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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참나를 만나기
나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
2016년 7월
1) 내가 마치 데이비드 호킨스 인것처럼
2) 내 인생을 비디오로 빨리 감기
설명
역설적으로
비이원성의 길은
하지 않음의 함(doing of undoing)이다.
경전이나
외적 권위에 대한
의존은 없다.
진실은
선언하지 않아도
혹은 과장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드러난다.
진실의 절대적 통치권은
갈채나 찬양의 필요성없이
빛을 발한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처럼
방향이, 그리고 그러한 진실을 발견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믿음직하고 확실하다는
진실에 의존하는 믿음과 신뢰의 길이다.
전통적으로 의존해왔던 것은 역사적 문헌과 함께 명성이나 소문이었다. 정보의 신빙성 또한 믿음과 신념의 문제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금은 역사, 교회의 승인
혹은 명성과는 독립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빠르고 쉽게 진실과 거짓을 확인할 뿐아니라
진실의 수준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진실대 거짓에서 보고한 연구의 목적이었다.
인간사회의 진화에서
이전의 시대가
권위에 대한 믿음을 특징으로 했던데 반해,
현시대는 '의심, 도전, 회의주의 시대'다.
현사회는
의견들이 충돌하고
반대증언이 반복되고 과장되는
끝없는 법정드라마와 같은
시끄러운 논쟁으로 압박받고 있다.
그 목적은
설득을 통해
위치성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 시대는
진실을 전복하고 왜곡함으로써
자기애를 미화하는
가차없이 과시적인 논쟁과
소사적 과장의 시대다.
역사적으로
논쟁은
종교의 진화에서 생겨났고,
종교분쟁은
과거 수많은 세기 동안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의견들이
주관적이고 편향되어 있으며
주로 소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은 이상,
중대한 문제에 이르렀을 때
그러한 것에 의존할 수는 없다.
수백만 인간들의 삶이
세속적 관심사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속적 관심사가 정말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볼때 그것은 영적 진실에 대해 부차적이다.
영적 진실의 귀결은
일시적인 세속적 삶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장기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진화를
어떤 권위있는 정보의 원천에 의탁하는 것은
가볍게 내디뎌서는 안되는
중요한 한발짝이다.
종교적/영적 오류의 어두운 면은
육체적 삶을
온전치 못한 것에 의탁하는 것만큼이나
재난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탐구를 시작하기 전에
제자는 특정한 길이
비판적 기준을 만족시키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수많은 거짓된,
그리고 심각한 한계를 가진
영적/종교적 신념체계, 스승,
단체들이 있다.
에고/마음의 지각은
제한되어 있고
환상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며
인상받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두는 게 좋다.
마음자체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도,
혹은 데카르트의 레스 이테르나(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텐사/엑스테르나(있는 그대로의 실상-창조)를
식별하지도 못한다.
영적 온전성의 첫번째 요구는 가능한 모든 방법에 의거하여 길을 확인하는 것인데, 그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1. 역사적 기록
2. 진실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세상에 미치는 효과
3. 의식의 측정수준과의 부합
4. 주관적, 경험적 각성에 의한 확인
영적교육
오락과
유행하는 매력적인 것들로 하여
곧고 좁은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구도자는 운이 좋다.
사람들은
진정한 가르침을 찾아서
몇 생을 보내며,
매력적이고 미화된 진실에서의 일탈의 유혹에 의해
곁길로 빠지게 된다.
이러한 일탈은
순진한 사람의 내면의 아이를 끌어당기는
허구적이거나 낭만적인
공상임이 밝혀진다.
영적인 동화는 넘쳐나고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는데,
이들에게 영성 꼬리표가 붙은 것은
무엇이든 마술적 매력으로 물들어 있다.
처음의
무비판적 열정과 탐구기간에는
으레 그런 단계를 거치기 마련이다.
