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 전라남도 나주사람입니다. 「흥보가」중에서 중요한 대목인 <제비노정기>를 작곡한 명창입니다. 원각사 주석으로 있으면서 창극을 새로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멋쟁이이자 호남이었고 너름새가 멋져 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멋지게 차려입고 백마 타고 나주시내를 누비고 다녔는데 마침 일본인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하여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풍채에 큰 갓에 백마까지 떡하고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자 직감적으로 대단한 양반이라 생각하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뒤통수를 긁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전해옵니다. 서편제의 애원성으로 일세를 진동시킨 명창이고 특히 춤·너름새·발림 등에 능해 어떤 대목이라도 능히 감동적으로 연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근세 5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동백 : 어릴 때부터 심산유곡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 홀로 판소리 공부를 한 끝에 마침내 득음(得音)하여 판소리에서 제일로 치는 크고 구성진 <수리성>을 연마해냈습니다. 온갖 새소리 흉내내는 재주가 으뜸이었고 특히 그의 귀신울음소리(鬼哭聲)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합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출발하려는 전차를 막으려고 힘을 쓸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도 합니다. 풍채가 좋고 성격이 좋아 상류사회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또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단둘이 있을 적에는 귓속말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예쁜 탤런트는 누구누구냐 등등의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합니다. 어쨌든 고종황제로부터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을 정도의 명창이었습니다.
송만갑 : 전대 8명창 중에 송흥록이 가왕(歌王)이라면, 근세의 5명창 중엔 송만갑이 가왕(歌王)격이 됩니다. 대차게 쭉쭉 뻗는 통상성의 수리성을 연마하여 당대에 맞설 명창이 없었답니다. 전남 구례 출생으로 집안 전체가 판소리 명창들입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바로 가왕 송흥록이고, 할아버지가 송광록, 아버지가 송우룡으로 모두 당대 최고의 명창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이 모두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집안인지라,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만을 모두 모아 화려한 <송만갑제>를 만들어 부르고 다니니 집안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맞아 죽는 것만 모면하고 집안에서 파문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소리가 좋으면 그만이지 유파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당연히 <송만갑제>가 판소리계를 석권하면서 그의 문하에 수많은 제자들이 들어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고 판소리계 전체는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나주 명창 박기홍과 <적벽가>부르기로 한 판 붙었다가 크게 혼나고 버선발로 도망간 적이 있을 뿐 다른 명창과 대적하여 져본 적이 없는 큰 명창입니다. 나중에 감찰이란 벼슬도 얻었습니다.
김창용 : 충남 서천 출생으로서 <중고제> 창법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창입니다. 할아버지는 진양조를 창시한 공이 큰 김성옥이고, 아버지는 산궁접이란 곡조를 상시한 김정근입니다. 판소리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까닭에,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13세 때부터는 이날치에게 1년간 수학하여 비로소 소리가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혼자 소리를 연마하다가 김창환, 박기홍, 등 선배들과 어울리며 견문을 넓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32세 쯤에 경성에 올라와 연흥사를 창립할 때 많은 공헌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창법과 기량이 날로 늘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적벽가> 중 '삼고초려', <심청가> 중 '꽃타령', <수궁가> 중 '수중궁 들어가는데' 단가 중 <장부한>을 특히 잘 불렀는데, 타고난 목청이 좋아서 며칠을 계속 불러도 상하지 않음이 다른 사람에 비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그의 <중고제> 창법은 서당에서 글 읽는 창법이기 때문에 노래 곡조가 단조롭고 소박한 맛이 있어 상류층과 부녀자 층에서 크게 환영받았대요. 특히 관서지방(황해도, 평안도)지방에서는 <중고제> 창법의 김창용의 인기는 대단하여 극장의 흥행계약에서도 김창용의 이름이 없으면 아예 판소리 판이 열리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순박하고 시원시원한 기질에 맞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정렬 : 전북 익산 출신의 명창입니다. 7세 때 이미 소리에 소질을 보여 부모의 뜻을 좇아 한집안 사람인 명창 정창업으로부터 소리 수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4세 되던 해에 정창업이 죽었기 때문에 이날치를 찾아가 사사했습니다. 이날치마저도 2년 후 세상을 뜨자, 마침내 독공을 시작하였습니다. 40세 무렵까지 익산의 신곡사, 충남 홍산의 무량사, 공주 갑사 등에서 독공을 마치고 마산에서 활동했는데, 이미 그때 서울까지 명성을 떨쳤습니다. 친지들의 권유로 1926년 상경하여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등과 같이 활동했습니다. 그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판소리와 창극에 힘썼는데, 1935년 <춘향전>, <심청전>, 1936년 <흥부전>, <숙영낭자전>, 1937년 <별주부전>, 1938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의 창극을 편극하여 공연하였습니다. 선천적으로 성량이 부족하여 몇 번이나 포기할 위기에 처했었지만 불굴의 노력으로 마침내 <붙임소리>라는 교묘한 무공을 터득하였어요. 이것은 소리를 짧게 잘라 이것을 다시 이어 붙여 연결하는 수법의 창법이었습니다. 성량이 부족한 정정렬에게 안성맞춤의 비법이었답니다. 이 <붙임소리> 창법으로 세상에 나가 크게 환영받고 명창의 대열에 올랐습니다. 물론 명고수 한성준의 도움이 매우 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