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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경(安仲敬)
주천안씨(酒泉安氏) 단종~연산 때 환관 3등공신 원성군(原城君) : 원성(原城)은 현재 지명으로 원주(原州)
주천안씨(酒泉安氏)
본관소재지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주천면(酒泉面)
시조명 안정방(安挺方)
본관 연혁 주천(酒泉)은 강원도 원주(原州) 동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었으나 통일신라 시대에 주천(酒泉)으로 고쳐서 내성군(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원주 임내에 이속(移屬)하였고,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성씨의 역사 안정방(安挺方)은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모시고, 주천을 본관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신이며 원성군(原城君)에 봉해진 안중경(安仲敬) 혹은 안경중(安敬仲)이 일파로 전해진다고 한다. 주천(酒泉)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으로 주요 성씨로는 안(安), 윤(尹), 조(趙)씨 등이 있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주천안씨는 97가구 총 30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5년 발간된 박상진 씨가 쓴『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의 내용에서 안중경(安仲敬)이라는 환관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기록을 알수 있는 자료가 있어 여기에 옮긴다.
조선시대 환관들은 성씨가 다른 양자를 통해 가계를 계승하게 되는데 윤득부, 이득수 등 조선 초 환관 3명의 가계도를 기록한『양세계보(養世系譜)』를 보면, 양반들이 환관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환관들에게 같은 핏줄(同姓)을 양자로 맞을 수 없게 하였다고 한다.
151페이지를 보면 윤득부(尹得富)의 아들이며 익대공신 3등으로 원성군(原城君)에 봉해진 안중경(安仲敬)의 묘가 송도에, 통훈대부 상다를 지낸 안중경의 아들 백계남과 손자인 상선 최한손의 묘가 동대문 밖 봉화산에 있었다.
138페이지를 보면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시의 양자는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양자의 숫자는 명종실록에 많은 경우 한 집에 4~5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 어린 고자 아이들은 내시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도 양아버지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친가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입양된 형제간에도 성이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단 입양된 아이에겐 양아버지 되는 내시가 새로 이름을 지어주는 게 관례였다. 이름을 지을 땐 항열자를 따라서 지었다.
일례로 내시들의 족보인 양세계보엔 시조 윤득부(尹得富)의 두 이들인 안중경(安仲敬)과 김계경(金季敬)이 각각 경(敬)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10대손 한경상(韓景相)의 두 아들도 익(翼)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 각각 김원익(金元翼) 김몽익(金夢翼) 등으로 지었던 것이다. 환관 안중경(安仲敬)은 본관이 주천으로 주천안씨 였을지는 몰라도, 환관이 된 후 안씨가 아닌 타성을 쓰는 양자로 대를 잇게하는 조선시대 환관들의 관례에 따라 타성씨 환관 양자를 두게 되는 듯 하다. : 윤득부(尹得富) - 안중경(安仲敬) - 백계남 - 최한손 - ....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64회에 걸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단종 9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2월 26일(무신) 2번째기사 난신전을 공신 1등·2등·3등에게 나누어 주다
호조(戶曹)에 전지하기를, “난신전(亂臣田)으로서 1등 공신 영의정(領議政)에게는 1백 50결(結), 그 나머지에게는 각각 50결, 2등 공신에게는 각각 30결, 3등 공신에게는 각각 15결씩 나누어 주고, 또 혜빈(惠嬪)과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각각 1백 50결, 경숙 옹주(敬淑翁主)에게 1백 결, 봉보 부인(奉保夫人) 이씨(李氏)와 상궁(尙宮) 박씨(朴氏)에게 각각 70결, 사선(司膳) 신씨(申氏)에게 50결, 시녀(侍女) 김씨(金氏)·박씨(朴氏)·이씨(李氏)에게 각각 25결,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엄자치(嚴自治)·전균(田畇)에게 각각 50결, 행 지내시부사(行知內侍府事) 윤기(尹奇)에게 30결,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충(金忠)·이귀(李貴), 행 동판내시부사(行同判內侍府事) 최습(崔濕), 행 동지내시부사(行同知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 행 첨내시부사(行僉內侍府事) 인평(印平), 행 동판내시부사(行同判內侍府事) 유대(柳臺), 행 내시부 우승직(行內侍府右承直) 길귀생(吉貴生), 행 동지내시부사(行同知內侍府事) 이전기(李專奇)에게 각각 30결, 행 내시부 좌승직(行內侍府左承直) 안노(安璐)·이득부(李得富), 행 동첨내시부사(行同僉內侍府事) 박윤(朴潤), 행 동지내시부사 김득상(金得祥), 행 내시부 우승직 이중근(李重斤)·문줄(文茁), 행 동첨내시부사 길유선(吉由善), 행 사표국 사(行司豹局使) 최찬(崔璨)·조희(曹熙), 행 내시부 좌승직 배안생(裵安生), 행 동첨내시부사 문한(文漢), 행 내시부 알자(行內侍府謁者) 서성대(徐盛代), 행 내시부 승직 문중선(文仲善), 행 사표국 부사(行司豹局副使) 김혁(金革), 행 내시부 좌승직 복회(卜禬)·김결(金潔), 행 내시부 궁위승(行內侍府宮闈丞) 이효지(李孝智), 행 내시부 알자 김덕공(金德恭)에게 각각 25결, 행 내시부 우승직 김양(金壤)·배선(裵宣)·주희산(朱希山), 행 내시부 좌승직 최언(崔彦)·윤언(尹彦), 행 내시부 우승직 이춘(李春), 행 사표국 부사 정복(鄭福), 행 내시부 우승직 정존(鄭存), 행 좌부승직(行左副承直) 윤득부(尹得富), 행 좌승직(行左承直) 지덕수(池德壽), 행 내시부 좌부승직(行內侍府左副承直) 유진(劉進), 행 알자(行謁者) 유한(柳漢)·황사의(黃思義), 봉직랑(奉直郞) 박존수(朴存壽), 행 좌부승직(行左副承直) 한존(韓存)·황의지(黃義之), 우부승직(右副承直) 최정(崔汀), 우승직(右承直) 김종직(金從直), 행 사알(行司謁) 안중경(安仲敬)에게 각각 10결씩 내려 주라.”
사알(司謁) 조선시대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된 정육품(正六品) 잡직(雜職)으로 정원은 1원이다. 조선시대 사알은 고려의 사알을 계승한 것인데, 고려와는 달리 내시부가 환관직의 내시부와 액정서로 분리될 때 액정서 소속이 되었다. 또 품계도 정육품으로 상승되면서 액정서의 최고위직이 되었다. 잡직의 체아직(遞兒職)이고, 정육품 이상의 관계로는 승급할 수 없었다. 사알은 궁중에서 임금의 어명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고 시종과 알현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 편찬 시 명문화되면서 후대로 이어져오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2. 단종 14권,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4월 9일(갑신) 2번째기사 김충·인평 등의 집을 양녕 대군·효령 대군 등에게 내려 주다
호조에 전지하여, 김충(金忠)의 집을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에게 내려 주고, 인평(印平)의 집을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에게 내려 주고, 최잠(崔涔)의 집을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내려 주고, 이귀(李貴)의 집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宋玹)에게 내려 주고, 최찬(崔璨)의 집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낭이승거(浪伊升巨)에게 내려 주고, 김득상(金得祥)의 집을 첨지중추원사 마흥귀(馬興貴)에게 내려 주고, 유대(柳臺)의 집을 상호군(上護軍) 강곤(康袞)에게 내려 주고, 길유선(吉由善)의 집을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내려 주고, 조희(曹熙)의 집을 판내시부사 안노(安璐)에게 내려 주고, 서성대(徐盛代)의 집을 판내시부사 홍득경(洪得敬)에게 내려 주고, 박윤(朴閏)의 집을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 이전기(李專己)에게 내려 주고, 화계산(化繼山)의 집을 동지내시부사(同知內侍府事) 길귀생(吉貴生)에게 내려 주고, 박한(朴漢)의 집을 사표국 부사(司豹局副) 김용(金龍)에게 내려 주고, 유한(柳漢)의 집을 우부승직(右副承直) 윤득부(尹得富)에게 내려 주고, 황사의(黃思義)의 집을 동첨내시부사(同僉內侍府事) 임동(林童)에게 내려 주고, 이춘(李春)의 집을 좌승직(左承直) 윤언(尹彦)에게 내려 주고, 서의(徐義)의 집을 동첨내시부사 이중근(李重根)에게 내려 주고, 정존(鄭存)의 집을 동지내시부사 복회(卜禬)에게 내려 주고, 조생(趙生)의 집을 좌승직 신운(申雲)에게 내려 주고 김종직(金從直)의 집을 좌승직 안충언(安忠彦)에게 내려 주고, 문한(文漢)의 집을 좌승직 안중경(安仲敬)에게 내려 주고, 박공(朴恭)의 집을 시녀(侍女) 내은이(內隱伊)에게 내려 주고, 오율산(吳栗山)의 집을 우승직 김귀동(金貴同)에게 내려 주고, 유진(劉進)의 집을 좌부승직(左副承直) 서귀손(徐貴孫)에게 내려 주고, 윤기(尹寄)·엄자치(嚴自治)·정복(鄭福)의 집을 혜빈(惠嬪)에게 내려 주고, 시녀 충개(蟲介)가 받은 김종서(金宗瑞)의 첩(妾)의 집을 환수(還收)하여 최습(崔濕)의 집으로 내려 주었다.
좌승직(左承直) 고려시대의 환관직(宦官職). 1356년(공민왕 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뒤에 내시부(內侍府)가 신설되면서 그 관속으로 되었다. 품계는 정5품관으로 동첨사(同僉事)의 아래 벼슬인데, 정원 2명을 두었다. 우왕 때 내시부가 혁파되면서 폐지되었다가 공양왕 때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시부 관제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0일(신묘) 1번째기사 환관을 대우함이 매우 엄하여 환관들이 마음을 풀지 못하다
명하여 안중경(安仲敬)·김여생(金呂生)·김수경(金壽敬) 등을 형조(刑曹)에 가두었다가 곧 석방하였다. 임금이 환시(宦寺)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엄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죄를 범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징계하였기 때문에 환관(宦官)들이 마음대로 풀지 못하였다.
4.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2일(계사) 2번째기사 궁내와 내시부의 조장을 지어 환관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궁내(宮內)와 내시부(內侍府)의 조장(條章)을 지어서 환관(宦官) 등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강(講)하니, 모두 불통(不通)이었다. 임금이 명하여 임동(林童)·송중(宋重)·이존명(李存命)·김여생(金呂生) 등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이효지(李孝智)·안중경(安仲敬) 등의 직(職)을 1계급씩 강등(降等)하였으니, 이효지·안중경은 그때 승전(承傳)이 되어 궐내(闕內)의 일을 통찰(統察)하던 자들이었다.
5.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27일(무신) 3번째기사 훈련관에서 개장하는 온선 차자가 이르지 않으니 환관과 관리들을 국문하다
구례(舊例)에 무재(武才)의 도시(都試)에는 개장일(開場日)에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는데, 이날 훈련관(訓鍊觀)에서 개장(開場)하는데, 전일에 아뢴 선온 차자(宣醞箚子, 임금의 허가서)가 아침 해가 늦도록 내려지지 않으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다시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아침 해가 늦었는데, 아직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니, 승지(承旨)가 아뢰기를, “선온(宣醞)이 이미 훈련관(訓鍊觀)에 도착하였으므로, 단지 어명(御命)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아뢴 차자(箚子)는 승전 환관(承傳宦官)이 지체시키고 아뢰지 않는 것이다. 또 해당 관사에게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주육(酒肉)을 보냈으니, 모두 옳지 않다.” 하고, 명하여 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과 사재감(司宰監)·내자시(內資寺)의 해당 관리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6.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9월 8일(무오) 3번째기사 환관 송중·임동에게 관직을 도로 주고 김수경 등에게 고신을 돌려 주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환관(宦官) 송중(宋重)·임동(林童)에게 관직을 도로 주고, 김수경(金壽敬)·이효지(李孝智)·안중경(安仲敬)에게 고신(告身)을 주라.” 하였다.
7.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9월 30일(경진) 1번째기사 창덕궁 후원에서 습진을 구경하다. 효령 대군 보가 분신 사리를 바치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습진(習陣)을 구경하니, 왕세자(王世子)와 내종(內宗)·진종(陣宗)과 군무(軍務)의 직위를 띤 자가 어가(御駕)를 따랐다. 동가(動駕)할 때 환관(宦官) 조언(曹彦)·이효지(李孝智)·안중경(安仲敬)이 문(門)을 여는 데 지체(遲滯)하니, 임금이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어가(御駕)가 후원(後苑)의 악차(幄次)에 이르자 사금(司禁)·사복(司僕)·선전관(宣傳官) 등이 악차(幄次)의 앞뒤를 알지 못하여 즉시 시위(侍衛)하지 않으니,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병조 참의(兵曹參議) 박중선(朴仲善)을 좌상 대장(左廂大將)·우상 대장(右廂大將)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후원(後苑)을 몰이하게 하고, 기르던 노루·사슴을 놓았다가 이를 파(罷)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솔[候]을 1백 보(步)쯤 거리에 설치하고 겸사복(兼司僕)으로 이를 쏘게 하니, 맞힌 자가 다만 1인 뿐이었다. 또 내금위(內禁衛)로 하여금 들어와서 쏘기를 자원(自願)한 자가 20여 인이었는데, 오로지 반희(潘熙) 등 2인 만이 맞히니, 임금이 명하여 겸사복(兼司僕)으로 삼았다.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와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명하여 짝을 지어 쏘게 하니, 세자(世子)가 두 번 쏘아 두 번 맞히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잔(盞)을 받들게 하고 구치관(具致寬)으로 하여금 병(甁)을 잡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원각사 조성소 제조(圓覺寺造成所提調)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등이 절에서 새로 만든 불상(佛像)의 분신 사리(分身舍利)를 바쳤다.
8. 세조 35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2월 29일(병오) 2번째기사 공사 지체의 벌로 이효지·안중경을 가두다
공사(公事)를 지체(遲滯)하였으므로 승전 환관(承傳宦官) 이효지(李孝知)·안중경(安仲敬)을 옥(獄)에 내리었다.
9. 세조 36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6월 28일(갑진) 1번째기사 화위당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 활쏘기를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백악산(白岳山)기슭에 올라가 종이를 나무 끝에 맨 것을 휘두르고 있으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불러다 물으니,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선상(選上, 뽑혀 올라온) 한 종[奴]이었다. 옷이 몸을 덮지 못하고 얼굴에는 굶주려서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걸식(乞食)하며 조석(朝夕)을 지내고, 또 주인(主人)의 침책(侵責)을 입어 상언(上言)하려고 생각했으나 득달(得達)할 길이 없는 까닭으로 휘둘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불쌍히 여기어 사옹(司甕)으로 하여금 음식을 먹이게 하고, 또 면포(綿布)로 만든 철릭[帖裏] 1령(領)을 내려 주며, 양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 형조(刑曹)에 명하여 안동하여 온 사람과 주인(主人)이 침책(侵責)한 정유(情由)를 묻게 하고, 승전 환관(承傳宦官) 이득수(李得守)·안중경(安仲敬)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를 파직(罷職)하자고 아뢴 위의 일을 계완(稽緩)한 때문이었다.
10. 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9월 13일(정사) 1번째기사 대가가 도비연에 이르러 의정부 육조에서 음식을 올리다
대가가 도비연(都飛淵)에 이르니 도성에 머물러 있는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 풍정(豐呈)을 올리었다. 큰 비가 그치지 않으므로 먼저 중사(中使, 궁중에 왕명을 전하는 내시)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기로(耆老)·유생(儒生)·창기(倡妓) 등의 가요를 받았다. 먼저 대궐에 이르러서 명하여 최한경(崔漢卿) 등을 용서하게 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대가를 따른 종친·재추와 대가를 맞은 종친·재추를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11. 세조 38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3월 19일(경신) 1번째기사 환관 안중경에게 태 30대를 때리게 하다
대가(大駕)가 금성(金城)의 궁천(宮川)에 이르렀다.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태(笞) 30대를 때리게 하였다.
12. 세조 38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3월 27일(무진) 1번째기사 의금부에 명하여 이득수(李得守)·안중경(安仲敬)을 경성(京城)에 보내어 가두게 하였다.
13. 세조 41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월 16일(계미) 1번째기사 전라도 정읍현에 온정이 있다고 고하므로 환관 안중경을 보내어 탐지하게 하다
전라도 정읍현(井邑縣)에 온정(溫井)이 있다고 고(告)한 자가 있었으므로 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14. 세조 41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3월 16일(신사) 1번째기사 장패(將牌)출납을 함부로 한 승전 환관을 하옥하고 국문하게 하다
형조에 전지하기를, “무릇 장패(將牌, 군관·비장들이 허리에 차던 나무로 만든 패)는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이 친히 승전 환관(承傳宦官)에게 주고 받아야 하며, 승전 환관은 모름지기 두 사람이 갖추어져야만 출납(出納)할 수 있도록 그 법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데, 지금 위장이 친히 〈승전 환관에게〉 주고 받지 아니하고 부장에게 주며, 부장도 또한 친히 승전 환관에게 주고 받지 않고 여러 별감(別監)에게 주었는데도, 이득수(李得守)와 안중경(安仲敬) 등이 마음대로 출납하고 조금도 검찰(檢察)하지 않았으니, 그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15.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4월 27일(임술) 3번째기사 동불상을 헐어서 몰래 판 자들을 붙잡아 가두다
어떤 사람이 동불상(銅佛像)을 헐어서 몰래 팔아 이득을 취한 자가 있다고 고하였으므로, 곧 명하여 선전관(宣傳官) 김이정(金利貞)과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잡게 하니, 수모(首謀) 이후(李厚) 등 3인과 공사에 연루된 10여 인을 붙잡아 밤새도록 국문하였으나, 끝내 실정을 토로하지 않았다.
16.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1일(을유) 2번째기사 박중선·경준·승전 환관 안중경 등에게 옥사를 감독하게 하다
주서(注書) 경준(慶俊)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와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옥사를 감독하게 하고, 밤에 또 박중선(朴仲善)과 경준(慶俊) 및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에 가서 죄수들의 가쇄(枷鎖, 죄수에게 씌운 칼과 족쇄)가 견고한 지의 여부를 살피게 하니, 안중경 등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숙주(申叔舟)와 신찬(申澯)·신정(申瀞) 등 8인은 항쇄(項鎖)가 모두 헐거워서 벗어질 듯합니다.” 하니, 박중선으로 하여금 보병(步兵) 30명을 거느리고 옥을 지키게 하였다.