초기 주된 문제는
진정으로 영적인 실상과
아스트럴, 불가사의 혹은
초자연적 영역들 간의 차이에 대한
앎의 결핍이다.
순진한 이들에게
후자의 대안은
경이롭고도 인상적으로 보인다.
이는 인간경험에는
엄밀하게 물질적, 감정적, 정신적인 것외에
놀라만큼 많은 분야가
더 있다는 발견으로 인한 것이다.
그 결과
딱 들어맞는 영독은
예전의 순진한 구도자나 초보자에게는
정말로 인상적이다.
또한
가능한 실상들의
새로운 차원전체의
겉보기에 놀랍기 그지없는
경이로움으로 인해
곁길로 새는 것도 쉽다.
이른바 영적이라고 하는 대중적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사실상 허구이며, 그 평균적 진실수준은 190으로 측정되는데, 다른 차원등에 대한 환상을 미화하는 번지르르한 영적 잡지들 또한 마찬가지다.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 다른 공상적 차원은 말할것도 없고,
이 차원조차 마스터하지 못한
순진한 구도자에게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다른 차원의 궁극적 실상들이 있으며,
그에 대해서는
고수, 트랜스 리더, 영매, 투시자, 무당, 마스터, 스승, 안내자, 점술사,
점성술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 매력에 더해,
이러한 오락의 다수는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의 매혹적인 관념에
유혹당한 것은 물론
인상받고 영향받은 충실한 추종자들과
열광자들을 대규모로 수집해놓았다.
또한 고대의 비전, UFO종교, 원시제전, 마법의 상징, 수정, 주문, 에너지 조작, 다른 영역에서 온 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고전적인 영적 전통과
온전한 경전에서는
초자연/불가사의를 반박하지 않으나
"거기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진실한 영성의 대가와
깨달은 스승들 또한
동일한 조언을 처방한다.
의식측정연구에 따르면
영적 유혹에 넘어가 타인에 대한 권력의 환상적 획득에 굴복한
다른시대의 추락한 구루들은 물론
저쪽의 그런 모든 실체들에 대해서도 측정할 수 있다.
이른바 아스트럴 서커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다.
전문기술을 가진 고수들은 지상의 시간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기술을 완성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다. 노련한 전문 판매업자처럼 이들은 본능적으로 약점이난 결함을 낚아채는데 특히 미화하는 성향을 노린다. 만약 그런 실체들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그대로라면 그들은 오래전에 천상계로 진화해갔을 것이다.
보통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온전하고 믿을 만한 영적진실은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비상한 것을 구하는 것은
부주의한 이들 앞에 놓인 함정이다.
유체이탈한 에고는
사실상 육체안에 있는 에고와 같으며,
이제 그것은 물질적으로 붙잡기 어렵다는
신비스러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다른 차원에 대한 탐구는
의식의 유도되고 변성된 상태에 의해
촉진되고 학습될 수 있다.
주된 유혹은
어린 아이같은 호기심의 유혹이다.
한편으로 200이상으로 측정되지만 보통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는 그 어떤 정보도 같고 있지 않은 저쪽의 어떤 실체들이 있다.
상승하는
쿤달리니 영적 에너지장의 귀결로서
의식수준이 500대 후반에 이를 때,
초상적 성질들이
경험적 실상으로서 일어난다.
고전적으로
싯다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들은
선형을 넘어선
의식수준의 정상적 표현이다.
제자는
그러한 현상이 사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그저 지켜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영적 에너지 자체에 특유한 성질이라는 것이
자명해질 것이다.
그런 현상은
사적인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현상은
사람이 기적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저절로 펼쳐지는 것을 목격하는 동안
인상적일 수 있다.
그러한 것이 기적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선형적 마음이
원인과 결과의 제한된 지각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보이는 일의 펼쳐짐은
더 높은 전망에서는 정상일 뿐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영적 현상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종파의 신비주의자들과 성인들이 설명하고 있으며,
전 역사에 걸쳐 보고되어 왔다.
