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34 / 장경린
요철 심한 세상도
수동으로 털털털 털고 달려감
연식은 좀 됐지만
분위기 잡히면 연비 끝내줌
헤드 교환했음
(특히 웰빙과 탈세 쪽 신경 썼음)
삼 년 전 야매로 세례까지 받아놓았으니
당분간 종교적으로
소모품 교환할 일 없으리라 사료됨
사소한 접촉사고에도
간혹 시동이 꺼지거나
명상 모드로 빠져 사라져버리는 경향 있으나
FM 틀어놓고 기다리면
제 풀에 꺾여 다시 돌아옴
박통전통 당시 시대적 특징 살아 있어
소장가치 충분함 향후 시세가 올라갈 수 있으니
서두르시기 바람
과거를 묻지 않고 가져가는 분에게는
미래가 내려다보이는
키높이구두 같은 오늘을 덤으로 드림
대한 늬우스 / 장경린
동도극장 목책 넘어 들어가
가슴 졸이며 보던 대한 늬우스
기도에게 걸려 무릎 꿇고 벌 받으며 훔쳐본 대한 늬우스
빨간 마후라 태양은 가득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정무문 만다라를 보러 가서
눈 감고 끝나기를 기다리던 대한 늬우스
바니걸스가 나오자 환호하는
파월 장병들 방직기 항문에 붙어 서서
거미처럼 실을 뽑고 있는 여공들을 위한 대한 늬우스
세상보다 빠르고 박진감이 넘치던
군가의 뮤직 비디오 대한 늬우스
대한 뉴 - 스 에서
대한 늬우스로 대한 뉴우스를 거쳐 대한 뉴스로
정신없이 돌아가다 막을 내린 대한 늬우스
대한민국 명심보감 대한 늬우스
대한 늬우스보다 더 대한 늬우스다워져
국민교육헌장과
성문종합영어를 달달 외던 대한 늬우스
북괴 남침 땅굴 속에서 안보 교육을 받던 대한 늬우스
주택청약저축에 가입하고
아파트 당첨을 기다리던 대한 늬우스
대한 늬우스에 동원되어 허리 꺾어 논에 박고
흰 구름 속에 묵묵히
검은 모를 심던 대한 늬우스
대한 늬우스 함께 보며
첫사랑에 두근두근 기대 있던
대한 늬우스
동시 상영/장경린
폐암으로 투병중인 노모를 간병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수선한 복도
한 떼의 환자들이 모여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이목구비가 잘 빠지고 화사해서 바람이 든 것일까
갈비탕으로 저녁을 때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과 또 마주쳤다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그들은
환자처럼 표정을 무겁게 갈아앉히고
주연의 주위를 오락가락 배회하고 있었다
깊은 우물처럼 노모의 눈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어지고 있었다
물이 바싹 말라버린 우물 속 영화관에서는
두 편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고 있었다
뭉턱뭉턱 머리칼이 빠져버린 한 편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며칠 째 상영이 중단된 상태
다른 한 편은
간이 침대에 앉아 스포츠서울을 말아 쥐고
감독의 지시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블랙 먼데이 / 장경린
절정에서 맛본 탐욕의 기쁨을
공포와 교체했다
주가가 폭락한 블랙 먼데이
마음이 여려서 마모가 심한 자동차 앞바퀴를
교활하게 늘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기만 하는 뒷바퀴와 교체했다
보톡스를 맞은 애인의 사라져버린 주름살과
보톡스를 맞고도 시치미를 떼는 애인을 교체했다
활짝 핀 생의 정점에서
제 목을 꺾어들고 뚝뚝 떨어지는 능소화여
월스트리트 펀드매니저와 소말리아 아이의
바싹 마른 입술을 일대일로 교체했다
원관념은 사라지고
중국제 보조관념만 즐비한 인사동
어제의 당신이 사라지고 내일의 당신도 사라졌다
저 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뿌리를 약하게 할 거야
목젖이 부었다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집이 나가지 않는다 목젖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대통령이 나가지 않는다 관절염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채식에서 육식으로 식성을 교체했다 그 후로
창가의 선인장 가시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동네 개들은 꼬리를 내렸다 나도 꼬리를 내렸다
오늘도 나는
나를 임의의 나로 교체했다
내가 나만 쫓아다니며 꼬리치지 못하도록
블랙 먼데이 4 / 장경린
502호가 외출하나 보다
문이 닫히는 자동 잠금장치 소리에 이어서
방울 소리가 들린다
502호가 개와 함께 산책을 가나 보다
집만 나서면 아파트가 떠나갈 듯
사납게 짖어대던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해진 뒤로
내 머릿속은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졌다
정적이 짖어대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해
문밖의 그 헛것에 더욱더 긴장하게 되었다
이글거리는 눈망울
움켜쥔 주먹처럼 떡이 된 털뭉치들
허공을 물어뜯으며 울부짖지만
성대가 제거되어 쉰 소리 하나 토해내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혓바닥
야심한 밤
502호 연금생활자가 종일 시간만 죽이다가
개를 끌고 나가는 산책길
성대가 제거된 개가
현실이 제거된 502호를 끌고 나가는 산책길
환상통을 서로 교감하게 된 것일까
밤거리를 배회하고 돌아오는 방울 소리가
오늘따라 낭랑하다
퀵 서비스 /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비내리는 밤이면 발정 난 고양이를 담장 위에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을 산모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 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간접 프리킥 / 장경린
|
튀김을 먹다가
간장을 엎질렀다.기울어지던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에 힘입은 불완전한
것이었다.막강한 전력의
브라질 팀이
우리 편 문전을 향해서
간접 프리킥을 차려는 순간
사타구니를 쥐어짜듯 감싸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1919. 3. 1.
