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협화음의 문학과 보들레르
최문규
1
보들레르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사실 보들레르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보다는 소위 ‘사악한’ ‘비이성적’ ‘도피적인’ ‘추한’ 같은 부정적인 의미망 속에 놓여 있던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독일의 경우 과거 헤겔 철학의 전통에 의해 ‘비이성적인 문학’으로 치부되었던 낭만주의 문학은 70년대 이후 새로운 해석의 전환을 맞게 되는데, 여기서 주된 질문은 과연 낭만주의 문학이 계몽적, 유토피아적 사유와의 극단적인 단절인지 아니면 그와 같은 계몽적인 사유의 연장으로 파악해야 할 것인지로 요약된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대체로 후자의 입장이 관철되었고, 그 결과 계몽적인 작가들과 반계몽적 작가들 간의 변별점이 사라지고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무질(R. Musil)의 소설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특성 없는 시인’들로 해석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차이의 소멸 경향에 대항하여 그 어떤 형태의 ‘중재’를 용인하지 않고 또한 계몽과 반계몽이라는 사회정치적인 이항 대립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심미성 자체를 역설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사실은 그와 같은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독일을 중심으로 최근 서구 사회과학 및 문학이론에서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특이한 장면은 니체 철학과 보들레르 문학이 현대성과 탈현대성 간의 ‘줄다리기’ 내지는 ‘격론의 장’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 철학의 경우, 한편으로 그 철학은 ‘계몽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고찰해줄 수 있는 새로운 동인이 되고 이러한 점에서 니체 철학과 프랑크푸르트 학파 간의 유사성까지도 언급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 니체 철학은 여전히 이성과 합리성의 문맥 내에 갇힐 수 없는, 일종의 탈현대적인 혁신성까지도 제공해주는 사유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니체 철학의 쟁점화 현상과 평행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논의이다. 여기서도 그 주된 경향은 보들레르를 더이상 반계몽적인 시인으로 파악하지 않는 시각이며, 벤야민, 아도르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러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로 인해 보들레르 문학을 상징주의,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등으로 분류하고 궁극적으로는 ‘현실도피적’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과거의 경향은 이제 완전히 극복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악의 꽃들』의 작가는 더이상 악을 대변한 작가가 아니라 잘못 진행되는 ‘현대성’을 ‘추의 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작가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보들레르 문학은 탈현대적인(혹은 해체구성적인) 맥락에서 ‘텍스트 유희’의 귀중한 범례로 작용하며, 그 예로는 폴 드 만, 데리다의 해석을 들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텍스트, 좁은 의미에서 언어 기호의 최종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데리다의 시각은 사실 현실적, 정치사회적인 의식만을 중심으로 삼아 그것의 경중을 가려왔던 일반적인 독서 방식에서 벗어나서 텍스트 자체의 유희적인 속성을 강조해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몽과 반계몽, 현대성과 탈현대성으로 지칭되는 각각의 논의에 대한 타당성보다는 보들레르의 문학, 혹은 일명 ‘데카당스’라는 식으로도 명명되어온 문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세심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보들레르 뒤에는 에드가 앨런 포가, 보들레르와 포 뒤에는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호프만(E. T. A. Hoffmann)2)이, 그리고 호프만 뒤에는 아이러니, 위트, 알레고리 같은 문학적 특성을 최초로 이론화하였던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가 자리잡고 있다. 설혹 보들레르가 “탈낭만화된 낭만주의”(후고 프리드리히)의 시인이라는 모순적인 모습을 띨지라도 그의 문학은 낭만주의에서 유미주의 및 아방가르드로 이어지는 문학 전통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들레르 문학 자체보다는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일련의 문학적 전통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학적 전통이 왜 흔히 “난해하고, 비합리적이고, 탐닉적이고, 부도덕적이고, 아이러니컬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문학 등으로 분류되었으며 또한 거기에는 어떤 담론의 힘이 그러한 분류를 주도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게 된다.
낭만주의적 예술과 문학을 척결하기 위해 과거의 지배 담론이 내세웠던 요청은 가령 문학 텍스트는 가능한 한 아이러니, 위트 같은 사악하고도 장난스런 기법(혹은 자기탐닉적인 미적 자의식)을 절제해야 하며, 또한 기존의 도덕을 해치지 않는 건전한 서술을 취해야 하며, 이 밖에도 문학 텍스트는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해야 하며, 또한 현존해 있는 암울한 삶을 ‘투명하게’ 비판해주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대안적인 유토피아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지배 담론의 장에서 벗어나는 문학은 결국 ‘사악하고도 어두운’ 문학으로 폄하되었던 것이며 그러한 지배 담론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현대 예술의 경향에 매우 인색했던 철학자인 헤겔이 자리하고 있다.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하나의 전형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낭만주의부터 보들레르를 거쳐 유미주의(예술지상주의) 문학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현대 문학에 대한 좌우파의 비판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3) 그 비판의 핵심은 오로지 자신의 심미적 주관성에 심취된 낭만주의 문학에는 사회적 진지함(현실, 본질, 이념 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낭만주의가 핵심으로 내세운 아이러니, 위트, 알레고리는 잘못된 혹은 허위적인 주관성에서 나온 일종의 가상 혹은 유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과 작가에 대해서 헤겔은 다름아닌 ‘악(das B쉝e)’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바 있다.
헤겔이 좌우파의 시각에 의해 동시에 수용되듯이, 헤겔 이후의 철학적, 사회학적인 시각은 소위 ‘어두운’ 혹은 ‘데카당스한’ 문학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데카당스’라는 개념은 누구에 의해서 사용된 것인가? 그 개념은 일차적으로 전통적인 고전적 미학의 규율 및 규범을 옹호하는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거부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며, 더욱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은 보수적인 비평가 및 사회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회철학자들도 ‘새로운’ 척도보다는 고전적 척도에 의존한 채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데카당스’라는 개념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즉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줄 것을 요구하고 강령적인 프로그램을 관철하려는 경향을 지닌 좌파적인 시각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 문학을 거부하였는데, 그것은 그 문학이 지나친 새로운 상징성(내지는 알레고리) 및 형식미에 젖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새로운 문학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좌우파의 공통된 시각이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다행히, 매우 간헐적이었지만, 30년대에 시도된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벤야민의 천착, 그리고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새롭게 해석한 크리스테바(J. Kristeva)의 70년대 작업은 소위 낭만주의 혹은 데카당스 문학을 외면했던 과거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탈피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례로 손꼽힌다.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의 특성을 ‘수수께끼(R둻sel)’로 규정해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도 난해하고도 비밀스런 예술작품을 부정적으로 치부해왔던 과거의 시각을 극복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이들 모두는 흔히 이분법적인 사유로 서로 차단되어왔던 낭만주의적 밀폐시와 급진적인 정치성을 접목시켜냈던 것이다.
보들레르의 경우, 그의 문학은 소위 1848년 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부르주아(시민계급)가 다시금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역사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발전’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고 마는 당시의 시대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미 사회를 이끌어가는 절대적인 추동 세력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는 발전론과 낙관론을 거부하는 문학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이때부터 ‘반현대적인’ 문학은 곧 ‘데카당스’라는 개념과 연결되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포(Poe)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보들레르는 그 서문에서 당시 기존 비평가들(D. Nisard, A. de Pontmartin)에 대항하여 의도적으로 ‘데카당스’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바 있었다.