측정에 따르면
성인의 지위는
570과 그 이상을 나타낸다.
싯디는 정말
보기에 경이로운 데가 있으며,
그 영적 에너지 장은
저절로 타인에게 전이되어
카르마적 경향과 일치하는 치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듯
기적적인 일은
의지에 따른 것이거나
통제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의 귀결도 아니다.
이렇듯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참나의 치유력의 귀결이다.
싯디는
저절로 일어나며,
사이코메트리, 투시, 투청, 천리안
그리고 다른 텔레파시적 능력들을 불러일으킨다.
싯디는 또한
예측 불가능하며 덧없다.
다양한 기간동안
어떤 것들이 오고 가는데,
지속기간은 몇주에서 몇달, 몇년일수도 있다.
사전 경고가 있을때,
이런 현상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제자는
소유하려는 유혹 및 그것이 암시하는 특별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다.
온전성과 겸손함은
그러한 현상의 저작권에 대한 주장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환상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해준다.
싯디에 대해서는 의식수준의 초월에서 상당히 길게 논의했다.
실용적 관점에서
싯디의 출현은
또한 세상사에 대해
정리를 시작하라는 신호이기도 한데,
그것은
세상사를 처리하는 기능의 일부가
끝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직 가능한 동안에
실용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지혜의 문제다.
동기부여와 가치관은 물론
능력이 변할 수 있으며,
이전에 대단히 가치와 중요성이 있는듯 했던 것이
나중에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로 비칠수도 있다.
그래서
성공 및 부와 같은 것들은
재미난 놀이가 되고,
마침내 성가신 일,
그 다음에는 방해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동은
의식진화의 귀결인데,
의식의 진화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욕구/소유/추구에서
노력이 필요없는 끌어당김으로 이동했다.
낮은 의식수준에서 노력은
인과의 맥락안에서 적용되지만
의식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현상들은
개인적 의지작용의 결과라기 보다는
에너지 장 자체에 의한 끌어당김의 귀결이 된다.
높은 수준에서는
"소유"하기 보다는
"더불어 있는것"
이 필요할 뿐이다.
앞선 상태들에 필요한 영적 정보는
그것이 필요할 때를 위해
일찍이 배워서 저장해놓아야 한다.
앞선 정보들을 일찍 듣는 것에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은
'나는 ~~에 대해서 안다'는
지성의 오만한 추정이다.
정보를
'나는 ~~에 대해 들었다'로
보유하고 있는 편이 낫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참나 각성 및 깨달음에 대한 봉헌은
엄중하고
곧고 좁은 길이다.
그래서
진지한 헌신자는,
학습가능한 기술로서
일반적으로 판매되고 제공되는
마술적이고 신비스런 불가사의 및 심령현상들이
내면의 아이에게 갖는
호기심과 매력을 우회할 것을 권고받는다.
그러한 것은
지체이며,
부주의한 이들 앞에 놓인
함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의 매력은
흥미롭기는 하나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지 않는
이국적, 외래적, 초자연적이고
비교적인 기술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
진짜 현상들의 모방에 불과하며
선형적 관심사 및
에너지 조작에의 관여로 인도한다.
진정한 신비적 능력은
전시되지 않으며,
더구나 선전되거나
대가를 받고 판매되는 일은 없다.
실재에 대한 모방은
수많은 순진한 영적 제자들 및
주요 종교의 분파들조차
곁길로 새게 만들고
속여 넘긴 오락이다.
티베트 탄트라 요가, 의사 공중부양, 탄트라 섹스 등
인위적인 방식은
에고의 팽창인데,
이는
사람이 독특하고 드문 것의
특별함과 마력으로 인해
그러한 것에 이끌린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해도
그러한 현상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며
획득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으며,
과시와 선전이 증거하는대로 영적 허영심을 반영한다.
