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이야기(18) - 이성재
- 일제시대의 황금에 얽힌 이야기(상) -
기사입력 : 2008년 08월 04일
1930년대 일제시대에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가 조선을 병탄하여 국력이 커졌으니 전쟁을 일으켜 나약한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침탈, 속국으로 삼아야겠다는 야심에 광분하던 시기였다. 일본 군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즐길 수밖에 없었고 그 비용을 충당해야 하는 조선만 죽어나고 있었다.
특히 일본 군부는 전쟁 준비 자금으로 황금이 무진장 필요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금본위제(금태환제)를 택하고 있어서 화폐 발행고의 최소 10%는 황금을 준비해야 했고 국제 상거래시 상대국이 요구하면 금으로 결제해야 했었다. 일본과 조선중앙은행의 1원은 금 0.5돈(1.875g)의 가치가 있다고 화폐법으로 명시하였는데 일반인도 은행에 가서 화폐대신 금을 달라고 하면 내주게 돼있었다(사실상 일반인에게는 금태환이 안 되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군부 정권은 갖은 방법으로 조선에서 금 생산 정책을 독려하여 금 열풍으로 조선 천지가 황금광(黃金狂)들로 들끓게 하였다. 그 와중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본다.
- 활개 친 금 밀수출
일제의 군부 정권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은 될 수 있으면 싸게 구입하고자 국제시세나 이웃 중국보다 싼 값을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1931년 12월 일제는 아예 금 수출 까지도 완전 금지시켰다. 여기서 부작용으로 발생한 것이 금 밀수출이다. 당시 만주의 금값은 조선이나 일본보다 30~50% 비싸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죽음과 처벌을 감수하는 금괴 밀반출이 성행하였다. 조선의 압록강 철교(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세관과는 불과 100여m 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금값이 50%가 차이가 났으니 어찌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었겠는가? 워낙 유혹이 크다보니 신의주 경찰서의 경찰관, 철도의 기차 화부, 철도원, 철도 공안, 일본 헌병 등 까지도 연루된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소위 에로(eros)니 그로테스크(grotesque)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진 몸속 *문에 넣어 금괴 밀반출을 시도하는 사건 등이 속출 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1933년 5월 1일 평양 거주 신씨와 정씨가 *문에 금괴 60돈 3개를 넣고 철도로 국경을 넘다가 적발된 것이 신문에 난 것인데 이들이 밀반출에 성공했다면 단번에 180원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 기자 월급이 40원 정도였으니 그 수익성이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금 수출 금지이후 1936년까지 5년간 만주로 밀반출하다 적발된 양은 무려 1천관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가격으로는 1천만원대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금이 세관과 국경 수비대, 경찰에 적발되었던 것이다. 실제 적발되지 않은 것을 합하면 그보다 10배만 잡아도 1억원에 달하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조원 대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 언급된 수법을 보면 (1)경찰관, 세관원을 매수하기 (2)비누 속에 숨기기 (3)구두 뒤축에 숨기기 (4)열차 의자 밑에 숨기기 (5)열차 화부와 공모하기 (6)여자 몸에 감추거나 아기업고 포대기에 감추기 (7)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먹어 버린 후 배설하기 (8)기타 자전거나 인력거, 물고기 뱃속 등에 감추기 등등 기기묘묘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이러한 밀반출 행위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성행하는 도굴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은 드라마틱한 생을 살았던 분이다. 서기 927년 신라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참살하고 의기양양 회군하던 견훤과 경애왕을 구하려 출병한 왕건이 일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왕건의 대패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건을 대신하여 왕건의 갑옷을 입은 신숭겸은 견훤 군에게 포위되어 참살되었고 다행히 병졸 옷을 입은 왕건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뒤 전사한 신숭겸은 머리가 없어진 채 발견되었는데 개경으로 돌아온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왕건은 황금 머리가 도굴될 것을 염려하여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쓰게 하였다.
지금 춘천시 서면 방동리의 신숭겸 장군의 묘에도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평산 신씨 후손들도 이묘가 실제 묘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한다. 더구나 봉분이 세 개라서 이상하긴 하지만 자랑스러운 조상인지라 그것조차 가문의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러한 신 장군의 묘가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황금에 눈이 뒤집힌 도굴꾼들이 이 황금머리를 그냥 둘리가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적이 끊어지면 무덤을 파헤치고자 하니 후손들이 가만있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천막을 치고 경계를 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고 가야지방이나 경주지방의 고분이 이때 많이 도굴 당했는데 무식한 도굴꾼들이 이 황금 유물들을 몽땅 녹여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지금도 통탄하고 있다. 이것이 다 일제의 농간으로 생겨난 일이다.
/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 회장 (태극 마크 감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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