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9년 여름에 베수비오산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이 매몰된 대재앙은 참담하게 슬프고 불행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1천년이 넘는 로마사에서는 냉정하게 바라보건데 로마인들이 견뎌야 했든 수많은 불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이곳에 매몰된 지 1800년이나 지난 19세기에 발굴이 시작되어 20세기 부터 21세기인 오늘날에는 가장 관광객을 많이 끌어모을 만큼 유명해졌다. 그 때의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을 상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이 상상을 덮어버린다.
로마관광객들이 포로 로마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폼페이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든 타키투스(고대 로마시대 역사학자, 가이우스라고도 한다)의 기술에는 폼페이라는 이름 조차 남아 있지 않다.
20세기 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폼페이도 동시대인에게는 그냥
'캄파냐 지방의 풍요로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폼페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수없이 존재했든 전형적인 지방도시인 채로 봉인되어 있다가 2천년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발굴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폼페이 비극의 경우는 고베 대지진과 달리 100% 천재지변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직후에 적절한 대책으로 희생자 수를 줄이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폼페이의 비극을 다룬 저술은 바닷가 모래알 만큼이나 많다. 일반적 통사와는 반대로 단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글을 '모노그래프'라고 하는데 그 중 일부를 간략하게 기술해보자
나풀리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냐 지방 사람들은 지진에 익숙해져 있었다. 곳곳에 온천이 지금도 솟아 오를 정도니 그냥 화산지대다. 그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베수비오 산과 그 기슭에 폼페이에 이르는데, 네로 시대인 17년 전( 서기 62년)에는 강한 지진이 폼페이 일대를 덮쳤다.
그리고 서기 79년 당시의 폼페이는 17년 전의 지진 피해를 거의 복구한 상태였다.
허지만 베수비오 산이 분화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9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화산 정도로 간주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이 검투사에게 호응한 노예들이 도망쳐 들어갈 수 있었을 정도였다.
휴화산이나 활화산 특유의 거친 바위나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사망자 수를 늘이는 결과를 낳았다.
누구나 여느때의 지진이 또 일어났다고 믿고 진동이 가라앉을 때 까지 집안에 숨어서 기만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진동만으로 끝아지 않았다. 진동에 이어 불덩어리 같은 돌맹이가 비오듯 쏟아졌다. 낱개로는 가볍지만 겹겹이 쌓이면 지붕을 짓누른다. 지붕이 무너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집에서 탈출할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화산이 폭발한 지 대여섯 시간이 지난 뒤였다. 분화가 시작된 것은 오후 1시께였다고 추정한다. 사람들이 탈출을 결심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무렵은 쏟아지는 돌맹이는 더욱 커지고 낙하 속도도 빨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옷가지나 쿠션으로 머리를 가린 채, 초롱불빛에만 의지한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지만 이 화급한 피난민들의 숨통을 끊은 것은 그후 소리도 없이 덮쳐온 화산재였다.
화산재를 잔뜩 머금은 안개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사람들을 질식시켰다.
불운을 더한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아무리 도망쳐도 이 안개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세는 이 안개구름을 서지(surge)라고 부르게 되었다.
폼페이에서 5킬로미터쯤 남쪽에 있는 스타비아이(오늘날의 스타비아)에서도 서지로 인한 희생자가 나왔다.
폼페이에서도 헤르클라네움에서도 희생자들은 대부분 질식해서 죽은 듯하다.
8월 24일 오후 1시에 시작된 이 비극은 이튿날인 25일 아침에는 이미 끝나 있었다.
폼페이도 헤르클라네움도 4미터 높이로 쌓인 돌맹이와 화산재 밑에 매몰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화산재가 섞인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이 돌맹이와 화산재 더미는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희생자 수는 2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5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다.
폼페이 인구는 1만 5천 내지 2만 명었던 모양이다.
바닷가 피한지인 헤르클라네움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해변으로 달아났지만 지진으로 바다도 거칠어져 배가 접안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산재가 섞인 구름은 이들도 감싸 버렸다.
잿더미를 발굴하는데 속에 빈 공간이 자꾸 생겨나 있더라,
뭘까 하고 회반죽을 끓여붇고 굳혔드니 사람들이 나온다
키우든 개도 나오고.
서기 79년 여름의 이 비극에는 리포터가 한 사람 있었다
18살의 조카가 외삼촌의 양자로 가서 폭발 당시 외삼촌의 근무지인 군항 미세노에 함께 머물고 있으면서 대 기록을 남긴 것인데
현장으로 배를 타고 달려간 외삼촌의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두 통의 편지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편지에는 현장의 비극을 상세히 기술했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보듯 그림이 그려지는데 너무 길어지니 소개는 생략하자
원래 모습의 형태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화덕이 있는 식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