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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2장, 3장, 4장, 7장, 8장, 13장, 25장, 48장, 67장, 68장, 83장, 91장, 102장, 109장, 125장, 이해와 감상, 요점정리, 참고(표기상의 특징)
우리나라의 여섯 성군이 나시어 하는 일(건국 위업)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십니다. (이 일은) 중국 고대 성군들이 하신 일과 일치합니다.
# 해동 → '발해의 동쪽'이란 뜻의 말로, 우리나라의 별칭임 # 육룡 → 하늘의 뜻을 받은 여섯 분. 즉,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여섯 임금 # 일마다 → 하시는 일마다. 여기서 '일'은 '조선 창업'에 관계되는 일이다. # 고성 → 중국의 옛 훌륭한 임금(天子)을 가리키는 말. 특별히 중국의 역대 건국자를 가리킴 # 동부 → 부절(符節)을 맞추는 것처럼 '서로 부합하여 차이가 없이 일치하다'라는 뜻이다. '부절'이란 옥이나 댓조각 따위로 만들어 글자를 새긴 것을 둘로 쪼개어 따로따로 가지고 있다가 서로 맞추어 보게 되어 있는 신표로 쓰이는 물건이다. # 제1장 ⇒ 노래 제목인 '용비어천가'의 의미를 설명한 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혈통을 여섯 마리 용에 비유하여, 역성 혁명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태조의 선조 때부터 오랫동안 다져진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1절 3구체로 형식에 있어서 파격을 이루는 장이고, '해동장'이라고도 불림)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좋게 피고 열매가 많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물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냇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갑니다.
# 1절 → 기초가 튼튼한 나라는 내우외환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음으로 해서, 문화가 융성하게 발전하고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는 뜻.(은유법) # 2절 → 유서깊은 나라는 내우외환 속에서도 그 혈통이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길이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뜻. (은유법) # 제2장 → 용비어천가 125장 중 '30,67,68장'과 더불어 순 우리말로 이루어진 장. 고사가 인용되지 않았으며,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장이며, '근심장(根深章)'으로 불림. 조선왕조의 창업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대에 걸쳐 조상님들이 애써 쌓고 쌓은 성덕의 결정이며, 그 연원이 매우 심원하고, 또 앞으로의 발전과 번영이 무궁하리라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주나라 대왕(고공단보)이 빈곡에 살으시면서 왕업을 이루어 주나라를 열으셨습니다. 우리 시조(목조)가 경흥에 살으시면서 왕업을 이루어 조선왕조를 열으셨습니다.
# 제3장 → 전절에서 보듯이 주 나라의 왕업이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원인이 비롯되어, 은나라에 갈마들어 천하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씨의 선조의 사실(史實)이 그와 일치됨을 후절에서 설명함.
주나라 선조 후직의 이름은 기(棄)였다. 농사를 잘 지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요(堯)임금이 그를 불러 농사(農師)로 사았고, 순임금은 그를 태국에 봉하였다. 후직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불굴(不窟)이 그 직책을 이었으나,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禹) 임금은 농정을 폐하였다. 불굴은 아들 국도와 그의 아들 공유와 함게 기부에 가서 살았다. 바로 공유가 나라를 세운 곳이 빈곡이었다. 공유의 9세손인 고공단보, 즉 여기서 말하는 대왕이 빈곡에서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백성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주나라 창업의 기틀이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 목조께서 전주에서 사는 동안 태수와 사이가 나빠져서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를 할 때, 170호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목조가 다시 함길도(함경도)로 옮기게 되었을 때, 그들 170호의 백성들도 그를 따라 옮겼다. 그 뒤 목조는 원나라에 귀속하여 경흥의 오동으로 옮기고, 오천호 처소의 다루가치의 벼슬을 지냈다. 이때 동북방 사람들이 모두 심복하고 모여 들었는데, 여기에서 조선의 왕조 창립의 기틀이 비롯되게 되었다.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가) 북쪽 오랑캐 사이에 가셔서 살 때, 북쪽 오랑캐가 침범하므로, 기산 밑으로 옮기신 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익조가) 여진족 사이에 가셔서 살 때, 여진족들이 침범하므로, 덕원으로 옮기신 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 적인 → 북쪽 오랑캐의 ('북적'에 해당) # 서리예 → 여럿 있는 가운데의 그 사이 # 갈외어늘 → '덤비다, 적대하다, 침범하다'의 뜻 # 야인 → 여진족