발전론과 낙관적인 이념 이외에도 파국, 몰락, 소멸 등에 대한 심미적인 현상은 어쨌든 낭만주의 이후 보들레르를 거쳐 20세기 현대 문학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진보란 곧 절망 내지는 ‘파국(Katastrophe)’이며 그러한 파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은 ‘순간’에 있다는 벤야민의 인식에 의해서 비로소 그 의미를 되찾게 된다. 즉 ‘파국’이라는 문학적 현상은 결코 파국 자체에 대한 심미적인 예찬이 아니라 다름아닌 역사의 낙관적인 발전을 의문시하고 거기에 숨어 있는 억압적인 측면을 직시하도록 유도하는 인식론적 계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벤야민 이후의 주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데카당스’라는 개념은 이제, 비록 세기말에 다시금 고전적 미학관에 젖어 있던 좌우파의 냉혹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퇴폐적’ 내지는 ‘현실도피적’이라는 의미로 폄하될 수 없고 오히려 문학적인 형태를 지칭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가령 독일의 문예학자인 볼프디트리히 라쉬(W. Rasch)는 보들레르에서 출발하는 ‘데카당스’ 문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인식을 제시하고 있다. “데카당스는 더이상 욕설이 아니며 또한 저질적인 문학 형태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대 문학의 매우 귀중한 특정 유형을 가리킨다.”(라쉬, 25쪽) 이렇게 보면, 슐레겔, 랭보, 하이네,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아폴리네르, 브르통 등으로 이어지는 ‘데카당스적’ 전통의 현대 문학이 과거의 낙관론적 지배 담론에 의해서 더이상 부정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며, 따라서 이들 문학과 관련하여 새롭게 요청되는 점은 과거의 비평에 유령처럼 쫓아다녔던 탐미적 주관성이니 혹은 현실성의 결여 같은 판단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2
주체에 비해 사회적인 힘이 증가할수록 서정시의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집니다. 바로 이 점을 보들레르의 작품은 최초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유럽 세계의 고난의 결과로서 그의 작품은 개개인의 고통에 만족하기보다는 현대성 그 자체를 반서정적인 것으로 비난하면서 영웅적인 문체를 띤 언어의 힘으로 문학적인 섬광을 발산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그의 작품에는 특유의 패러독스에서만 균형을 잡고 있는 그 어떤 절망성이 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아도르노, 57쪽)
거대한 사회적인 힘의 도래와 그로 인한 주관적인 서정시의 위기, 현대성에 대한 문학의 급진적인 공격성과 특유의 패러독스에서 그 균형을 취하고 있는 모습, 이것이 「서정시와 사회에 대한 강연」이라는 글에서 아도르노가 파악한 보들레르 문학의 특성이다. 물론 아도르노는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보들레르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맥락하에서 현대적인 서정시의 의미와 보들레르 작품의 위치를 간결하지만 매우 심도 있게 짚어내었던 것이다.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논의 지평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다시 열려야 한다. 그 문학의 의미를 여전히 시인의 사적인 체험과 주관적인 탐닉으로 국한시키거나 혹은 ‘악마주의’라는 특성을 문학적인 차원이 아닌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만다면, 그의 문학에서 발현되고 있는 전복적이고도 ‘현대적인’ 의미는 또다시 왜곡과 오해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아도르노보다 더욱 예리하고도 뛰어난 감수성으로 보들레르 문학에 접근하였던 이는 발터 벤야민(「보들레르에게서의 제2제정 시대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중앙공원」 등)이다. 바로 벤야민의 연구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과거에(또한 간혹 현재에도!) 그렇게도 부정적으로 낙인찍혔던 보들레르의 시적 개념들이 새로운 해석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실례로 보들레르 문학에서 마주하게 되는 몇 가지 이미지와 개념들에 대한 벤야민의 시각을 정리해보면, ‘여성’은 관능적인 탐욕, 증오, 사랑과 관련된 구체적인 성적 대상(아직도 여성을 향한 관능적 욕망의 투영으로 그의 시를 읽는다면 매우 문제점이 많은 해석이 아닐 수 없다!)이 아니라 다름아닌 ‘죽음을 의미하는 삶’의 알레고리이며, ‘매음’은 바로 ‘대중과의 신비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시적 범주이며, 또한 ‘배회자(Fl뎝eur)’는 ‘역사의 진보’라는 낙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이, 즉 ‘태연함을 과시하는 몸짓으로 생산과정에 저항하는’ 혹은 자본주의 시장을 감시하는 자의 비판적 인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 꽃들』에 실려 있는 「살인자의 술」이나 「넝마주이들의 술」 등은 단순히 부랑자를 묘사한 시가 아니라 이미 자본의 힘이 득세했던 ‘대도시 파리 자체의 문학’이며, 벤야민은 이러한 ‘부랑자 문학(Poesie des Apachentums)’을 보들레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장르로 파악하였던 것이다.(벤야민, 582쪽)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길은 사회학적 이론을 나름대로 뒤집어서 해석했던 벤야민의 뛰어난 감수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령 동시대의 일반적인 사회이론이 노동과 도박을 구분하고 있었다면, 벤야민은 노동과 도박에 내재해 있는 동질적인 지각 특성을 읽어내면서 보들레르의 문학이 어떤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암시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지각 현상을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벤야민의 독법(이러한 독법은 영화와 관련된 물리적, 정신적 지각 작용을 정치적으로 파악하려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에 의하면, 기계적인 노동에서 오는 급격한 ‘충격’은 다름아닌 도박에서의 ‘한탕’과 유사하며 또한 자동화된 작업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몸짓은 카드를 분배받을 때의 민첩한 손동작과 유사하다는 것이다.(「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일종의 ‘지각의 정치화’로 명명될 수 있는 벤야민의 독법은 노동과 도박이 보편화되는 역사적인 근거를 통해 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즉 17~18세기에 소수의 귀족만이 즐겼던 도박은 19세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보편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삼을 때, 『악의 꽃들』의 「노름」(도박)에서 엿볼 수 있는 도박꾼들(“핏기 가신 입술들에, 이빨 빠져 합죽한 턱들,/초록색 도박대 둘러앉아, 지옥의 열에 떠는 손가락으로,/텅 빈 호주머니나 설레는 가슴을 뒤지는,/입술도 제대로 없는 얼굴들”:박은수 역, 183쪽)의 모습은 단순한 도박꾼들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경험과는 차단된 채 현재적인 삶만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허무보다는 지옥을 택하게 되고 마는”(위의 글, 184쪽) 이들이며, 이들을 시샘하는 화자도, 도박꾼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자신의 경험을 기만당한 사람, 즉 한 사람의 현대인”(벤야민, 636쪽)에 속하고 만다.
이러한 뛰어난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보들레르 문학이 동시대의 독자보다는 ‘후세의 독자’를 겨냥한 문학이라고 인식하였던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보들레르의 문학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보들레르에 관한 그의 비평적 시각은 곧바로 현대의 비평 속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뒤늦게 1970년대의 독자들에 의해서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보들레르나 벤야민의 이차 연구가 ‘지체된 수용사’의 길을 걷게 되었던 까닭은 ‘동시대’라는 힘이 항상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비평에 대해 미진하고도 보수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진행 과정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동시대’라는 일반적인 시각이 새로운 문학작품의 자리매김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아무튼 뒤늦은 수용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시각은 보들레르 연구에서 하나의 ‘전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조명하에 놓인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1848년 혁명 이후 금세기 양차 세계대전, 특히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인간의 잔인한 범죄 행위(혹은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인간의 잔인성)까지도 반성케 하는 텍스트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는 『악의 꽃들』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마주치는 「독자에게Au Lecteur」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며, 그것은 역사의 ‘진창길’에서 쉽게 망각하고 쉽게 뉘우치는 값싼 행위에 젖어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암시를 던지고 있다. “우리 죄는 끈질기나, 뉘우침은 무르다:/참회의 값을 톡톡히 받아들고,/싸구려 눈물에 때가 싹 가신 기분으로,/우쭐대며 진창길로 되돌아온다.”(박은수 역, 21쪽) 이처럼 보들레르 문학이 분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적 인식을 무시한 채 아직도 ‘현실성의 결여’라는 척도로 보들레르 문학의 가치를 측정코자 하는 시각이 있다면, 그러한 시각은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논의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발전적인 시각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3
보들레르 문학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점에서 현대 문학의 전형으로 간주되어도 좋은가? 전통적인 문학과 비교해볼 때 보들레르 문학은 하나의 ‘충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1850년 이전의 문학이 일반적으로 저속하고도 일상적인 소재를 문학적 형상화에서 배제하였다면 보들레르는 그와 같은 일상적 소재에서 새로운 문학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아방가르드적 의미를 지니는 보들레르의 문학은 특히 전통적인 도덕적인 ‘선’과 예술적인 ‘미’의 연결 코드(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의 결합)에서 탈피하여 악(추)과 미를 새롭게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 개념을 확장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하고 악한 현실을 그려냈다는 연유로 보들레르의 문학이 곧 미메시스적 특성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저속하고 관능적인 소재를 단순히 전달적이고도 소통적인 언어를 통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시적 상상력)의 언어를 통해 그와 같은 소재를 예술미의 인위적인 공간 속으로 전이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예술적인 형상화 과정과 조우하게 된 일상의 추한 소재는 탈일상화되고 동시에 서술적인 언어의 일반적인 의미까지도 지양되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도시를 그려내고 있는 듯한 보들레르 문학은 사실 그 어떤 실제의 대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대도시 문학인 것이다.