1945. 8. 15.
1950. 6. 25.
1961. 5. 16.
한 접시의 식어 버린 튀김을
질질 흘러내리는 간장에
주녹이 든 채로
여전히
손에 강 같은 평화 / 장경린
사람 손가락이 열 개인 까닭에
십진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손이 소처럼 뭉툭했다면
번잡한 삶 얼마나 단순하고 평화로웠겠는가
새의 날개 같았다면
가볍게 떨리는 마음으로도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까
내 손은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낡은 도자기처럼 은은하게 잔금이 깔리고
푸르렀던 힘줄도
스웨터에서 풀려 나온 실처럼 느슨해져
세상을 움켜쥐기보다
누구나 손잡기 쉽게 되었다
이 손 강 같았으면
남원 어느 샛강처럼
둔덕을 끼고 느리게 돌아가는 강 같았으면
신발 벗어들고 생을 건너다
흰 발등 내려다보며 아득해진 마음이여
그 마음 쓰다듬는 얕은 강이여
내 손 그런 강 같았으면
나의 영화관 / 장경린
시간을 뛰어넘는 영화도 보았고
性을 뛰어넘는 영화도 보았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도 보았다 그러나
악이 선을 뛰어넘는 건 보지 못했으니
영화는 일종의 오락에 불과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가 그런 일류도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거라는 생각에
뒷골목 삼류 극장들을 찾아 순례하던 시절
기차표를 끊어 놓고 시간 죽이러 들어간
창량리 동시상영극장
기형도 시인이 쓰러졌던 파고다 극장보다
협소하고 퀴퀴했다 코앞에 펼쳐진
스크린 가득 시간의 벽을 뚫고 나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공룡들
발바닥에 뭉클 밟히는
쥬라기의 팝콘들
가상이 아주 현실적으로 현실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때 내 허벅지를 슬그머니 넘어오는
옆자리 중년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
여자가 남자를 뛰어넘는 영화도 보았고
영화가 문학을 뛰어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남자를 뛰어넘지 못하고
내 몸 위로 무너져 내리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아마......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무겁게 느껴질 때
어둠 속에서 나를 영화에 던져 놓고
감상하며 군더더기를 덜어낸다
삶이 한 편의 영화로 보일 때까지
흰 스크린처럼
적막해 보일 때까지
누구지 / 장경린
잠옷을 입은 채로
휴일 온 하루를 자연광 속에서 보냈다
땅거미가 진 뒤에도 불을 켜지 않고
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것은
내 눈동자를 통해 내 마음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 넷째 행에 등장하는 '그 것'은
선인장에도 있고 약수터에도 있으며
옆 집 꼬마가 치는 고장난 피아노 소리에도 있고
속 좁은 내게도 무진장 있다
그러나 다섯째 행의 '그 것'과 사랑을 나눌 때
나는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내게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느닷없이 발광하는 풀벌레 울음소리
천지사방에 휴대폰 때린 자 누구지
~~~~~~~~~~~~~
장경린 시인
1957년 서울 출생
1985년 ≪문예중앙≫ 등단
1990년 ≪현대시세계≫ 등단
「시와 시학 ?은 시인상」 수상
시집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문학과 지성사 1993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