공유의 9세손인 고공단보가 그 조상인 후직과 공유의 업을 닦기에 힘쓰며, 덕을 쌓고 의를 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임금으로 받들었다. 그 후에 적인(북쪽 오랑캐)이 빈곡을 침범하여 피폐(皮幣)와 견마(犬馬)로 섬기어도 면할 수 없고, 주옥(珠玉)으로 달래어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백성 중의 원로를 모아서 "적인이 욕심내는 것은 정녕 우리의 땅이다. 본디 땅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인데, 이제 그 땅을 억지로 지키려면 도리어 사람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설사 임금이 없은들 어떠하리오. 나는 이 곳을 떠나리로다." 하고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빈곡을 떠나서 기산 밑으로 옮기었다. 빈곡 사람들이 모두 고공단보를 인인(人仁)으로 숭앙하며 그 위인에 따랐다. 이웃 나라에서도 모두를 고공의 어짐을 듣고 많이 모였다. 이에 고공이 나라 이름을 고쳐서 '주(周)'라 하고 나중에 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목조의 뒤를 이어 익조도 그렇게 하여 덕과 인심을 얻으니, 오랑캐 장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하므로 적도로 피하였다가 덕원으로 옮겼다. 이에 따르는 경흥 백성들이 많아서 시장과 같았으니, 이것이 다 하늘의 뜻이었다.
붉은 새가 글을 물고 와서 (주나라 문왕의) 침실 문 앞에 앉으니, 무왕(武王)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데에 있어 하늘이 내리신 복을 보인 것입니다. 뱀이 까치를 물어 큰 나뭇가지에 얹으니, 이것은 태조가 장차 임금이 되려하는 데 있어 경사스런 징조가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 이페 → 잎에, 방문에, 지게문(戶)에 *입(口), 잎(戶), 닢(葉). # 성자혁명 →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치고 중국을 통일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일 # 제호 → 하늘이 내리는 복, 천복(天福) # 즘겟 → '즘게'는 나무, 특히 큰 나무, 살아있는 나무의 뜻으로 많이 씌었다. 'ㅅ'은 사잇소리 # 성손장흥 → 도조의 손자인 이성계가 장차 일어나 조선을 건국하는 일 # 몬졔시니 → 먼저이시니, 먼저이셨습니다.
주나라의 문왕 때 어느날 문왕의 침실 문 앞에 붉은 새가 '경승태자길 태승경자멸(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 부지런한 자는 길하고 게으른 자는 망한다)'이라고 붉은 글씨로 쓴 문서를 물고 왔었다. 도조(度祖)가 큰 나무에 앉은 까치 두 마리를 활로 쏘아 한번에 다 떨어뜨렸는데, 큰 뱀이 물어다가 다른 큰 나무 위에 얹고 먹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였다.
태자(계력)를 하늘이 가리시어, 그 형(태백)의 뜻(아우 계력에게 나라가 전해지게 하려는)이 이루어지므로, 계력의 성손인 무왕을 (하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시어, 원나라 황제의 명령이 내리시거늘, 환조의 성자(聖子)인 태조를 (하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 갈해샤 → '가리다, 고르다, 선택하다' 의 뜻임. # 제명 → 황제의 명령
주나라 태왕에게 아들 셋이 있었으니 태백, 중옹, 계력이 그들이다. 태왕 때에 이미 상 나라의 국운이 점점 기울어지고 주 나라의 세력은 날로 강해지매, 태왕은 상 나라를 치려는 생각이 있었으나 맏아들 태백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태왕은 막내 계력에게 왕위를 전하여 문왕 계력의 아들 창(昌)에게 나라를 맡길 생각이었다. 태백이 아버지 태왕의 뜻을 알고 중옹과 더불어 멀리 형만 땅으로 몸을 피하여 달아나 버렸다. 도조가 세상을 뜨자 맏아들 자흥이 계승하였으나 이내 죽고, 그의 아들 천계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도조의 둘째 아들인 환조가 왕위를 잇고, 그의 아들 태조에게 미치게 하였다.
(은나라 주왕을 치라는) 말슴을 여쭈는 사람이 많되 (무왕이) 천명을 의심하시어 (머뭇거리니),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은나라 주왕을 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이씨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되 (이태조는) 천명을 몰라 (혁명을 주저하니), 하늘이 꿈으로 알리셨습니다.
