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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世 이홍유(李弘有)
[생졸년] 1588년(선조 21)~1671년(현종 12)
[생원]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5위(95/100)
1588년(선조 21)∼1671년(현종 12). 조선 중기 문신. 호는 둔헌(遯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이다.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부친 괴산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과 모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장징(張徵)의 딸 옥구장씨(沃溝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 성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44년(인조 22) 성현찰방(省峴察訪)에 발령을 받았으나 모친상으로 인해 직무를 내놓고 물러갔다. 60세 이후 향인(鄕人)들에 의해 도훈장(都訓長)‧산장(山長: 서원 책임자)에 추천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사후인 1770년(영조 46)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저서로 1890년(고종 27)에 간행된 『둔헌집(遯軒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둔헌집(遯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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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
萬曆戊子正月四日。先生生于壽樂村庄。
丁酉。先生十歲。○正月。先考以學行被薦。筮禧陵參奉。三月十九日。遭祖母淑人姜氏喪。
戊戌。先生十一歲。服闋。
庚子。先生十三歲。○先考作玩易齋于西溪之上。○六月。先考又以明經擢拜王子師傅。上洛未浹旬而還鄕第。
壬寅。先生十五歲。○參本州蓮榜。
癸卯。先生十六歲。○四月。先考除工曹正郞。○五月。除刑曹佐郞。在鄕不就。上賜米菽十石。
甲辰。先生十七歲。○二月。先考除義城令。○往謁于郡。
乙巳。先生十八歲。在縣侍讀。○是時。聘于醫書習讀官長鬐鄭霫女。
丙午。先生十九歲。○先考棄官歸鄕。○上洛。○三月。南征時。上百祥樓。次再思堂韻。
戊申。先生二十一歲。○先考卜玉華臺。扁堂曰歲寒亭。○先生侍讀於此。○長子萬憲生。
甲寅。先生二十七歲。三月晦日。入華陽洞會。宋尤齋有詩。○八月二十日。中漢城試。
乙卯。先生二十八歲。二月二十日。參蓮榜進士二等二十五人。
辛酉。先生三十四歲。二月八日。會申之益於壽樂。論奸臣李爾瞻罪。草䟽。○三月。與諸益會飛鴻。八月二十八日。奉別族叔
憬胤赴泗川任。九月九日。講飮追遠堂。
癸亥。先生三十六歲。○六月二日。先考除工曹正郞。○七月十二日。徵書特下。先考舁病詣闕。上御宣政殿入侍。上賜米菽。
一依沙溪金長生例。特命。九月。除繕工監僉正。十月。上書乞歸還鄕第。十二月。除槐山郡守。○奉親
命祭靈城君。
甲子。先生三十七歲。○先考上京拜恩。下洛赴任。上䟽救民瘼。仍棄歸。
戊辰。先生四十一歲。三月三日。與卞公嵒稧會。六月流頭。作十景韻。上申養一堂。○次子萬濟生。
○七月十六日。詠冶溪八景。
己巳。先生四十二歲。○十二月一日。先考疾作感寒。雖不至刺痛。留時引日。轉成沉痼。人或勸以針灸。必峻拒之。
庚午。先生四十三歲。○二月。先考疾或作或止。四月十日。命不肖曰。吾病稍間。安有蘓息之理乎。五月二十七日。命不肖
曰。吾死後依禮返魂于追遠堂。翌日易簀。八月二十五日壬申。窆先塋西一里許子坐。禮葬焉。十一月十
五日。門人申之益。奠哭于先考几筵。有祭文。
壬申。先生四十五歲。服閱。○九月。與李子升,韓卓爾,李德厚諸益。遊落影山。信宿性菴。晦日往卞栢陰茅亭。會公岩。
癸酉。先生四十六歲。六月十一日。少子萬彪生。二月。晦日。往拜金堂谷仲父校理公。三月十日。筮除童蒙敎官。再除參奉。
皆不仕。
乙亥。先生四十八歲。四月六日。往松洞賀申養一堂。資陞永崇殿參奉。
丙子。先生四十九歲。子萬輝生。赴哭仲父校理公于醴泉。
戊寅。先生五十一歲。正月。聞倭奇又擾。慨然有詩。
己卯。先生五十二歲。九月二日。訪申壽翁。翌日赴哭仲父進士公。
順治甲申。先生五十七歲。三月。除省峴察訪。晦日發行。四月五日。到任。五月。在舘。有寫懷詩。七月。上監司告休書歸
覲。親患甚劇。八月二十八日。
丁內艱。享年八十七。十月二十九日。就合先考墓。盖一原同壙。卽先考遺命也。
丙戌。先生五十九歲。服關。七月二十五日。發申三孝㫌閭通文。使儒生呈牧伯。