17.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16일(기유) 1번째기사 상참 때 실의한 자를 추핵하게 하고 유자광에게 이시애 잡을 방략을 묻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는데, 백관(百官)으로 수반(隨班)하지 않는 자와 실의(失儀)한 자가 많으므로, 유사(攸司)에 명하여 추핵(推劾)하게 하고, 갑사(甲士) 유자광(柳子光)을 불러 이시애(李施愛)를 잡을 방략(方略)을 물으니, 유자광이 논대(論對)함이 자못 성지(聖旨)에 맞아서 임금이 크게 포장(褒奬)을 더하고 명하여 겸사복(兼司僕)에 충원하였다. 또 도총관(都摠管) 윤사흔(尹士昕)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임금이 조용히 이르기를, “경(卿) 등은 내 심복(心腹)이니, 내외(內外)의 일을 마땅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내 무엇을 은휘하겠느냐? 저사(儲嗣)는 국가의 근본이니, 마땅히 친근(親近)하고 정대한 사람이 삼선(三善)을 가르쳐 이루어야 하는데, 근자에 저궁(儲宮)을 세우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대부(士大夫)의 소견을 접함이 없고, 더불어 노는 자가 오직 환관(宦官)과 궁첩(宮妾)뿐이니, 내가 매우 근심이 된다. 근자에 내녀(內女) 초금(草今)이 형벌의 화에 걸려 빠지었고, 환자(宦者) 안중경(安仲敬)의 무리도 또 내 뜻을 거스르니, 이는 내가 집을 다스림이 지극하지 못함이고, 오늘 상참(常參)하는 데 조신(朝臣) 가운데 실의(失儀)한 자가 많으니, 이는 내가 조정(朝廷)을 바르게 함이 지극히 못함이며,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북방을 도둑질하여 웅거하고, 산개[山獠]와 사나운 말[桀驚]이 변경을 침략(侵略)하니, 이는 나의 치화(治化)가 지극하지 못함이다. 이 한 몸을 돌아보건대, 이 세 가지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장차 무엇으로 마음을 삼겠는가? 거듭 경(卿)들에게 얼굴이 붉어지니, 경들은 마땅히 조석(朝夕)으로 공경하여 나의 빈 것을 보조하라.” 하였다. 그 때에 세자(世子)가 곁에 있으므로, 특별히 좌승지(左承旨) 이봉(李封)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고하게 하고, ‘나의 선부(先父)가 너의 아비와 정의가 가장 깊었다.’고 말하고는, 따라서 승지(承旨) 등을 경계하기를, “정원(政院)은 기틀이 요긴한 지위이기에 권위가 더욱 중하니, 각각 너희 일을 삼가하라.” 하고, 또 환관(宦官) 전균(田畇)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우리 집의 늙은 종이라 세종(世宗) 때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 것이니, 당시에 시조(視朝)할 즈음에도 또한 군신의 실의(失儀)하는 자가 있었더냐?”
18.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6일(기묘) 2번째기사 환관 안중경·송중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다
임금이 명하여 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송중(宋重)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시키고, 곧 주서(注書) 박효원(朴孝元)을 감옥으로 보냈다.
19.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1일(갑신) 2번째기사 내녀 원앙·두대 등과 승전 환관 안중경·이득수를 하옥하다
내녀(內女) 원앙(元央)·두대(豆大) 등 4인과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이득수(李得守)를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하였다.
20.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2일(을유) 4번째기사 직임을 다하지 않은 환관 이득수·안중경을 국문하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환자(宦者) 이득수(李得守)·안중경(安仲敬) 등이 승전 환관(承傳宦官)으로서 긴급(緊急)한 공사(公事)를 여러 날 동안 아뢰지 않아서 늦춰지게 하였고, 또 공사(公事)를 가지고 혹은 문틈에 끼워 놓거나 혹은 땅에 던지는 등 삼가 전수(典守)하지 않았으니, 그들을 국문(鞫問)하여서 아뢰어라.” 하였다.
21.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월 16일(정축) 4번째기사 내전과 상서원에 있는 옥새를 조사하게 하다
임금이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묻기를, 보새(寶璽, 옥새)가 입내(入內, 내전에 들어 옴) 한 것이 몇이 있으며, 상서원(尙瑞院)에 있는 것은 몇이 있느냐?” 하니, 안중경이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하므로, 즉시 명하여 안중경과 직숙 승지(直宿承旨)에게 상서원에 나아가 문적(文籍)을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22.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2월 10일(신축) 2번째기사 문서의 지완을 책하다
중국인[唐人]을 해송(解送)하는 문서(文書)가 지완(遲緩)한 것을 계달(啓達)하니,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을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내려 가두게 하고, 좌승지 이극증(李克增) 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출납(出納)을 직임으로 삼고서 모든 공사(公事)를 기한에 미치는 것이 이와 같이 더디게 아뢰는 소위(所爲)는 무슨 일이냐? 죄가 진실로 책망하기에 마땅하나 아직은 용서하니,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 하였다.
23.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3월 7일(정묘) 1번째기사 승전 환관 안중경에게 행궁 안에 표신이 없는 자를 수색하게 하다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행궁(行宮) 안에 표신(標信,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하던 문표) 이 없는 자를 수색하게 하니, 수십 인을 얻었다.
24.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7월 12일(기사) 1번째기사 이조의 관리를 핵실할 것을 명하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이조 판서(吏曹判書) 성임(成任)·행 호군(行護軍) 구종직(丘從直)·대사성(大司成) 김예몽(金禮蒙)·공조 참판(工曹參判) 정자영(鄭自英) 및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홍문관(弘文館)·시강원(侍講院)의 여러 문신(文臣)을 불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에 모이게 하고,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로 하여금 전지(傳旨)하게 하기를, “무반(武班)은 여러번 술과 고기를 하사(下賜)하였으나, 문신(文臣)은 오랫동안 접견(接見)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특별히 술자리를 베풀었으니, 모름지기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또 내가 좋은 청주종사(靑州從事, 미주美酒)를 얻어서 갈무리해 둔 지가 오래되었는데, 너희들이 마실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나누어 내려 주었다. 이는 유구국(琉球國)에서 올린 천축주(天竺酒)인데, 그 맛이 쓰고 매워 사람들이 쉽게 마시지 못하였다. 또 전지하기를, “근일(近日)에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하는 일이 바빴으므로, 인하여 강론(講論)을 폐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중국 사신이 회환(回還)하면 내가 마땅히 강론에 참여하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가 아뢰기를, “군자감 정(軍資監正) 이숭원(李崇元)·훈련 첨정(訓鍊僉正) 이유인(李有仁)·형조 정랑(刑曹正郞) 안우삼(安友參)·종묘서 영(宗廟署令) 이석견(李石堅)·진주 판관(晉州判官) 노윤(盧昀) 등은 모두 임기가 차지 아니하였는데도 체천(遞遷)되었고, 또 이유인은 본조(本曹)의 낭관(郞官)이 임기가 차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아울러 다 천전(遷轉)하였으니, 청컨대 이조(吏曹)의 관리(官吏)를 핵실하게 하소서.” 하니,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命)하여 성임(成任)에게 물으니, 성임이 대답하기를, “제사(諸司)에서 개만장(箇滿狀)을 본조(本曹)에 올리면 본조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체천(遞遷)하는데, 다시 점검(點檢)을 하지 아니한 것은 신(臣)의 죄(罪)이니,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였다. 전지(傳旨)하기를, “제사에서 개만장(箇滿狀)을 올린 것인데, 경(卿)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피혐(避嫌)하지 말라.” 하니, 성임이 또 아뢰기를, “본조의 낭관이 개만(箇滿)하지 아니한 것을 살피지 못하고 체천시킨 것은 신에게 더욱 죄가 있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스스로 공(功)을 상고하는 것이 낭관이니 혐의하지 말라.” 하고, 최경지에게 전지하기를, “네가 자세히 조사한 것을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이를 핵문하라.” 하였다.
25.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비가 새는 장악과 유막이 많아 전설사 별제 강거정을 추핵하여 아뢰게 하다
임금이 불예(不豫)하여 여러 종친(宗親)과 재추(宰樞)가 문안(問安)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위사(衛士)들이 폭로(暴露, 비바람을 무릅씀) 할 것을 염려하여 내진(內陣)의 사면(四面)에 장악(帳幄)과 유막(油幕)을 설치하여, 비를 피하게 하도록 명(命)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비를 무릅쓰고 순시(巡視)하게 하였더니 비가 새는 곳이 많았고 혹은 설치하지 아니한 곳이 있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 명(命)하여,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강거정(姜居貞)을 추핵하여 아뢰게 하였다.
26.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18일(갑진) 2번째기사 실정을 말하지 않는 오이협을 엄하게 고문하게 하다
승정원에 명하여 성계증(成繼曾)과 서원(書員) 오이협(吳以俠)을 국문하게 하였다. 권감과 어세겸이 오이협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는데도 오히려 실정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전교하기를, “곤장 30대를 때려도 오히려 자복(自服)하지 아니하므로 반드시 그 정상이 있을 것이니, 압슬(壓膝, 죄인을 심문할 때 무릎에 무거운 물건으로 짓눌러 고통을 주던 고문의 하나)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권감 등이 또 오이협에게 물으니, 오이협이 말하기를, “다만 정병(正兵)을 갑사(甲士)로 잘못 썼을 뿐입니다.” 하고서, 마침내 자복하지 아니하니, 전교하기를, “만일 승복(承服)하지 아니하거든 비록 쇠몽둥이가 부서지더라도 가하니, 다시 장을 때려 심문하라.” 하였다. 어세겸이 또 곤장을 때리고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이 묻기를, “너는 그렇다고 하고 위장(衛將)·부장(部將)들 가운데 아부하는 자가 없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곤장 15대 정도를 때리고서 그쳤다.
27.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4일(경술) 4번째기사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 사실을 고하니 남이를 붙잡아 실상을 묻다
어두울 때에 병조 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승정원에 나아가서 입직(入直)하는 승지 이극증(李克增)·한계순(韓繼純)에게 고하기를, “신이 급히 계달할 일이 있습니다.” 하니, 이극증 등이 유자광과 더불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서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유자광을 불러서 보니, 유자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내병조(內兵曹, 조선조 때 궁중에서 시위(侍衛)·의장(儀仗)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병조에 딸린 관아)에 입직하였더니 남이(南怡)도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 입직하였는데, 남이가 어두움을 타서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이제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아마도 간신(姦臣)이 작란(作亂)하면 우리들은 개죽음할 것이다. 마땅히 너와 더불어 충성을 다해 세조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어떤 간사한 사람이 있어 난(亂)을 일으키겠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이 정사를 오로지하여 재물을 탐하니 이같은 무리는 죽이는 것이 옳다. 또 노사신(盧思愼)은 매우 불초(不肖)한 자인데, 너도 아느냐?’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天河,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데 광망(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將軍)이 반역(叛逆)하고 두 해에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오랜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거사(擧事)하고자 하는데, 이제 주상이 선전관으로 하여금 재상의 집에 분경(奔競)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수강궁(壽康宮)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이라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같은 큰 일을 우리들이 어찌 능히 홀로 하겠는가? 네가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모의(謀議)하였느냐? 또한 주상이 반드시 창덕궁에 오래 머물 것이다.’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이는 어렵지 않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런 말을 내가 홀로 너와 더불어 말하였으니, 네가 비록 고할지라도 내가 숨기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내가 비록 고할지라도 네가 숨기면 내가 죽을 것이므로, 이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말할 수 없다. 또 세조가 민정(民丁)을 다 뽑아서 군사를 삼았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 나는 호걸(豪傑)이다.’ 하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려고 하자 이미 취했다고 말하며 마시지 아니하고 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유자광이 대답하기를, “밤을 타서 가서 잡으면 혹시 도망해 숨을까 두려우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한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 위쪽에 ‘명(命)’자를 쓰고 붉은 칠을 한 나무패. 임금의 명으로 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부를 때, 이 패에 성명을 써서 돌렸음. 이 패를 받고 올 뜻이 있으면 ‘진(進)’, 안 올 때는 ‘부진(不進)’이라고 써서 도로 바치었음)를 가지고 부르면 나치(拿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고, 곧 명하기를, “어찌 반드시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것인가?” 하고, 곧 명하여 이극증과 한계순을 불러, 한계순에게 명하여 입직(入直)한 사복장(司僕將)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고, 또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명하여 같이 가게 하였다. 이어서 입직한 도총관(都摠管) 노사신(盧思愼)·강곤(康袞), 병조 참판 신승선(愼承善) 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도총부(都摠府)에 명하여 군사로 하여금 갑옷을 두르고 궐문(闕門)을 지키게 하였으며,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선전관(宣傳官)에게 주어 입직한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병기(兵器)를 정돈하여 각소(各所)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고, 또 병조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도성문(都城門)과 성(城)을 지키게 하였다. 명하여 밀성군 이침(李琛)·하동군 정인지(鄭麟趾) 등 여러 종친과 재추를 부르고, 또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우참찬 윤필상(尹弼商)을 불러서 입시하게 하였다. 부(溥)가 아뢰기를, “7, 8일간을 격하여 남이가 신의 입직한 곳에 이르러 신에게 묻기를, ‘종친이 입직하는 것은 예전 예(例)대로 하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주상께서 나와 귀성군(龜城君)·하성군(河城君)이 졸곡(卒哭) 전까지 날을 번갈아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남이가, ‘낮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낮에는 상직(常直)하되 연고가 있으면 나간다.’고 하였더니, 남이가 말할 것이 있는 듯 머뭇머뭇하다가 나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형편을 엿본 것이다.” 하였다. 한계순·이복(李復)·신운(申雲)이 겸사복(兼司僕) 박지번(朴之蕃)·유정(柳) ·조한신(曹漢臣)과 위사(衛士)를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남이의 집에 가서 에워싸고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를 가지고 부르기를 심히 급하게 하였다. 남이가 일이 발각되었는지 의심하여 없다고 속였는데, 잠시 후에 남이가 칼을 차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담을 넘어서 나갔다. 군사들이 그 머리털을 꺼두르므로 남이가 칼을 뽑으려고 하자 군사들이 함께 잡아 묶고 첩기(妾妓) 탁문아(卓文兒)를 잡아 왔다. 삼경(三更)에 임금이 수강궁의 후원(後苑) 별전(別殿)에 나아가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부(溥)·영의정 준(浚)·하성군 정현조(鄭顯祖)·하동군 정인지(鄭麟趾)·봉원군 정창손(鄭昌孫)·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중추부 영사 심회(沈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좌참찬 김국광(金國光)·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우참찬 윤필상(尹弼商)·파산군 조득림(趙得琳)과 노사신(盧思愼)·강곤(康袞)·신승선(愼承善)·복(復)과 승지(承旨)·주서(注書)·겸사복(兼司僕)·선전관(宣傳官) 등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요사이 어떤 사람을 보고 어떤 일을 말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신정보(辛井保)를 보고 북방(北方)의 일을 의논하였고, 다른 말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문치빈(文致彬)을 며칟날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문치빈을 본 것이 며칠 되었습니다. 신이 시폐(時弊)를 진달하고자 하여 상소를 초하는데 문치빈으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였을 뿐이고 다른 말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제 오늘 중에 네가 어떤 사람을 보았느냐?” 하니, 남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망연(茫然)히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오늘 이지정(李之楨)의 집에 가서 서로 바둑을 두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북방에 일이 있으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을 것인데 누가 부장(部將)을 맡을 만한가?’ 하니, 이지정이 말하기를, ‘민서(閔敍)·김견수(金堅壽)·장효손(張孝孫)이 모두 겸인지용(兼人之勇, 많은 사람을 당해낼 만한 용기)이 있으나, 장효손은 외방에 있고 김견수는 이미 현용(顯用)되었고 또 외방에 있으니, 오직 민서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드디어 민서의 집에 가서 지난해 거산(居山)의 싸움을 서로 말하고 또 북방의 성식(聲息)을 말하니, 민서도 방수(防戍)할 요지를 말하고 인하여 성변(星變, 혜성이 나타난 일)을 말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성변이 이와 같으면 사람이 유리(流離)되는데 근심이 없겠는가?’ 하고 인하여 술을 마시고 나왔습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곁에 있는 책상에서 《강목(綱目)》을 가져다가 혜성이 나타난 한 구절(句節)만 보았을 뿐이고 다른 의논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재상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으나 실정을 다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유자광과 남이를 면질(面質)하도록 명하니, 유자광이 남이를 불러서 남이가 말한 것을 갖추 말하였다. 남이가 비로소 유자광이 와서 계달한 것을 알고 놀라, 머리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유자광이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무고(誣告)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忠義)한 선비로 평생에 악비(岳飛, 남송(南宋) 때의 무장으로 충의가 뛰어났음)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민서가 마침 순장(巡將)으로서 부름을 받고 왔는데, 임금이 민서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신의 집에 이르러 지난해 거산(居山)의 싸움을 말하고 또 북방의 성식(聲息)을 말하였는데, 신도 북방 장성(長城)의 이로움을 논하기를, ‘황보인(皇甫仁)이 성을 쌓을 당시에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혜택을 입는다. 옛사람 가운데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서산(西山)에 심어서 오랑캐[胡]를 방어한 이가 있으니, 지금도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성을 쌓지 아니한 곳에 심어서 야인(野人)의 충돌을 막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남이도 그 이해(利害)를 진술하였는데, 인하여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이와 같으니 간신(姦臣)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반드시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 ‘간신이 누구인가?’ 하니, 남이가, ‘상당군 한명회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하여 일찍 계달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남이가, ‘하는 것을 자세히 들은 뒤에 계달하겠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발설할 수 없다.’ 하고서 인하여 술을 마시고 갔는데, 신이 즉시 치계(馳啓)하고자 하였으나 자세히 듣지 못하였고, 또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 때가 급박하고 꾀함이 익숙하지 못해서 미처 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남이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과연 민서와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이르러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신은 그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한명회가 자리를 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이의 집에 가서 남이와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대변(對辨)하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남이가 꾸민 말이니 족히 분변할 것이 못된다. 경은 자리에 나아가라.” 하였다. 문치빈(文致彬)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남이가 상소의 초안(草案)을 신에게 주어 교정하게 하였는데, 초안은 지금 신의 집에 있고 다른 말을 들은 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지정(李之楨)에게 물었으나 이지정의 대답이 바르지 아니하므로, 곤장 30여 대를 때리자 다만 말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 ‘만약 올량합(兀良哈)을 치는데 나를 장수로 삼으면, 누구에게 위장(衛將)을 맡길 만하냐?’고 하기에 신이 민서·장효손을 들어 말하자 민서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탁문아(卓文兒)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요즈음 북방에 성식(聲息)이 있다고 말하고 사람을 시켜 갑옷을 수리하게 하고, 또 박자하(朴自河)·박자전(朴自田) 형제가 와서 활과 화살을 만들며, 남이는 항상 야행(夜行)의 금지를 범하고 출입하는데 물으면 꾸짖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일찍이 강 정승(康政丞)이 집에 왔는데 남이가 외청(外廳)에서 마주 대해 술을 마시었고, 또 선전관(宣傳官) 이계명(李繼命)이 교위(校尉) 5, 6인을 데리고 집에 왔다가 갔는데, 남이가 그 어미에게 고하기를, ‘첨지(僉知) 정숭로(鄭崇魯)가 이계명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이지정에게 묻기를, “네가 어려서부터 남이와 사귀어왔으니, 남이의 하는 것을 네가 모르지는 아니할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서 입번(入番)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니 남이가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상소하여 불법(佛法)과 병위(兵衛) 등의 일을 진달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또 남이가 일찍이 신에게서 《병요(兵要)》를 배웠으나, 남이의 꾀하는 바는 신이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또 곤장 30여 대를 때렸으나 불복하였다. 남이의 서삼촌[孽叔] 남유(南愈)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번 신이 남이의 집에 가니 김창손(金昌孫)·이중순(李仲淳)이란 자가 먼저 이르렀는데, 서로 바둑도 두고 작은 과녁에 활을 쏘았으며, 다른 것은 들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곤장 20대를 때려도 불복하였다. 또 남이에게 묻기를, “남유가 말하기를 네가 활쏘고 바둑을 두었다고 하는데, 네가 어찌하여 졸곡(卒哭) 전에 활을 쏘고 바둑을 두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무인(武人)이므로 활힘[弓力]이 장차 줄어질까 두려워하여 김창손(金昌孫)·박자하(朴自河)·이중순(李仲淳)의 무리들과 더불어 활을 쏘았고, 또 조영달(趙穎達)·강이경(姜利敬)과 더불어 활을 쏘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조의 영(靈)이 소소(昭昭)하게 빈전(殯殿)에 계시니, 너는 사실대로 말하라.” 하고, 드디어 경복궁으로 옮기겠다는 등의 말은 무엇을 이르는 것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신이 어찌 능히 주상을 경복궁으로 옮기게 하겠습니까?” 하므로,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그래도 불복하자 한명회가 아뢰기를, “먼저 남이의 집 노복(奴僕)을 국문하여 상시로 왕래하는 사람을 묻게 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곧 노비 5, 6명을 나치하여 일일이 물으니, 계집종 막가(莫加)가 대답하기를, “요사이 정승(政丞)이라 일컫는 이가 왔었습니다.” 하니, 한명회가 묻기를, “지금 정승이 많은데 네가 본 이는 누구냐?” 하니, 막가가 말하기를, “성명은 알지 못하고 검은 수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자, 강순(康純)이 앉아 있다가 자리를 피하며 말하기를, “신이 강 태감(姜太監)의 집을 사고자 하여 남이의 집을 지나면서 들어갔었습니다.” 하였다.
