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도 화개산(華蓋山)산행
오늘은 친구와 함께 강화 교동도 화개산 산행을 한다.
교동도(喬桐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면적이 46.90㎢ 섬으로 인천시 강화도 북서부에
놓여 있으며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강화에 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
개화면 수정면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화개산(華蓋山)은 교동도에서 제일 높은 해발 259.6m로 교동도의 주산 이다 나머지 산들은 모두 나지막
한데 봉황산은 75m, 율두산은 39m, 고양이산은 35m, 수정산은 75m라 하니 화개산 이야말로 우뚝 솟은
산이라 할수 있다
화개산 정상에 올라 보니 동쪽으로 바다 건너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어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
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
를 비롯하여, 고려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봉수대(烽燧臺)
단묘(壇廟) 등 많은 유적들이 있다.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이 있다.
산행 사진이 이어 집니다
우리 일행은 지하철 5호선 송정역 1번 출구에서 09:00에 만나 중앙 차량 정류장 에서 강화행 신촌발 3000-A
2층 버스를 타고 강화도 터미날 에서 교동도행 70번 버스로 환승 교동도 입구에 도착 한다.강화 교동도는
서울 에서 지척 이고 국내 에서 14번째로 큰섬 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 가는 탓에 교동도로 가는 길은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교동도를 들어 가려면 2개의 검문소를 거쳐야 하는데 얼마전만 해도.첫번째 검문소 에서 신고후 교동대교를
통과 두번째 검문소 에서 이 통행증을 받아 들어 갔다가 귀가시 검문소에 반납을 하였다는데 오늘은 해병
병사가 버스에 올라와 차내 사람들을 둘러 보고 통과 시킨다.
교동대교(喬桐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간의 연륙교로 강화도와 교동도간
연결다리이다. 다른 이름으로 교동 연륙교 라고도 한다. 이 대교는 총연장 3.44km로 총 904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되었다.
우리 일행은 교동대교(喬桐大橋)를 통과 대룡시장 앞에서 하차 대룡시장을 둘러 본다.
이곳은 피란민들이 임시로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시장이다. 고향에 있는 연백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은 오랜 세월 개발이 되지 않아 지금도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통시장으로 남아있다.
세월의 때가 물씬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녹슨 양철 지붕을
얹은 낡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교동이발소, 동산약방, 중앙신발, 거북당 등 향수가 물씬 풍기는
이름들의 간판들이 보인다.
우리는 대룡 초등 학교 방향으로 이동 한다.대룡 초등 학교는 올해 5명의 졸업생을 배출 하였단다.
대룡중고등 학교 방향 한증막 방향으로 이동 한다
조선시대 한증막(汗蒸幕)은 교동도 고구리, 봉소리, 서한리 등에 있는데 고구리에 있는 한증막은 원형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언뜻보면 산소같이 둥근 형태에 풀이 우거져 있기에 누구도 한증막
인지는 모른다.
크기는 둘레 45미터, 지름 15미터, 톺이 3미터 크키로 어른 10여명이 두러앉을 수있는 규모다. 원래는
황토와 돌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황토가 비바람에 씩겨내려가 지금은 돌만
남아 있는 상태다.
주민들은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불을 지펴 한증막에서 목욕을 즐기는 것을 보았다"면서 1960년대 말
까지 주민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 인조 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3개도를 관활하는 '삼도수군통호사'가 교동에 있었기에 상당수의
군사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하고 있을 당시 한증막이 생기지 않았나 보고있으며 또한 교동는 조선시대에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었다. 안평대군과 연산군은 특히 이곳에서 생을 마감 하였기에 한증막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 한다.
교동 면사무소 입구 등산로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 한다.등로 따라 연산군 유배지 방향으로
한참을 오르니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에서 150m에 유배지가 있다고 이종목이 우리를 안내 한다.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 으로 이장한 연산군 묘
우리 일행은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 한다.
