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초점이 욕망에서 능력으로, 대상의 가치에서 주체의 가치로 전이되는 현상은 이솝 우화 “여우와 신 포도”에서도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여우는 주렁주렁 열린 잘 익은 포도송이를 보고 군침을 삼킨다. 여우는 포도를 따먹으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몇 번 포도를 향해 발돋움을 해보다가 되지 않자 “저 포도는 아주 실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가 버린다. 잘 익어서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포도가 갑자기 “신 포도”로 전락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처음에 여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맛있는 포도(가치 대상)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여우는 곧 포도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원하는 대상을 얻지 못해서 포기한다는 것은 실패자 또는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능력으로 인해 주체의 가치가 추락할 위험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우가 단순히 욕망의 대상을 포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가치가 실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포도가 시다면 설사 포도를 따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먹지 않을 것이다.
“줘도 안 가진다”는 식으로 여우는 자신의 욕망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그렇다면 포도를 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능력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며 이에 따라 여우는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닌 셈이 된다.
요컨대 표면적으로 여우는 대상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포도가 달까 실까?), 그에게 정말 문제되는 것은 포도를 따먹는 데 실패함으로써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인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 문제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경우처럼 욕망에서 능력으로, 대상의 가치에서 주체의 가치로 전이된다.
물론 『벌거벗은 임금님』과 『여우와 신 포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욕망에서 능력으로의 전이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경우에는 대상의 가치를 과장하는 결과를 낳았고(존재하지도 않는 옷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이 된다), 『여우와 신 포도』에서는 대상의 가치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먹음직스런 포도가 신 포도가 된다).
그 이유는 두 이야기에서 문제되는 욕망과 능력의 관계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경우에 문제되는 능력은 즐길 줄 아는 것, 즉 향유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욕망을 품는 데 필수적인 전제이다. 능력이 없으면 욕망을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무능력 때문에 평가절하될 위험에 빠진 주체(왕)는 대상의 가치를 과장하면서 그것을 향한 욕망을 가장하게 된다. 반면에 『여우와 신포도』에서 문제되는 것은 향유의 능력이 아니라 획득 혹은 실현의 능력이다(이 이야기는 여우가 현실에서와는 달리 포도를 즐길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여우의 무능력은 다만 포도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데 있을 뿐이다. 즉 획득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욕망은 향유의 능력을 전제하지만 획득의 능력은 전제하지 않는다. 여우는 자기가 포도를 딸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전에 이미 포도에 대한 욕망을 품는다. 욕망과 획득의 능력은 서로 무관한 독립 변수다. 이 때 주체의 가치가 실추되는 것은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 때문이며(욕망은 있는데 능력이 없다), 주체는 욕망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이런 불일치 상태를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이렇듯 욕망과 획득의 능력은 각각 독립적인 변수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4 가지 조합 가능성을 갖는다.
1) 원하고 획득할 수 있는 경우
2) 원하고 획득할 수 없는 경우
3) 원하지 않고 획득할 수 있는 경우
4) 원하지 않고 획득할 수 없는 경우.
『여우와 신 포도』에서 문제되는 것은 두 번째 상황(원하지만 획득할 수 없음)인데, 그것은 많은 이야기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한겨울에 감이 먹고 싶은 노모(老母)의 이야기가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먹고 싶다/구할 수 없다).
이런 류의 민담에서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과정이 줄거리의 중심축을 이룬다. 즉 감을 구하러 간 아들은 신령님의 도움을 얻고 그렇게 해서 욕망과 능력의 일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먹고 싶다/구할 수 있다).
『여우와 신 포도』에서 여우는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어쨌든 이 줄거리 역시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에서 일치로의 방향을 취한다는 점에서는 감 이야기의 줄거리와 동일하다. 두 이야기의 줄거리를 욕망과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먹고 싶다/구할 수 없다→먹고 싶다/구할 수 있다(감 이야기)
먹고 싶다/딸 수 없다→먹고 싶지 않다/딸 수 없다(포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