28.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8일(갑인) 3번째기사 공신의 호칭을 3등으로 나누어 정하고 남이의 어미를 환열시키다
전교하기를, “내가 책훈(策勳)하고자 하니, 공신(功臣)의 호칭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어서 계달하라.” 하니, 신숙주(申叔舟) 등이 의논하여 계달하기를, “1등은 수충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으로, 2등은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으로, 3등은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으로 하소서.” 하였다. 이조(吏曹)에 전지하여 참지(參知) 유자광(柳子光)·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환관(宦官) 신운(申雲)·우부승지 한계순(韓繼純)을 1등으로 삼고,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영사(領事) 심회(沈澮)·우의정 박원형(朴元亨)·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좌승지 이극증(李克增)·겸사복(兼司僕) 박지번(朴之蕃)을 2등으로 삼고,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동지사(同知事) 홍응(洪應)·신천군(信川君) 강곤(姜袞)·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병조 참판 신승선(愼承善)·도승지 권감(權瑊)·우승지 어세겸(魚世謙)·우부승지 윤계겸(尹繼謙)·동부승지 정효상(鄭孝常)·첨정(僉正) 권찬(權攢)·주서(注書) 조익정(趙益貞)·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서경생(徐敬生)·김효강(金孝江)·이존명(李存命)·유한(柳漢)을 3등으로 삼고, 그 포상(褒賞)하는 모든 일은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예에 의하게 하였다. 지사(知事) 한계희(韓繼禧)는 집이 성 밖에 있어서 성문을 닫음으로 인하여 들어오지 못하였다가 이날에 와서 알현(謁見)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고 3등 공신에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권찬(權攢)은 의술로써 세조에게 지우(知遇, 인격·학식을 알아서 후히 대우함)를 받아 은혜와 사랑이 보통과 달랐는데, 임금이 즉위하자 사랑과 대우가 더욱 융성하였다. 공신들이 아뢰기를, “신 등은 별로 공로가 없었는데 외람되게 은혜를 받으니 마음에 진실로 미안합니다.”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남이 등이 보성군(寶城君) 부자(父子)를 구실로 역모(逆謀)하였으니, 청컨대 이합(李㝓)과 이내(李徠)에게 죄를 가하여 인심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개(金漑)는 난신(亂臣) 조경치(曹敬治)의 장인인데 그 사위가 주살(誅殺)당하였으니, 김개는 벼슬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고신(告身)을 거두도록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天地間)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 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轘裂)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남이가 증(蒸, 상피 붙음)한 때문이다.
29. 예종 2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1월 7일(계해) 2번째기사 한계희·임원준·유자광·홍응·홍상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한계희(韓繼禧)를 서평군(西平君)으로, 임원준(任元濬)을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로, 유자광(柳子光)을 무령군(武靈君)으로, 홍응(洪應)을 겸 경연 지사(兼經筵知事) 춘추관 동지사(春秋館同知事)로, 홍상(洪常)을 당양군(唐陽君)으로, 안중경(安仲敬)을 원성군(原城君)으로, 이연(李衍)을 금산군(金山君)으로, 이말생(李末生)을 도평군(桃平君)으로, 이청(李倩)을 천읍군(川邑君)으로, 이선생(李善生)을 무림군(茂林君)으로, 이창(李昌)을 수성군(壽城君)으로 삼았다.
30. 예종 2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1월 9일(을축) 5번째기사 난신 남유·조숙·김효조 등의 집을 외명부와 환관·승지에게 내려 주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여, 난신(亂臣) 남유(南愈)의 집을 봉보 부인(奉保夫人) 김씨(金氏)에게, 조숙(趙淑)의 집을 상궁(尙宮) 홍씨(洪氏)에게, 김효조(金孝祖)의 집을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조영달(趙穎達)의 집을 조진(曹疹)에게, 최원(崔湲)의 집을 안중경(安仲敬)에게, 조경치(曹敬治)의 집을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에게, 김원현(金元賢)의 집을 승지(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박자하(朴自河)의 집을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에게, 홍형생(洪亨生)의 집을 환관(宦官) 유한(柳漢)에게, 유계량(柳季良)의 집을 김결(金潔)에게, 강이경(姜利敬)의 집을 판관(判官) 한환(韓懽)에게 내려 주었다.
31.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월 13일(무진) 1번째기사 난신의 처첩과 자녀를 공신에게 노비로 내려 주다
난신(亂臣) 강순(康純)의 아내 중비(仲非)와 민서(閔敍)의 첩(妾)의 딸 민말금(閔末今)을 유자광(柳子光)에게 내려 주고, 강순의 첩 월비(月非)와 변자의(卞自義)의 첩 딸 변소앙가(卞召央加)를 신숙주(申叔舟)에게 내려 주고, 남이(南怡)의 딸 남구을금(南求乙金)과 홍형생(洪亨生)의 첩 약비(若非)를 한명회(韓明澮)에게 내려 주고,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를 신운(申雲)에게 내려 주고, 강순의 첩 심방(心方)을 한계순(韓繼純)에게 내려 주고, 남이의 첩 이덕(李德)을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내려 주고, 민서의 첩 중비(仲非)를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에게 내려 주고, 노수동(盧守同)의 첩 호근장(好斤莊)을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내려 주고, 최원(崔瑗)의 아내 권비(權非)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내려 주고, 이중순(李仲淳)의 아내 금광(金光)을 심회(沈澮)에게 내려 주고, 변영수(卞英守)의 아내 석비(石非)를 박원형(朴元亨)에게 내려 주고, 〈변영수의〉 첩 칠월(七月)을 정현조(鄭顯祖)에게 내려 주고, 홍형생(洪亨生)의 아내 복비(卜非)를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에게 내려 주고, 남유(南愈)의 아내 근비(根非)를 이극증(李克增)에게 내려 주고, 문효량(文孝良)의 아내 덕이(德伊)를 박지번(朴之蕃)에게 내려 주고, 이철주(李鐵柱)의 아내 효도(孝道)를 정인지(鄭麟趾)에게 내려 주고, 조영달의 아내 중이가(仲伊加)를 정창손(鄭昌孫)에게 내려 주고, 조영달의 첩 자근덕(者斤德)을 조석문에게 내려 주고, 김창손(金昌孫)의 아내 금란(金蘭)을 한백륜(韓伯倫)에게 내려 주고, 조숙(趙淑)의 아내 동질이(同叱伊)를 한계희(韓繼禧)에게 내려 주고, 맹불생(孟佛生)의 아내 허비(許非)를 노사신(盧思愼)에게 내려 주고, 박자전(朴自田)의 첩 매읍가(每邑加)를 박중선(朴仲善)에게 내려 주고, 진자근지(陳者斤知)의 아내 마금(麻今)을 홍응(洪應)에게 내려 주고, 노경손(盧敬孫)의 아내 성구지(性求之)를 강곤(康袞)에게 내려 주고, 오치권(吳致權)의 아내 효비(孝非)를 조득림(趙得琳)에게 내려 주고, 김원현(金元賢)의 첩 백덕(白德)을 신승선(愼承善)에게 내려 주고, 조순종(趙順宗)의 아내 간아지(干阿之)를 권감(權瑊)에게 내려 주고, 조경치(趙敬治)의 아내 효양(孝養)을 어세겸(魚世謙)에게 내려 주고, 강이경(姜利敬)의 아내 말비(末非)를 윤계겸(尹繼謙)에게 내려 주고, 문치빈(文致彬)의 아내 은비(銀非)를 정효상(鄭孝常)에게 내려 주고, 고복로(高福老)의 첩 아지(阿只)를 안중경(安仲敬)에게 내려 주고, 문치빈의 첩 천년(千年)을 권찬(權攅)에게 내려 주고, 강순(康純)의 첩 딸 귀덕(貴德)을 조익정(趙益貞)에게 내려 주고, 강석손(康石孫)의 아내 흔비(欣非)를 서경생(徐敬生)에게 내려 주고, 조윤신(曹閏身)의 첩 의비(義非)를 유한(柳漢)에게 내려 주었다.
32.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7일(임진) 2번째기사 난신의 처첩과 가족을 종친과 대신에게 내려 주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와 장례원(掌隷院)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의 아비 문치빈(文致彬)의 첩(妾) 성비(性非)와 신정보(辛井保)의 아내 소사(召史)를 흥양군(興陽君) 신운(申雲)에게 내려 주고, 문치빈의 첩 눌가(訥加)를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내려 주고, 그 첩의 딸 문용비(文龍非)를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에게 내려 주고, 소사(召史)를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내려 주고, 강석손(康碩孫)의 첩 관음비(觀音非)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내려 주고, 강순(康純)의 첩 춘월(春月)을 청송군(靑松君) 심회(沈澮)에게 내려 주고, 그 아내 부귀(富貴)를 졸(卒)한 영의정(領議政) 박원형(朴元亨)에게 내려 주고, 조경치(曹敬治)의 계모(繼母) 종금(從今)을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에게 내려 주고, 민서(閔敍)의 첩의 딸 민성구지(閔性仇之)를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에게 내려 주고, 장순지(張順之)의 첩 용비(龍非)를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에게 내려 주고, 전실(全實)의 아내 권월(權月)을 죽산군(竹山君) 박지번(朴之蕃)에게 내려 주고, 강석손(康碩孫)의 첩 옥금(玉今)을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에게 내려 주고, 오치권(吳致權)의 딸 오비(吳非)를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에게 내려 주고, 오치권(吳致權)의 어미 복지(卜之)를 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에게 내려 주고, 그 누이 오음죽(吾音粥)을 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에게 내려 주고, 최계지(崔戒之)의 아내 경순(敬順)을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에게 내려 주고, 민서(閔敍)의 아내 석비(石非)를 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에게 내려 주고, 최계지(崔戒之)의 첩 금음덕(今音德)을 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에게 내려 주고, 변자의(卞自義)의 딸 변소사(卞召史)를 지사(知事) 홍응(洪應)에게 내려 주고, 장익지(張益之)의 아내 보덕(甫德)을 신천군(信川君) 강곤(康袞)에게 내려 주고, 민서(閔敍)의 딸 민중비(閔仲非)를 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에게 내려 주고, 장순지(張順之)의 아내 양비(陽非)를 병조 참판 신승선(愼承善)에게 내려 주고, 최계지(崔戒之)의 첩 유이(流伊)를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내려 주고, 장서(蔣西)의 아내 중금(仲今)을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에게 내려 주고, 김실(金實)의 아내 선장(善莊)을 좌부승지(左副承旨) 윤계겸(尹繼謙)에게 내려 주고, 고복로(高福老)의 아내 보현(甫賢)을 동부승지(同副承旨) 정효상(鄭孝常)에게 내려 주고, 문효량(文孝良)의 아내 은비(銀非)를 원성군(原城君) 안중경(安仲敬)에게 내려 주고, 그 첩 고읍상(古邑尙)을 행 호군(行護軍) 권찬(權攢)에게 내려 주고, 장서(蔣西)의 첩 연비(延非)를 상전(尙傳)에게 내려 주고, 서경생(徐敬生)의 딸 서손강(徐巽岡)을 상금효강(尙金孝江)에게 내려 주고, 변자의(卞自義)의 아내 종생(從生)을 합천군(陜川君) 이존명(李存命)에게 내려 주고, 장서(蔣西)의 첩 개덕(介德)을 성산군(星山君) 유한(柳漢)에게 내려 주라.” 하였다.
33.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20일(을사) 1번째기사 환관 이존명이 죄를 범하고도 말이 불손하므로 의금부에 가두게 하다
처음에 환관(宦官) 이존명(李存命)이 죄를 범하여,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추문(推問)하게 하니, 이존명이 안중경과 더불어 임금 앞에서 높은 소리로 서로 힐난(詰難)하기를, “나는 남에게 벼슬을 준 일도 없고, 남에게서 뇌물을 받은 것도 없지만, 너는 있다.” 하며, 말이 매우 불순(不順)하였으므로, 명하여 이존명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에 명하여 이를 물으니, 이존명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웃 사람 이백련(李百連)이 나를 그의 집으로 청하고는 이르기를, ‘어떤 중[僧]이 지난해에는 약재(藥材)를 얻어서 바쳤고, 지금은 백옥(白玉)을 얻어서 바치려고 하는데, 대납(代納)하여 상(賞)을 받기를 원하니, 모름지기 보모(保母, 왕세자를 보육(保育)하는 여자)에게 청해서 성사(成事)하여 달라. 전날에 어느 중[僧]이 청옥(靑玉)을 바치고 상을 받을 때에 안중경이 그 일을 출납(出納)하며 대납하도록 허락하였으므로 그 대납한 사람들이 안중경에게 면포(綿布) 50필(匹)을 주어 이에 보답하였으니, 그대도 이를 힘써 달라.’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청(請)이 통할 리가 만무(萬無)하다.’ 하고, 마침내 이를 물리쳤었는데, 안중경도 제 말로 은병(銀甁)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곧 이백련을 잡아다가 무릎맞춤을 시키니, 대답하기를, “내가 이존명이 우리 집 문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청해서, 술을 대접해 먹이고 묻기를, ‘무릇 기이한 물건을 바친 자에게 상을 주는 때에 대납(代納)을 허락한 적이 있는지 반드시 알아보고 가르쳐 달라.’고 하였고, 안중경이 뇌물을 받은 일은 내가 진실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니, 명하여 이존명을 도로 가두게 하였다.
34. 예종 5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5월 20일(계묘) 1번째기사 임금이 경회루에 나아가 익대 공신에게 교서를 내리고, 술을 내려 주다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익대 공신(翊戴功臣)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고, 이어서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돌아와 환관(宦官) 전균(田畇)으로 하여금 궁온(宮醞)을 가지고 가서 이들을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또 자을산군(者乙山君)【금상(今上)의 휘(諱)이다.】에게 명하여 이화주(梨花酒) 1담(壜)을 가지고 가서 내려 주게 하였다. (생략)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원성군(原城君) 안중경(安仲敬)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오직 신자(臣子)의 대의(大義)요, 공(功)을 정표(旌表)하고 상(賞)을 행(行)하는 것은 곧 국가의 항규(恒規)이니, 떳떳한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높이노라. 생각건대, 그대는 조행(操行)이 단정(端正)하고 근신(謹愼)하며 처사(處事)를 안상(安詳)하게 하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궁중(宮中)에 거(居)하면서 받들어 모시니, 소심(小心)으로 공경하여 숙야(夙夜)에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사랑을 더하시고 항상 좌우에 두었고, 밝은 명(命)을 출납(出納)하니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근신하였다. 그대의 충근(忠勤)은 진실로 가상(嘉尙)하게 여길 만하다. 내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집의 불행을 만나 쓸쓸히 상(喪) 중에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와 강순(康純) 등이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떼지어 모아 신기(神器)를 위태하게 하기를 도모하였다. 화기(禍機)가 발(發)하기에 미쳐서 흉모(兇謀)가 스스로 드러났다. 그대가 이때에 나의 좌우에 있다가, 겨우 변(變)의 고(告)함을 듣자마자, 충성을 분격하여 나의 주획(籌畫)을 받들어 출입(出入)하고 응대(應對)하였도다. 비록 일이 급거(急據)히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있었을지라도 능히 기미를 잃지 아니하고, 이윽고 흉악한 도당을 잡아서 모두 부질(鈇鑕)에 복주(伏誅)하였다. 천지의 큰 원수를 숙청하여 신인(神人)의 공분(共憤)을 통쾌하게 하였다. 이는 비록 조종(祖宗)들의 묵묵히 도와주신 힘이요, 종척(宗戚) 대신(大臣)들의 협조하여 도와준 공(功)이지만, 또한 오직 그대들 내시(內侍)의 신하들이 분주히 막아서 보위(保衛)한 근로(勤勞)에 힘입은 것이로다. 그대의 노고를 생각하니, 그대의 공훈을 기록하여 포상(褒賞)하기를 성하게 하는 것이 어찌 사사로운 은혜라 하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안중경(安仲敬)의 후손(後孫)’이라 하고,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공(功)을 솥[鼎]에 새기고 종(鍾)에 새기니, 그대는 길이 금일의 뜻을 굳게 할지어다. 태산(泰山)이 숫돌이 되고 황하(黃河)가 띠가 되도록 내가 감히 이때의 마음을 잊겠는가?” 하였다. (생략)
35. 예종 6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7월 19일(경자) 1번째기사 밤에 승전 환관 안중경을 보내어 위사를 점고하게 하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밤에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위사(衛士)를 점고하게 하였더니, 북소 위장(北所衛將) 신주(辛鑄)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안중경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군사를 점고하는 것이라고 두 번이나 말하였는데도, 신주가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部將) 매보남(梅輔男)은 이르기를, ‘신주가 취하여 누워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병으로 누워 있다.’ 하다가 군사 5백여 인을 점고하기를 거의 마쳐서야 신주가 나왔다고 하니, 공경하고 삼가는 뜻이 매우 없으므로, 내가 친히 국문하겠다.” 하고, 즉시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정사를 보기를 마친 후, 선전관으로 하여금 신주와 매보남을 잡아 오게 하여 묻기를, “어젯밤 군사를 점고할 때에 어찌 나오지 않았는가?” 하니, 신주가 대답하기를, “별달리 위장을 부르는 명(命)이 없었으며, 또 장수(將帥)는 가볍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신이 즉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는 안중경이 표신(標信)을 가진 것을 알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알았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어떤 연고로 나오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살핀 후에야 나갔기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하였다. 매보남에게 묻기를, “너는 처음에 신주가 취하였다고 하고 나서 또 병들었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주는 취하지도 병들지도 않았습니다만, 안중경이 노할까 두려워서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전관으로 하여금 신주와 매보남을 끌어 내다가 도총부(都摠府)에 붙여서 승지 한계순(韓繼純)으로 하여금 가서 국문하게 하였다.