신의 선물은 모방될 수있지만, 모조품은 진짜가 아니다. 이것은 의식수준 측정으로 할 수 있다.
진정한 싯디는
측정수눈 540에서 시작하여
570수준의 범위에서 현저해진다.
선전되는 모방은
155에서 400대 후반으로 측정된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화신이나 위대한 스승들을 초자연적인 것의 추구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적적인 현상들은
카르마적 경향 및
국소적 조건의 귀결로서
잠재성이 현실로 출현하는
자연발생적이고
비의지적인 출현이다.
수준의 혼동
에고/마음이
뭔가에 대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안다고 추정하는 것 외에
진실 혹은 추상의 수준을
혼동하는 오류가 있다.
특정한 의식수준의 자명한 실상이
반드시 또 다른 수준의 실상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측정된 의식수준의
수치표시가 잘 나타내준다.
예를들어 라마나 마하르시의 유명한 발언 "사람이 보이는 대로의 세상은 존재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를 인용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수준 720수준의 진실이며, 경험적 실상이지만 그 이하의 의식수준의 경험적 실상은 아니다.
사람의 의식발달 수준에서
경험적으로 유효하고
진실인 실상에 대해서
진실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각각의 수준은
한계는 물론이고
그와 일치하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수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예를들면 라마나 마하르시라면 두눈을 감고 차량통행이 많은 고속도로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겠지만, 똑같은 흉내를 내다가는 십중팔구 차에 치고말 보통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경험이다.
수준을 혼동하는 오류는 LSD를 복용한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육체가 없어서 날 수 있다고 믿으며 창밖으로 뛰어내린 이유를 설명해준다. 육체를 벗어난 법칙은 육체내에 있는 상태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에고/마음이 환상적인 기초위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 행위, 행실에 대해
카르마적 책임지지 않는다고 추정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누군가
다른 어떤 가설적 이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식수준에서 책임이 있다.
진실이
내용뿐 아니라
맥락적 귀결임을 각성함으로써
오류는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시기에
자신의 의식수준의 실상안에서
카르마적으로 책임과 과실이 있다.
추상의 수준을 혼동하는 것은
또한 지적영역에서의
이성의 결함이며,
여기서
맥락을 무시하는 것은
부조리함으로
귀착된다.
이는
맥락이나 논리의 법칙,
혹은 둘다를 무시하는
유명한 수사학적 오류들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의식의 각 수준은
지각된 중요성, 이해,
의미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책임성은
이해와 부합한다.
이것은 또한
법적 원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일정한 사실들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가
판사와 배심원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책성은
상황과 조건, 나이, 정신, 상태,
동기 등과 같은 요소들에 따라
가변적이다.
지금 있는 사람이 나중의 진화수준에서 있게 될 사람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각 사람마다 유책성의 수준이 다르다.
일관성
효율적인 영적 노력은
열정의 발작이라기 보다는
일관성과 끈기의 귀결이다.
각각의
영적 진화의 상태는
그 자체가 보상이 되고,
만족스러우며,
그 자체에 대해 완전하다.
이전의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그만한 노력의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내면을 향한
영적 노력에 더하여,
사심없는 봉사인 카르마 요가
또한 의식의 진화에 도움이 된다.
내적 만족이
세속적 이익이나
혹은 타인을 통제하거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보다
더욱 중요해진다.
끌어당김이
조장을 대체한다.
결국에는
세상사 및
그것의 지각된 가치에 대해
더이상 저항이 결부되지 않는다.
대신에
내적의도는
순수함과 사심없음의 하나다.
그래서
진화는
추구나 획득의 귀결이라기 보다는
과정자체의 귀결이 된다.
영적진화와 더불어
양육을
더이상 자기애적 에고가 아닌
참나에서 구하게 된다.
잠재성의 실현은
그 자체로서 보상이 되며
인정이나 이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득을 얻은 즐거움은
내적과정 자체의 펼쳐임에 대한
감사로 대체된다.