戊子。先生六十一歲。十一月八日。鄕人薦先生于道伯。爲都訓長。屢有辭書。監司慶最。特遣行衣一襲。鬣者一匹。凡五辭。
○九月。訪武溪書齋。
己丑。先生六十二歲。十月十二日。丁酉。哭申之益。有祭文。○少子萬彪。登武科。
癸巳。先生六十六歲。哭卞承宣。有挽詞。
乙未。先生六十八歲。十月九日。哭卞公岩。有挽詞。○鄕士大夫。推爲山長。有辭書。
丙申。先生六十九歲。飛鴻四老會。
庚子。先生七十三歲。七月十二月。錄金都事世定來訪詩。八月八日。有望月詩。九月二十日夜。憲兒有記夢之說。十二月三
日。命憲兒撰追遠堂記。二十七日。大雪滿尺。
辛丑。先生七十四歲。十二月二十四日。遭夫人張氏喪。窆于先塋顔山子坐。
壬寅。先生七十五歲。二月。送表侄赴海州任。○三月。過卞承宣舊居。有感詩。
戊申。先生八十一歲。又辭山長。○重九講會。○以壽資陞嘉善。
顯廟辛亥。先生八十四歲。四月十二日。易簀。七月二十九日。窆于夫人墓左雙墳。
乾隆三十五年九月六日。特贈掌樂院正。妣張氏贈淑人。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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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헌(遯軒) 이홍유(李弘有)
이홍유(李弘有, 1588~1671)는 조선후기 문인으로, 역학으로 이름났던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의 장남이다. 그는 청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문인이었으므로 대내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집 『둔헌집(遯軒集)』(한국문집총간 속 23권)에는 13편의 문(文)과 시(詩) 373제 524수가 수록되어 있어 문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홍유는 1588(선조 21)년 청주의 수락촌(壽樂村)에서 괴산군수를 지낸 이득윤과 옥구 장씨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징(徵)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길(順吉), 호는 둔헌(遯軒) 혹은 산민(山民)이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이홍유를 한번 보고 “훗날 틀림없이 도(道)있는 군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성현의 학문을 돈독히 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46세에 동몽교관과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57세에 성현(省峴) 찰방(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휴서(休書)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만년에 도훈장과 산장(山長)으로 추대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향사대부들에 의해 이렇듯 잇따른 추대를 받았음은 그가 향리에서 학식과 덕망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선비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가 관직에 몸담았던 기간은 성현 찰방에 제수된 4개월이 전부였다. 그는 일생을 현사대부들과 산수 간에서 노닐고 옥화동을 왕래하면서 시를 읊조리거나 인재를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 우암 송시열(宋時烈), 오리 이원익(李元翼), 지천 최명길(崔鳴吉), 화곡 이경억(李慶億), 만주 홍석기(洪錫箕) 등의 제현들과 교유하였다. 그들과 주고받은 시편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몇 편에 불과하다.
그대 어느 날 갑자기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임천에 누워 일민이 되었구려.
도성과 궁궐은 이미 멀어졌으나
청산에서 늙어가는 흥취 더욱 새로우리.
수심을 없애려 술을 부르니 새들이 서로 권하고
뜻을 얻어 시를 지으니 필력 신기하여라.
묻노니, 서울에서 땀 흘리며 달리는 것
물외에서 천성을 보존하는 것과 견줄쏜가.
夫君一夕謝簪紳, 退卧林泉作逸民.
紫陌金門身已遠, 靑山白首興堪新.
澆愁喚酒禽相勸, 得意題詩筆有神.