36.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8월 12일(계해) 1번째기사 신숙주·한명회·이극배·한계순·안중경 등에게 명하여 전중생을 국문하도록 하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영의정 한명회(韓明澮)·병조 판서 이극배(李克培)·좌부승지 한계순(韓繼純)·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전중생(全仲生)을 국문(鞫問)하게 하고, 한계순에게 말하기를, “가서 국문하되 형세를 보아서 사람을 시켜 아뢰면 내가 처분하겠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한척(韓陟)을 시켜 와서 아뢰기를, “전중생에게 묻기를, ‘네가 이예경(李禮敬)에게 너는 장차 신하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어제 또 우연한 가문(家門)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떠한 말이냐?’ 하고, 장(杖) 7대를 때리니, 전중생이 말하기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조정에서 정사를 맡고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오히려 그 실정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를 정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내야 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의금부에 전지(傳旨)하기를, “전중생은 능지 처사(凌遲處死)하여 3인 동안 효수(梟首)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되 반역(反逆)에 의하여 논하라.” 하고,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이준(李浚)을 함길도(咸吉道) 등의 일에 부리어 특별히 어여삐 돌보셨다. 이제 전중생의 말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저희끼리 말한 자가 있을 것이다. 준(浚)의 간사인(幹事人, 밑에서 일을 맡아 보는 사람) 등을 승정원에 잡아다가 물으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준(浚)이 만약 범한 것이 있다면 어찌 세조께서 늘 어여삐 돌보셨다 하여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左議政) 홍윤성(洪允成) 및 승지(承旨) 등이 아뢰기를, “준은 비록 지친(至親)이고 공(功)도 있기는 하나, 만약 공사에 연루되었다면 마땅히 국문해야 하며, 준도 변명한 뒤에야 안심할 것이니, 청컨대 준을 국문하소서.” 하였다. 한참 있다가 신숙주·한명회 등이 와서 아뢰기를, “전중생이 매를 견디고 실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준이 비록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반인(伴人)들을 시켜서 폐해를 끼치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으니, 청컨대 죄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다시 아뢰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준(浚)의 반인 김현(金鉉)·김지(金祉), 종[奴] 시동(始同)·귀치(龜致) 및 공사에 연루된 팔계군(八溪君) 이정(李瀞)의 가동(家僮)을 잡아오니, 홍윤성 및 승지 등이 묻기를, “너희들이 전중생과 어떠한 모의(謀議)를 하였느냐?” 하였으나, 김현 등이 굳이 숨기며 말하기를, “전중생은 준(浚)의 반당(伴倘)이 아니므로, 그의 얼굴을 모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같은 무리인 반인을 모를 수가 있느냐?” 하고, 곧 명하여 김현·김지 및 정수(鄭壽)에게 각각 장(杖) 30대를 때리게 하였으나, 역시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37.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8월 26일(정축) 4번째기사 남소문 밖에서 겁탈한 도둑 이막산 등을 장을 때려 신문하게 하다
승정원에 명하여 남소문 밖에서 겁탈한 도둑 이막산(李莫山)·김선달(金先達)·모지리(毛知里)·이가질동(李加叱同)·백근금음(白斤今音)·정안생(丁安生) 등을 장을 때려 신문하게 하였다. 한 사람이 복초(服招)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이막산 등의 공사(供辭)를 갖추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밤이라도 국문(鞫問)을 끝내라.” 하였다. 그때 이미 폐문(閉門)하였으나, 형조 정랑(刑曹正郞) 고태익(高台翼)·좌랑(佐郞) 최숙정(崔淑精) 등은 도둑들을 데리고 영추문(迎秋門)을 나가 이미 전옥(典獄)에 가둔 뒤였다. 당직(當直)한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숭원(李崇元) 등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승지들이 대명(待命)하지 않고 마음대로 나갔다 하여 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을 시켜서 견책(譴責)하게 하고,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영추문의 수문장(守門將) 이중선(李仲善)을 잡아오게 하여 때 늦게 폐문한 것을 문책하고 의금부(義禁府)에 가두도록 명하였으며, 또 선전관에게 명하여 고태익·최숙정 등을 잡아다가 내금위 청(內禁衛廳)에 가두게 하였다. 이윽고 환자(宦者) 김결(金潔)에게 명하여 권감 등에게 사온(賜醞)하여 위로하게 하고, 영추문을 열고 도둑들을 들이도록 명하고 입직(入直)한 병조·도총부(都摠府)의 낭관(郞官) 등을 시켜 서소(西所)·남소(南所)·북소(北所)에 나누어 가두게 하고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단속하여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경성(京城) 가까이에서 이러한 겁탈이 있었다 하여, 선전관과 형조 낭청(刑曹郞廳)에게 명하여 의심할 만한 자를 수색하여 잡으니, 유사(攸司)에 맡길 겨를도 없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승지들이 국문이 끝나기 전에 해가 졌으므로 형조 낭청에게 맡겨서 하옥(下獄)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위임한 까닭은 아침까지라도 끝내 따져 내려고 한 것인데, 승지들이 하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도승지 권감에게 사제(私第)로 돌아가라고 명하자 권감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그것을 듣고서 집에 돌아가지 말라고 명하고, 이어서 고태익 등을 풀어 주었다.
38.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4일(갑오) 4번째기사 환관 원성군 안중경에게 난신의 종 1구를 내리다
환관(宦官) 원성군(原城君) 안중경(安仲敬)에게 난신(亂臣)의 종[奴] 1구(口)를 내렸다.
39. 예종 8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0월 13일(계해) 1번째기사 갑사 김계동이 갑사 이말중 등의 난언을 아뢰다
갑사(甲士) 김계동(金繼童)이 갑사 이말중(李末中) 등의 난언(亂言)을 아뢰었다. 임금이 환관(宦官)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김계동의 말한 바를 쓰게 하고, 선전관(宣傳官) 영선(永善)과 수리(守利)로 하여금 김계동을 후원(後苑)에 압직(押直)1252) 하게 하였으며, 안중경이 쓴 것을 승정원(承政院)에 보이고, 이말중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청송군(靑松君) 심회(沈澮)·영의정(領議政)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상락군(上洛君) 김질(金礩)·좌의정(左議政) 윤자운(尹子雲)·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 등을 명소(命召)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 허계(許誡)와 의금부 낭관(義禁府郞官)으로 하여금 이말중과 더불어 서로 말한 이양보(李陽補)·장소옥(張紹玉)·고맹달(高孟達) 등을 나치(拿致)하고, 또 선전관에게 명하여 궁성(宮城)의 4문(門)을 파수(把守)하게 하였다. 임금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니, 모든 재상들과 승지 등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김계동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갑사 이말중·이양보·장소옥·고맹달 등과 더불어 이달 초7일에 창덕궁(昌德宮) 내병조(內兵曹)의 옆문에서 숙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밤 이말중이 다른 곳에서부터 들어와 신 등과 더불어 이야기를 할 때에 까치가 후원에서 울었습니다. 이말중이 듣고 말하기를, ‘괴이하구나! 까치가 밤에 울면 주인이 장차 가는[去] 것이다.’ 하므로, 이양보가 이르기를, ‘이 곳은 빈 대궐인데, 주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하니 이말중이 이르기를, ‘이 집의 주인은 상위(上位)이니, 너는 다만 두고만 보아라. 주상이 장차 위태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양보가 이르기를, ‘어째서 그렇다고 하는가?’ 하니 이말중이 이르기를, ‘전왕(前王)1253) 이 여러 대 동안 서로 전하는 과전(科田)을 고치고, 또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정병(正兵)의 군적(軍籍)에 올렸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어 향년 51세에 훙(薨)하였다. 이제 주상이 어찌 오래가겠느냐?’ 하므로, 이양보가 이르기를, ‘그러면 누가 장차 대기(大器)1254) 를 차지할까? 하니, 이말중이 이르기를, ’어찌 사람이 없겠느냐? 영순군(永順君)이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영선과 수리가 아뢰기를, “김계동이 신과 더불어 말한 바는 아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계동에게 물으니, 김계동이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않다가 강제로 물은 연후에야 말하였는데, 그 말이 부도(不道)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양보에게 물으니 이양보가 굳이 숨기므로 곤장을 40여 대나 때려 신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다가 김계동과 면질(面質)시키니 이에 자복하였다. 또 장소옥과 고맹달에게 물었으나, 모두 사실대로 아뢰지 않다가 곤장을 때려 신문하니 이에 말을 하였다. 이양보·장소옥·고맹달·김계동과 관음노(觀音老)를 대궐 안에 가두고, 의금부 도사(都事) 조쟁(趙崝)을 보내어 양주(楊州)에 가서 이말중을 체포하게 하였다.
40. 예종 8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무신) 4번째기사 진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하다
원상(院相)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영의정(領議政)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좌의정(左議政) 윤자운(尹子雲)·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 등이 승정원(承政院)에 모이니, 사알(司謁)이 고하기를, “승지(承旨) 등은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시오.” 하므로, 승지와 원상 등이 모두 사정전의 문내(門內)로 나아갔다. 진시(辰時)에 임금이 자미당(紫薇堂)에서 훙(薨)하였다.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이 대궐 안으로부터 곡읍(哭泣)하며 나와서 모든 재상에게 훙(薨)하였음을 고하니, 모든 재상들도 실성(失聲)하며 통곡하였다. 안중경이 태비(太妃)의 명을 선포(宣布)하여 이르기를,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와서 봉시(奉視)하라.” 하였다. 겸 판서 신숙주가 도승지 권감과 함께 자미당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입직한 도총관(都摠管) 노사신(盧思愼)이 또한 대궐문 안으로 들어오니, 모든 재상들이 노사신과 함께 의논하여, 위사(衛士)로 하여금 궁성의 모든 문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신숙주가 권감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큰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하여야 한다.” 하니, 권감이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를 인하여 태비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주상자(主喪者)를 정하여서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소서. 이것은 큰 일이므로 중사(中使)를 시켜 전달(轉達)할 수 없으니, 청컨대 친히 아뢰게 하소서.” 하고는 정현조가 들어가 친히 계달하고, 왕복하면서 출납(出納)하기를 서너 번 하자, 이윽고 태비가 강녕전(康寧殿) 동북쪽 편방(便房)에 나와서 원상과 도승지를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권감 등이 들어오고, 한계희·임원준 등이 또한 자미당으로부터 들어오니, 태비가 슬피 울었다. 조금 지나서 신숙주가 아뢰기를,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하니, 태비가 이르기를,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하였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 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 정현조와 권감을 시켜 여러 재상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신 등이 감히 의의(議擬)할 바가 아니니,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 하므로, 정현조에게 명하여 전교하기를, “이제 원자(元子, 제안 대군(齊安大君))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 덕종(德宗)의 장남. 성종(成宗)의 친형.))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홀로 자을산군(者乙山君, 성종(成宗))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太祖)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슬피 울며 목이 메어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신숙주가 아뢰기를, “국가의 액운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종묘와 사직을 염려하여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사군(嗣君)을 잘 조호(調護)하여 비기(丕基, 제왕(帝王)의 기업(基業))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외간(外間)은 시청(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뒷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 하고, 드디어 태비에게 하직하고 사정전 뒤 서쪽 뜰로 나갔다. 신숙주가 최항과 더불어 의논하여 교서(敎書)를 초(草)하였다. 신숙주 등이 의논하여 장차 한명회와 권감 등을 시켜 위사(衛士) 20여 인을 거느리고 자을산군 본저(本邸)에 가서 맞아오려고 하였는데, 미처 계달하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예궐하였다가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병방 승지(兵房承旨) 한계순(韓繼純)을 보내어서 환관 3인, 겸사복(兼司僕) 10인, 오장 차비(烏杖差備)를 거느리고 자을산군의 부인을 본저에서 맞아 들이게 하소서.” 하였다. 신숙주 등이 태비의 청정(聽政)을 계청하였다. 태비가 전교하기를, “나는 이미 박복하여 일이 이와 같으니, 심신을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양하려고 한다. 또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粹嬪, 성종의 생모))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 하니, 신숙주 등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고사(故事)가 있고, 또 온 나라 신민의 여망(輿望)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태비가 두번 세번 사양하므로, 원상과 승지 등이 굳이 청하고 인하여 글을 올려서 이르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가 성상의 슬픔을 만나 재앙과 근심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는데, 또 이제 대행 대왕(大行大王)도 갑자기 만기(萬機)를 버리시었고, 계사(繼嗣)가 유충(幼沖)하여 온나라의 신민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니, 자성 왕대비 전하(慈聖王大妃殿下)께서는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 전례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여정(與情)에 따라 무릇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함께 듣고 재단(裁斷)하다가, 사군(嗣君)이 능히 스스로 총람(摠攬)할 때를 기다려서 정사를 돌려주시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41. 성종 1권, 즉위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무신) 1번째기사 예종이 돌아가시니 대비의 명에 의해 경복궁에서 즉위하다
왕이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이날 예종(睿宗)께서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하니,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영의정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曺錫文)·좌의정 윤자운(尹子雲)·우의정 김국광(金國光)이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모였다. 진시(辰時)에 예종(睿宗)이 훙서(薨逝)하니, 대비(大妃)가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나가서 신숙주 및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조금 후에 신숙주 등이 밖으로 나가서 여러 원상(院相)4) 및 승지 이극증(李克增)·윤계겸(尹繼謙)·한계순(韓繼純)·정효상(鄭孝常)·이숭원(李崇元)과 더불어 의논하여 병조(兵曹)로 하여금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대궐의 안팎 문과 마땅히 숙위(宿衛)해야 할 곳을 근엄(謹嚴)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대궐에 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官) 노사신(盧思愼)도 또한 부름을 받고서 이르렀다. 신숙주가 권감(權瑊)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주(喪主)를 마땅히 서둘러 품달(稟達)해서 결정해야 될 것이오.” 하고는,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대비(大妃)에게 아뢰게 하기를, “마땅히 상주(喪主)부터 먼저 정하여야 할 것인데, 큰 일을 중사(中使)에게 전하여 아뢰게 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직접 품달(稟達)하게 하소서.” 하므로, 정현조(鄭顯祖)가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는데, 교지(敎旨)를 받들어 갔다 왔다 한 것이 너더댓 번 되었다. 한참 있다가 대비(大妃)가 강녕전(康寧殿) 동쪽 편실(便室)에 나와서 신숙주 등과 권감(權瑊)을 불러서 들어오게 하였다. 대비가 얼마간 슬피 울고 나서 정현조(鄭顯祖)와 권감에게 명령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主喪)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신숙주 등이 말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신(臣)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敎旨)를 듣기 원합니다.” 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생략)
42. 성종 2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1월 13일(임진) 5번째기사 한계미 등이 권맹희가 최세호의 사건에 관련됨을 아뢰니, 권맹희를 국문하게 하다
좌찬성(左贊成) 한계미(韓繼美)·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우승지(右承旨) 한계순(韓繼純)이 함께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서 한계미가 아뢰기를, “지난 12월 초 5일에 신(臣)이 도총부(都摠府)에 있으니 권맹희(權孟禧)가 신의 종 약로(若老)의 집에 도착하여 나를 맞이해 서로 보자고 하므로, 신이 마침 출직(出直)해 있어서 가서 그를 보았는데, 강자평(姜子平)·조간(曺幹)·조지경(曺智敬)도 또한 와서 신을 보았습니다. 그 나와서 간 선후(先後)는 신이 지금 잊어버렸습니다만, 권맹희가 말하기를, ‘국가의 상사(喪事)가 겹쳐 일어나니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내 상위(上位)의 연갑(年甲)과 월산군(月山君)의 연갑(年甲)을 물었으므로, 신(臣)이 대답하기를, ‘월산군(月山君)은 지금 13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권맹희가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형을 버리고 아우를 세우는가?’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대비(大妃)의 하려는 생각이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월산군은 어릴 때 중병(重病)이 있었는데 지금도 때때로 병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 임금은 아이 때부터 세조(世祖)께서 이를 기특(奇特)하게 여겨서 일찍이 일컫기를, 「이 아이는 마침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고 하셨으니, 생각건대, 이런 일로써 세우게 된 것일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은 또 말하기를, ‘이같은 때에 내가 이조 겸 판서(吏曹兼判書)가 되었으니 정사(政事)를 어떻게 하겠는가? 한 가지 일이라도 혹시 잘못되면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상위(上位)의 연장(年長)이 하성군(河城君)·영순군(永順君)·덕원군(德源君)과 같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고 하니, 권맹희가 말하기를, ‘귀성군(龜城君)도 또한 물망(物望)이 있는 사람이다.’고 하였으며, 권맹희가 또 말하기를, ‘최세호(崔世豪)는 포폄(褒貶)이 중등(中等)에 있으니, 산관(散官)105) 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권맹희는 말하기를, ‘최세호가 세조조(世祖朝)에 있어서는 임영 대군(臨瀛大君) 부인의 친족으로서 특지(特旨)로 관직에 임명된 사람이니 힘써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마땅히 상고하여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한계미(韓繼美)가 아뢴 것을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홍윤성(洪允成)·윤자운(尹子雲)에게 말하게 하기를, “한계미의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권맹희(權孟禧)를 국문(鞫問)하라.” 하니 신숙주 등이 아뢰기를, “신(臣) 등이 추국(推鞫)한 지가 몇 날이 되었지마는 그 실정(實情)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지금 그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실정을 알아내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 등이 지금 아뢸 일이 있으니 친히 아뢰도록 해 주소서.” 하니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임금과 함께 보경당(寶敬堂)으로 나가서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홍윤성(洪允成)·윤자운(尹子雲)·한계미(韓繼美)·한계희(韓繼禧) 및 도승지(都承旨) 이극증(李克增) 등을 불러 보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이준(李浚)이 세조조(世祖朝)에서도 나인(內人)과 서로 통했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도, 세조께서 특별히 권애(眷愛)하여 감싸 주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또 간사한 소인의 무리들은 준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린 공로가 있으므로 세조께서 사랑해 대우했다는 이유를 가리켜 말하면서 차마 아뢰지 못하고 있으니, 준이 비록 작은 공로가 있지마는 돌볼 것이 되겠습니까? 원컨대 선왕(先王) 때의 죄를 다스려서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외방(外方)에 유배(流配)시키소서. 이것이 사실은 보전(保全)시키는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여러 소인들이 스스로 나쁜 말을 만들었을 뿐이다. 준이 어떻게 나인(內人)과 서로 통한 일을 알 수가 있겠는가? 세조께서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논했으니 지금 소급해 논죄(論罪)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땅히 다시 이를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신숙주가 또 아뢰기를, “지금 주상(主上)께서 어리시므로,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서무(庶務)를 친히 결단하시나, 궁중(宮中)에 깊숙이 거처하시면서 내관(內官)을 시켜 명령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주상(主上)과 함께 정사(政事)를 들어 재단(裁斷)하소서. 수렴 청사(垂簾聽事)는 예로부터 있었으니, 또 이와 같이 한다면 주상의 문견(聞見)도 날로 넓어지고 청단(聽斷)도 또한 익숙해질 것입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말하기를,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니, 정사를 청단(聽斷)하기가 또한 어렵겠다.” 하였다. 신숙주가 아뢰기를, “승지(承旨)가 문자를 해석하여 아뢴다면 청단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청단하겠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물러가서 다시 준(浚)의 죄를 처벌하기를 청하여 두번 세번에 이르렀다. 홍윤성이 또 세종조(世宗朝)의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불법(不法)한 일을 아뢰고는 또 준이 궁인(宮人)을 몰래 간통한 죄를 청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아니했다.