외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저절로 사라진다.
진화하는 과정이
세상속에서의 존재방식이 되면서
노력이 점점 덜 든다.
이행과 변형은
자기의 간청에 대한
참나의 반응으로서
스스로 시동이 걸리는 것이다.
영적 진화의 속도는
개인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며,
갑작스럽고 놀라운 도약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젠가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깨달음을 선택하는 이들의 운명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추구를 하겠는가?
단지
영적 정화와 앎을 구하는 것만도
이미 커다란 선물이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지?"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은 부질없다.
왜냐하면
최상의 진실을 향한
봉헌과 헌신에 의해
이미 나침반은 놓였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속도는
느리게도 보이고,
때로는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도약에 대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길고도 무미건조한
좌절의 시기로 보이는 시간을 보낸 다음이라해도
비관을 피하는 것이 현명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는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
많은 중대한 장애와 집착의
극복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노력과 진화의
보이지 않는 이로움은
인간의식의 집단적 수준자체에 대한
그 긍정적 영향이다.
진화하는
영적 헌신자 개인이
의식수준이 상당히 낮은
수많은 사람들의 부정적 효과를
상쇄한다.
의식측정연구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이
상승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낙관적 전망이
보장된다.
사람은
카르마적 이익에 대한
그 모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할 수 있다.
사람은 또한
깨달음에 대해 들은 것과
깨달음의 추구를 선택한 것에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은
정말이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전의 책들에서 보고한 것처럼 통계적으로 자기 삶의 주된 목적으로 깨달음을 선택할 가능성은 1만명 중의 한명이다.
토론
1.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세속성을 강조하며 또한 논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거나 피상적인 것을 미화하는 대중매체가 지배되는 현 사회에서는 드문 일입니다. 세속의 삶에서 어떤 진정한 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세상은
에고가
명백한 극적 표현으로 투사된 것일 뿐이므로
내적 성장을 위한
최적의 자극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환상들에
유혹당하거나 혹은
동일시나 집착을 통해
환상의 덫에 걸리기보다는
세상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세속의 파노라마는
의식수준의 전단계를
가장 명백한 표현으로 반영합니다.
그 파노라마는
식별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은데,
여기서
극단적인 것들은
외관의 밑바탕에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데
기여합니다.
2. 사람은 어떻게 참여하면서도 집착하거나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것은 회피에 이르게 되지 않습니까?
참여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동기'입니다.
활동이란
그저 사람의 "행"일뿐,
"존재"가 아니지요.
모든 표면적 사건들이
학습기회가 되어줍니다.
사람은 참여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목격자/관찰자의 수준에서
현상을 경험하며
정신 내부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분리와 무집착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는
회피나
물러남으로 귀착될 수 있지만,
반면에
무집착은
결과에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참여를 허용해 줍니다.
3. 그런데 세상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습니까?
세상 속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않는 상호작용은
내면의 에고위치성들의 귀결인
습관적 방식과 태도를
드러냅니다.
남들이
동일한 환경에 대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교육적입니다.
사람은
다른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해볼 수 있는데,
유연성을 가질때 내면의 미개발 자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고전적인 "마치 ~~인 것처럼" 실험입니다.
실험) 마치 내가 데이비드 호킨스인 것처럼...
마치 내가 프란치스코 교황인 것처럼..
마치 내가 싯디인것처럼.
사람은 추정 및
그에 따른 저항에 기초하여
상황을 회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유익한 수행은
상상 속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일정한 활동과
사람들이 즐기는 척하는 것인데,
그러면
'향유하고 기뻐하는 능력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태도와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은 놀라운 내적 발견으로 귀착되지요. 이러한 형태의 "역할 연기"는 심리극의 집단기법에 서 활용됩니다.
4. 사람은 중요한 것과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구별할수 있습니까?
의도가
기법과 학습방식을
공급해줍니다.