일상의 탈일상화, 추의 미 등으로 표현되는 보들레르 문학의 독특한 출발점은 바로 자연 개념과 결별하고 인공성 내지는 인위적인 미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그 인공성은 황량하고도 잔인한 현실 자체보다는 마치 ‘꿈’속에 젖어 있는 듯한 상태를 불러들일 정도로 강렬하게 작용하며, 이러한 점을 통해 보들레르 문학은 전원과도 같은 이상적인 자연 상태를 그려냈던 보들레르 이전의 작가들과는 현격하게 구분된다. 그 인공성에 대한 대표적인 시가 「파리의 꿈Le r릚e parisien」이며, 다음의 두 연에서는 그 인공적인 언어 세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내 천재를 뽐내는 화가인 나는,
금속의, 대리석의, 그리고 물의
도취하게 하는 단조로움을
내 그림 속에서 맛보고 있었다.
계단들과 아케이드들의 바벨탑,
그것은 광 없거나 광나는 황금 속으로
떨어지는 분수와 폭포들로 가득 찬,
하나의 끝없는 궁전이었으니;(박은수 역, 195쪽)
하나의 꿈의 세계를 그려낸 초현실주의 화가 데 키리코(G. de Chirico)의 그림이나 혹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인용되는 찰스 모어(C. Moore)의 〈이탈리아의 광장Piazza d’Italia〉을 연상시켜주는 듯한 이 시에서 금속, 대리석, 황금 등으로 만들어진 듯한 세계에 대한 상상은, 야우스가 밝혀주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유기체적인 자연과는 거리가 먼 상상적이고도 인위적인 풍경이며, 그러한 풍경은 마치 수수께끼 같은 초현실성을 자아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대한 상상적인 풍경은 보들레르가 중시한 ‘꿈의 세계’로서의 순수 예술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듯하며,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시는 철저히 ‘초자연적’이다.
그렇다면, 자연물로 구성된 세계가 아니라 금속, 대리석, 황금, 수정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세계를 보여주는 「파리의 꿈」은, 이제 이데올로기적 독해 차원에서 볼 때, 인공적인 산업화와 문명화의 물결이 팽배했던 당시의 자본주의의 사회를 예술적으로 옹호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우선 야우스는 「파리의 꿈」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야우스의 시각에 의하면, 보들레르는 부르주아의 진보 이데올로기 및 낙관적인 역사 발전을 예찬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동시대의 문명발전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마치 당시 부르주아 사회에 편승해 있는 듯한 보들레르 문학이 사실은 그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최근의 해석과 동일선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욀러의 글 참조) 즉 이상적인 자연에 대한 표상과 언어에 더이상 의존하지 않고 도시화, 문명화, 인공적인 문화를 절대적인 세계상으로 예찬하는 듯한 보들레르 문학이 사실은 그와 같은 문명화에 대한 자기 비판(야우스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지배라는 유토피아적 목표 자체를 다시 문제삼는”)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찬란하고 화려한 인공낙원과도 같은 이상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이 ‘무시무시한 새로움’으로 인식되고, 특히 시적 화자가 현재 시점을 취하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환상이 깨지고 있는 시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해석을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야우스는 종교적인 비전과 시적 비전의 차이를 지적해줌으로써 일반적으로 보들레르 문학을 종교적으로 환원시키는 해석과 거리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일찍이 후고 프리드리히(H. Friedrich)도 지적한 것처럼, 보들레르는 기독교 없이는 생각될 수 없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견해와도 일치하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이탈하고 문명 혹은 인공성으로 전환하는 것이 보들레르 문학의 특징이며, 이것은 ‘초자연주의(surnaturalisme)’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천명한 바 있는 보들레르를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야우스는, 그러한 초자연주의에 입각한 인공성으로의 전환이 곧 인공성 자체보다는 인공성에 의해 초래된 ‘자연 억압’의 측면을 인식케 해주며 동시에 자연이 “생소한 힘을 띠고 억압된 자연으로서 복귀”하고 있다고 강조해줌으로써, 보들레르 문학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유토피아에의 회의, 즉 ‘이상’과 ‘우울’ 혹은 ‘의미의 약속과 거부’(욀러)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보들레르 문학의 특징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우스의 해석은 주제적인 차원에서 매우 평면적으로 전개된 것일 뿐, 거기에는 적지 않는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그 문제의 핵심은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미와 시대적인 의식이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보들레르의 시와 관련하여 야우스는 오로지 후자에만 국한된 채 자신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 혹은 억압된 자연의 복귀 등은 모두 시대성과 관련된 주제로서 이러한 측면은 보들레르 문학의 ‘절반’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야우스의 보들레르 해석에서는 또다른 반쪽 면이 도외시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노발리스의 시적 언어관이나 혹은 보들레르 자신의 시 「교감」(“멀리서 섞여드는 긴 메아리들처럼/냄새들과 빛깔들과 소리들이 서로 어울린다,/밤처럼 또 빛처럼 가이없이 드넓은,/어둡고 깊은 하나의 통일 속에서”:박은수 역, 34쪽)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보들레르 문학에서는 언어 기호의 일반적인 결합이 아니라 소리, 색깔, 향기 같은 ‘마술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의 시적 세계를 구성해보려는 열정이 또하나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경우 세계는 삶의 세계가 아니라 곧 ‘예술작품’이라는 영원한 세계를 뜻하게 된다.
따라서 「파리의 꿈」이라는 시 전체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통해 현재 세계의 문명화 과정을 비판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의미 이외에도 동시에 그 시 전체는 미학적·시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새로운 실험성을 띤 언어 예술작품의 창작 가능성에 대한 메타포로도 작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양 측면은 결코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야우스의 해석에는 그와 같은 후자의 측면, 즉 ‘시 전체는 곧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언어적 실험에 의해 구축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인식이 간과되어 있다. 여기서 후자에 대한 강조는 보들레르의 시를 다시금 고상한 파르나시즘(parnassism)에로 귀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다음에 언급될―시대성과 영원성의 철저한 모순성으로 해석되는 보들레르의 예술관에 부합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차원에서도 야우스의 해석은 매우 난처한 문제에 봉착하도록 만든다. 만약 야우스의 지적대로, 문명화 과정을 통해 억압된 자연이 다시 복귀하는 것이 보들레르의 주된 관심사였다면, 그것은 야우스가 인용하고 있는 데놔예에게 보낸 그 유명한 보들레르의 편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끔 만든다. 세심하게 보면, 그 편지는 자연 묘사만을 일삼아왔던 전통적인 시에 대한 거부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문학이 자연에 부여했던 의미(예컨대, 유기체적인 자연에서 유도될 수 있는 인간들간의 지고한 연대성과 소박성 같은 관념적 표상)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 자체에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은 곧 자연이 담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론에 대한 거부를 뜻하며, 특히 연대성과 소박성 같은 전통적인 사유를 이미 부르주아의 허위로 파악했던 보들레르의 경우 자연과 문명을 둘러싼 삶의 의미론은 더욱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물론 야우스는 보들레르의 시는 “자연과 문명의 반립명제를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과 회의라는 시각은 여전히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항적인 쌍에서 유도될 수 있는, 전통적인 의미론의 일부를 구성해주는 요소인 것이다.