43. 성종 2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1월 14일(계사) 4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윤자에게 사목을 보내 이준 일행을 안치시키는 일에 대해 지시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윤자(尹慈)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동봉(同封)한 사목(事目)을 자세히 보고 시행하라. 1. 이준(李浚)이 처첩(妻妾)과 비자(婢子) 5인을 거느리고 가는데, 처첩에게는 세 끼[三時]의 요미(料米)를 주고, 비자(婢子)에게는 두 끼[兩時]의 요미(料米)를 주도록 하되, 술과 찬물(饌物)을 아울러 주도록 하라. 1. 식물(食物)은 관찰사(觀察使)가 매월마다 한 번씩 적당히 갖추어 주도록 하라. 1. 기우(寄寓)할 집은 주위에 담을 쌓고 녹각(鹿角, 대나무를 세워 사슴 뿔처럼 만들어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까지 설치하여 출입(出入)을 방지하라. 1. 감고(監考) 2인과 군사 10인을 정하여 날마다 윤번(輪番)으로 수호(守護)하도록 하라. 1. 있는 곳의 고을 수령(守令)은 3일에 한번씩 면견(面見)하고 검찰(檢察)하되 그와 더불어 말은 하지 말아라.”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이준(李浚)을 독촉하여 급박하게 서울을 나가게 해서는 안되니, 다만 그로 하여금 천천히 행장을 차리도록 하고, 해가 저물면 압송(押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내시(內侍)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선온(宣醞, 임금이 내려주는 술)을 가지고 가서 그 집에서 접대하도록 하고, 또 내시(內侍) 장부(張富)에게 명하여 식물(食物)과 약재(藥材)를 가지고 가서 보호해 가도록 하였다.
44. 성종 51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1월 25일(을해) 11번째기사 선농제 아헌관 이정, 종헌관 신숙주 등에게 각각 말 1필을 내려 주다
사복시(司僕寺)에 전지하기를, “선농제 아헌관(先農祭亞獻官)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종헌관(終獻官)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 안장 갖춘 말) 1필(匹)을, 진폐 작주관(進幣爵酒官) 정효상(鄭孝常), 천조관(薦俎官) 이극증(李克增), 예의사(禮儀使) 이승소(李承召), 친경시 좌·우 위장(親耕時左右衛將) 노사신(盧思愼)·임원준(任元濬), 판서(判書) 이극배(李克培), 대간(臺諫) 이서장(李恕長)·정괄(鄭佸), 도승지(都承旨) 신정(申瀞)에게 각각 말[馬] 1필(匹)을, 전폐 작주관(奠幣爵酒官) 심한(沈澣), 단상 집례(壇上執禮) 안관후(安寬厚), 승지(承旨) 유지(柳輊)·유권(柳睠)·이극기(李克基)·김영견(金永堅)·현석규(玄碩圭), 전사관(典祀官) 박계성(朴繼姓), 단하 집례(壇下執禮) 김승경(金升卿), 대축(大祝) 성현(成俔)·유순(柳洵), 봉조관(捧俎官) 정윤각(鄭允恪), 재랑(齋郞) 윤사하(尹師夏), 협률랑(協律郞) 고태정(高台鼎), 찬자(贊者) 이계신(李繼信), 김신몽(金信蒙), 좌통례(左通禮) 박숙진(朴叔蓁), 우통례(右通禮) 신윤저(申允底), 알자(謁者) 이중석(李仲石)·윤사상(尹師商), 친경시 시경 내시(親耕時侍耕內侍) 안중경(安仲敬)·김결(金潔), 사복시 정(司僕寺正) 정숙(鄭俶),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 최경지(崔敬止), 봉청상관(奉靑箱官) 이병규(李丙奎), 알자(謁者) 남칭(南偁), 전악 령(典樂令) 황효성(黃孝誠), 기읍령(畿邑令) 홍현정(洪顯廷)·김원신(金元臣)·권중린(權仲麟)·김사원(金嗣元), 협시(夾侍) 정석희(鄭錫禧)·강흡(姜洽), 정의(正衣) 황효의(黃孝儀)·예인호(艾仁浩),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극돈(李克墩), 정랑(正郞) 김수손(金首孫)에게 각각 아마(兒馬) 1필(匹)을 내려 주라.” 하였다.
45. 성종 61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11월 15일(경신) 7번째기사 공문 속에 잘못 들어간 광성군 김겸광의 편지를 우부승지 임사홍이 감추다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이 대내(大內)로부터 조그마한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교를 선시(宣示)하기를, ‘이것이 무슨 편지인가?’ 하였는데, 이는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충훈부 낭청(忠勳府郞廳)에게 그 아들을 체아직(遞兒職)에 임명할 것을 청한 편지였었다. 그런데 도사(都事) 이의(李儀)가 임금에게 아뢸 공문 속에 잘못 두었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웃으며 감추어 버렸다.
46. 성종 63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1월 13일(무오) 5번째기사 대왕 대비가 정무에서 물러나고자 하니 임금과 원상 등이 만류하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상전(尙傳, 내시부(內侍府)의 정4품의 벼슬. 왕명(王命)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음) 안중경(安仲敬)을 시켜 언문(諺文) 편지 1장을 가지고 원상(院相)에게 전하게 했는데, 그 언문(諺文)의 뜻은 이러하였다. “내가 본디 지식이 없는데도 여러 대신(大臣)들이 굳이 청하고 주상(主上)께서 나이가 어리신 이유로 마지못하여 힘써 같이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했던 것인데, 지금은 주상(主上)께서 나이가 장성(長成)하고 학문도 성취되어 모든 정무(政務)를 재결(裁決)하여 모두 그 적당함을 얻게 되었다. 더구나 밖에는 정승(政丞)과 육조(六曹)와 대간(臺諫)이 있으니 내가 일찍이 사사(辭謝)하려고 하였으나 뜻밖에 중궁(中宮)이 훙서(薨逝)하여 궁중(宮中)의 일이 대부분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까닭으로 시일을 미루어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여러 사람의 뜻은 어찌 ‘몸이 대비(大妃)가 되었으니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고 말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다만 세조(世祖)와 주상(主上)에게 욕되게 함을 두려워한 것이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 속에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일도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內戚)과 외척(外戚))로 인하여 한 것은 없었는데도, 지금 익명서(匿名書)에 말한 것은 오로지 내 몸을 지칭(指稱)하였으니, 최개지(崔蓋地)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실로 편안하지 못하다. 평일에는 비록 아주 작은 공사(公事)일지라도 내가 보고난 후에 주상(主上)께서 또 자세히 살펴보았으니, 그 사이에 어찌 사정(私情)을 쓸 이치가 있겠는가? 최개지 등은 반드시 내가 부인(婦人)인 이유로써 형제(兄弟)의 말을 함부로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까닭으로 감히 지척(指斥)하지는 못하고 시비(侍婢)를 핑계해서 말하고 있지만은 마침내 그 실정(實情)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부모(父母)가 일찍이 별세(別世)하셨으므로 내가 끊임없이 형제(兄弟)를 보고 싶어 하였었다. 그러나 서로 만나보는 즈음에는 옛날 친정집에 있을 때의 희롱한 일을 이야기한 데 불과할 뿐이니, 비록 사사로 청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주상(主上)에게 알릴 수가 있겠는가?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형벌은 〈끊어진 것을〉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면서 매양 법사(法司)에서 처형(處刑)하기를 청할 때, 만약 일이 의사(疑似, 비슷하여 분각하기가 어려움)에 관계되면 바로 형률(刑律)에 비추어 적용하도록 했으니, 이 일은 바로 이른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우연한 일치로 남의 혐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세조(世祖)께서는 내가 있는 까닭으로써 척속(戚屬)들의 소원을 묻고는 자주 작록(爵祿)을 주었으므로 내가 매양 그치기를 청하였는데, 하물며 이와 같은 때에 감히 척리(戚里)에게 사정(私情)을 쓰겠는가? 윤사흔(尹士昕)이 의정(議政)이 된 것도 또한 주상(主上)의 명령인 것이다. 더구나 해당 관청[該曹]에서 도량과 재간에 따라 이를 임용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한결같이 척리(戚里)라 하여 이를 물리친다면 또한 통하지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나의 처사(處事)는 반드시 그릇된 까닭으로 일마다 나를 지척(指斥)하더라도 드러내어 변백(辨白)할 수가 없다. 무릇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만나게 되면 나에게 인유(因由)된 것이 두려워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한두 날이 아니었다. 연전(年前)에는 시절(時節)이 더욱 불순(不順)하였기 때문에 내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바이다. 이에 사사(辭謝)하는 사정을 감추어 경(卿) 등에게 알린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의지(懿旨, 대왕 대비의 교지)가 이와 같은데, 내가 이를 청해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정승(政丞) 등이 그것을 청해보라.” 하였다. 원상(院相) 한명회(韓明澮)와 김국광(金國光)이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오늘날의 태평한 정치는 태상(太上, 대왕 대비)의 보도(保導)한 힘이었습니다. 더구나 수렴 청정(垂簾聽政)하는 것은 스스로 고사(故事)가 있는데, 또 무엇을 혐의스럽게 여기겠습니까? 더욱이 소인(小人)의 말을 어찌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태상(太上)이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동방(東方)의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억만(億萬) 창생(蒼生)에 어찌되겠습니까?” 하였다. 안중경(安仲敬)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전교(傳敎)하기를, “경(卿) 등에게 가부(可否)를 취(取)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卿) 등으로 하여금 이를 알도록 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조금 후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의 월랑(月廊)에 나가서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나는 자질이 본디부터 민첩하지 못하고 학문도 또한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일을 의지(懿旨)5874) 에 우러러 아뢰었던 것은 경(卿) 등의 아는 바인데, 지금 대비(大妃)께서 나에게 정사(政事)를 돌리려고 하므로, 내가 이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면, 원상(院相) 등이 또한 이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신다. 경(卿) 등은 곧 나의 시종(侍從)하는 사람이니 나의 말로써 다시 청해보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지(柳輊)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선정전(宣政殿) 뒤의 내문(內門)에 나아가서 나인(內人)을 인하여 아뢰기를, “제가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정무(政務)를 오로지 대비의 지획(指劃)을 받들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으니, 모름지기 원상(院相)의 청을 따르소서.” 하였다.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주상(主上)께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내가 국정(國政)에 참결(參決)했지마는, 지금은 임금의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무슨 일인들 능히 혼자 처리할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유지에게 명하여 다시 청하기를, “제가 만약 학문이 이미 성취되어 큰 일을 결단할 만하다면 여러 신하들이 당연히 저에게 정사를 돌려주기를 청할 것인데, 지금은 원상(院相) 등이 저에게 정사를 돌려주지 말도록 청하고 있으니, 원컨대 이를 따르소서.” 하였다.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주상(主上)께서 이미 내 뜻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지식이 적고 우매한 자질로써 국정(國政)에 참여해 청단(聽斷)했으니 사필(史筆)을 더럽힐까 두렵다. 지금부터는 임금이 혼자 결단하고 늙은 부인(婦人)에게는 편안히 잠자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은 잠시 물러가 있으라. 내가 장차 면대(面對)해 청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함께 나갔는데, 조금 후에 다시 원상(院相)과 승지를 선정전(宣政殿)에 불러 와서 임금이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동쪽을 향하여 앉아서 이르기를, “내가 간절히 이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원상(院相)이 마땅히 이를 다시 생각해 보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신(臣)이 이미 의정부(議政府)와 충훈부(忠勳府)의 〈대신들을〉 불렀으니, 장차 같은 말로써 청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 한명회) 이 이미 왔으니 어찌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고는, 이내 안중경(安仲敬)에게 명하여, 원상(院相)의 말을 듣고서 청하도록 하였다. 한명회가 청하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세종(世宗)께서 승하(昇遐)하시고 문종(文宗)께서 일찍 별세(別世)하셔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왕위에 오르니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므로 세조(世祖)께서 정난(靖難)하였지마는 오히려 성삼문(成三問)의 변고(變故)가 있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 이르러서는 남이(南怡)의 난(亂)이 있었었는데, 주상(主上)께서 즉위(卽位)한 이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진 정치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태상(太上)께서 보도(保導)하신 힘이오니, 청컨대 정사를 돌려주지 마소소.” 하였다.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내가 이 마음을 가진 지가 오래되었는데, 때마침 중궁(中宮)이 불행(不幸)하게 된 때문에 머뭇거리면서 이제까지 이르게 되었다. 더구나 외간(外間)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을 들으니, 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경(卿) 등의 말은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을 다시 청하여 보라.” 하니, 한명회가 다시 청하기를, “더구나 지금은 중궁(中宮)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찌 마땅히 정사를 사피(辭避)하겠습니까? 만약 지금 정사를 사피하신다면 이는 동방(東方)의 창생(蒼生)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신(臣) 등이 상시(常時)로 대궐에 나아와서 안심하고 술을 마시게 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장차는 안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국광(金國光)도 또한 아뢰기를, “걸왕(桀王)의 개가 요제(堯帝)를 보고도 짖게 되니, 소인(小人)의 말은 셀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안중경(安仲敬)이 의지(懿旨)를 선시(宣示)하기를, “오로지 소인(小人)의 말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 마음을 가진 지가 오래되었다. 더욱이 밖에서는 삼공(三公, 삼정승)이 정무(政務)를 보좌하고 백사(百司)가 직무(職務)를 분담(分擔)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쓸데없이 있겠는가? 또 부왕(父王)께서 비록 있더라도 이미 왕위(王位)를 전하셨다면 어찌 다시 국사(國事)를 참여해 들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유지(柳輊)가 나아가 아뢰기를, “의지(懿旨)에서 고집(固執)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명령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니다.” 하였다. 유지가 다시 이르기를, “의지(懿旨)에는 이르기를, ‘사필(史筆)을 더럽힐까 두렵다.’고 했으니, 비록 정사를 청단(聽斷)함은 꺼리지마는, 그러나 질의(質疑)할 만한 일과 궁중(宮中)의 모든 일을 어찌 참여해 듣지 않겠습니까? 대비(大妃)의 명령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지난 후에 말하기를, “어찌하겠는가? 정승(政丞) 등이 바로잡고 보좌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고는, 이내 유지(柳輊)를 불러 말하기를, “백사(百司)들이 내가 나이 어리다 하여 해체(解體, 사람들이 이탈하여 배반함)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런 이유로써 포고(布告)하라.” 하니, 유지가 아뢰기를, “의지(懿旨)와 함께 중앙과 지방에 알아듣도록 타이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47. 성종 65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3월 1일(갑진) 5번째기사 한명회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돌려주다
원성군(原城君)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한명회(韓明澮)의 집에 선온(宣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는 술)을 하사하였다. 한명회가 와서 사은(謝恩)하고, 이어서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신은 본래 포의지사(布衣之士,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또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다행히 세조 대왕(世祖大王)을 만나고, 나라의 몹시 어려운 때를 당하여 권간(權奸)들의 역란(逆亂)을 꾸미는 음모(陰謀)에 분격해서 그들을 제거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키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겨우 조그마한 수고를 나타내어 드디어 대난(大難, 계유 정난)을 평정하고, 외람되게 여산 대하(礪山帶河,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誓辭)에,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한 데에서 나온 말. 대려(帶礪).)의 맹세에 의탁하여 예묘(睿廟, 예종)를 섬기기에 이르렀고, 금일(今日)에 이르도록 옛 신하를 버리지 아니하시어 신에게 벼슬길에 오르도록 허락하여 백료(百僚)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노둔(駑鈍)하지만 나라만 생각할 뿐이요 집은 잊고 있으며, 알면 실행하지 아니함이 없을 정도로 여러 왕조(王朝)의 지우(知遇)하신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여 몸이 죽은 다음이라야 그만두는 것이 신의 뜻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정사(政事)를 되돌리시고 전하(殿下)께서 사양하시어 청(請)하시던 때를 만나서 모두 천고(千古)에 없었던 훌륭한 덕(德)이고 아름다운 일이었으나, 신은 그 사이에서 회천(回天, 임금의 뜻을 돌리게 함. 여기에서는 대왕 대비의 뜻을 돌리는 것을 말함)의 힘이 없고 도리어 불측(不測)한 죄를 지게 되었습니다. 대신(大臣)과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탄핵하여 마지 않으니, 신은 스스로 용납(容納)할 여지가 없어서 한 번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고 곧 어찰(御札)을 내리시기를, ‘한 가지 마음이 분명한 것을 신기(神祗)가 아는 바이라.’고 하시니, 신은 글을 받들고 감읍(感泣)하여 목놓아 울기를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한 가지 마음을 가진 것을 어찌 오로지 신기(神祗)만이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를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자광(柳子光)이 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부도(不道)하고 무례(無禮)하다고 지목하여 죄와 허물을 얽어서 씌우니, 이것이 신의 골수(骨髓)에 통렬히 들어와서 스스로 변명(辨明)하여 마지 아니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유자광이 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 무례(無禮)하다고 지목한 것은 우선 그대로 두고 논(論)하지 아니하겠으나, 그가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조고(趙高, 진나라의 환관)의 지록 위마(指鹿爲馬)한 간사함과 양기(梁冀, 후한 사람) 의 불궤(不軌)한 음모와 곽광(霍光, 전한 사람)의 권력을 전횡(專橫)한 화(禍)를 신에게 비유하였는데, 이 몇 사람들은 모두 인신(人臣)으로서 난적(亂賊)한 행위가 심하여, 천하에서 나라가 흥망(興亡)할 때에는 입에 올릴 수가 없고 귀에 들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신은 ‘독이 깨질까 하여 쥐를 못친다.[投鼠忌器]’라는 말을 들었는데, 신은 비유하면 쥐가 되고, 전하께서는 비유하면 독이 되는 셈입니다. 유자광이 비어(飛語)를 가지고 신을 모함하려고 하고 전하께 꺼리는 바가 없으니, 옳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나이가 이미 쇠모(衰耗)하고, 또 발을 절뚝거리는 병에 걸려서 여러 번 직사(職事)를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고 한갓 시위 소찬(尸位素餐, 재덕이나 공로가 없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갓 자리만 차지하고 녹(祿)만 받아먹음을 비유)의 기롱(譏弄)만을 다하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조그만한 도움도 드리지 못하여 국지 척천(跼地蹐天, 땅이 꺼질까 발끝으로 디디고 하늘에 부딪힐까 몸을 구부리는 것)하고 매양 걱정하는 마음을 품고 부족한 것을 두려워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의 두려워하여 몸둘 바가 없는 처지를 불쌍히 여겨 신의 무거운 직책을 해임하여 보내어 전야(田野)에 돌아가서 종시(終始)의 은혜를 보전하게 하여 주신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그 글을 돌려주고 이어서 전교(傳敎)하기를, “경(卿)은 의심하지 말라. 내가 어찌 정승(政丞)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일전에도 여러 번 사직(辭職)하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다시 이와 같이 하는가? 만약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지 아니하고 굳이 사피(辭避)하고자 한다면 잘못이다.” 하였다. 한명회가 아뢰기를, “성상의 은혜가 망극(罔極)합니다. 그러나 신이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에 있으면서 이와 같이 탄핵을 당하였으니, 비록 능히 스스로 죽지는 못할망정 무슨 면목(面目)으로 사람들을 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유자광의 잘못은 비단 나 한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이니, 그것을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48. 성종 67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5월 13일(을묘) 2번째기사 구종직과 노재상에게 주육을 하사하다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구종직(丘從直)에게 주육(酒肉)을 하사(下賜)하고 이어 노재상(老宰相)에게도 두루 하사하였다.
