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법화신앙계열은 대략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고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법화사상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구성한 단체와,
둘은 법화사상 위에 재래의 민간신앙을 결합한 단체와,
셋은 일본 법화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단체 등이다.
일본 법화계는 다시 일련종계와 일련정종 대석사계와
그 신도단체인 창가학회계와 법화종계열의 군소 단체로 나누어지는데
그 지부형태로 들어온 단체까지 합하면 수십개파를 헤아린다.
여기서는 성격상 일본 법화계는 제외하고 정통 법화종단만을 살펴보는데 그친다.
한국적인 법화계열은 전 호에 소개한 한국불교법화종 대한불교법화종
대한불교불입종(관음종) 대한불교일승종과 대한불교천태종 및 대한불교영산법화종등이다.
이중 천태종과 영산법화종은 인맥이나 법맥상 앞의 종단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흔히 소백산의 기적으로 불리는 천태종은 박상월스님에 의해 창종되었다.
스님의 속명은 준동이고 법호는 원각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한 스님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5세부터 구도를 뜻해
삼태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이어 차력 축지 등의 선도술도 배웠다.
그 후 불문에 귀의해 제 경전을 공부하고 선지식을 찾던 스님은, 32세에 중국에 건너가
곤륜산을 비롯한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티벳 등지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광복되던 해에 그는 소백산의 백자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봉팔문 중 제4봉 밑의 연화지에 초암을 짓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해 6년만인 41세 섣달에 도각을 이루었다.
도각 후 스님은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초기는 주로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치병과 기도를 통해 영험을 얻자 전국 각처에서 소백산으로 향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스님은 대한불교천태종으로 문공부에 등록한다. 더불어 애국.대중.생활불교의 지표와
개인완성 불국토건설 법성체결합의 강령으로 종단의 체계를 세웠다.
황폐했던 산중에 2백만 그루의 잣나무가 심어지고, 전답과 농원을 개간해
자급자족의 종단 경제를 구축했으며, 험준한 산길은 도로로 변해 대중교통이 이용되고,
승속이 하나되어 관음주력과 주경야선과 강학공부를 병행하니
창종 수년만에 천태종은 대종단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소백산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천태의 종지와 종풍을 정립하는데 진력했던 스님은 1974년 여름 세수 64세로 세연을 마친다.
그의 묘소는 수리봉 상봉에 모셔져 있다.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는 단위사찰로는 국내 최대이다. 50여동의 전각과 현대식으로 갖춰진
완벽한 기도시설은 위치가 산중이고 불과 20년내에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기록될만 하다.
모든 기본 틀은 창종주 생전에 구비되었고 현재는 내적인 충실을 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상월스님의 입적 후 종단은 2대 남대충, 3대 김도용스님으로 이어진다.
남대충스님은 상월스님의 소백산 입산 때부터 시봉과 수련을 함께 한
수법제자이며, 김도용스님은 장좌불와로 유명하다.
행정책임인 총무원장은 1980년부터 전운덕스님이 맡아 오늘의 조직체계를 이루었고,
산하기관으로는 금강불교대와 <천태종보〉및 월간지 <금강〉과 3개의 유치원이 있다.
최근 활발한 국제교류와 함께 천태종의 발상지인 중국 천태산의 국청사에
지자 의천 상월스님의 3조사상을 조성하였고, 천태종맥의 확립을 위해
《천태삼대부》등을 간행 중에 있다. 전국에 대규모의 회관 및 사찰이 건립됐지만,
사회복지시설의 확충이 아직도 과제로 남는다. 종조는 지자대사이며,
소의경전은 《법화경》과 《법화삼대부》와 《천태사교의》이다.
일반에게 영산법화사로 더 잘 알려진 이 종단은 이법화스님에 의해 창종되었다.
스님은 27세부터 《법화경》에 심취해 박한영스님 등에게 법화사상을 공부했고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하다 광복 후 윤고암스님에게 수계한다. 스님은 스스로
법화행자로 칭하면서 법화신앙에 관한한 투철한 신념과 폭넓은 교학을 정립했고
이를 실천신앙으로 전개해 나갔다. 1955년에 진해 영산법화사를 창건하면서 전국에 16개의
영산법화사를 세웠고, 1964년에 출판부를 개설해 《법화경》에 관한 10여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특히 일본 일련종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정통해 《창가학회를 절복한다》는
저술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일련종의 신앙적 모순을 지적한 것으로 오랫동안 필독서가 되고 있다.
또한 어린이 포교용의 《불교동화집》과 《부처님 말씀》은 정부의 우량도서로 선정된 책들이다.
스님은 기도에 철저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은 포살참회 기도를 가졌고,
매년 세차례의 단식기도를 전 종도가 갖게 했으며, 현재 각 영산법화사에 모셔진
만다라도 성도절의 7일 단식기도 후 자필로 써서 봉안한 것이다.
만다라 앞에는 불사리탑을 안치하고 그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일찌기 일본 태국 인도를 순례하며 석존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보탑을 건립한 스님은,
끝없는 저작과 왕성한 법문을 통해 한국적인 법화사상을 구축한 후 1977년 세연을 마쳤다.
이 종단에서는 법화스님을 종조 겸 초대 법주로 모시며 경기도 장흥에 부도가 세워져 있다.
스님의 뒤를 이어 김행산스님이 2대 법주에 올라 현재에 이르고 총무원은 동숭동
영산법화사에 설치했으며 연화합창단이 활동중이다. 소의경전은 《법화삼부경》이다.