결국 「파리의 꿈」의 경우, 자본과 문명의 힘을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사회학적 의미론 이외에도 시적 상상력과 새로운 언어로 창출된 수수께끼 같은 예술작품의 현현 방식과 관련된 미학적 의미론을 암시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학적 의미론의 가능성은 「파리의 꿈」 이외에도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여행에의 초대L’Invitation au Voyage」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산문시에 제시된 그 “이상한” 세계, 즉 “자연이 꿈에 의해 개혁된 나라”에서는 “세련된 영혼들처럼 비밀과 자물쇠로 무장된 가구들이 널찍하고 기묘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으며, 또한 거기서는 “거울, 금속들, 천들, 작은 장식품들, 도자기들, 이 모든 것이 보는 사람의 눈에 일종의 소리없는 신비한 심포니를 연주”(윤영애 역, 103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산문시를 통해 보들레르는 새롭게 창조되는 언어 예술작품의 가능성을 음미하도록 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우스는 그러한 예술작품의 연주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4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보들레르는 예술은 일시성(현대성)과 영원성, 즉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현실(혹은 유행)과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예술미를 취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를 통해 보들레르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는 결코 쉽게 답변될 수가 없다. 그 글에서 보들레르는 “예술의 이중성은 인간의 분열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서, 변화하는 요소를 예술의 육체로서 파악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으로 비유된 일시성과 영원성의 관계는 전통적인 위계적 사유(가령 내적인 영혼을 감싸고 있는 표피적인 육체 같은 사유)를 통해 구분될 수 있는 본질과 현상, 안과 밖, 중심과 주변 같은 관계를 뜻하진 않는다. 이분법을 토대로 한 위계적 사유가 거의 불가능한 까닭은 영혼(영원성)을 중시했던 고대적인 문학에 대항하여 보들레르는 문학의 육체(일시성)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문학을 오로지 육체(일시성)로만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은 보들레르가 여전히 예술이란 시대를 초월하는 영혼의 특성을 지닌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 영원성과 시대성의 관계에서 무엇이 중심(본질)이고 주변(현상)인지는 결정 불가능하다. 또한 예술과 관련하여 그 양자의 관계는, 독일 고전주의 미학자인 실러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서 사용한 ‘소재충동’과 ‘형식충동’의 이분법과도 일치될 수 없으며 또한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과 ‘아폴로적’ 예술충동 같은 니체의 이분법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일시성과 영원성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며, 설혹 그러한 관계로 파악되더라도 무엇이 수단이며 무엇이 목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매우 난처한 해석에 직면하게 된다. 이 점이 최근 보들레르에 관한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현대적 삶의 화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되며, 그 대표적인 예는 하버마스와 보러의 서로 상이한 시각이다.
보들레르의 현실적이고도 시대적인 의식을 강조한 예로는 우선 하버마스의 해석을 들 수 있다. 현대성(혹은 근대)이라는 개념 규정을 개념사적으로 정립해준 역사학자 코젤렉과 철학자 블루멘베르크에게 의존하면서 하버마스는 그 개념이 점차 스스로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는 개념(“현대는 자신의 규범성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해야 한다”)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현대인이 전통 내지는 고대와 급진적으로 결별하면서 자신의 시대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급진성의 예는 다름아닌 보들레르에게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밝힌다. 즉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성’은 ‘일시적인 것’ ‘사라지는 것’ ‘우연적인 것’, 요컨대 ‘유행’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러한 일시성(시대적 의식)으로서의 현대성과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특성(즉 초역사적인 예술미)의 종합으로 예술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하버마스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예술의 ‘현대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으로까지도 축소될 수 있는 현재적인 시대 의식에 의해서만 비로소 영원한 예술미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보들레르 해석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작품은 철저하게 생성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작품은 현재성 안에서 소진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진부한 통속성의 물결을 멈추게 할 수 있고 정상성을 타파할 수 있으며, 영원한 것이 현재적인 것과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그 순간에 아름다움을 향한 불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앞에 번역된 글 참조)
반면에 하버마스에 대한 보러의 비판은 나름대로 그 타당성을 지닌다. ‘미래적인 현재의 진정한 과거’라는 역사철학적인 시간 의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버마스에 대항하여 보러는 “시대성과 영원성의 활성화에 대한 보들레르의 변증법적 형상은 결코 ‘현재’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이론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역설한다. 보러에 의하면, 보들레르가 언급한 ‘일시성’이라는 현재 의식이란 “아름다운 것에 명상적으로 집중하는 일을 위해 단지 기능적으로만 주어진” 것, 즉 역사적인 지시 의미는 예술미를 위한 보조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니체의 시각’으로 보들레르를 읽지 않고 오히려 ‘헤겔의 시각’으로 보들레르를 읽고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를 비판하고 있는 보러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보러와 하버마스의 시각은 완전히 서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대립적인 시각은 특정인의 해석의 오류라기보다는 「현대적 삶의 화가」라는 텍스트 자체에 의해 야기된 문제로 볼 수 있다. 그 텍스트에서 보들레르는 일시성과 영원성의 종합으로 설명된 예술의 특성에 대한 매우 모호하고도 모순적인 구절을 도처에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연유에서 해석자의 ‘선택’ 및 ‘강조’에 따라 서로 상이한 텍스트 이해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에 대한 의식을 하나로 파악하였던 보들레르 시각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그것은 「현대적 삶의 화가」에 제시되어 있는 또다른 논의, 즉 ‘댄디(당디, dandy)’에 관한 보들레르의 시각을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 풀릴 수 있다. 그 글에서 댄디는 마치 동시대인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듯한 열정과 독립성을 소유한 것처럼 언급되며, 또한 “한가롭고” “귀족적”이며 “풍요로운” 듯한, 그럼에도 “차가운 표정과 자세”를 지닌 그는 “대립적이고 혁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귀족적인 댄디는 이제 “몰락의 시기에 출현하는 영웅성의 최후의 폭발”과도 같으며 “지는 해” “지는 성좌처럼 찬연하지만 열정도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언뜻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한가로운”과 “귀족적”이라는 개념은 세심한 이해를 요한다. 가령 ‘한가로움’은 정신이 이완된 상태에 자신을 내맡기는 무력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았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댄디의 ‘귀족적인’ 자세도 부르주아 사회 이전의 정치 체계였던 귀족사회로 복귀하고 싶어하는 역행적인 정치 이념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시민사회를 비판하는 정신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귀족적인 자세와 상통하는, 보들레르 문학에서 ‘부정성’의 미학적 범주로서 작용하는 권태(ennui)는 흔히 ‘멜랑콜리(melancolie)’와 동일시되는데, 이 두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 레페니즈(W. Lepenies)가 정교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멜랑콜리는 자본주의 이래로 부르주아 계급이 취했던 부르주아적 행위 방식이다. 반면에 권태는 결코 부르주아적이 아니다. 권태는 귀족주의자들과 아웃사이더들에게 적합하며, 그들은 부르주아의 거실보다는 귀족적 살롱에서 언제나 환영받는다.”(레페니즈, 209쪽) 이처럼 멜랑콜리와 권태는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가 부르주아적이라면, 그와 대치되는 아웃사이더가 갖게 되는 ‘권태’는 오히려 반부르주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귀족적’이라는 개념은 부르주아 사회 이전의 귀족사회를 회상하는 개념이 아니라 바로 부르주아 내에서 배척당한, 그 부르주아 자체를 비판하는 자의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은 글자 그대로 오락과 환락을 추구했던 실제의 귀족적인 살롱이 아니라 이미 ‘낡아버린 것’과 상상력이 서로 조우되는 내면 공간(interieur)이며, 바로 여기서 그들의 혁명적 에너지가 분출된다.4)
‘