49. 성종 73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11월 7일(정미) 3번째기사 사복시에 전교하여 상전 안중경과 내의원 송흠에게 각각 말 1필씩을 내려주게 하다
사복시(司僕寺)에 전교하기를, “상전(尙傳) 안중경(安仲敬)과 내의원(內醫員) 송흠(宋欽)에게 각각 말[馬] 1필씩을 내려 주게 하라.” 하였다.
50. 성종 78권, 8년(1477 정유 / 명 성화(成化) 13년) 3월 30일(정유) 3번째기사 대신들이 중궁을 빈으로 강등함이 부당하다고 아뢰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오늘 빈이 출궁(出宮)할 모든 일을 갖추어 놓고 기다리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빈(嬪)은 호(號)가 없을 수 없으니 속히 의논해서 아뢰어라.” 하였다. 오장 교자(烏杖轎子)는 이미 건양문(建陽門) 밖에 갖추어져 있었는데, 좌승지(左承旨) 이극기(李克基)와 우승지(右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창의(唱議)하여 모든 승지와 함께 차비문(差備門, 편전의 앞문) 밖에 나아가 문중선(文仲善)을 맞아서 계달하기를, “신 등이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면대(面對)하여 말하려고 하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니, 이극기(李克基)의 무리가 들어와서 알현(謁見)하였다. 이극기가 말하기를, “신 등은 재상으로 하여금 회의하게 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오늘 또 회의를 하니 신 등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들으니, 중궁을 강봉(降封)할 이름을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하는데, 신 등은 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강봉하여 빈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종묘에 고해야 할 것인데 무슨 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죄목을 만들어 종묘에 고한다면 또 어찌 반드시 빈으로 책봉해야 합니까? 또 그를 처음 봉할 때 이미 중국에 명을 받았으니 지금 폐위한다면 또한 마땅히 중국에 주문(奏聞)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차 무슨 말로 주문하겠습니까? 이미 종묘에 고하면 또한 반드시 사방(四方)에 고해야 하는데 또 무슨 말로 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절목(節目)은 신 등으로서는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각 생각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니,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지금 중궁(中宮)의 한 바는 진실로 죄가 있고 주상이 처리하신 것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 등은 생각하기를 주상(主上)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9년에 궁곤(宮壼, 내전) 에 자정(疵政, 잘못된 일)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옛부터 없었던 훌륭한 일입니다. 지금 중궁(中宮)이 비록 작은 실수가 있었다 하나 이미 원자를 두어 나라의 근본이 정해졌는데 갑자기 폐위한다 하니, 신 등은 비록 과오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또한 근래에 두 번이나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았는데 또 폐위하려고 하니, 후일 왕비에 계승할 자는 또한 마땅히 중국에 고명(誥命)을 청해야 할 것인데, 구실을 만들어 아뢰자면 그 언사가 불미스러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궐전(闕典, 결여된 의식)을 거행하여 그 미행(美行)을 칭송(稱頌)하고 두 번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자 뭇 신하가 칭송할 뿐 아니라 사방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갑자기 허물과 악함을 반포하여 사방에 반시(頒示)하면 듣는 자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가까이 지척에 모시고 있어도 궁중의 일은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데, 사방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이것은 뭇 소인들이 한 것으로 어물어물하여 딱 자르지 못한 것은 있지만, 건(乾)과 곤(坤)은 한몸으로 허물이 있으면 일식이나 월식처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데, 한 번 그 허물이 퍼지면 어떻게 가리겠습니까? 만일 그 죄가 있다면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궁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빈(嬪)은 1품의 명부(命婦)로서 내정(內政)을 참여하여 듣는 것인데, 빈으로 책봉하여 궁중(宮中)에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 원자가 있으니,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빌건대, 늦추어 세 번 생각하소서.”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홍귀달(洪貴達)이 말하기를, “이극기(李克基) 등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 이 일에 네 가지 옳지 못함이 있으니, 종묘(宗廟)에 고하는 것이 옳지 못하고, 중국에 고하는 것이 옳지 못하고, 사방에 반포하여 유시하는 것이 옳지 못하고, 원자가 있는데 동요(動搖)하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명(誥命)을 청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렵지 않으니, 옛날 제왕(帝王)도 이같은 자가 있었다.” 하였다. 홍귀달이 말하기를, “일이 꼭 잘한 것이 아닌데도 옛날에 있었다고 해서 행하고, 일이 꼭 잘못이 아닌 데도 옛날에 없던 일이라고 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입니다. 요는 때에 따라 제재(制裁)하여 적당하게 할 뿐입니다.” 하였다. 임사홍이 말하기를, “일에는 권(權, 때에 따라 알맞게 함)과 경(經, 일정한 규칙을 지킴)이 있는데, 어찌 한결같이 경(經)만 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폐치(廢置)하는 뜻으로 조정에 고하는 것은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우승지 손순효(孫舜孝)가 말하기를, “골육(骨肉) 사이에서 생긴 일이므로 참고 숨겨서 발설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사랑하고 미워함으로서 폐치(廢置)한 자가 있었으나 지금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중궁은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한 나라에 모범이 되고, 궁위(宮闈)에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겠는가?” 하였다.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비록 진실로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외간의 아첨하는 소인들이 한 짓인데, 강경하게 처단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나 이는 작은 허물이며, 지금 원자(元子)가 있어서 국본(國本)이 지극히 큽니다. 그러나 신 등은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차고 있는 주머니 속에 독약을 감추었으니, 누가 넣어 두었기에 스스로 알지 못하겠는가? 이것뿐만 아니라, 하는 일이 많은 실수가 있으나 모두 한집안 일이라 다 말하기 어렵다. 어찌 이같은 사람이 한 나라의 모의(母儀)가 되겠는가?” 하니,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여러 소인들이 한 것을 실지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 등은 죄가 없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만일 대강(大綱)을 논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지극히 중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방양서(方禳書)」를 얻어 보고 의심스러워서 그 상자를 조사하려고 하니, 덮어 감추었는데, 헤쳐 보자 독약을 감추었던 주머니가 있었으니,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 하였다.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뭇 소인들이 한 짓인데, 아마 혹시 알지 못할 수도 있을 듯하며, 또 비록 알고 있다 하더라도 관련되어 미치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못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 등은 죄가 없다고 이른 것이 아니라 대체(大體)로서 아뢴 것뿐입니다. 지금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라서 금지 옥엽(金枝玉葉)이 반드시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자(元子)가 어진 덕이 있으면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뒤에 비록 아들을 두더라도 원자야 어떻게 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사홍이 말하기를, “옛부터 나라의 근본이 강하고 약한 것은 모후(母后)의 경중(輕重)에 관계되니, 모후가 폐위된다면 원자는 능히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강등하여 빈(嬪)으로 삼으면 그 원자가 장성함에 미쳐 비록 다시 위호(位號)를 바로잡으려 한다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이같으나 뒤에는 반드시 뉘우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마치 태갑(太甲)이 동궁(桐宮)에 옮긴 것같이 별궁에 거처하여 천선 개과(遷善改過)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임사홍이 말하기를, “중궁(中宮)의 춘추가 매우 젊으므로 지금 비록 작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뒤에 반드시 고쳐 행할 것인데, 지금 강등하여 빈으로 삼으면 뒤에 착한 행실이 있어서 위(位)를 회복하려고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존호(尊號)를 버리지 말고 별궁에 살게 해서 반성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이 있으면 정위(正位)로 회복하는 것이 무방하고, 만일 허물을 뉘우치지 않으면 그대로 종신하게 하는 것도 또한 옳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은 능히 허물을 뉘우치는 자가 적다. 그의 마음이 어찌 참으로 나를 해치려 했겠는가만은, 그 마음쓰는 것을 논한다면 허물이 적지 않다. 그러니 그러한 자로서 남의 위에 있게 할 수는 없다. 어찌 자기 몸이 바르지 않고 능히 그 밑에 사람을 제어할 자가 있겠는가?” 하니,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일을 미처 행사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미처 행사하지 아니했으나 만일 그 일을 행해서 죄없는 사람을 해쳤으면 이는 작은 것이 아닌데, 어찌 일이 작다고 해서 소홀히 하겠는가? 지금 너그러이 용서했다가 뒤에 혹 큰 데에 이르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임사홍이 말하기를, “작은 것은 삼가해야 한다는 것은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하나, 이것은 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왕(文王)의 후비(后妃) 이후로부터 부인이 투기하지 않는 자가 적습니다.” 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이 말하기를,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니면 누가 능히 다 착하겠습니까? 투기는 부인(婦人)의 상정입니다. 청컨대 대강(大綱)을 생각하셔서 적은 허물을 용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정승(政丞)들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하였다. 임사홍이 말하기를, “정승들의 의논도 이와 같지 않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혹은 중관(中官)이 그 말을 잊기도 하고 혹은 성상의 마음이 굳었기 때문에 위엄이 두려워서 모두 진달(陳達)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를 그르다고 하는가?” 하였다. 임사홍 등이 말하기를, “전하(殿下)를 그르다고 이른 것이 아니라, 신 등의 의논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며 임사홍 등이 논의하기를 마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경들과는 다르니 다시 전날 모였던 모든 재상들을 불러서 그 하나로 정해진 의논을 취하여 아뢰어라.” 하니, 이극기(李克基) 등이 나아가 곧 정인지(鄭麟趾)·한명회(韓明澮)·김국광(金國光) 등의 이름을 써서 아뢰기를, “정인지 등은 전일의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이극배(李克培)도 대신(大臣)인데, 다만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가 아니라고 해서 오지 않았으니, 청컨대 아울러 오라고 부르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좋다.” 하였다. 모든 재상들이 이미 모두 모이자 이극기(李克基) 등이 자세히 말하니, 정창손(鄭昌孫) 등이 함께 의논하기를, “어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오히려 폐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주상의 뜻이 이미 정해져서 감히 다시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자, 이에 모든 재상들이 모두 폐위할 수 없다고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해지니, 정창손 등이 안중경(安仲敬)을 보고, 아뢰기를, “신 등의 의논은 이미 정해져서 장차 계달(啓達)하려고 하는데 중관(中官)이 다 계달하지 못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승지(承旨)로 하여금 친히 아뢰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니, 임사홍(任士洪)이 뭇사람들의 의논을 가지고 들어가서 아뢰기를, “정창손(鄭昌孫)의 말한 대로 신도 또한 폐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상의 뜻이 굳어졌기 때문에 감히 굳이 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중궁이 비록 실덕(失德)했다 하나, 종묘나 사직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다만 투기에서 나온 것뿐입니다. 투기라는 것은 부인의 상정인데 하물며 원자(元子)가 있으니 하루아침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같은 일은 마침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원자를 중하게 여겨 폐하지 마소서.” 하였고, 이승소(李承召)는 말하기를, “한(漢)나라 광무(光武)가 곽후(郭后)를 폐하고 음씨(陰氏)를 세웠는데, 곽후의 아들 강(彊)이 태자(太子)가 되어 뜻이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번국(藩國, 변방의 나라)을 방비(防備)할 것을 원하니, 광무제는 마침내 음후(陰后)의 아들 장(莊)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또 당(唐)나라 이필(李泌)이 대종(代宗)에게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궁(宮)에 돌아가서 이 뜻을 드러내지 마소서. 좌우(左右)에서 들으면 장차 사왕(嗣王)에게 공을 세우려 하여 태자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중궁(中宮)이 강봉(降封)되어 빈이 된다면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려서 능히 세자(世子)를 보호할 수가 없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였고, 강희맹(姜希孟)은 말하기를, “사자(嗣子)의 안위(安危)는 모후(母后)의 경중에 매어 있는데, 옛부터 제왕(帝王)이나 우리 선왕(先王)이 사자(嗣子)를 정하지 못하여 국가가 동요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 있었으니, 지금 폐한다면 이것은 원자를 흔드는 것입니다.” 하였고, 노사신(盧思愼)은 말하기를, “얼마 전에 고명(誥命)을 받아 봉(封)하여 중궁으로 삼고 갑자기 그의 실덕(失德)을 사방에 포양(布揚)한다면 이는 규문(閨門, 안방)의 은미(隱微)한 일을 외인(外人)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또 원자(元子)가 태어나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정해졌는데, 그 장성하여 어른이 된 뒤에 이러한 일을 얻어듣는다면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모든 재상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임사홍(任士洪)이 또 아뢰기를,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문종(文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김빈(金嬪)이 조그마한 과실이 있어서 세종(世宗)께서 명하여 쫓아내게 하셨는데, 그 뒤에 후회하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잘못 처리했구나!」 하고 종신토록 말씀하셨다.’ 합니다. 김씨는 빈(嬪)에만 봉해졌을 뿐이고 사자(嗣子)도 없었는데, 세종(世宗)은 오히려 크게 뉘우치셨습니다. 지금 중궁은 정위(正位)에 있고 또한 원자가 있으니, 이런 데에도 폐해야 하겠습니까? 신이 이러한 것으로써 내관(內官)에게 말했는데 주상께 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며 임사홍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원하건대, 다시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추(宰樞)들은 나를 그르다 하는가? 지금 이미 다 모였으면 내 친히 그 의논을 들으리라.” 하고, 곧 명하여 불러 들였다. 모두 들어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회의(會議)하기를 명령하여 일이 이미 정해진 줄 알고 있었는데, 다시 이론(異論)이 있기 때문에 경(卿) 등을 번거롭게 오게 했다.”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승소(李承召)·강희맹(姜希孟)·노사신(盧思愼) 등이 아뢴 말은 한결같이 전에 말한 것과 같았다. 정인지가 말하기를, “약물(藥物)과 「방양서(方禳書)」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입니까?” 하였고, 허종(許琮)은 탑전(榻前)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비록 약물(藥物)이 있었으나 독(毒)의 해를 입은 자가 없었으니, 진실로 용서해 줄 바입니다. 또 일이 골육(骨肉) 사이에서 나온 것인데, 발설한다면 문호(門戶)가 온전하지 못하고, 발설하지 않는다면 조치할 방도가 없으므로, 은인(隱忍, 겉으로 발설하지 않고 견디어 참음)하고 발설하지 않았다가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만일 일을 만들어 낸 뜻이 중궁(中宮)으로부터 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뭇 소인들만 베어 없애 다시 선양(宣揚)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강희맹이 말하기를, “무릇 일은 동기는 아주 작으면서도 발동하는 것은 지극히 큽니다. 지금 원자(元子)의 위태로운 발단은 동하였으니, 신 등은 몹시 민망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부터 나라에 근본이 흔들리고서 어지럽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고, 심회(沈澮)는 말하기를, “죄는 작고 일은 크니, 청컨대 다른 날의 큰 일을 생각하여 오늘의 적은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하였고, 이승소는 말하기를, “생각함이 천리 밖에 있지 아니하면 근심은 궤석(几席) 위에 있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생각하셔서 이같이 하지 마소서.” 하며,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임사홍은 말하기를, “무슨 일이나 마땅히 멀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오늘 잘못 판단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어찌하여 원자는 보전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도 후일에 종사(宗社)의 근심은 헤아리지 못하는가? 지금 중궁(中宮)이 작은 일에도 이러한데 만약 한가지 일이 마음에 합당하지 않음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지 않겠는가?” 하자 모두 말하기를, “중궁의 춘추가 아직 적으므로 오늘의 일은 잘못된 데서 나온 것이니, 원컨대, 다시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상전(太上殿, 대왕대비, 정희왕후)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후환이 없게 하라.’고 하시었으니, 내가 장차 품해 보리라.” 하였다. 뭇 신하들이 연영문(延英門) 밖에 나아가 명령을 기다리니 안중경(安仲敬)이 나가서 전지(傳旨)를 선시(宣示)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경(卿) 등이 말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동요하지 말 것이다.” 하니, 뭇 신하들이 삼전(三殿)에 하례하였다.
