰 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랜 사찰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전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불사는 진행되고 있다.
특히 보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전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다.
용문사(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두운은 풍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이다.
절 이름은 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올 때
이 사찰을 찾다가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명종 때는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세자(世子)의 태(胎)를 묻고 사액(寺額)을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개명하였다.
-용문사 홈페이지에서-
인물사진만 확대했습니다.
대장전 보물145호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윤장대(輪藏臺) 보물684호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8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목불좌상 및 목각탱 보물 989호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명부전
응진전
응진전에는 16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교지 보물729호
세조 3년(1457)에 내린 교지로,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해주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다.
이 교지의 내용은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지시한 대로 경상도 용문사는
다시 심사하여 더욱 보호하고 잡역을 덜어 주라’는 것이다.
이 교지는 가로 44.8cm, 세로 66.5cm로 국왕의 수결(지금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용문사의 지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산회괘불탱 보물1445호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삼존불상 가운데 통견(通肩)의 적색 대의(大衣)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에 이르러 10미터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본존불 하단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였는데
두 상 모두 손 모습과 천의(天衣)의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본존불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신체의 자세 및 벌리고 서 있는
발의 모습, 인물의 크기와 형태, 보관, 지물 등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상단 본존불상의 머리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였으며,
배경으로는 황·적·청·녹색의 색구름대(彩雲帶)를 깔고 감청색의 하늘을 두어 공간감을 부여해주고 있다.
또한 그림 내부 하단 가운데 쪽에 왕실의 안위를 발원하는 내용의 글이 있으며,
테두리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괘불탱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 조성의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함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팔상탱 보물1330호
팔상탱화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이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탱화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영남제일강원
범종각
자운루 문화재자료143호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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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히도 관찰 하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