귀족적인 댄디’와 비슷한 이미지 및 의미는 현대적인 삶에 처한 ‘영웅’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영웅은 전투적인 열정과 탁월한 기력을 발휘하는 신화적인 영웅이나 독재적이고도 자만심으로 가득 찬 현대적인 영웅을 지칭하는 언어 기호가 결코 아니다. 그 현대적인 삶에서의 영웅은 사실 아웃사이더이며, 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공동묘지와도 같은 대도시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는 자(“지는 해” “지는 성좌”)에게서 발현되며, 그는 “지루하게 혹은 위선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호상꾼들의 합창 소리”(욀러)에 둘러싸여 있는 자인 것이다. 이처럼 귀족적인 댄디 혹은 현대적인 영웅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의해 억압된 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사회에 비판적인 자를 가리키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는 이들은, 시 「백조 Le Cygne」에서처럼, “……싸늘하고 맑은/하늘 아래서 노동이 깨어나는 시간에, 쓰레기터가/시커먼 회오리바람을 고요한 공기 속에 내뿜는 시간에,/제 새장을 도망쳐나와, 그 물갈퀴 있는 발로,/바싹 마른 포장길을 문질러대는 고니 한 마리”(박은수 역, 167쪽)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5)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댄디나 귀족 같은 개념이 사회학적인 특정 인간의 시대적 의식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범주’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보들레르가 ‘댄디즘(당디슴)’을 “결투처럼 특이한, 예리하게 정의될 수 없는 장치”이며 동시에 “모든 법칙을 벗어난 제도”라고 설명하고 있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데, 즉 ‘장치’와 ‘제도’는 다름아닌 보들레르 자신의 문학과 관계한다. 요컨대, “한가롭고” “귀족적”이며, “풍요로운” 듯한, 그럼에도 “차가운 표정과 자세”를 지닌 댄디는 시대적 자의식을 지닌 개인의 특징만이 아니라 심미적이고도 냉철한 예술작품 자체의 내적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몰락의 시기에 출현하는 영웅성의 최후의 폭발”이나 혹은 “지는 해” “지는 성좌처럼 찬연하지만 열정도 없고 우수에 차 있는” 특성도 예술에 적대적이었던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자신의 내적 세계를 지키려 했던, 그럼으로써 싸늘한 부정의 카테고리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예술작품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댄디 혹은 댄디즘은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에 대해 철저한 비판적 인식으로 맞서는 이의 특성이자 동시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순수하고도 영원한 특성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 보들레르 문학 자체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며, 이것이 곧 아도르노의 언급처럼, “특유의 패러독스에서만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일시성과 영원성, 시대적 현실과 절대적인 예술미의 동시성은, 그 양자가 수단과 목적,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경우, 분명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불협화음적인 패러독스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로 인해 보들레르의 문학은 넓게는 궁극적으로 ‘참여적 히로이즘’과 ‘예술적 히로이즘’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턱에 자리잡고 있으며6) 좁게는 고통과 매혹, 몰락(죽음, 해체)과 쾌락, 전율과 도취 같은 다양한 형태의 양면성을 띠며, 이러한 모순적 양상은 마침내 ‘숭고함’(장엄함)이라는 문예학적 개념으로 부연될 수 있다. 그러나 ‘숭고함’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해가 요구되는데, 가령 일찍이 보들레르는 “저열하고 경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을 혼합시키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어내었다고 분석한 아우어바흐(E. Auerbach)의 개념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아우어바흐가 사용한 ‘숭고함’이라는 개념이 보들레르 문학의 모순성 자체를 표현해내고 있기보다는 저열하고 경멸적인 것을 형식적으로 승화 내지는 이상화시키는 측면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보들레르 문학 자체가 일시성과 영원성의 모순성으로 이해된다면, ‘숭고함’이라는 개념은 영원한 예술성뿐만 아니라 죽음, 관능, 부패(즉 저열하고 부조리한 것)와 관련된 시대적 의식을 동시에 포함하며, 이런 의미에서 보들레르 문학의 ‘숭고함’은 버크와 칸트 이래로 모순적으로 파악되었던 양 측면, 즉 전율(공포)과 감탄, 불쾌와 쾌의 모순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보들레르 문학의 ‘숭고함’이 그러한 모순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일시성과 영원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관점을 지나치게 수단과 목적의 관계 내지는 환원주의적인 시각하에서 고찰하는 입장(즉 일시성만을 강조했던 하버마스나 영원한 예술미를 강조했던 보러)을 극복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욀러가 강조한 바 있는 보들레르의 이중적 주체(즉 예술적 주체와 사회적 주체)의 모순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5
보들레르 문학의 또다른 중요한 특성은 ‘알레고리’라는 문예학적 개념이며, 이 점은 『악의 꽃들』에 실려 있는 대표적인 시 「백조」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빠리는 변해요! 한데 울적한 내 마음속에서는
움직인 게 하나도 없군요! 새 궁전들도, 비계들도, 돌
덩이들도.
낡은 변두리들도, 모두가 내게는 알레고리로 바뀌니,
그리운 옛 생각들이 바위보다도 더 무겁군요.
물론 보들레르 문학이 상징의 문학(이것은 그 유명한 「교감」에서 “상징의 숲들을 거쳐……”라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는데)인가 아니면 알레고리의 문학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대체로 상징에 주목하였던 과거의 연구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알레고리’에 주목해봄으로써 우리는 보들레르 문학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특히 벤야민의 상징과 알레고리 구분, 즉 전자는 초역사적이고 총체적인 특성을 띠며 후자는 역사적이고 파편화된 특성을 지닌다는 구분은 일차적으로 보들레르 문학의 기본 특성을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적절한 의미를 갖는다. 주위의 일상적인 사물이 알레고리로 변한다는 것, 이것은 알레고리적으로 표현된 사물이 곧 그 사물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가령 “낡은 변두리들”을 회상하는 방식은 옛 시절로의 회귀나 현재에서 옛 것을 복구하려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이 점은 ‘댄디’의 특징을 ‘귀족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결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귀족 계층을 뜻하지 않고 이미 알레고리적인 언어로 기능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한 방식은 오히려 기존 연관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맥 속으로 전이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결국 알레고리는 일상이 탈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적 방식이고, 또한―오늘날의 기호학적 개념으로 표기한다면―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기본 특징으로 삼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보들레르 문학의 알레고리적 특성을 벤야민은 그의 글 「중앙공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해주고 있다.
알레고리적인 의도에 의해 포착된 사물은 삶의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그것은 파괴되고 동시에 저장된다. 알레고리는 파편 조각에 붙어 있다. 알레고리는 응결된 불안의 상을 제공한다. 보들레르의 파괴적인 충동에서는, 자신에게 예속된 것을 말살하려는 관심을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벤야민, 666쪽)
사물을 그것의 일반적인 연관성으로부터 떼어놓는 것―물론 이것은 상품이 진열되는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인데―은 보들레르의 매우 독특한 방식이다. 그것은 알레고리적인 의도에 내재해 있는 유기체적인 연관성의 파괴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벤야민, 670쪽)
이처럼 사물이 위치하고 있던 연관성으로부터 그 사물을 떼어놓는 방식이 알레고리의 근본 특성이라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보들레르 문학의 전체 특성을 그려볼 수 있다. 즉 알레고리에 의해 생산된 보들레르 문학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인간 보들레르의 실제의 삶(아편에 심취하고 방랑자 생활을 했던 보들레르의 삶)과의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되는 작품이며,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작품 자체에서 묘사된 장면은 실제 일상의 구체적인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도시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마주치는 시적 장면의 경우, 그것은 우리의 일상의 경험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되고 이러한 분리를 통해 그 알레고리의 의미가 새롭게 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인 방식에 의한 문학적 창출 작업은, 『악의 꽃들』 가운데 「해Le Soleil」에서 보들레르가 역시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 바 있듯이, 일종의 “환상의 펜싱술 연마”로 표현된다.7) 그렇다고 해서 일상에서 나왔지만 그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알레고리가 단순히 미적인 유희 세계만을 구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상성에서 나온 알레고리는 그 일상성의 세계에 대항하는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 점은 후고 프리드리히의 해석과도 일맥 상통한다. “보들레르에게서 불협화음적인 대도시 형상들은 극도의 강도를 지닌다. 그 형상들은 가스 불빛과 저녁노을, 꽃향기와 동물 냄새를 연결시키며, 쾌락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나름대로 시연의 거대한 진동폭과 대조를 이룬다. 독성식물에서 마약이 채취되듯, 저속한 일상성에서 얻어진 형상들은 서정적인 변주를 통해 그 ‘저속한 일상성’에 대항하는 저항 수단으로 변한다.”(프리드리히, 43쪽)
사물의 유기체적인 연관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서의 알레고리가 보들레르 문학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여기서 욀러 및 보러가 서로 다르게 해석한 바 있던 소네트 「마주친 여인에게」 중 다음의 두 연에 다시 접근해보기로 하자.
귀 따가운 길거리가 내 둘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자 하나가,
장중한 비통의 얼굴로 지나갔다, 화사로운 한 손으로
꽃무늬 장식의 옷단을 치켜들고 흔들어대면서;
조각상과도 같은 종아리로 날쌔고도 고상하게.