51. 연산 9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10월 11일(경신) 1번째기사 장령 이자건이 안중경·우윤공 등의 일을 논하니, 권위를 내세워 허락하지 않다
장령 이자건(李自健)이 안중경(安仲敬)·우윤공(禹允功)·한금음정의 일을 논하니, 전교하기를, “내관(內官)에게 말을 주는 일이 적기는 하지만, 반드시 정원을 경유해야 한다면 이것은 권세가 위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말이 어린애의 말과 다름이 없으니, 내가 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근래 대간이 아뢰는 것을 내가 반드시 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대들의 말이 이런 것이다. 윤탄(尹坦) 등의 일은, 어찌 대간의 말이라고 하여 문득 죄 없는 사람을 체직시킬 것이랴? 우윤공의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 한금음정은 종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매, 자건이 다시 아뢰기를, “상교에 이르기를 ‘내관이 만일 정사에 간여하여 그 족속에 대한 청이 있다면 반드시 중법에 처하더라도 무엇이 애석하랴.’ 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환관이 그 간사함을 부리려하면 반드시 먼저 시험하여 보니, 저 엄용선(嚴用善)·중경(仲敬)이 이렇게 한 까닭은 대개 전하의 뜻을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요(堯)·순(舜) 같은 성인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지만, 중간 가는 임금으로서 어둡지 않은 자라면 무릇 환관[宦寺]의 하는 짓을 또한 반드시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일은 정사에 간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전교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말을 실수할 뻔하였다.” 하고, 또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관이 정치에 간여하였다면 중법에 처하더라도 무엇이 애석하랴.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헌부에서 이렇게 버티니, 내가 이것을 애매하다고 본다.” 하였다. 승지 송질(宋軼)이 아뢰기를, “내관은 좌우에 가까이 모시니 모든 일을 뜻대로 쉽사리 아뢰게 되면 그 조짐이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만일 무방하다고 하신다면, 장차는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대간이 굳이 다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52. 연산 12권, 2년(1496 병진 / 명 홍치(弘治) 9년) 2월 3일(신해) 3번째기사 한훈이 김효강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다
정언 한훈(韓訓)이 아뢰기를, “신이 말미를 받아 외지에 있으면서 듣자오니, 유점사·낙산사에 소금 공급하는 일과 김효강이 함부로 아뢴 일로 대간이 여러 달을 두고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하옵니다. 지난번에 안중경(安仲敬)이 역시 사복시(司僕寺) 관원의 일 때문에 함부로 아뢰었으므로 신들이 죄주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쫓지 않으셨는데, 지금 효강의 직계(直啓)는 오로지 중경(仲敬)을 죄주지 아니한 까닭에서 온 것입니다. 이는 실로 위망(危亡)이 직면한 일이오니, 그 일은 빨리 대간의 말을 들으시어 효강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므로 일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대 역시 벼슬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역시 나와 같을 터인데, 어찌 말이 이와 같이 번거로운가.” 하매, 한훈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한 내시만을 사랑하고 위망의 화를 생각지 않으시니 신은 매우 민망하옵니다. 백성을 괴롭혀서 소금을 고아 승도(僧徒)들에게 공급하고, 내시가 함부로 아뢰어 꺼림이 없으니, 이것이 모두 위망에 직면한 일들이라, 이런 일이 하나만 있어도 족히 위망을 부를 수 있는데, 하물며 두 가지를 다 아뢰웠음에리까. 신이 벼슬한 날짜는 비록 오래지 않사오나 우매한 생각으로는, 이 일은 대간이 끝내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전하께서도 또한 듣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찌하여 위망이 당장에 온다고 말하는가?” 하매, 한훈이 서계(書啓)하기를, “전하께서 승도(僧徒)에게 공급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 하시니, 그 조짐이 장차 양 무제(梁武帝)가 사신(捨身)하는 그 지경에 이르실 것이요, 내시가 함부로 일을 아뢰되 정원이 간여하지 못하니, 그 조짐이 장차 조고(趙高)가 교조(矯詔, 조칙(詔勅)을 거짓으로 꾸밈)하는 경우에 이를 것이니, 나랏 일을 하는 데는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망하지 않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전하께 이 두 가지 실책이 계심에리까. 신의 생각으로는 위망이 당장에 온다는 말이 과한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옛적부터 이르기를, ‘길(吉)한 것은 말하고 흉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하였으니, 단지 내시가 함부로 아뢰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만 말하면 될 터인데, 반드시 위망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매, 한훈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만약 도리에 벗어난다면 신이 비록 국운이 연장된다고 찬양한들 어찌 능히 길할 것이며,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만약 실지로 옳다면 신이 비록 위망이 당장에 온다고 할지라도 어찌 흉하오리까. 옛말에 이르기를, ‘망한다 망한다 해야 포상(苞桑)에 매게 된다.’하였으니, 지금 효강이 함부로 아뢴 일은 실로 위망이 당장에 오는 징조이오라 신이 논계(論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대간이 합사하여 여러 번 논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53. 연산 22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3월 16일(무오) 2번째기사 대간이 공신의 적장에게 가자한 일로 상소한 일에 대해 아뢰다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어제 상서하여 여러 가지를 논하였는데 아무런 결정이 없으시니,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반복하여 보았지만 상소에 논한 것은 결코 따르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 등이 공신의 적장(嫡長)에 가자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 날 궐문 앞에 엎드려 거의 수십 번을 말했는데도 전하께서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고 하교하시기를, ‘공신이 없으면 사직(社稷)도 없다.’ 하시니,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하옵니다. 공신이 사직에 관계 있음이야 전하께서 하교하지 않으시더라도 신 등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공이 있고도 어진 자가 있으며, 공이 있고도 간악한 자가 있으며, 공이 있고도 탐람한 자가 있으며, 공이 있고도 천한 자가 있습니다. 공이 있고 어진 자라면 높은 관질(官秩)을 더한다 해도 누가 불가하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간악한 자·탐람한 자·천한 자인데도 모두 큰 은혜를 베푸신다면 신 등은 이른바 사직에 관계있다는 것이 나중에는 도리어 사직의 근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나라를 창업하고, 집을 계승하는 데에 소인을 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소인을 창업할 때 쓰는 것이 불가하다면 더구나 수성(守成)할 때에는 쓸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인은 반드시 그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막으니, 서리를 밟는 경계[《주역》 곤(坤) 초육(初六)의 말]는 얼음이 굳어질 것을 두려워함이요, 여자를 취하는 경계[《주역》 몽(蒙)괘 육삼(六三)의 말]는 장성해질 것을 두려워함이요, 송아지 뿔에 막대로 가로 대[《주역》 대축(大畜)의 육사(六四)의 말]는 것은 억세질 것을 예방함이요, 금니(金柅, 수레바퀴를 멈추는 나무)로 매어두[《주역》 구(坵)괘 초육(初六)의 말]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춤입니다. 싹트지 않는 소인도 뱁새[桃蟲]처럼 적을 때에 방지하는데, 하물며 형적이 드러나서 번득이며 나르[拌飛, 《시경》의 소비(小毖)장에서 나온 말인데, 도충은 뱁새(鷦鰓)로 작은 새를 의미하고, 반비는 번득이며 나르는 모양으로 큰 새를 의미함. 옛말에 뱁새가 화해서 독수리[鵰]가 된다는 말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소인의 화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끝내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뜻임]는 것이겠습니까. 임사홍(任士洪)의 교만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음험 잔혹하여 물건을 해치는 것은 소인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그가 처음 벼슬길에 나올 때에 큰 거짓이 정직한 것처럼 보이니, 성종의 성명하심으로도 우선 쓸 만한가를 시험하여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위가 점점 높아질수록 그 간악함이 더욱 노련하여 권세를 잡고 농락하며 조정사를 탁란(濁亂)하므로 성종께서, 그 나라 그르칠 조짐을 아시고 물리쳐 멀리하였으되, 서반(西班)에 두어 녹을 잃지 않게 한 것은 그가 공신의 후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숭조(鄭崇祖)는 탐하고 흐려 상 없을 뿐 아니라, 농단(壠斷, 옛날 어떤 천부(賤夫)가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 시장(市場)을 살펴보고 시리(市利)를 독점하였다는 고사)의 천부(賤夫)이고 도신(盜臣)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전에 경상 감사가 되었을 적에는 온 도내에 누추한 소문이 퍼졌으며, 호부(戶部)의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장사치들과 연결하여 국고 물건[公帑]을 도둑질하였으니 청의(淸議)에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장안(贓案)에 기록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한치례(韓致禮)는 용렬하고 자잘하며 탐하고 비루하니 비부(鄙夫) 중에도 심한 자인데 외람되게 훈맹(勳盟, 훈공으로 공신을 본받은 사람들이 단결을 맹서하는 일)의 자리를 더럽히어 작록(爵祿)을 도둑질하면서도 조금의 조심과 두려움이 없어, 심지어는 양가의 장정을 억압하여 자기 집 종을 만들고, 대궐 뜰에서 눈물을 뿌리고도 버젓이 얼굴을 들고 부끄럼이 없으니 사림(士林)이 비루하게 여깁니다. 한환(韓懽)은 광패(狂悖)하고 폭려(暴戾)하여 본처를 몹시 학대하고 장인을 구타하였으며, 김포(金浦)에서 탐욕을 부린 것과 선명(宣命)을 업신여긴 것과 윤리와 강상(綱常)을 패란(敗亂)한 것을 이루 다 들어 말할 수 없습니다. 조득림(趙得琳)은 세조 잠저(潛邸) 때의 어린 종으로 국가 중흥하는 시기를 만나 약간 심부름한 공[羈紲之功]이 있기는 하지만 천례(賤隷)로서 직위가 정헌(正憲)에 이르고, 군(君)에 봉하고 녹을 먹으니 천지 같은 넓은 은혜가 이미 분수를 넘었습니다. 이런 몇 무리는 지난 해에 특명으로 가계하였다가 공의(公議)를 받아들여 곧 정지하여 고치게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불가하다고 하여 고치신 것이라면, 지금 몇 달이나 되었기에 또 특수한 은혜를 더하시옵니까? 더구나 어리석고 무식하기가 윤반(尹磻)·윤준원(尹俊元)·설주(薛柱) 같은 자와, 용잔(庸殘)하기가 조헌(曺獻) 같은 자와, 천한 내력이 이치남(李致南) 같은 자가 모두 당상(堂上)에 승진되고, 신종흡(申從洽) 같은 무리는 혹은 탐람하고 혹은 범상한데, 거개 초천(超遷)되어 내외에 분포하고 있으니, 모두 일이 그릇되지 않으리까. 또 강귀손(姜龜孫)·신수근(愼守勤) 같은 자는 전월 승급(陞級)할 적에 공의가 일어나고, 대간이 따라서 논주(論奏)하니,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것으로 관직을 옮기는 것이 불가함이 있느냐?’고 하시었습니다. 이미 ‘이것으로 관직을 옮겼다.’고 하시었는데, 지금 아직 열흘도 못 되어 또 가계하시니, 전의 하교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환관이란 것은 본래 궁중을 청소하기 위하여 둔 것입니다. 그러나 단속을 혹 소홀히 하면 걱정을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근자의 일로 말씀 드리오면, 고려조 중엽 이전에는 직위가 7품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말년에 와서는 권간(權奸)이 일을 맡아 하자 줄을 이어 굳게 결탁하여 하루에도 군(君)을 봉한 것이 15명이나 되니, 은혜를 팔고 붙어 지내면서 기세가 성하여져서, 그만 신하로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러 나라도 따라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상께서 오늘 수성(守成)하시는데 은감(殷鑑,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이 되는 일입니다. 이존명(李存命)·안중경(安仲敬)·서경생(徐敬生)·김효강(金孝江)의 무리 역리 특수한 은혜를 입어 직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니,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고추(孤雛)·부서(腐鼠)인데, 성상의 어진이 대우하는 공기(公器)를 절취해야만 되겠습니까. 더구나 효강은 겉으로 근신한 체하면서 속에는 간교(奸巧)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불씨(佛氏)의 교를 쇠하게 하려 하시는데, 거짓으로 낙산사(洛山寺)에 소금을 주었으며, 전하께서 피폐한 우역(郵驛)을 진흥시키려는데, 궁중의 명령을 빙자하고 봉안역(奉安驛)의 하인을 빼앗았으니, 두 번이나 기망한 죄를 범하여 죽어도 죄가 남는데도 큰 죄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우질(優秩)을 더하시니, 신은 전하를 그르치는 자가 반드시 이 늙은 간인이요, 환관의 성해짐도 이로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호안국(胡安國, 중국 송나라 훈신)의 말에 ‘공신을 대대로 녹을 주는 것은 녹으로 공을 갚는 것이므로 그 대를 연장할 수 있으나, 어진 이는 직위로 높이는 것이므로 관직은 택해서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전하의 이번 일이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온지, 관직을 택하는 것이온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보위(寶位)를 사수(嗣守)하여 새로 억조 창생에 군림하시니, 이때야말로 군자와 소인이 소멸되고 성장하는 계기요, 안위(安危)와 존망이 인연하고 순환하는 관문이며, 중외의 신민들이 지극한 정치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선하고 사특한 것을 빨리 분별하지 않아, 대간(大奸)·대탐(大貪)과 광패(狂悖), 천례(賤隷) 및 용렬 잔약한 자들로 하여금 모두 높은 직위를 더하기를 이처럼 외람되게 하옵니까. 신 등은 전 왕조에 있는 연호정(烟戶政, 연호는 사람이 사는 집을 의미하는데, 고려 우왕(禑王) 때에 집권자들이 인품의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고 자기편 사람이면 아무나 벼슬을 주었기 때문에 ‘연호정’이라 하여 비난하였음)에 관한 기롱이 다시 오늘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엇으로 청백한 선비들을 격려하며, 무엇으로 지극한 정치를 조성하여 위로 조종의 업을 보전하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대망(待望)에 보답하겠습니까? 신 등은 실망을 금할 수 없아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거두옵소서.” 하였다.
54. 연산 22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4월 16일(정해) 1번째기사 대간이 임사홍 등의 벼슬 높임이 불가함을 서계하다
어서로 대간의 사직장(辭職狀) 말미에 쓰기를, “내가 다시 거절하는 것은 비록 처음과 같지만, 경 등의 어그러진 생각 역시 처음과 같도다. 어찌 공신의 일로 하여 여러번 사직장을 올리느냐 옥송(獄訟)을 지연시키고 원왕(冤枉)을 쌓아 두게 하니 어찌 불가하지 않은가.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릇된 생각을 돌려 고치며, 빨리 나의 명을 따라 속히 일을 보라.” 하였다. 대간이 서계하기를, “복직의 명이 엄하오나 임사홍(任士洪) 같은 큰 간인배를 벼슬을 높이고 그 마음을 길러 준다면 사직의 관계가 경하지 않습니다. 송(宋)나라는 한 명 왕안석(王安石)의 등용으로 인하여 붕당을 끌어들여서 천하의 창생(蒼生)을 해쳤는데 하물며 이 여러 간사한 자들이겠습니까. 신들이 이목(耳目)의 관직에 있으면서, 이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용납하게 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본직에 나가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소위 이 무리들이라는 것은 누구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냐?” 하매, 대간이 열서하여 아뢰기를, “임사홍은 붕당을 교결(交結)하여 조정을 탁란하였으며, 정숭조(鄭崇祖)는 장사치들과 교결하여 국고의 재물을 도둑질하였고, 한환(韓懽)은 본처를 박대하고 장인을 구타했으며, 금포(金浦)에서 탐욕을 부리고 내린 명령을 능욕했으며, 한치례(韓致禮)는 용렬 세소하고 탐람 비루하며, 양민을 억압하여 천인을 삼았으며, 조득림(趙得琳)은 내외가 천인이며, 윤반(尹磻)·조헌(曺獻)·윤준원(尹俊元)은 용렬 무지하며, 설주(薛柱)는 용렬하고 무식하며, 이치남(李致南)은 천인으로서 교사하며, 신종흡(申從洽)은 탐오하고 염치가 없으며, 박윤(朴輪)은 성품이 본시 용렬하고 또 불의를 행하며, 유진(柳軫)은 광패(狂悖)하며, 김효강(金孝江)은 환관으로서 여러번 기망죄를 범하였으며, 안중경(安仲敬)·서경생(徐敬生)·이존명(李存命) 역시 모두가 환관입니다. 또 득림은 세조께서 특별히 가선(嘉善)을 하사하시면서 이르기를, ‘득림의 직위는 이미 다 되었다.’ 하시었으니, 이것은 후세의 변동할 수 없는 전교입니다. 강귀손(姜龜孫)·신수근(愼守勤)은 한 달이 지나지 못하여 재차 높은 품계를 제수받고, 이세좌(李世佐)·노공필(盧公弼)은 육경(六卿)의 우두머리로서 역시 음직(蔭職)을 더하니 사체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55. 연산 28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2월 26일(계사) 1번째기사 대사헌 이집 등이 합사하여 원자 탄신에 대한 논상의 일에 대해 서계하다
대사헌 이집(李諿), 대사간 김영정(金永貞) 등이 합사(合司)하여 서계(書啓)하기를, “하늘이 우리 대동(大東, 우리나라)을 도와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실로 종묘 사직의 한량없는 아름다움이라, 아무리 궁벽한 시골의 영세한 백성일지라도 오히려 경사를 기뻐할 줄 아옵니다. 하물며 신 등은 직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사온데 어찌 경사임을 모르오리까. 다만 작상(爵賞)은 유일한 명기(名器)로서 임금이 현능(賢能)을 대우하는 것이므로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약방 제조(藥房提調)와 내의(內醫) 내관(內官)이 산실(産室)을 간호한 미미한 공로가 있다 해서 참람히 자급(資級)을 제수하는 것은, 예전의 예를 상고해도 역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또 전일 중삭연(仲朔宴)에 가자(加資)를 내렸다가 다시 개정(改正)한 인원 중에는,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한 자도 있고 또 탐학하고 광패한 자도 있어서 그때 대간(臺諫)들이 바야흐로 합문(閤門)에 엎드려 정쟁(廷爭)하고 있을 적에 벼락이 정전(正殿)에 떨어져 천견(天譴)을 정령히 보였으므로, 전하께서 천계(天戒)를 삼가하사 아울러 개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두어 달이 못되어 다시 백관의 가자를 친수(親授)하겠다 하시니, 어찌 임금이 하늘에 순응하기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개국(開國)과 승가(承家)에는 소인을 쓰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원자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실로 승가의 기회로는 이보다 큰 경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국본(國本)을 튼튼히 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하시려면 마땅히 어진 인재를 초빙하여 모든 직위에 나열해서 뒷사람에게 물려 주시는 것이 가하온데, 어찌 감히 이런 무리들을 인용하여 후일에 나라를 그르치는 사단을 열어놓으려 하옵니까. 또 심미(沈湄)의 죄는 용서하지 못할 죄과가 있어서, 신 등이 한 달이 넘도록 논쟁한 것이온데, 아직 윤허를 입지 못하오니 마음 아픔을 이지기 못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간하는 말을 들어주시는 성명(聖明)을 드러내옵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집(諿) 등이 다시 논계(論啓)하니, 전교하기를, “경 등이 하늘에 순응하기를 성실하게 하라 하는데, 나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도 반드시 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경사는 하늘이 곧 말 없는 가운데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집(諿) 등이 다시 아뢰기를, “지금 하늘이 길이 복 있는 자손을 주었으니, 하늘이 사랑하고 돕는 것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공이 없고 부정한 사람에게 막중한 은수(恩數)를 마구 가(加)하는 것은 어찌 천심(天心)에 합당하다 하오리까.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하늘에 응하시되 성실로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대저 지나치게 기뻐하면 참상(僭賞)을 내리게 되고 지나치게 노하면 남벌(濫罰)이 있기 마련이니, 임금은 경솔히 기뻐하고 성내서 과한 상벌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신민의 다행이요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그러나 은수를 이와 같이 참람하게 해서는 안되옵니다. 약방(藥房)이 아무리 조그마한 공로가 있을지라도 상을 내리는 것은 가하지만 어찌 자급을 마구 높혀 줄 수 있으며, 공신(功臣)과 그 적장(嫡長)으로 가자(加資)를 받았다가 도로 개정(改正)된 사람들은 모두가 흉사(兇邪)하고 부정한 무리들인데 경사를 핑계해서 아울러 가자(加資)를 허하시면, 전일에 개정한 것은 천계(天戒)를 삼가하는 뜻이고 오늘 도로 주는 것은 바로 천계를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구나 경사날을 당해서 어찌 꼭 흉사하고 부정한 사람들에게 급급히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까. 이 무리들이 경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높여 주고 키워 준단 말입니까. 이는 다 전하의 지나치신 기쁨에서 나온 것이니, 불가불 개정되어야 하옵니다. 심미(沈湄)에게 통청(通淸)을 허하는 일은 신 등이 한 달이 넘도록 논집(論執)하였사오나 아직도 윤허를 입지 못하고 있사오니, 마음 아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청컨대 아울러 쾌히 결단하옵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결단코 들을 수 없으니 뒤에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매, 집(輯) 등이 다시 서계(書啓)하기를, “이는 바로 작상(爵賞)을 참람하게 내리는 과실이오며, 강상(綱常)을 파괴하는 사단이오며, 군자(君子)와 소인이 진퇴(進退)하는 기틀이 되므로 모두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되오니, 신 등의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는 이상 부득불 면절 정쟁(面折廷爭, 면전에서 직간(直諫)하는 것)하여 전하의 과하신 처사를 구(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홍귀달(洪貴達)·신수근(愼守勤)·김효강(金孝江)·김흥수(金興守)·하종해(河宗海)·박성림(朴成林)이 비록 조그마한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단지 상을 내리는 것이 가하옵고 관작을 남수(濫授)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하물며 수근(守勤)으로 말하오면 별다른 현능(賢能)도 없는데, 특히 초방(椒房, 후비의 궁전)의 지친이라 해서 지난 봄에 특별히 가선(嘉善)으로 가자했다가 얼마 안되어 또 가정(嘉靖)으로 가자했는데, 지금 또 약방의 공을 칭탁하여 명하여 자헌(資憲)을 제수하라 하시니, 아무리 무리에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1년 안에 이와 같이 뛰어오를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일국의 신민들이 전하의 사의(私意)를 엿볼까 두렵습니다. 임사홍(任士洪)은 성종조(成宗朝)에 붕당(朋黨)을 결탁하여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하였으며, 정숭조(鄭崇祖)는 일찍이 호부(戶部)의 장[호조판서]이 되어 탐오(貪汚)하고 청렴하지 못했으며, 한환(韓懽)은 처부(妻父)를 구타하고 민전(民田)을 겁탈하였으며, 조득림(趙得琳)은 노예(奴隷)의 천류로 복(服) 중에 혼인을 계획했으며, 김효강(金孝江)·서경생(徐敬生)·안중경(安仲敬)·이존명(李存命)은 훈부의 나머지로[薰腐之餘] 지위가 높은 품계에 이르렀는데 지난 봄 중삭연(仲朔宴)에 명하여 모두 계급을 더 올리시니, 대간이 옳지 못하다고 논쟁을 하고 하늘이 또한 이변(異變)을 보이므로 전하께서 하늘의 노(怒)함을 발해서 곧 개정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온데, 그 후 얼마 안가서 도로 그 가자를 내주시고, 심지어는 조헌(曺獻)·이치남(李致南)·설주(薛柱)의 용렬한 무리들까지 또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격하였으니, 이는 은수(恩數)가 제한이 없고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천계(天戒)를 삼가하시던 그 마음이 갑자기 몇 달 후에 잊었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이옵니다. 심미(沈湄)는 범한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또한 통청(通淸)을 허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만약 신 등의 직을 갈아주신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하루라도 이 직에 처해 있게 하오면 어찌 차마 침묵만 지켜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리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56. 연산 28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2월 27일(갑오) 1번째기사 대간 등이 합사하여 원자 탄신으로 약방 제조와 내의 등에게 자급을 올려준 일에 대해 논하다
