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일제의 감옥 제도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寺內 : 데라우치-편집자 주*) 총독 암살 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집행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의 뭉우리 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거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 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7,8삭 만에 어머님이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 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에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 간수 한 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님은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주랴?"
하시고 언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님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님은 참말 거룩하시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뿌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님이 하루 두 번 들여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받아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 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내게 얻어먹는 편이 들고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채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퉁퉁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므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끌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끌른 자리의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 군은 옴이 올라서 옴 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 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 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맑은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서 최명식 군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등(佐藤)이라 하는 간수 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세워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 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 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햇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 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만기(滿期)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즉, 감옥의 간수로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入監者)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 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을 마비시키게 한다. 예(例)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다.
그도 친한 친구들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오,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을 하거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다.
10. 불한당의 괴수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 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 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 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날더러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날더러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이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 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퍽이나 반가와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 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 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요,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 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 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이 자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찌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길래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로 아마 북대인가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 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活貧黨)이니 불한당(不汗黨)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錢財)를 빼앗았으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끝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 있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에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 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 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隱諱 : 숨기고 꺼리는 것 - 편집자 주*)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강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고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하는 허두로 시작된 김 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 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신벌군(以臣伐君 : 신하로서 임금을 들어 치는 것 - 편집자 주*)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의 무리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의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快事 : 통쾌한 일 - 편집자 주*)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老師丈)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하였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 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有司)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 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총괄하였다. 1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목단설과 추설 전체의 대회요, 또 수시로 '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 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레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11. 도적만도 못한 단결로는 그들은 대회에 참여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 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 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 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靑丹) 장을 치고 곡산 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 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 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 별배로 앞 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 당당하게 청단 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오. 장에 볼 일을 다 보고 질풍 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으로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친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오?"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만으로 되겠소? 기위 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 - 도적질한 재물 - 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 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 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 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延聘)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예불은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전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 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채우고 도로 내보내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滿山枯木一枝靑 : 온산의 나무가 말라 죽었으나 오직 한 가지가 푸르다는 뜻 : 편집자 주*)의 기개가 있었다.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嵬嵬落落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
라 한 불가(佛家)의 구(句)를 나는 도 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明治 : 당시 일본의 왕이던 메이지를 말함 - 편집자 주*)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大赦 : 사면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 편집자 주*)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 삭을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자기의 3분의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경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俄領 : 러시아 땅 - 편집자 주*)에 있는 그 부친과 친아우를 그려서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和龍縣)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치러 버린 3년 나머지를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 구(金龜)를 고쳐 김 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전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12. 다시 인천 감옥으로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넘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 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 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戊戌)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來遠堂)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십 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 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 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할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왔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文鍾七)이다. 늙었을망정 젊었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 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오.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 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날더러,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 때에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 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 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 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에는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오."
"역한 - 징역 기간 - 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욱이나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것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고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 자가 내가 17년 전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이는 날이면 모처럼 1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우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 - 감옥에서 주는 밥 - 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보다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여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하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달이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 켤레나 담배 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熱則熱殺 梨 寒則寒殺 梨(더울 때는 더위로 아사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아사리를 죽여라)'의 선가(禪家)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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