# 말씀 → 팔백 제후가 은나라 주(紂)왕을 쳐야 하다고 말한 사실을 가리킴. # 놀애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앞서 "서경 성밖에 불빛이요, 안주성밖에 연기로다. 이 원수(이성계) 그 사이에 다니시거니, 우리 백성을 구하시옵소서." 라는 동요가 진중에서 불리었으며, 민간에서는 '木子得國之歌(李씨가 나라를 얻는다)'가 불리웠다고 한다. # 제13장 → 꿈을 통하여 하늘의 계시가 내린 신이로운 징조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진중에 불리워진 노래'는 '서동요'의 배경설화와 비슷한 유형을 가지고 있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주나라 무왕에게 팔백 제후가 은나라 주왕을 치라고 아뢰니, 무왕은 천명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 후 2년 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주왕을 치기를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무왕은 내 꿈으로 보나 점괘로 판단하나 천의(天意)가 내게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반드시 주(紂)를 쳐서 이기라 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말기에 이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에, 이씨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가 떠돌기도 하고 불리워졌으나, 그 자신은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모르시므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는데 꿈이 신인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내어 주며, "공의 자질은 문무를 겸하고 백성이 모두 심복하니, 이 자(尺)를 가지고 나라를 바로 잡을 이가 공이 아니면 누가 있으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송나라 태조의) 덕망이 저렇게 높으시므로, 가다가 돌아오는 군사들이 당신(송태조:조광윤)께 황포(왕복)를 입혀 드렸습니다. (환조의) 충성이 매우 지극했으므로, 죽다가 살아난 백성들이 아드님(이태조)께 곤룡포를 입혀 드렸습니다.
# 자걋긔 → 자기에게 # 황포나 곤복을 입혀드리다 →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다는 뜻임.
후주(後周) 공제 때, 후한의 군사와 거란병이 토문 동쪽으로부터 내려오니, 조광윤이 절도사로 금군(禁軍)을 이끌고 이것을 막으러 변경을 떠났다. 부하인 묘훈이 천문을 잘 보다가 마침 해 아래에 또 하나의 해가 있어 검은 빛이 오래 움직이는 것을 보고, 조광윤의 문리(門吏)에게 이것은 천명이라고 하며 조절도사를 모시어 천자로 삼은 후에 북쪽을 정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때 조광윤은 술에 취하여 자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몰려가 조광윤이 말하기도 전에 만세를 부르고 기뻐하며 황포(왕복)를 입혀 다시 변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 태조의 선조인 환조께서는 공민왕 때 왕명을 받들어 변방의 치안에 많은 공을 세웠고, 이러한 충성을 쌓은 결과로 그 아들 이태조를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태조가) 골목으로 말을 지나가게 하시어 (높은 언덕으로 뛰어 넘어가니, 뒤쫓던) 도적이 다 포기하고 돌아가니, 반 길 높이의 언덕을 다른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태조가) 석벽에 말을 올라가게 하시어 도둑(왜적)을 다 잡으시니, 몇 번 뛰어오르게 한들 다른 사람이 (그 절벽을) 오를 수 있겠습니까?
# 굴허 → 구렁에, '굴헝'은 '구렁'의 원형으로 '골(谷), 굴, 골목'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골목'임 # 현 → 몇(관형사) # 제48장 → 장수들이 불가능하다고 말린 왜적과의 싸움을 선두에서 지휘해서 왜적을 섬멸하였던 이성계의 기개와 용맹을 다룬 이와 같은 대목은, 영웅의 시련과 투쟁을 나타냄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강한 신뢰와 설득력을 갖게 할 수 있게 함.
금 태조가 적에게 쫓겨 골목에 들어 길을 잃었는데, 급하게 한 길이나 되는 언덕을 뛰어 넘어가니, 적이 더 이상 쫓아 오지 못했다. 이 태조가 지리산에서 왜적을 토벌할 때, 왜적이 절벽 위에서 대치하거늘 장수들이 모두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데도, 이성계가 칼등으로 말을 쳐서 한달음에 올라가니, 군사들이 그를 뒤쫓아 적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원나라 백안의 군사가 송나라를 치려고) 강(전당강) 가에 진을 치고 자는데, 밀물이 사흘이나 이르지 않다가 떠난 뒤에야 그 자리가 물 속에 잠기었습니다. (이 태조가) 섬(위화도) 안에서 묵으실 때에, 큰 비가 사흘이나 계속되었는데, 섬을 비운 뒤에야(빠져 나온 뒤에야) 온 섬이 물 속에 잠기었습니다.