선비들의 유배지가 전남 해남지역 이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
으로 유배됐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누구 인가 ?
연산군은 1476년(성종 7) 성종과 윤기무(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는 가난한 양반집의 딸로 집안이 궁핍해지자 궁에 들어가 빼어난 미모로 1473년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元妃/임금의 정실) 공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그해 성종의 첫째 아들 융(小隆)
을 낳았으나 남편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고부갈등이 심했으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등 심한 투기로 인해 성종은 원자의 모후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도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를 폐위시켜 1482년 사약을 내려 사사 했다
그후 인수대비는 어린 원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자 융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세자 융과 정현왕후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 성종 역시 제왕으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
되는 세자를 미덥지 않게 여겼다.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역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손자인 연산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연산군은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
으로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으나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폭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 서적을
불사르기 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그후 이곳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7개월만에 죽었고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면년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 되었다.
우리는 정상을 향해 산행을 이어 간다.등로는 가파른 급 경사계단길로 바람 한점 없는 한여름
산행 길 이다 진땀을 흘리며 오르고 또 오르는길 뒤돌아 보니 바다가 열릴 무렵 산성터 안내목
이다.
화개산 에는 고려 산성인 화개 산성지가 있다고 전한다.이 산성은 고구리 산성 이라고도 하며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제압 하기 위해 한강 입구인 교동도를 점거한후 쌓았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의 산성은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을 대비 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고 하며 주위는 약 2Km이고
석축은 약 5m정도 이다.지금은 화개산을 올라 가는 길에 산성을 쌓은 석축은 잘 보이지 않고 옛 산성
을 쌓았던 석축의 일부로 보이는 볼무지 들이 여러군데 보이고 있을 뿐 이다.
조금 오르니 화개 약수터 이다.화개산 정상 부근의 약수터는 초등학교시절 봄 소풍가는 단골 장소였단다.
왜냐하면 여러사람이 물을 마실 수도 있었고 정상에서 앞에 펼쳐진 들판과 바다와 북녁땅등은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그 곳만의 장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 화개산성 안쪽으로 적당한 경사면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학생 들이 장기자랑이나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교동에 아무리 가물어 논 밭이 쩍쩍 갈라져도 이 곳만은 항상 같은 양의 약숫물이 흘러 나왔다. 큰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곳도 아니요,8부 능선에서 어떻게 이런 물줄기가 있어서 계속 흘러 나오는지,물 맛이 일품이다.
성터내에 위치하므로 분명 군사들의 식수로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정상 오름길에서 만나는 민묘에는 세상을 뜬 아버지께 못다 한 효를 풀기위해 아들이 매일같이 성묘를
갔는데 묘 앞에 손자국, 무릅자국, 갓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마을사람들은 효자묘 라고 부르고 있단다.
효자묘터를 지나 능선길에 오르니이정목이 우리를 당황케 한다.정상 가는 길은 없고 화개산 봉수대터와
강화 둘레길 가는 방향만 표시된 이정목 이다.둘레길 가는 방향을 올려 보니 산불 감시탑이 눈에 든다.
이곳이 바로 화개산 정상 이다.
화개산(華蓋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면 고구리에 위치 하고 있는 해발269m 의 산으로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주변의 아름답고 남쪽으로 석모도, 북쪽으로는 북한 땅인 황해도 연백군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화개(華蓋)란 명주에 꽃무늬를 수놓아 만든 천자(天子)의 일산(日傘)을 의미 하는데. 아마도 화개산의
경관이 화려한 일산의 모습을 해서 그렇게 붙였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상에 오르니 화개산 정상비(頂上碑)가 있고, 망대와 정자가 있다. 정자이름을 구름을 이고 있는
정자라 하여 대운정(戴雲亭)이라 하였단다.
남쪽 으로는 석모도를 비롯 하여 서검도 미법도,복음도등 서해안에 산재해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고 북쪽 으로는 북녘 땅인 연백평야와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입구가 지척 이다.