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
>이 시도 알레고리적 방식에 의한 작품으로 해석될 경우, 그것은 단순히 당시 파리에서 시인이 체험했던 한 장면이나 혹은 일상의 한 장면을 미메시스적 차원에서 그려낸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알레고리적 방식과 관련하여 특히 욀러는 매우 예리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는데, 가령 ‘죽음의 이념’을 상기시키는 여인의 모습이나 “치켜들고”와 “흔들어대면서”라는 현재분사가 지닌 사회 전복적인 의미, 또한 거리의 공간적 밀도가 아닌 순간의 시간적 밀도 등이 그것이다. 욀러가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해석에 덧붙일 수 있는 점은 “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언급된 그 ‘눈’은,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그리고 싶은 욕망 Le D럖ir de peindre」에서처럼, “번개처럼 빛나고” 또한 “어둠 속의 폭발과도 같은” 여인의 ‘눈’을 상기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눈’은 「초라한 노파들」에서 비유되고 있는 “늙은 독수리의 눈”처럼 파토스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눈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알레고리적 속성을 띠고 있는 여인과의 만남을 분석하고 있는 욀러의 시각이 어떤 점에서 혁신적인지는 국내에 번역된 보들레르 시선집의 주석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소네트의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 하나의 체험된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마주친 존재들이, 서로가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고 느끼면서도 저마다 자기 길을 계속한다는 생각은 꽤 흔한 생각이다. (……) 이름 모를 운명들이 노상 마주치는 도시, 몰래 일치된 넋들이 날마다 행복을 부질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대도시들에서만 꽃필 줄 아는 것 같은 그런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 그 우아한 미지의 여인의 매력이 ‘막연하게나마 즐거움과 슬픔을 동시에 꿈꾸게 하는 아름다움, 우울과 피로와 싫증의 관념을 내포하는’ 여성적이고 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보들레르적 개념과 일치하고 있다.(박은수 역, 665쪽)
물론 이 주석은 역자의 것이 아니라 모두 프랑스 학자들의 것이다. 이 주석에서 엿볼 수 있듯이, 보들레르 문학은 철저히 사적인 것(“하나의 체험된 사실”) 내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차원(“이름 모를 운명들이 노상 마주치는……”)에서만 설명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보들레르 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알레고리의 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의미가 전혀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동일한 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는 보러와 욀러는 시 표면에 흐르고 있는 일상의 연관성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의미 지평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욀러의 경우 남녀간의 에로틱한, 순간적인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결코 일상적인 문맥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혁명에 대한 보들레르의 알레고리적 의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이 곧 독특하게 시각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보들레르 문학의 특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알레고리가 지닌 수수께끼 같고도 불확실한 특성은 바로 알레고리의 익명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알레고리는 자의적이고도, 아마도 역설적인, 흡사 교환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미’ 이외에 다른 어떤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독자는 일반적으로 시의 현실적인 토대인 삽화적인 중심 내용에만 순진하게 의존하고 만다. 그러한 독자는 결국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를 파리의 진정한 연애시로서만 파악하게 되고 그 시의 감성적 분위기와 형상만을 즐기게 된다.(욀러, 뒤에 번역된 글에서 인용)
이처럼 보들레르의 시는 결코 연애시나 혹은 관능적인 탐닉으로 읽혀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를 상호텍스트성(들라크루아와 보들레르)에 기초한 논리를 통해 해독할 경우, 즉 혁명과 여인의 관계를 알레고리적인 차원에서 파악할 경우 우리는 보들레르 문학이 어떤 점에서 급진적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이미 벤야민도 「마주친 여자에게」를 해석한 바 있지만 그의 경우 알레고리적 이미지에 대한 해석은 매우 애매하게 주어져 있다. “대도시인들의 황홀감은 일종의 사랑의 감정이다. 그것은 첫 시선으로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시선으로 느끼는 사랑이다. 그것은 일종의 영원한 이별이며, 이 시에서 영원한 이별은 도취의 순간과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소네트는 충격의 이미지, 아니 파국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벤야민, 623쪽) 대도시인들이 순간적으로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 “마지막 시선”에서 나온 “이별”이며 또한 일종의 “파국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는 것이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또한 무엇과의 이별이며 동시에 그 파국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벤야민의 해석과 비교하여 욀러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까닭은 그 파국의 이미지가 다름아닌 ‘혁명의 좌절’이라는 의미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혁명과 여인 간의 예기치 않은,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알레고리적 방식은 일련의 문학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예로 우리는 들라크루아, 보들레르 이외에도 초현실주의 작가인 브르통의 소설 『나자 Nadja』를 들 수 있다. 그 소설의 앞부분에는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화자와 스쳐 지나가는 여인 간의 만남이 매우 몽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 옷차림, 걷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런 것들은 혁명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은 아니지. 나는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아마도 교회 앞에 있던 어느 교차로를 막 건너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 앞에 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녀가 오고 있다. 젊지만 매우 초라한 옷을 입은 여인을 나는 보며, 그녀 또한 나를 보고 있거나 혹은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통행인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머리를 치켜들고 걷고 있다. 마치 발을 내딛지 않는 것처럼 부드럽게.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녀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간다.”(브르통, 47쪽) 거리를 배회하던 자신의 상황 묘사에는 과거 시제가 사용되고 있지만, “젊지만 매우 초라한 옷”을 입은 여인과의 만남은 현재 시제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듯한 장면은 다름아닌 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수수께끼와도 같은 갑작스러운 만남의 순간이라는 미학적 방식과 결합시키고자 했던, 즉 일종의 “예술의 정치화”(벤야민)를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의 알레고리적 의도에서 분출된 것이다.
이처럼 알레고리는 근본적으로 일상적인 연관성의 파괴, 그로 인한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방식에 그 특징을 두고 있다. 물론 벤야민과 욀러의 시각이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이들이 사물의 유기체적인 연관성을 파괴하는 알레고리의 의미를 오로지 역사철학적인 시대 의식하에서만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미학적 차원에서 그 시를 분석하고 있는 보러의 시각은 매우 독창적이다. 알레고리보다는 상징에 비중을 두고 있는 보러의 시각에 의하면, 여인은 “고독한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갖고 있는 비밀”을 유발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 결과 시인의 내적인 상태, 여인, 시적 화자로서의 배회자 등은 모두 보들레르의 추상적인 미학적 범주(미지의 것, 슬픔)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것은 하버마스와 야우스에 대항하여 그가 내세웠던 테제, 즉 현재라는 시대적인 의식 자체보다는 영원한 예술미가 보들레르에게서는 핵심적이라고 밝힌 자신의 테제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레고리는 일종의 불일치의 미학에서 나온 현대적인 방식이며 동시에 상이한 해석을 유발시키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에 기초한 보들레르의 문학이 여전히 그 미학적·정치적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그 텍스트 내의 언어적 기호가 특정한 삶의 연관성 내에 반드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현대의 심미적 사유에서는 조화, 재현, 일치, 통일성보다는 부조화, 파편, 불일치, 부정성 이외에 다른 어떤 방식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조화, 재현, 일치 등이 이미 부르주아의 미학적·정치적 방식에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6
보들레르가 공격하였던 시민적(즉 부르주아적) 세계는 조화로운 현실이나 이상을 추구하였던 세계였다. 그들이 내세운 형제애, 인간성, 도덕성 같은 서구 계몽주의적 이념은 그러나 그들이 속해 있는 현실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였으며, 따라서 부르주아 세계의 이념들은 보들레르에게 이미 추상적이고도 허위적인 환상으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위에 저항하기 위해 보들레르는 갑작스러운 단절의 상상력, 즉 독자의 예상과 기대를 깨는 아이러니컬한 방식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들레르 문학의 도발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기존의 도덕적인 기대감을 파괴하는 곳에서, 또한 그 어떤 새로운 도덕이나 긍정의 이념을 설파하지 않는 곳에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알레고리보다는 ‘사악한 아이러니’가 작동되고 있는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이다. 이 산문시집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서술된 것과 서술하는 자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 내지는 간극을 뜻하며, 따라서 아이러니컬한 텍스트와 관련하여 독자는 씌어진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최근 자주 분석되고 있는 「불쾌한 유리장수 Le Mauvais Vitrier」 「가난뱅이들의 눈 Les Yeux des Pauvres」 「위조화폐La Fausse monnaie」 등을 살펴봄으로써 보들레르 문학의 ‘사악한 아이러니’에 가까이 가보도록 하자.