# 제67장 → 순우리말로 표현된 장 하늘이 태조를 보호하고 있다는 영웅 서사시적 모티프로, 그 이면에 감추어진 모티프는 일종의 반역행위인 회군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늘의 뜻이 신이로운 징조로 나타남으로써 역성 혁명의 계시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용비어천가 67장에서 89장까지는 태조가 여말 정치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반대파 세력을 꺾고 위화도 회군, 창왕 폐위 등 정치 권력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이 일화적인 사실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원나라 세조 때, 중서승상 백안이 송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전당강 기슭에 주둔시키니, 항주 사람이 이를 보고 곧 조수에 잠길 것이라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밀물이 사흘 동안이나 밀려오지 않다가 떠난 뒤에야 그 곳이 물 속에 잠겼다. 이 태조가 위화도에 군사를 주둔시킬 때, 장마비가 수 일 동안이나 내렸으나 물이 불어나지 않다가, 그 곳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온 섬이 물 속에 잠겼다고 한다.
(원나라 백안이) 전당강 가에 진을 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밀물이 드는 것을 막으시니, 이는 하늘이 일부러 (백안을 위한 기적을) 남에게 보인 것이로다. (이 태조가 위화도에 주둔하였을 때) 장마를 그치지 않게 하고, 홍수를 다른 곳으로 돌리시니, 이는 하늘이 일부러 (이성계를 위한 기적을) 우리에게 보인 것이로다.
# 말이샤 → 말리시어 # 한비 → 큰비, 장마 # 날므를 → 날물을, '날물'은 '썰물'이 아니라, '나는 물' 즉 '큰물'을 뜻함. # 외오시니 → 돌리시니, 에워가게 하니
제67장과 동일
임금 자리가 보배라 하므로 (하늘이 왕위를 이으라는) 큰 명령을 알리려고 바다 위에 금탑이 솟게 하였습니다. 자(尺)로서 제도가 생기고, 어진 정사를 맡기시려고, 하늘 위에서 금척을 내려주셨습니다.
# 맛됴리라 → 맡기리라 # 83장 → 내용상 13장과 관련됨.
고려의 태조(왕건)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에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우뚝 서 있고, 자기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 태조가 잠저(潛邸: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에 있을 때에, 꿈에 신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금척을 내주며, "공은 자질이 문무를 겸하고 백성이 심복하니, 이 자를 가지고 나라를 바로 잡으라."고 하였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정도전은 태조 2년(1393)에 '몽금척(夢金尺)'이란 악장을 짓기도 했다.
(당태종이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어) 아버님을 공양할 때 돌아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흘리신 눈물을, 좌우의 신하들이 (저희들을 미워하여 흘리는 눈물이라고) 참소하여, 아버님(당고조)이 아들에게 노하셨습니다. (이 태종이 모후 산소에서 시묘하며, 그 곳에서) 아버님(이태조)을 뵈올 때 어머님을 여읜 눈물을 흘리니, 좌우의 신하들도 같이 슬퍼하여 아버님이 아들의 효성을 칭찬하셨습니다.
# 91장 → 당대를 대표하는 영웅의 모습 속에서 지극한 효성을 담은 인간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교화적인 면에서나, 태조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서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하는 의미가 깃들인 장이라 볼 수 있다.
당 태종이 궁중에서 아버지인 고조를 위해 잔치를 마련했을 때, 돌아가신 아머니를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는데, 고조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저희들을 미워하여 우는 것이라고 고조에게 참소하여 고조가 크게 노하였다고 한다. 이 태종이 모후인 신의왕후의 상(喪)을 입으실 때에, 능(陵) 앞에 여막을 짓고 있다가 태조를 뵈러 서울로 향할 때면 길에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태조저에 이르러서도 통곡하니, 좌우가 다 슬퍼하였고, 태조는 항상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근심하는 마음이 없어서 이 집에 자려 하시니, 하늘이 (한고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몸에 병이 없어서 저 집에 가려 하시니, 하늘이 (태종에게) 병을 내리게 하시도다.