試問東華揮汗走, 何如物外葆天眞. 「홍원구에게 부치다(寄洪元九)」
시제에 보이는 ‘원구(元九)’는 홍석기(1606~1680)의 자(字)이다. 그는 예조정랑, 인동부사, 성천부사, 양재찰방, 단양군수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조선후기의 관료이자 문인이다. 홍석기는 특히 민첩한 시재(詩才)로 이름이 났다. 그는 어려운 운자를 잘 달아서 사람들이 운자를 부르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답을 하였다는 일화가 시화집에 두루 보인다.
홍석기는 서계 이득윤의 문인인 동시에, 이잠(이득윤의 부)의 사위인 홍순각(洪純慤, 1551~?)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홍석기와 이홍유의 집안은 학연뿐만 아니라 친척이 되어서 세교(世交)를 이어갔다. 위의 시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는 홍석기에게 부친 것이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벼슬을 버리고 일민(逸民)이 되었으나 청산에서 늙어가는 재미가 새로울 것이라며 위로하고 있다.
일민이란 학덕이 있으나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묻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백이, 숙제, 유하혜와 같은 인물들이 다 일민에 속한다. 경련에서는 시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 흥이 일어 시를 지으면 필력이 대단할 것이라며, 홍석기가 전원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렸다.
평소 술을 좋아하고 시에 재주가 있었던 홍석기의 모습을 포착하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련에서는, 세상 밖에서 은거하며 천성을 보존하면서 사는 삶이 서울의 생활보다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나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지 않을까 싶다.
이홍유는 자호를 ‘둔헌(遯軒)’이라 하였다. ‘둔(遯)’이란 ‘떠나다’, ‘도망가다’, ‘은둔하다’, ‘숨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역 64괘 중에 <둔(遯)>괘가 있다. 위에 건괘(乾卦)가 있고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으니, 이는 소인의 상징인 음효(陰爻) 두 효가 밑에서 자라고 있어 세상이 어지러울 징조이므로 군자는 이 괘를 만나면 은둔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괘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벼슬을 버리고 그저 물러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은둔해 있으면서 끊임없이 덕성을 함양하는 공부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시세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에 ‘돈(遁)은 형통하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중용』에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있으면서 은둔해 있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은둔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遁世不見知而不悔)”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듯 둔(遁)에 다양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둔’을 이름한 이들이 많았다. 예컨대 고려말의 명신인 이집(李集, 1327~1387)은 둔촌(遁村),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둔암(遁庵), 김양현(金良鉉, 1679~1743)은 둔옹(遁翁), 이진병(李震炳, 1679∼1756)은 둔곡(遁谷)이라는 호가 있었다. 이들 외에도 초야에 묻혀 있는 은사들도 ‘둔’을 자호한 예가 적지 않았다.
이홍유의 삶과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호인 ‘둔’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홍유는 자호 그대로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세리(勢利)를 좇는 속인과 달리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알았고 청정하면서도 담박한 세계를 추구하려 하였다. 이홍유의 시 몇 편을 소개해 본다.
평소 성품은 경치 좋은 곳을 몹시 좋아하여
인간 세상의 부귀에는 도통 무심하였네.
생애는 이미 바위 집에 맡기고
사업은 오로지 무릎 위의 거문고에 의지했네.
근심 떨치려 외상 술 마시는 것도 무방하고
회포 풀려고 애오라지 시 찾아 읊조리지도 않는다네.
늘그막에 절로 몸 가는대로 한적하게 지내니
물가 친구 촌 늙은이가 차례로 방문하네.
雅性偏憐山水窟, 人間富貴摠無心.
生涯已托巖邊屋, 事業惟憑膝上琴.
排憫豈妨賖酒飮, 遣懷聊不覔詩吟.
