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 황집(黃鍓)
[생졸년] 1670년(현종 11)~1739년(영조 15) / 향년 69세
[본 관] 창원(昌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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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학생 황공 묘표(學生黃公墓表)
근래에 선행에 힘쓰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아 지금 세상의 선비와는 다른 인물이 있으니, 황집(黃鍓) 중개(仲開) 공이 그 사람이다. 황씨는 창원(昌原)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시중을 역임한 충준(忠俊)이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종친부 전첨을 역임한 휘 탕경(湯卿)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였다. 공의 고조는 한림을 역임한 휘 성(珹)이고, 증조 휘 자중(自中)은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휘 류(瀏)는 통덕랑이다.
부친 휘 도종(道宗)은 인열왕후(仁烈王后) 외조부의 봉사손(奉祀孫)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에 궁중에 들어가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밥과 반찬을 내려주어 융성한 예우로 특별히 우대하였으나 장성해서는 불치병이 있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동지중추부사 정린(廷隣)의 따님이다.
공은 현종 경술년(庚戌年,1670, 현종 11)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에 모친의 명으로 용인(龍仁) 덕의동(德義洞)에 있는 외숙부의 집에 가서 수학하다가 그대로 외숙부의 부임지인 광양(光陽)으로 따라 갔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매일 밤 그리워하여 먹고 자는 일도 그만두었는데, 얼마 뒤에 모친의 부고가 이르렀다.
공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 셀 수 없이 곡을 하고 가슴을 쳤으며, 초상을 치르는 태도가 어른처럼 의젓하였다. 외숙부가 공이 너무 수척해진 것을 근심하여 강계(薑桂)로 기력을 북돋우라고 권하였으나 울면서 따르지 않았다.
본가로 돌아가서는 음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기에 직접 부친을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니, 다만 몸소 모친의 궤연을 받들 뿐만이 아니었다. 장사 지낼 때에 큰비가 내렸는데 슬피 곡을 하고 울면서 어느 하나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으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거처할 집이 없어 늘 친척집을 전전하였다.
늘 독서를 할 때에는 바른 자세로 앉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른들이 하늘이 낸 학자라고 칭찬하였다. 간간이 과거를 볼 때마다 스스로 답안지를 작성하자, 남들이 군색하여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비록 합격하고픈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글씨 역시 어찌 감히 남에게 맡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처럼 예를 지켰으며, 합장할 때에는 비록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으나 장례를 치르는 데 자신의 힘을 다하였다. 십 리 거리에 묘소가 있었는데, 삭망(朔望) 때가 아니더라도 슬픔이 일면 찾아가서 하루 종일 통곡하였는데, 눈물이 말라 피가 나오자 묘를 지키던 노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상기(喪期)를 마치고는 그대로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집이 무너져 비가 새어 거의 앉을 만한 조그만 공간도 없었으나 밤새도록 독서를 하며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서책은 《효경》을 몹시 좋아하여 날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이 책은 과거공부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읽어서 무엇하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황산곡(黃山谷 황정견(黃庭堅))이 말하기를 ‘사대부가 3일 동안 독서를 하지 않으면 곧 언어가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추해짐을 느낀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공명과 득실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나는 죽은 뒤에 그만둘 것이니, 이밖에 더 이상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벗을 대할 때는 오래되어도 공경하였고, 친척과는 화목에 힘썼으며, 남을 대할 때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직 남의 자식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효(孝)를 주장하였고, 벼슬아치들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충(忠)을 주장하였다. 고을에 살던 40년 동안 교유를 삼가고 출입하는 일이 적었으며, 한결같이 소박함을 지키고 조용히 수양하는 것을 마음에 두었다.
비록 궁핍하게 살았지만 국가를 위한 근심은 조금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으니, 열 가지 조목으로 충심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머뭇거리다 올리지 못했다. 인자하고 사랑스런 마음을 타고나 비록 하찮은 미물도 차마 해치지 못하였고, 몸가짐을 겸손하고 공손히 하였으며, 남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잡고 일을 처리할 때 결코 공로와 이익에 관계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지키는 바가 확고하여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반드시 결행하는 용기가 있었으며, 평소 술을 즐겼으나 한 잔 이외에는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또 해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예의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피하여 함께 앉지 않았다.
공의 실제 행실을 추적하면 다만 한 고을의 선사(善士)일 뿐만이 아니니, 가령 일찍 큰 현인의 문하에서 배워 식견을 넓혀 더욱 원대한 사업에 힘썼다면 공의 성취가 어찌 다만 이와 같을 뿐이었겠는가. 이 점이 안타깝다.
공은 기미년(己未年,1739, 영조 15) 10월 8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였다. 철원 덕립동(德立洞)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부인 원주 이씨(原州李氏)를 합장하였다. 공의 아들인 명하(明河)가 나에게 몇 년 동안 배웠기에 그로 인해 공의 훌륭한 덕성에 대해 익숙히 들었다. 그래서 대략 이렇게 서술하여 묘도(墓道)에 게시하게 하여 효자의 마음을 채워주고 선사(善士)를 권면하는 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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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학생 황공 묘표 :
이 글은 황집(黃鍓, 1670~1739)의 묘표이다. 황집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개(仲開)이다.
[주02] 강계(薑桂) :
생강과 육계(肉桂)이다.《예기》〈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초목
의 양념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생강과 육계를 말한 것이다.[曾子曰, 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
也.]” 하였다.
[주03] 수많은 …… 있었으며 :
자신이 떳떳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도 두렵지 않다는 기상이다.《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방
법으로 용기에 관해 논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비록 천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
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