# 뮈우시니 → 움직이게 하시니 # 모맷 → 몸엣 병, 몸에 있는 병 # 102장 → 태종이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태종을 보호하기 위해 하늘은 병까지 내려 목숨을 건지게 했다는 사실을 강조함.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인한 혈육내의 싸움은 역성 혁명을 통해 세워진 조선의 당위성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민심 수습과 혁명의 당위성을 재인식시킬 필요성이 증가되었고, 이에 대한 수습책으로 태조를 이은 태종 역시 하늘의 뜻을 이어 받아 조선을 이끌 후계자임을 알려야 했다. 바로 이런 의도하에 마련된 장이라 볼 수 있다.
흉노가 마읍에 침입하자 한신(韓信)도 이에 가다하였다. 한 고조가 이를 토벌하다 평성에서 포위되었다. 7일만에 조(趙) 나라로 돌아와 조왕(趙王) 장오를 핍박하자, 조나라 재상 관고와 조오 등이 노하여 고조를 해하려 하였다. 고조가 한신의 잔당을 파하고 조나라 고을인 백인에서 유하려다가, 지명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栢人을 迫人으로 고치면 사람에게 핍박을 당한다는 뜻) 자지 않고 갔기 때문에 조왕으로부터의 해를 면하였다. 즉, 고조를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그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정도전의 난을 평정한 뒤, 논공행상에 있어 불평을 가진 박포가 방간을 충동하여 태종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에 방간이 태종을 해하려고 자기 집으로 청하였으나, 태종은 갑자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태종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이 갑자기 태종에게 병을 내렸다는 뜻이다.
말이 병이 깊게 들어 산마루에 못 오르거늘, (주나라 왕비가 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지 못하여) 군자를 그리워하시며 술잔에 (술을) 부으려 하셨습니다. 말이 화살에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태종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태종의 비 원경왕후가) 성종을 모시고 저승에 가려 하셨습니다.
# 산척 → 산마루, 산등성이 # 군자 → 낭군, 남편 # 금뢰 → 금으로 만든 술잔 # 성종 → 임금(태종)
주나라 문왕의 후비가 남편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를 지었다. "저 산 언덕에 올라보고 싶으나, 내 말이 이미 병들었도다. 금잔에 술이나 가득 기울여, 깊이 이 시름 잊어 볼까나"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군사가 타고 나갔던 태종의 말이 화살을 맞고 들어오므로, 원경왕후는 태종이 전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전장에 나가서 태종과 같이 죽으려 하였다. 여러 사람이 말려도 듣지 않고 가다가 전승의 소식을 듣고 비로소 돌아왔다.
천 년 전에 미리 정하신 한양에 인덕(仁德)을 쌓아 개국하시어 왕조의 운이 끝이 없습니다. (비록)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셔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셔야 더욱 (왕조의 기반이) 굳으질 것입니다. (후대의) 임금들이여 아십시오. (하나라 태강왕이) 낙수에 사냥을 가 있으면서 할아버지(우왕)를 믿었던 것입니까?
# 누인개국(累仁開國) →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 복년 → 점쳐서 정한 왕조의 운수 # 성신 → 성자신손(聖子神孫)의 준말. 위대한 후대 왕들을 지칭하는 말 # 125장 → 이 장은 국도(國都)를 찬양하고, 국운을 송축하는 데 이어서, 후대왕에게 하나라의 대강왕의 고사를 인용하여 '경천근민'의 위정자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다(他山之石). 용비어천가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장으로서,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등의 궁중음악으로도 활용되었으며, 형식상 특징은 특별히 절의 구분은 되어 있지 않으나, 내용상 3절로 구성되어 있어 1장과 더불어 파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신라 때의 중 도선의 비결(秘訣)에 의하면, 삼각산 남쪽 곧 한수의 북쪽인 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부흥하리라고 하였다.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손자 태강왕이 정사에 게으르고 또 사냥에 절도가 없어서, 낙수 남쪽까지 가서 백 일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유궁 후예가 이것을 참지 못해,하북(河北)에서 태강왕을 막아 오지 못하게 하여 그를 폐위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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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조선 건국을 찬양한 송축가로서, 건국 영웅 서사시로서의 조건을 구비한 장편 서사시로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임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등장 인물의 탄생과 성장 과정, 사업 등에 영웅적 성격을 부여하고 사건 중심으로 서술한 서사시라는 점에서 고대의 건국 신화와 일맥 상통한다. <용비어천가>는 총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의 배열을 고려하여 의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천복(天福)을 강조한 1장은 하늘에 해당하는 장으로 한 줄이고, 나무와 샘을 통해 왕조의 영원성을 그려낸 2장은 땅에 해당하는 장으로 두 줄이다. 3장 이하는 사람의 일을 다루었으므로 인(人)에 해당된다. 