화엄계열이란 석존께서 깨달으신바 우주의 진리를 남김없이 설한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을 말한다. 한국화엄의 비조는 원효와 의상이다.
화엄계열 종단들은 대략 원효를 종조로 모시나 고려 때의 보우를 모신 곳도 있다.
현재 화엄계열은 대한불교원효종 대한불교화엄종 대한불교총화종
(이상 종단등록 순)의 3개 단체로 모두 불교재산관리법하에서 창종되었고,
큰 발전은 없으나 화엄사상을 본체로 통불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조계종의 이른바 비구 대처의 분규가 치열해지고 정부의 불재법이 시행되자
대처계의 스님들은 새로운 종단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 때 김경택스님이 중심이 되어 1963년
대한불교 원효종이 창종된다. 그러나 당시는 종의원제도였고 본격적인 종단체제는
정수용스님이 초대 종정을 맡으면서 부터이다. 정수용스님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법명은 해인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40여년간을 조계종에서 활동했고 당시 기림사 주지로 있던 중
원효종에 참여했다. 원효종은 총본산을 경주시 망월사에 둔 지방종단이었지만
급속히 발전했다. 여기에는 신라의 대성인 원효의 본고장이라는 점과 함께
불교계의 실력자인 이법홍스님의 참여가 큰 힘이 된다.
법홍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고 일본 입정대와 비에산학원을 졸업한 후
원효의 화쟁사상을 근간으로 대중불교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원효사상에 관한 수십편의 출판물과 동상건립과 연구회 설립 등을 꾀한 그는 실상
비구스님으로 조계종의 재정부장을 역임했고 부산에는 금수사를 맡아 청소년교화에 주력했다.
이렇게 정수용.이법홍 체제로 종단이 뻗어나갈 즈음 법홍스님은 일본에 건너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난행과 수행 및 포교에 임했는데, 이 기간에 종단 내부에서는
분규가 일어나 수년간 종권다툼이 계속된다. 종단내분은 법홍스님이 귀국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이후 10여년간 조용히 내실을 꾀했으나, 근래 다시 안양암의 매각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종단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려 양분 또는 삼분의 양상을 맞았다.
현재 원효종은 이법홍스님이 금수사를 중심으로 종단재건을 꾀하고 있고, 서울 창신동
안양암은 별도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불교원효종이 창종된 상태이다.
그동안 총본산은 기림사.망월사.금수사.안양암을 거쳐 다시 금수사로 왔고,
역대 종정은 정수용(1.2대) 김경봉(3.4대) 이설호(5대) 엄상수(6.7대) 스님을 거쳐
법홍스님이 8대와 9대째를 역임하고 있으며, 총무원장은 설대운스님이 6대째를 맡고 있다.
기관지로는 <원효종보〉와 <법사불교신문〉이있으며, 원효양로원과
원효사상연구원이 운영된다. 종조는 원효성사이며, 소의경전은 《화엄경》등이다.
화엄종을 창종한 분은 한능해스님이다. 속명은 영석이고 법호는 월승이며,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다. 스님은 18세에 출가해 당대의 화엄 법주로 유명했던
이해명스님에게 사사한다. 그 후 휘문의숙을 나와 다시 보현사.망월사.전등사 등에서
수행한 그는, 1929년 인천 간석동에 약사암을 짓고 화엄종의 터를 잡는다.
광복 후 스님은 해동공민학교와 해광여자기술학교를 설립해 교육계에 힘을 썼고,
조계종의 경기 종무원장을 맡으면서 종단에도 깊이 관여했다.
불재법으로 종단이 난립할 때 그는 청정비구이면서도 새로운 종단의 창립을 뜻해 1966년
자신이 세운 해광사에서 화엄종을 세우니 원효의 화엄종맥을 다시 재흥함을 표방했다.
스님은 철저하게 내실 위주였고 계율이 엄했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모두 비구계를 지켰고
검소와 근면과 시간관념이 엄격해 화엄종의 독특한 종풍을 이룬다.
1970년 능혜스님은 사리탑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세연을 다했고,
한구하스님이 뒤를 이어 오늘의 화엄종을 일구었다. 구하스님은 종회의장 정희수스님과
함께 1978년부터 장학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수천명의 인재를 길러냈고
그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총본산은 약사사이며 총무원장은 장화담스님이다.
총화종은 한국불교 제종단 중 특이하게 창립됐다. 조계종이 한창 분규에 휘말릴 때
불교계의 뜻있는 인사 5인이 화동위원회를 구성했고 등록까지 필하면서 화동을 꾀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에 종파를 초월해 결성된것이 1968년의 총화회이며
각 종단과 총화를 시도하면서 통불교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나자 결국 다음해
총화종이 창종된다. 초대 종정은 최득연스님이다. 총화종은 비록 단일종단으로 등록했으나
대승행원과 육화정신을 주창했으므로 초기엔 원효성사를 종조로 했으나
뒤에 서산대사를 거쳐 지금은 보우국사를 모시고 있다.
또한 참여인사들도 쟁쟁해 본 종의 종정에 오른 분이 변설호.이장호.조종현스님 등 세분이고
권계환.전야옹스님도 뒷날 신생종단의 종정에 오른다. 이렇게 독특하게 출발하여
화려한 인맥을 구축했던 총화종은 한 때 낙맥상에도 처했으나, 최근 다시 체제를 정비했고
더우기 숙원사업이었던 총무원청사가 완공되면서 더욱 활기를 되찾고 있다.
현재의 종정은 이동광스님이며 총무원장은 법원스님이다.
복지시설로 두개의 고아원이 있다. 소의경전은 《반야경》과 《화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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