우선 「불쾌한 유리장수」의 경우, 권태, 공상, 충동 등에 사로잡혀 “위험한 행위”를 저지르는 친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일인칭 화자는 자기 자신도 그와 같은 위기와 충동(즉 사악한 악마의 충동)에 사로잡혀 저질렀던 일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우울하고 슬프고 피곤한”(이것은 개인적인 상태라기보다는 그 어떤 암울한 사회적인 상태를 암시해준다!) 느낌에 젖었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유리제품을 팔러 다니는 가난한 장사꾼을 불러들이지만 “인생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색유리”를 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고는, 다시금 발코니로 나가 그 가난한 유리장수를 향해 화분을 내던졌으며 그로 인해 그 가난한 유리장수가 갖고 있던 모든 유리제품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깨지는 소리는 벼락을 당한 수정궁전이 폭발하는 소리를 만들었다”(윤영애 역, 52~54쪽)고 언급되어 있다.
이 텍스트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갑작스런 충동에서 나온 일인칭 화자의 행위가, 일반 사회심리학적인 차원에서처럼, 일종의 ‘도착적 패덕성’으로 간주되어도 좋은가에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난한 유리장수에게 화분을 던지는 화자의 행동이 정말 “악마와도 같은” 행동일까? 조심스러운 접근을 요구하는 점은 “악마와도 같은” 개념이 선악의 구분에 기초하는 전통적인 종교적 의미론 내에서 결코 정초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며, 또한 이 산문시의 의도를 성급하게 인본주의적이고도 도덕적인 마음에서 읽으려는 독자들도 그 개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이유 없이 가해하는 행위에 대해 도덕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이 텍스트는 사실 하나의 정치적·미학적인 텍스트이며, 더욱이 보들레르 특유의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하는 정치적·미학적인 텍스트인 것이다. 즉 병적인 심리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아이러니는 한편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보들레르 문학 자체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위에서 인용된 대목에서 유리장수가 갖고 있던 유리제품들의 “깨지는 소리”는 다름아닌 “벼락을 당한 수정궁전이 폭발하는 소리”로 비유되고 있는데, 여기서 ‘수정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밝힘으로써 보들레르 텍스트의 ‘사악한 아이러니’가 무엇에 정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수정궁’은, 욀러의 또다른 연구서에서 지적된 바 있듯이, 다름아닌 “새로운 파리라는 소위 아름다운 세계의 훌륭한 건축물” 혹은 당시 “화려한 거리나 혹은 국제박람회에서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소비의 성전”(욀러, 296쪽)에 대한 암시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산문시에 내재해 있는 아이러니의 공격 대상은 가난한 유리장수라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과 현란한 소비사회이며, 이러한 현대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급진적인 공격성이 보들레르 특유의 ‘전복의 미학’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유리장수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유리”, 즉 “수정궁”에 빌붙어 사는 이들이기에 “불쾌한” 사람으로 여겨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산문시는 보들레르 자신의 문학과 동시대의 문학적 경향과의 차이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이 산문시는 “파리를 미화시키거나 혹은 자본가들에게 삶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미에 대한 저항”(욀러, 297쪽)을 뜻하며, 이런 점에서 “삶을 아름답게! 삶을 아름답게!(La vie en beau! la vie en beau!)”라는 화자의 외침은 그 자신의 실제 요구 사항이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당시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아이러니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유리의 깨지는 소리는 일종의 이중 기호로 작용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독자의 일상적인 기대심리를 예기치 않게 “부수는” 텍스트의 간접적인 소리로서 보들레르 문학 자체에 대한 메타포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강렬하고도 순간적인 파열음을 내는 파편 조각의 시청각적 이미지는 다름아닌 자본과 소비에 의해 이끌려가는 산문적 현실을 파괴하려는 정치성과 동시에 삶의 심미화를 거부하는 파괴적인 문학성 자체를 뜻하며, 이런 점에서 보들레르 텍스트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미학적 ‘실천’인 셈이다.
「가난뱅이들의 눈」도 그와 비슷한 사유 지평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화려한 카페 안에서 연인과 함께 있던 일인칭 화자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카페 밖의 가난한 사람들(한 남자와 그의 두 아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자신의 연인도 동일한 연민의 감정을 갖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눈들 앞에서 연민을 느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을 너무 큰 잔들과 술병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사랑하는 연인이여, 나의 시선을 당신 쪽으로 돌렸소. 내가 당신의 시선에서 역시 ‘나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였소.”(윤영애 역, 136~138쪽) 그러나 그 연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격적이며 거의 독설에 가깝다. “카페 주인에게 부탁하여 저들을 이곳에서 멀리 쫓아낼 수 없을까요?”
이 텍스트를 작가 전기적인 차원에서 보들레르가 갖고 있던 ‘여성 경멸감’의 발현으로 독서할 경우, 그러한 독서는 보들레르 텍스트가 지닌 정치적·미학적인 의미를 오인할 수 있다. 텍스트의 서두에 씌어 있는 “내가 만난 한 여인의 불감성”이라는 화자의 말도 언뜻 보기에 매우 진지한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표피적인 것으로서 일종의 독서의 ‘함정’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이 산문시는 결코 인류애적인 남성의 정신과 비정신적이고도 편협한 여성의 마음 같은 단순한 이분법을 설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긍정’과 ‘이성적인 교환’의 이데올로기를 ‘예기치 않게’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계몽주의가 태동된 시기의 언어관(그 예로는 헤르더Herder의 「언어 기원론」인데)에서 지배적이었던 사유는 다름아닌 언어와 이성의 동질성 내지는 이상적인 교환 관계이며, 이러한 계몽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성적 행위는 곧 언어적 행위와 동일시되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을 들 수 있다. 또한 계몽주의 이후 철학적인 글(가령 실러와 헤겔)에서는 사유와 언어를 매개해주는 지각 기관으로서 주로 ‘눈’이 언급된 바 있는데, 여기서 ‘눈’은 곧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사유를 통해 그 사물에 ‘이성적인’ 형식을 다시 부여하는 지각 기관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철학적인 배경을 고려한다면, 「가난뱅이들의 눈」이 어떤 점에서 언어와 이성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했던 계몽주의적 사유에 대해 비판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산문시 「그리고 싶은 욕망」에서의 “폭발적인” 여인의 ‘눈’과는 달리,8) 이 텍스트에서 ‘눈’은 매우 부정적인 매개체이다. 화자는 연인의 ‘눈’을 통해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기를 희망하지만 결국 화자와 연인의 정신적인 ‘교감’, 즉 ‘이상적인 의사소통’은 좌절되며, 이러한 이상적인 의사소통의 좌절은 결국 이성에 대한 회의를 뜻한다. 또한 삶의 기본적인 장면,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주고받는 일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하는 남녀간의 의사소통 장면을 통해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인류 전체의 이성적이고도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공허하고 허위적인지를 아이러니컬하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의 주인공을 남녀 관계로 제한하기보다는 카페 밖의 가난한 사람들과 카페 안에 있는 두 사람(화자와 연인) 간의 관계로 확대해서 읽을 경우 이 텍스트는 뜻밖에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발산하고 있다. 즉 ‘눈’의 대립적인 구도(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눈과 화려한 삶을 누리는 이들의 눈)를 통해서 우리는 매우 급진적인, 일종의 ‘유물론적인’ 사상의 단초까지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동정심의 이상적인(혹은 이성적인!) 교환에 대한 회의를 넘어서 이 텍스트는 “사회적 불평등의 첫번째 징후이기도 한 빈곤의 폐지 없이는 인간들 간에 의사소통이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욀러, 310쪽)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보들레르 텍스트는 소위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도덕과 인륜성을 내세운 형이상학적 사유에 비판적인 아이러니의 화살을 당기고 있으며, 아마도 보들레르 텍스트는 그 점을 독자들이 읽어주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보들레르 텍스트가 표면적인 서술 차원에서의 의미보다는 아이러니, 위트, ‘사악한 유머’ 같은 부정성을 통해 그 어떤 변형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파리의 우울』의 또다른 텍스트 「위조화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변형의 가능성은 화폐의 진위와 관련된 아이러니컬한 유머를 통해 증폭된다. 이 텍스트에서 화자는 자신의 친구가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동에 내심 흐뭇해하면서 “상대에게 놀람을 야기시키는 데서 얻는 쾌감보다 더 큰 쾌감은 없는 법이요”라는 말을 던진다. 그러나 그 친구는 놀랍게도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말을 내던지며, 이러한 친구의 언술에 대해 화자는 곧 나름대로 그 위조화폐로 인한 개연성 있는 사건(위조화폐가 발견되지 않아 거지가 부자가 될 수 있거나 혹은 위조화폐가 발각되어 거지가 감옥에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놓고 여러 가지 가능한 ‘연역’과 ‘가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화자는 친구가 거지에게 놀라움 자체를 주려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자비심과 좋은 거래를 꾀하려 했다”는 것, 즉 “자비로운 인간이라는 면허장을 거저 얻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는 분개하고 만다.