老來自信身閑適, 溪友園翁次第尋. 「산촌에서 멋대로 읊다(山村謾吟)」
이홍유는 산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몹시 좋아하고 부귀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다. 복잡한 티끌세상을 벗어나 산속 집에 몸을 맡긴 채 그가 일삼는 것이라고는 무릎 위의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다. 근심을 잊으려고 외상술을 마셔도 아무 거리낄 것이 없으며, 가슴 속 회포를 풀려고 고음(苦吟)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몸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고 한적하게 지낼 뿐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이홍유의 벗은 홍진을 피해 산간계곡에 사는 인물들이다. 시인도, 시인의 벗도 그렇게 자연 속에서 인생을 여여하게 살고 있다. 이홍유가 산촌에서 담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그는 산속에서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남들이 자신의 성명을 알아주지 않음을 오히려 기뻐하였고(幽居峽裏閉巖扃, 自喜無人知姓名.), 한가하게 아무 일이 없는 자신을 흡족해 하며 낚싯대를 잡고 낚시터로 향하면서(投閒自喜身無事, 謾把漁竿向釣㙜.)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그는 ‘빈부(貧富)는 인연 따라 가는 것이기에 사람을 원망할 것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다(隨緣貧富難容力, 不可尤人不怨天)’는 낙천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가난한 살림에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강물이 깊고 넓어 쏘가리 살쪄있고
단풍잎에 갈대꽃 물가에 가득하여라.
어여쁠손, 가랑비 비껴 내리고 바람 부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 어부 앉아서 돌아갈 줄 모르네.
江深水濶鱖魚肥, 楓葉蘆花滿石磯.
可憐細雨斜風裏, 簑笠漁翁坐不歸.
「낙우당 주인의 구곡 시에 공경히 차운하다(敬次樂愚堂主人九曲韻)」
시제에 보이는 낙우당은 신득치(申得治, 1592~1656)의 호이다. 자는 평보(平甫)이다. 이홍유와는 막역한 사이로 친밀하게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가가 혼인을 함으로써 세교(世交)가 이어졌다. 일찍이 신득치가 <낙우당구곡시>를 지은 바 있는데 위의 시는 그 시에 차운한 것으로, 구곡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낚시터(釣魚磯)>를 시화하였다.
낚시터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되어 시중유화(詩中有畵)를 연상케 한다. 넓고 깊은 강물이 석양녘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물결 아래 물고기가 뛰어놀고 있다. 힘차게 물을 차고 올라온 쏘가리를 보니 제법 살이 올랐다. 강가의 양 언덕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었고 얕은 모래밭에는 하얀 갈대꽃이 흩날리고 있다. 그뿐인가, 살살 불어오는 바람 속에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다. 도롱이와 삿갓을 쓴 늙은 어부가 고기를 낚으려 함인지, 세월을 낚으려 함인지, 가을 풍경을 낚으려 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물가에 앉아 있을 뿐이다. 평범한 어휘와 자연스런 표현으로 대상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기구는 당나라의 시인 장지화가 읊은 <어부가(漁夫歌)>의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또한 승구는 이숭인이 읊은 <등루(登樓>의 “저녁 바람에 먼 나그네 홀로 다락에 오르노니, 단풍잎에 갈대꽃 눈에 시름 가득한데(西風遠客獨登樓, 楓葉蘆花滿眼愁)”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산수에 대한 마음 고질병이 되고
공명에 대한 뜻 이미 관심 밖이 되었네.
한가한 틈을 타서 때때로 산책하다가
돌을 쓸고 푸른 이끼 베고 눕네.
山水因成癖, 功名意已灰.
乘閑時一步, 拂石枕蒼苔. 「우연히 짓다(偶題)」
부귀는 진실로 원하는 것이 아니요
공명도 본디 기약하지 않았네.
일생에 흥이 많아
풍월과 술, 거문고 그리고 시에 부치노라.
富貴誠非願, 功名本不期.
一生多少興, 風月酒琴詩. 「회포를 풀다(遣懷)」
위의 두 편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홍유는 부귀와 공명에 뜻이 없었다. 그는 산수 자연을 몹시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며 흥이 많은 풍류객이었다. 한가하면 산책을 나가서 푸른 이끼를 베고 드러누울 줄도 아는 그런 이였다. 한 자락의 바람, 한 조각의 달빛, 한 잔의 술, 한 곡조의 거문고, 한 편의 시에 흥취를 담으려 했던 시인이었다.
이홍유는 자호인 ‘둔헌’의 의미대로 은둔의 삶을 살다가 84세에 타계했다. 그의 아들 만헌(萬憲) 역시 동몽교관과 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과 덕업이 있었음에도 진취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업(家業)을 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귀와 공명을 애써 추구하지 않으면서 맑고 담박한 삶 속에 시정(詩情)을 잃지 않은 것을 가업으로 이음도 천분(天分)과 천복(天福)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시 2015년 12월호(통권 330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