명하여 신승복(愼承福)에게 한 자급(資級)을 더 올려주게 하니, 대간 등이 합사(合司)하여 서계(書啓)하기를, “약방 제조(藥房提調)와 내관(內官)과 내의(內醫)의 유들이 비록 산실(産室)을 간호한 작은 공로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다시 자급을 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음험(陰險)한 임사홍(任士洪)과 탐오(貪汚)한 정숭조(鄭崇祖)와 광패(狂悖)한 한환(韓懽)과 천례(賤隷)인 조득림(趙得琳)과 용렬하고 어리석은 조헌(曺獻)·설주(薛柱)·이치남(李致南) 같은 따위들을 비롯하여 김효강(金孝江)·서경생(徐敬生)·이존명(李存命)·안중경(安仲敬) 같은 훈부(薰腐)의 나머지들까지 모두 품자를 얻게 되었으니, 그 외람된 것이 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심미의 강상을 무너뜨린 죄는 온나라가 함께 분히 여기는 바이거늘, 경이하게 통청(通淸)을 허하시므로, 신 등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논쟁하여 지금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윤허를 입지 못하였으니, 실로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청컨대 개정하시여 공론을 들어주옵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57. 연산 29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1월 4일(경자) 1번째기사 의원·내시 등에게 가자한 일 등에 대한 대사간 김영정 등의 논의
대사간 김영정(金永貞)·집의 이유청(李惟淸) 등이 아뢰기를, 옛날 제왕(帝王)은 아무리 총명하고 제성(齊聖)한 이라도 오히려 좌우 신하들의 허물을 고쳐주고 틀린 점을 규정(糾正)해 주며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해 줌에 힘입어서 능히 전열(前烈)을 계승하였습니다. 지금 신 등이 계한 바는, 한갓 작상(爵賞)이 참람한 것만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의 진퇴하는 기미와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가 매였으므로, 신 등은 이 점이 두려워서 여러 달을 두고 논쟁과 고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굳이 거부하여 윤허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은 죄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히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시고 또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의 말은 도리어 미미한 내시들만도 못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종(侍從)이 논(論)하니 하교하시기를, ‘지금의 홍문관(弘文館)은 대간(臺諫)의 직책까지 겸했느냐.’ 하셨고, 의정부(議政府)가 말하니, 하교하시기를, ‘경(卿) 등은 아직 어리다.’ 하시고, 또 ‘사왕(嗣王)은 들을지 모르나 나는 들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간하는 말을 이렇게까지 거부하신다면 재상(宰相)·대간·시종들을 제외하고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모의하며 국가를 유지하시렵니까? 신 등이 또 내농작(內農作)의 폐해를 아뢰니, 하교하시기를, ‘이는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리는 바이니 폐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신 등은 상고하건대, 《서경》 무일(無逸)1944) 에 이르기를, ‘먼저 가색을 올리는 것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안일하게 지내면 곧 백성의 의지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옛날의 왕으로 백성의 의지하는 바를 아는 것이 문왕(文王)보다 더한 이는 없는데도 인력을 허비하여 유희(遊戲)와 완롱(玩弄)의 바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아시고자 하실진대 마땅히 빈풍(豳風)1945) 과 무일(無逸)의 그림을 그려서 좌우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관성(觀省)할 것이며, 또 봄에는 경작(耕作)하는 것을 살피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어 민력을 빼앗지 않고 농사철을 어기지 않으면 자연히 집집마다 윤택하고 사람마다 족할 것인데 어찌 꼭 무익한 일을 만들어서 완호(玩呼)의 기구로 삼으시려 하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영정(永貞)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면 5등의 복(服)으로 다섯 가지를 빛나게 하고,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討罰)하면 5등의 형(刑)으로 다섯 가지를 사용하시어 정사를 힘쓰고 힘쓰소서.’ 하였으니, 대개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잘한 일이 있어 상을 주되 하늘이 상을 준다고 이르는 것은 사사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죄가 있어 벌을 주되 하늘이 벌한다 이르는 것은 사사로 노(怒)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혹시 작(爵)으로 상주고 형(刑)으로 위엄을 보이는데 일호라도 참람(僭濫)함이 있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벌한 것이 아니라 한갓 사의(私意)로써 상주고 벌준 것이다.’ 할 것이오니, 이로 말미암아 선(善)한 자는 게을러지고 악한 자는 날뛰며 소인은 진출되고 군자는 후퇴하며 천명(天命)은 가고 인심은 흩어질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우리 국가를 도우시어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지고 인심이 부쳤으니, 어느 누가 서로 시조(市朝)에서 경축하지 않고, 우리 조선의 억만 년 다함 없는 아름다움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리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중외(中外)에 대사(大赦)를 반포하시고 백료(百僚)에게 계급을 올려주어 온 나라 신민들과 함께 큰 경사를 누릴 것을 생각하셨으므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뜻이 그 사이에 충만했습니다. 어찌 태평 세대의 막대한 경사가 아니오리까. 다만 전하께서 좋고 즐거운 마음만이 있어서 그 정(正)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상과 벌의 시행이 사뭇 그 당연성을 잃으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약방(藥房)의 미미한 노고는 직분상 의당 할 일이온즉 물건을 하사하심이 가하거늘, 문득 명하여 상으로 계급을 올려 주시고 공신(功臣)과 적장(嫡長)으로 계급을 승진한 자가 흉사(凶邪)하고 부정한 사람이 있다면 배척하고 축출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이 가한데, 친히 그 가자(加資)를 제수하여 숭반(崇班)과 극품(極品)을 일찍이 존중하고 아끼지 않고 초개(草芥)와 이사(泥沙)와 같이 천히 여기시므로, 천마(天麻)가 한 번 내리면 물론(物論)이 해괴하게 여기니 신은 아마도 연거 두량(連車斗量)의 기롱이 다시 오늘날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홍귀달(洪貴達)은 지위가 높은 재상으로서 자급이 현덕(賢德)으로 말미암아 오르지 않았으니 수치스러운 일이오며, 신수근(愼守勤)은 공로도 없고 재덕(才德)도 없는데 한갓 폐부(肺腑)의 친(親)이란 점 때문에 후설(喉舌)의 장이 되었고, 1년 동안에 연달아 세 번이나 가자(加資)되어 마치 땅에서 지푸라기를 줍듯이 하였으며, 신승복(愼承福) 역시 척완(戚畹)으로 여러해 고을을 다스렸으나 별다른 성적도 없는데 갑자기 당상(堂上)으로 올라갔으니 이 점이 바로 신 등의 이른바, 전하 한 집안 정사이고 진실로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본의가 아니옵니다. 김흥수(金興守)는 의가(醫家)의 유(流)로서 발신하여 가선(嘉善)으로 승진되었으니 진실로 분에 넘치는 일이거늘, 지금 또 승자(陞資)시켜 재상보다도 우위에 이름이 있으니 조정을 존중하는 바가 아니오며, 임사홍(任士洪)은 정사를 어지럽힌 소인이며, 정숭조(鄭崇祖)는 농단(壠斷)의 야비한 자이오며, 한환(韓懽)은 광탕(狂蕩)하고 포학한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 천토(天討)를 보인 자들이거늘 단지 훈맹(勳盟)만을 연유하여 도로 작위를 주었으니 천은(天恩)이 이미 족하온데 또 숭반(崇班)을 가했으며 조득림(趙得琳)은 노예의 천인이요, 설주(薛柱)·조헌(曹獻)·이치남(李致南)은 용렬하고 무식하온데 혹은 1품이 제수되고 혹은 당상(堂上)에 올랐으니,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본의가 과연 이러하옵니까. 내시의 임무는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며 소제하는 역사를 받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내시성(內侍省)에 3품관을 두지 않았는데, 그후에 현종(玄宗)이 태종의 제도를 경솔히 변경하여 환관(宦官)에게 3품의 장군(將軍)을 제수한 것이 차차 많았으므로, 당실(唐室)의 화가 개원(開元, 당헌종의 연호)에서부터 터가 잡혔으니 이는 이연(已然)의 귀감(龜鑑)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김효강(金孝江)·이존명(李存命)·안중경(安仲敬)·서경생(徐敬生)이 또한 특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은즉 당(唐)의 3품관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하물며 김효강은 가슴속이 깊고 치밀하여 간교하기가 이를데 없사오니 이는 바로 진(秦)의 조고(趙高)요 한(漢)의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입니다. 지난날 낙산(洛山)의 소금과 봉안(奉安)하는 종들을 제 마음대로 아뢰어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였으니, 군상(君上)을 기만한 것이 죽여도 죄가 남는데 도리어 높은 직급을 제수하되 불차(不次)로 뛰어올렸으니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뜻이 역시 어디에 있습니까. 또 심미(沈湄)는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죄인입니다. 그 소위에 비추어 죄를 정하면 마땅히 중죄를 입어야 하는데, 단지 죄안(罪案)에 기록하여 금고(禁錮)만을 내렸으니 은혜가 지극히 크거늘, 지금에 법을 어기고 통청(通淸)을 허하였으니 그 하늘이 죄 있는 자를 벌하는 뜻과 비출 때 어떠하옵니까. 전하께서 요사이 큰 경사로 인하여 무릇 공신의 후손과 의원·내시·척리(戚里)의 유들을 모두 다 승진시키어, 혹은 거듭 높은 질급을 제수한 자도 있고 혹은 한 해에 3급을 뛰어올린 자도 있사오니 이러한 명기(名器)의 남용은 예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알지 못하겠지만, 성심(聖心)이 사사로운 정의에 갇히어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대간(臺諫)이 말하고 시종(侍從)이 말하고 재상(宰相)이 말하니 또한 살피실만 하온데 간함을 거부하심이 더욱 심하여 ‘대간의 평론이 내시의 말만도 못하다.’ 이르시고, ‘묘당(廟堂)의 정책이 아동(兒童)의 소견과 다름이 없다.’ 하시니, 아! 내시와 아동이 어찌 재상과 대간을 대우하는 대상자가 되오리까. 명기(名器)를 천히 여기고 조정을 욕되게 하여 이미 정치하는 체모를 잃었는데, 더구나 자신은 넓고 남은 좁다 해서 아무리 의정부의 대신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으니 이치에 어긋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옵니까. 이는 반드시 전하께서 깊숙이 들어앉아 연안(宴安)만을 즐기고 경연(經筵)에 게을리 납시어 기거(起居)와 동정(動靜)이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실상에서 위배되므로, 그 외면에 발로되는 것이 이렇게 검속할 수 없사오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감히 충직(忠直)을 거역하고 기덕(耆德,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멀리하고 완동(頑童, 완악한 사람)을 친하면 이를 난풍(亂風)이라 하는데, 나라 임금이 이 중에서 한 가지만 몸에 두어도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간(臺諫)은 공론의 소재로서 그 충성된 말과 강직한 의논이 일찍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꾀하지 않은 바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니 충언(忠言)을 거역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삼공(三公)은 누조(累朝)의 원로(元老)로서 국가와 휴척(休戚, 기쁜 일과 슬픈 일)을 같이 했을 뿐더러 선왕께서 전하에게 물려주신 바이온데, 전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면 기덕(耆德)을 멀리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간사하고 광패(狂悖)한 무리와 탐오(貪汚)하고 노예(奴隷)의 하천과 의원(醫員)·내시·외척의 무리들은 국가를 함께 다스릴 수 없는 것이온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존숭하고 이들을 키우시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 같이 하시니 이는 완동(頑童)을 친비(親比)하심에 가깝지 않습니까. 또 하교하시기를 ‘불행히 경사가 일찍 오지 아니해서 모후(母后)가 정사를 전제하여 비인(匪人, 소인)을 끌어 썼다면 그 화가 장차 이보다 크지 않겠느냐.’ 하였사온데, 전하의 이 하교는 양한(兩漢, 동한과 서한)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양한의 난리는 소유래가 있사옵니다. 외척(外戚)이 밖에서 제 마음대로 하고 내시들이 안에서 서리고 있는데다가, 힘이 있는 자, 금고(禁錮)를 당한 자, 무뢰(無賴)한 자들이 연줄을 타고 당부(黨附)하여 교대해 가면서 서로 치성하여 주권(主權)을 거꾸로 쥐고 어린 임금을 세워서 권세와 은총을 굳혔으므로 한(漢)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니, 이는 노두가 서리를 밟을[履霜, 시초를 보고서 종말을 안다는 뜻임] 적부터 근신하지 아니한 화라고 하겠습니다. 성려(聖慮)가 여기까지 미치시고도 달갑게 복철(覆轍, 앞사람의 실패한 자취)을 밟으시고 일찍이 각오하지 못하여 스스로 화(禍)를 터잡은 임금이 되신다면 어찌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은탕(殷湯)의 삼풍(三風, 무풍(巫風)·음풍(淫風)·난풍(亂風)을 말한 것임. ‘이 삼품이 임금의 몸에 한 가지라도 있게 되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만다.’ 하였음)의 경계를 생각하여 대간(臺諫)과 대신의 의논을 채택하시고, 아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라 총명을 넓히시옵고, 명기(名器)를 애석하여 조정을 높이시고, 언행(言行)을 계신(戒愼)하여 백성의 지표를 세우소서. 그러면 참으로 종묘 사직에 만세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58. 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7월 6일(갑자) 1번째기사 승지 이세영 등에게 홍문관 독서당에 가게 하고 내관을 시켜 술과 고기를 보내다
승지 이세영·권주·박원종(朴元宗)을 명하여 홍문관 독서당에 먼저 가도록 하고 이어서 내관 안중경(安仲敬)에게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가서 공궤(供饋)하도록 하였다.
59. 연산 44권, 8년(1502 임술 / 명 홍치(弘治) 15년) 6월 29일(기사) 3번째기사 충훈부에서 안중경에게 봉록 주기를 청하다
충훈부(忠勳府)가 아뢰기를, “안중경(安仲敬)이 친공신(親功臣)으로써 오래도록 봉록(俸祿)을 받지 못했으니 봉록을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서용(敍用)하고 봉록을 주는 것은 이야말로 은수(恩數)인데 아랫사람이 스스로 먼저 함부로 아뢰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지 승정원에 물어보라.” 하였다. 승지 이자건(李自健)·이점(李坫)·한위(韓偉)·김감(金勘)이 아뢰기를, “충훈부는 오로지 공신(功臣)만을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지금 안중경이 벼슬에 다시 돌아왔는데도 봉록을 받지 못하므로 이와 같이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은수(恩數)에 관한 일은 진실로 아랫사람이 함부로 아뢸 것이 아니니, 성상의 전교가 진실로 지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국문하라.” 하였다. 자건(自健) 등이 다시 아뢰기를, “충훈부 당상(堂上)은 곧 윤필상(尹弼商)과 한치형(韓致亨)입니다. 옛날에 가의(賈誼)가 한 문제(漢文帝)에게 말하기를 ‘대신에게 실수한 일이 있더라도 감히 그 실수를 지척(指斥)하지 않는 것은 대신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필상(弼商) 등은 모두가 수상(首相)인데 이들을 국문한다면, 국가에서 대신을 존경하는 의리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히 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국문하지는 말고, 다만 함부로 아뢰어서는 안된다는 일로써 필상(弼商) 등에게 알리라.” 하였다.
60. 연산 53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윤4월 17일(정축) 3번째기사 폐비에 관여한 자에 대하여 승정원이 서계하다
승정원이 서계하기를, “기해년 6월 5일, 회릉(懷陵)을 폐위할 때, 승지는 홍귀달(洪貴達)·김승경(金承卿)·이경동(李瓊仝)·김계창(金繼昌)·채수(蔡壽)·변수(邊脩)요, 주서(注書)는 신경(申經)·홍형(洪詗)이요, 사관(史官)은 최진(崔璡)·이세영(李世英)이며 언문 글을 번역한 것은 채수·이창신(李昌臣)·정성근(鄭誠謹)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인년 8월 16일 〈사약 내릴 때〉 승지는 노공필(盧公弼)·이세좌(李世佐)·성준(成俊)·김세적(金世勣)·강자평(姜子平)·권건(權健)이요, 주서는 이승건(李承健)·권주(權柱)이고, 사관은 신복의(辛服義)·홍계원(洪係元)이고, 언문을 펴 읽은 이는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이며, 언문을 풀어 보인 것은 강자평이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 등은 그 죄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유순(柳洵) 등이 서계하기를, 경동(瓊仝)·계창(季昌)·변수는 직첩을 거두고 신경은 파직하고, 홍형은 직첩을 거두고 최진은 파직하고, 채수·이창신은 직첩을 거두어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고, 정성근과 그 아들들은 직첩을 거두어 외방에 부처하소서. 김세적·강자평·권건·이승건은 직첩을 거두고, 권주·신복의는 파직하고, 홍계원은 직첩을 거둠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61. 연산 57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2월 2일(무오) 2번째기사 내관 안중경을 보내어 외방의 처녀를 간택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외방(外方)의 처녀를 간택하게 하라.” 하였다.
62. 연산 59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9월 2일(계미) 3번째기사 밤 늦게 도승지 권균을 불러 술을 내리고 활쏘다
밤 2고(鼓)에 도승지(都承旨) 권균(權鈞)을 불러 대내로 들어오게 하여, 수없이 술을 내린 다음 활을 쏘고, 숭정(崇政)으로 높이고, 내시 안중경(安仲敬)의 서대(犀帶, 무소의 뿔로 장식한 띠로서, 1품 벼슬아치가 띰)을 풀게 하여 그것을 띠게 하였으며, 또 내관 김새(金璽)를 당상(堂上)으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63. 연산 59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9월 10일(신묘) 1번째기사 우의정 신수근을 보내어 경사에 가서 등극을 축하하게 하다
우의정 신수근(愼守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등극(登極)을 축하하게 하였다. 왕이 승지 권균(權鈞)과 강혼(姜渾), 내시 안중경(安仲敬)을 시켜서 의정부(議政府)에서 전송(餞送)하게 하고, 또 의정부·육조로 하여금 교외(郊外)에게 전송하게 하였다.
64. 연산 62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5월 29일(무신) 8번째기사 봉공에 태만한 내관 안중경을 국문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내관 안중경(安仲敬)이 공을 믿고 늙은 것을 빙자하여 봉공(奉公)에 태만하니, 국문하라.” 하였다. |
첫댓글 안중경 어르신이 비록 내시였지만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군요. 기록이 없어 아쉽지만 분명 안씨는 같은 핏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듭니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28세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을 예종이 즉위한 1468년에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할 때 안중경(安仲敬)은 한명회 등의 훈구대신 편에 서서 남이를 제거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 원성군(原城君)을 받은 사람이므로 역사적인 평가에서 공신과 군호 받은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