인(人)은 계속 겹쳐지는 여러 줄로 계속되다가 맨 끝 125장이 세 줄로 되어 있다. 이렇게 형식을 통해 <용비어천가>는 형식적 구성으로도 왕조의 창업이 '천지인' 삼재와 일치함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제목은 세종 자신이 직접 지은 것으로, "용이 날아서 하늘을 덮었다"라고 풀이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용'은 임금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건국신화적인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민간 전승되는 설화까지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당시는 신화가 통용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일관된 줄거리에 입각한 영웅의 투쟁이 나타나지 않아 긴장감이 없고, 단편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이 작품은 무조건의 사대주의(事大主義)적인 시필(詩筆)이 드러난다. 전구가 중국의 고사요, 후구가 조선 창업의 사실인데, 중국 하(夏), 은(殷), 주(周), 수(隨), 당(唐) 등의 고대 사회의 기자이적을 들어 놓고, 여기에 덧붙여 14세기의 이조적 전설과 고사를 창작해 내려고 했으니 어색한 신화를 만들어낸 듯하다. 목조를 비롯한 대조(代祖)의 신화는 거의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같고, 사실 장엄하다거나 흥미있는 줄거리가 없이 극히 빈약하다. 이것은 이 작품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유학자이기 때문에, 신화를 만들어낼 만한 상상력과 필치가 부족했고, 중국 고사의 지식만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작품을 위대한 영웅서사시로 승화시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 |||||||||||||||||||||||||||||||||||||||||||||||||
◆ 성격 및 갈래 : 악장, 장편 영웅 서사시, 건국 서사시, 송축가 ◆ 연대 : 세종의 명을 받들어 세종 27년(1445)에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해서, 1447년에 간행됨. ◆ 작자 : 노래 가사 → 권 제, 정인지, 안 지 한문 주해 →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신숙주, 이개, 신영손 등 서문 → 정인지. 발문(跋文) → 최 항 ◆ 구성 ⑴ 서사 (1~2장) → 조선건국의 정당성과 왕조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 송축 <개국송(開國頌)> ⑵ 본사 (3~109장) → 육조의 사적을 예찬함으로써, 건국의 합리성 찬양 <사적찬(事蹟讚)> ⑶ 결사 (110~125장) → 후대 임금들에 대한 교훈과 경계 <계왕훈(戒王訓)> # 110장~124장 : "무망장(毋忘章)" 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한결같이 마지막 구절이 '이 뜻을 잇지 마소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형식 및 표현 ① 2행 4구체의 연장체. →1행(전절)은 중국의 고사, 2행(후절)은 조선 창업의 주역들에 대한 내용으로 대구가 이루어짐. ②'우리말 노래(국문가사) - 한역시 - 한문 주해(역사적 사실이나 전설에 대해서)' 순서로 이루어짐 ③ 전 10권 5책. 총 125장의 연장체 ◆ 창작 동기 ①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널리 밝히기 위해서 ② 훈민정음의 문자로서의 가능성과 실용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③ 후대 왕들에 대한 훈계를 위해서 ◆ 주제 ⇒ 조선 건국과 왕조 창업의 정당성 ◆ 국문학사적 의의 ① 한글로 씌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한글이 반포되기 1년 전에 지은 것임) ② 15세기 국어의 표기법이나 옛말본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 ③ <월인천강지곡>과 더불어 악장 문학의 대표작이며, 역사 연구의 보조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음. ◆ 궁중음악 ① 여민락(與民樂) : 1~4. 125장의 한역시 ② 취풍형(醉豊亨) : 1~8, 125장의 한글시가 ③ 치화평(致和平) : 1~16, 125장의 한글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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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기상의 특징 > ① 8종성과 함께 'ㅈ,ㅊ,ㅍ'의 종성이 쓰인 표의적 표기법이 보인다. ② 모음조화가 철저히 지켜짐. ③ 사잇소리 표기가 훈민정음 언해본보다 더 원칙적으로 지켜졌다. [ ㄱ, ㄷ, ㅂ, ㅈ, 반치음, 여린 히읗 등의 관형격 사잇소리가 쓰였으며, 유성음 사이에서 '반치음'이 쓰인 것은 언해본보다 엄격하다. ] ④
⑤ 연철 형식을 취했으며, 한자 표기 이외에는 방점(사성점)이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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