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 집단망명. 우당 이회영은 1911년 정월 6형제 일가족 60여 명을 이끌고 횡도촌에 도착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한 사회의 지배층이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으로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처럼 건강한 사회는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지배층의 존재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힘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모든 것을 바쳤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회영 6형제, 광복자금 600억 들고 ‘가문의 이동’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중앙일보 중앙 SUNDAY 제229호 | 2011년 07월 30일
절망을 넘어서
⑥ 일가 망명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는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가 수작자(授爵者)들과 양반들에게 막대한 은사금을 내린 데는 독립운동을 상민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천시케 하려는 이런 교묘한 계산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이 말은 구한말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한 뒤 일제의 선전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서 “(이회영이) 안동현(지금의 단동)에서 오백 리 되는 횡도촌으로 가셔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석오(石吾) 이동녕씨 친족 이병삼(李炳三)씨를 그곳으로 먼저 솔권(率眷)해서 안정을 시키고, 앞으로 오는 동지의 편리함에 대한 책임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등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을 횡도촌 건설에 되살렸다.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이 이때 ‘이병삼에게 식량과 김장도 미리 준비하라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런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이회영·이동녕은 이은숙 여사가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고 회고한 대로 집단 망명을 실행했다.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는 이회영이 형제들에게 “지금 한·일 강제병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 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 부통령)·호영이 있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첫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 은숙(恩淑) 여사와 재혼하는데 이 여사의 자서전 서간도시종기에는 “무신년(1908) 10월 20일에 상동 예배당에서 결혼 거행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전통 명가 출신이 교회에서 혼인식을 올린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회영과 같이 활동했던 권오돈(權五惇)은 “(이회영이)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고 전한다. 횡도촌에 합류하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의 연보인 선부군유사(先父君遺事)도 이상룡이 망명하기 전 “노비 문서를 다 불태워서 각각 흩어져 돌아가서 양민(良民)이 되게 했다”고 전한다.
이상룡의 사돈이기도 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는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10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회영) 선생의 의견을 듣자 (형제) 모두가 흔연히 (망명에) 찬동하였다”고 전한다. 보통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한 사람은 남았지만 이회영 형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민의 땅에서 드리는 제사를 조상들이 흠양하지 않으리란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섯 대가족의 망명 준비는 쉽지 않았다. 이은숙은 서간도 시종기에서 망명 준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원으로 당시 3원 정도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돈으론 대략 600억원의 거금이 된다.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가 “영석장(潁石丈: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 댁으로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에게 출계(出系)해 상속 받은 1만여 석의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다. 1911년 발생하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은숙 여사는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타인 보기에는 주막’이 이건승·홍승헌 일행이 달포 이상 몸을 숨겼던 신의주 사막촌(四幕村)이었다.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 도강 장면에 대해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안동현에서 이동녕의 매부 이선구의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서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맞이했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우당장(이회영)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이석영)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라고 회고했다. 이은숙은 “12월 27일에 (이회영이)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새해 맞이)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니요”라고 회고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명은 말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향했다. 이은숙은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요.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면서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쾌전(快廛:큰 가게)이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요. 밤중이라도 큰 쾌전을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6~7일을 달려 이회영 일가는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강화학파의 행적을 추적한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두 행차가 서로 교차되는 순간, 응당 거기엔 억제되었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이건승이 남긴 망명 기록 해경당수초 3책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망국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순탄하지 못할 앞날도 감정의 표출을 자제케 했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의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 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