단순한 방법은
자신의 삶을
비디오로 "빨리감기"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육체가 여러가지 활동, 관계,
외현 행동들을 거쳐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결국
빨기감기는
육체성의 종말을 향해 이동하는데
이는 대결적이며,
삶의 목표, 투사된 가치, 그리고 잠재력의 실현과 같은
의의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를 불러일으킵니다.
테이프가 삶의 종말에 이를 때, 자동적으로 의문이 솓아납니다.
"어떤 가치있는 일이
행해졌던가?"
"사람은
무엇때문에
책임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가?"
사람은
다른 관점들을
상상할 수 있으며
다르게 선택해야 했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5. 세상의 매력은 끝이 없는 듯합니다. 거기 가는 것이 정말로 안전할까요? 저는 그냥 도망치고 싶을때가 많습니다.
매력은
세상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투사된 가치를 반영하고
에고 만족이라는
보상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현실에서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며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쾌락은
가치가 부여된 것,
높게 평가받은 것과 연관됩니다.
투사된 가치의 대부분은
상상에서 일어나며,
가치는
욕망을 반영합니다.
실상에서
영적성취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사람들은
명사의 삶에서
일단 색다름이 씻겨나가고 나면
그것이 귀찮고
짐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합니다.
상상된 쾌락은
사실 감각과 감정의 쾌락입니다.
내적인 영적 진화와
더불어
모든 활동은 동등해집니다.
6. 행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위는
맥락, 장, 의도의 통합의
자동적 귀결입니다.
모든 행위는
사실상 자연발생적이고
카르마적 경향을
반영하며 표현에 유리하거나
유리하지 않을 수 있는 국소적 조건들을 반영합니다.
행위를
비개인화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불리는
분리되고 독립된 작인이 있다는
신념을 놓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러한 앎은
유위의 무위(nonaction of action)가
발달하는 것을
허락해주는데,
유위의 무위는
결과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가능해지지요.
단 한사람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최대한의 잠재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12단계 프로그램의 에고를 억제하는 기본적 금언입니다.
존재는
그것 자체가
보상입니다.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실행자체를 위한
실행의 탁월함과 정렬되게 됩니다.
일체의 존재는
이미 매순간
가능한 최대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위의 무위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혹은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며,
완성에서 완성으로
그리고
완전에서
완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전부는
그 정체가 정확히
그것의 의미임으로 말미암아 완벽하며,
일체의 의미는
그것의 존재입니다.
완벽한 씨앗은
완벽한 눈,
그 다음에는 완벽한 싹,
그 다음에는 완벽한 꽃,
그 다음에는 시든 꽃으로 출연함을 통해
변형되고 변태됩니다.
모든 형상은
매 순간
완벽하게 있는 그것일 뿐입니다.
창조는
완벽하게 이것에서
완벽하게 저것으로
이동합니다.
상상속에서가 아니라면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일체가 이미 있어야할 그대로 있습니다.
근사한 낡고 찌그러진 스레기통은
고물처럼 보여야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근사한 낡은 고물 쓰레기통이
아닐 것입니다.
7. 시간 그 자체가 환상인가요?
창조는
출현하는데,
이것은 에고의 지각에게
변화로 해석됩니다.
목격된 것은
잠재성의 현실로의 나타남이고,
이것은 되고 있음으로
맥락화됩니다.
에고는
시간궤도를 얹어 놓는데,
이것은 투사이지요.
오직
계속되는
앎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은
정신적 구조물이며
연쇄에 대한 설명을
개념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연쇄는
그 자체가
관찰자의 개념화이며
정신작용입니다.
진짜 실상은
마음에게
이해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에고가 붕괴할 때,
시간은 사라지고
모든 현상은
느린 움직임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진실은 영화 "그랑블루 700으로 측정됨"와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의 삶을 그린 '아시아의 프랑치스"의 슬로모션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몇명 촬영감독들에 의해 절묘하게 직관되어 있습니다.