이 텍스트에 서술된 친구의 행위를 놓고 일종의 “지적인 도착 행위에의 유혹”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거나 혹은 위조화폐에 의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의 운명을 두고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라는 보편적인 의미를 끄집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윤영애 역, 151쪽 참조) 그러나 다른 한편, 이 텍스트는 보들레르의 글쓰기가 어떤 점에서 현대적인 지평을 넘어 탈현대적인 텍스트 유희와도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친구의 언술 행위는 마찬가지로 보들레르 특유의 수법, 즉 일상의 기대를 부수는 문학적 언술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그것은 가짜 화폐였어”라는 친구의 너스레는 또 한 번의 뒤집기 가능성을 그 자체에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친구가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것은 이미 실행된 뒤집기 행위이지만, 이러한 뒤집기 행위는 다시 한번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친구의 말은 진짜 화폐를 주고서 천연덕스럽게 내던져진 제스처일 수 있는데, 그러한 ‘추측’이 가능한 까닭은 위조화폐를 주었다면 수치심으로 인해 은폐하기 마련인 일반 사람의 태도와는 달리 그 친구는 노골적으로, 태연스럽게 그 말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즉 만일 친구가 진짜 화폐를 주었음에도 가짜 화폐를 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될 경우) 도덕적이고도 보편적인 차원에서 친구의 행위에 대해 그 정당성을 묻는 화자의 행위가 오히려 매우 표피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결국 위조화폐를 둘러싼 화자의 반응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문학에 대한 독자의 일반적인 반응을 미리 선취하여 그 일반적인 반응과 아이러니컬한 유희를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가지 가능성, 즉 위조화폐와 진짜 화폐의 가능성은 텍스트 내에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결국 ‘글(럄riture)’이란, 데리다가 지적하듯,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서술하는 자와 서술된 것의 불일치, 실제와 의미의 불일치를 바탕으로 ‘유희의 유희’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동시에 ‘독서의 현기증’(폴 드 만)을 야기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절대적인 의미의 현존이 부재해 있는, 불연속과 해체 가능성을 지닌 언어의 틈새(brisure)로서 나타난다.
“위조화폐”라는 말의 의미가 사실인지 혹은 거짓인지의 애매성에 대해서는 이미 데리다도 짚어낸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데리다의 사유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위조화폐”라는 말이 단순한 소재일 뿐만 아니라 허위 내지는 픽션의 의미를 지닌 텍스트 혹은 ‘문학’ 자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이중적인 언어 기호”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여기서 고대 로마 시대에 사용되었던 동전의 그림에 다름아닌 ‘야누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매우 암시적이다!) 화폐와 텍스트, 화폐에 관한 텍스트, 텍스트 내에서 언급된 화폐, 화폐의 두 얼굴, 두 의미를 지닌 텍스트 등을 통해 형성되는 화폐와 텍스트 간의 의미 유사성에 대해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위조화폐’라는 제목은 단순히 ‘여기 위조화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 문학으로서 이야기는―아마도―위조화폐, 즉 픽션이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픽션에 대해 누구나, 화자가 (……) 친구의 위조지폐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듯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데리다, 116쪽)
물론 데리다는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자기 독백적인 질문과 대답을 전개하고 있지만,9) 그러나 “위조화폐”라는 제목으로 사용된 언어 기호가 단순한 돈이라는 질료를 넘어서 ‘픽션’과도 같은 ‘텍스트’의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그의 테제는 매우 설득력 있다. 그 테제의 타당성은 텍스트 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즉 위조화폐가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연역’과 ‘가정’을 생각해보는 화자의 행위에서 말이다. 예컨대, 화자의 행위는 곧 픽션과도 같은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모색해보는 우리의 독서 행위와 친화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욀러가 지적해주었듯이, 보들레르는 독자의 은총에 아부한 작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독자가 능동적인 힘으로 자신의 텍스트에 다가오기를 기다린 작가였다. 그러한 독자의 능동성은 또다른 산문시 「가난뱅이를 때려라!Assommons les Pauvres!」에서 비렁뱅이 노인과 화자 사이의 격투 장면을 통해 주어져 있는바, 그 초현실적인 장면은 그 어떤 실제의 장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독자(비렁뱅이 노인)와 텍스트(혹은 그 생산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알레고리, 아이러니, 위트가 가득한 작가의 텍스트로부터 실컷 두들겨(아이러니, 위트 등) 맞은 독자, 그러나 그 독자가 불현듯 그 작가의 텍스트를 다시금 두들겨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가난뱅이를 때려라!」가 던지고 있는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에 합당한 새로운 동등 관계가 창출되는 것이다.
7
지금까지의 논의는 보들레르 문학의 내적 의미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려 했던 것은 아니며 다만 독일 문학, 특히 낭만주의 문학을 다루어왔던 필자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들레르 문학의 의미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독일의 경우 보들레르 문학이 지닌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의미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면, 우리 주변에서는 그러한 의미 지평이 마치 안개 속에 놓여 있는 듯 불투명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들레르 문학을 치밀하고도 폭넓은 지평하에서 고찰하지 못하면서도 그 문학의 한계성을 성급하게 논하는 시각이 여전히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의 보들레르 연구 동향은,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언뜻 보기에 관능적 탐닉과 도취만을 자아내는 듯한 보들레르 문학이 어떤 측면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의미를 표출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가령 벤야민과 그에 의존한 시각(욀러)이다. 물론 이들은 일시성과 영원성, 시대적 현실과 영원한 예술미가 명확한 구분 없이 어우러지는 보들레르의 문학을 지나치게 수단(영원성)과 목적(일시성)의 관계로 읽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난을 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보들레르 문학의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진일보한 시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연구 경향과는 달리 지금은 보들레르 문학의 미학적이고도 유희적인 측면을 읽어내려는 시각들(보러, 데리다)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새로운 시각이 곧 ‘순수성’ ‘절대성’ ‘자율성’만을 보들레르 문학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삼았던 전통적인 논의(프루스트, 발레리 등)로 회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의 미학적·유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은 보들레르 문학이 지닌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의미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새로운 방법론과 의미 지평하에서 보들레르 문학의 또다른 잠재력을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제 보들레르 문학과 관련하여 요구되는 점은 보들레르 자신이 역설하였던 시대성과 영원성이라는 예술의 두 가지 측면이 텍스트 자체의 ‘내재적 특성’뿐만 아니라 텍스트에 접근하는 ‘독서의 특성’으로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Th. W. Adorno, Noten zur Literatur, Frankfurt 1974.
E. Auerbach, Baudelaires ‘Fleurs du Mal’ und das Erhabene, in :Baud-elaire, WdF(Nr. 283), Darmstadt 1976, S. 137~160.
Ch. Baudelaire, Les Fleurs du Mal(Die Blumen des B쉝en), M웢chen 1975.
Ch. Baudelarie, Der K웢stler und das moderne Leben. Essays, Salons, intime Tageb웒her, Leipzig 1990.
W.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Frankfurt 1974.
A. Breton, Nadja, Frankfurt 1984.
J. Derrida, Falschgeld, M웢chen 1993.
H. Friedrich, Die Struktur der modernen Lyrik, Hamburg 1985.
W. Lepenies, Melancholie und Gesellschaft, Frankfurt 1969.
D. Oeler, Ein H쉕lensturz der Alten Welt, Frankfurt 1988.
W. Rasch, Die literarische D럄adence um 1900, M웢chen 1986.
P. Zima, Die Dekonstruktion, T웑ingen 1994.
김붕구, 『보들레에르』, 문학과지성사, 1987.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윤영애 역, 민음사, 1996.
보들레르, 『보를레르 시전집』, 박은수 역, 민음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