실상은
개념적이라기 보다는
주관적이고 경험적이며 드러냅니다.
심지어
사소해보이는 것에 대한 연구조차
지각의 선형적 이원성이
상상의 산물이며,
이는 차례로
가설의 허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모든 순간에
이미 일체는
현실로 되어 가는
잠재성의 출현에 영향을 미치는
우세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하는
카르마적 잠재성의 완벽한 표현입니다.
일체는
있는 그것의 제출인데,
왜냐하면
일체가
이미 정확하게 있는 그것으로 존재하고,
이는 다시 그것의 의미이고 쓸모이며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쓸모와 가치란
투사된 정신화입니다.
구부러진 나무는
완벽한 구부러진 나무입니다.
만약 그것이
완벽한 구부러진 나무가 아니라면
그것은 완벽한
곧은 나무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8, 비이원성은 근본적 실상과 같고, 그 속에서 일체는 그 정체로 말미암아 자신의 본질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본질적 통찰입니다.
모든 창조는
오직 그 존재로 말미암아
완벽함에서
완벽함으로 이동합니다.
존재는
이미 현실로 표현된
잠재성의 실현이지요.
형상은
국소적 조건들의 귀결이며
그리고
다시 우세한 조건들하에서
가능한 완벽한 표현입니다.
창조의 완벽함에 대한
모든 반론이나 의심은
가설적 오류를
세계에 투사하는
레스인테르나/코기탄스에서 비롯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원리를 통해서
진화하는 변화의 세부가
수학공식으로
맥락화될 수 있습니다.
의도는
잠재성에서 현실로,
우주의 잠재적 상태(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붕괴된 파동상태(디랙 방정식)로
파동함수를 붕괴시킵니다.
새로운 상태는
그 다음에
새로운 잠재력 상태가 되는데,
이것은
그 다음에 다음의
정의된 상태로 붕괴합니다.
깨달음의 상태는
그러므로
'에고의 지각의 위치성들의 환상을 대체하는 잠재적 실상'입니다.
영적의도, 노력, 결정은
선형적인 한정된 것에서
비선형적인 실상의 전부임으로의
의식의 진화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의도는 가능성에서
더 높은 가능성으로,
그 다음에 현실로의 진행을 활성화합니다.
9. 선생님께서는 여러강연에서 로저 배니스터가 1마일 4분벽이라는신념체계를 깨뜨린 사례를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 수행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영역에서
최고도의 완성을 향해
의식의 수준들을 뛰어넘은
각 개인은
남들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더욱 쉽게 해줍니다.
그것은 마치
선두견이
눈더미를 무너뜨려
같은 조의 나머지 개들이
나아가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과 같지요.
표면상으로는
개별적인 영적 노력이
전인류에게 기여합니다.
200이하에서
200이상으로 건너뛴 모든 사람은
이미 무수한 이들이 뒤따를 수 있도록
잠재적 교사로
봉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단지 자기자신만을 위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충격은
인간의식 전체에서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구도자는
전 인류의 의식수준이 상승하는 중에 있고,
그래서 집단적 저항이 덜하다는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면의 평화
깨달음!!
첫댓글 사람은 카르마적 이익에 대한 그 모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할 수 있다. 사람은 또한 깨달음에 대해 들은 것과 깨달음의 추구를 선택한 것에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은 정말이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전의 책들에서 보고한 것처럼 통계적으로 자기 삶의 주된 목적으로 깨달음을 선택할 가능성은 1만명 중의 한명이다
감사합니다
사람은 중요한 것과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구별할수 있습니까?
- 의도가 기법과 학습방식을 공급해줍니다. 단순한 방법은 자신의 삶을 비디오로 "빨리감기"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도자는 전 인류의 의식수준이 상승하는 중에 있고, 그래서 집단적 저항이 덜하다는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있는 일이 행해졌던가?"
"사람은 무엇때문에 책임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