또한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왜란을 당 하여 지현 최재윤이 내성과 외성을 증축 하고 성안에 군량
창고를 두었다고 하는 화개산성터가 산줄기 밑에서 정상 까지 회손 된 상태 이지만그대로 남아 있다.
교동도는 원래 화개산 주변에 높은산이 거의 없고 본섬과 주위 작은 섬들을 연계 하여 간척한 농로가
상당히 넓은 섬 으로 화개산 정상에 올라서니 넓은 평야와 교동 시장을 비롯 하여 크고 작은 마을과
저수지 들로 되어있는 경치가 한폭의 동양화 이다.
우리 일행은 봉수대터 방향 으로 하산을 한다.하산길 화개산 청동기 암각화 이다.
청동기 후기에 만들어져 기우제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로 암각화는 가로 1.8m, 세로 85cm
크기의 자연 암석 위에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11개의 선과 12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다.
화개산 봉수대
우리 일행은 봉수대 방향으로 이동 한다.화개산 봉수대는 화개산과 잇대어 있는 연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낮은 석단만이 남아 있는데, 가로 4.6m, 세로 7.2m이고 잔존 높이는 1.2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어 있다.
문무정에 도착 한다.교동도는 화개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옛날 화개산 남쪽에 두 개의
샘이 있었다. 동쪽의 것은 문정(文井), 서쪽의 것은 무정(武井)이라고 불렸다. 두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흘렀다. 그 깊이도 상당히 깊은 데다 밤이면 물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두 샘물이 솟으면서부터 교동에서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벼슬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정에 물이 넘쳐흐르면 문관이 많이 나오고 무정에 물이 넘쳐흐르면 무관이 많이 나오곤
했다.
교동도의 맞은 편에 송가도라는 섬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매우 문란
해지기 시작했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고 얼마 후 제일 나이가 드신 어른이 말했다.
“이는 모두 교동의 두 샘에서 비치는 물빛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샘을 메워 버려야 한다.”
다음날부터 송가도의 남자들은 교동의 두 샘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깊이가 하도 깊어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샘물은 더 솟구쳐 올랐다. 모두들 지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나이 드신 스님이
물었다.
“여보시오, 모두들 왜 그런 얼굴들을 하고 계시오. 무슨 큰 걱정거리라도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송가도 남자들은 그간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노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금 몇 포만 집어넣으면 될 것을 괜한 고생들만 하셨구려.”사람들은 서둘러 소금을 구해 와 두 샘에
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샘물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두 샘은 완전히 말라 버렸다. 그로부터
교동도에는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송가도 사람들은 이 노승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당도 찾을 수 없고 문무정 우물도 찾을 수 없다.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다.
우리 일행은 화개사 방향으로 이동 한다.
화개사(華蓋寺)는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화개산(華蓋山)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 이다.
화개사(華蓋寺)라는 이름은 교동도의 최고(最高)의 산인 화개산(華蓋山 259.6m)에서 왔을 것으로 추측
된다.
화개(華蓋)란 명주에 꽃무늬를 수놓아 만든 천자(天子)의 일산(日傘)을 일컷는 말 이다. 아마도 화개산의
경관이 화려한 일산의 모습을 해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 으로 안에는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교동 향교로 이동 한다.
교동향교(喬桐鄕校)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년)에 제거(提擧) 안유(安裕)가 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역사서를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 하였다가
충렬왕29년(1303) 송도로 모셔졌다고 하여 수위(首位)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교동향교를 수묘(首廟)라
부르고 있다.1127년에 안유(安裕)=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 되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부사 조호신(趙虎臣)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6년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제기고(祭器庫)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 으로 안에는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동무(東廡),는 대성전 동쪽에 있는 향각 이고 서무(西廡)는 대성각 서쪽의 판각 으로
중국 에서 유교를 발전 시킨 공자의 제자 위패를모신 건물을 일컷 는다.
교동향교의 건물 배치는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동,서무를 두었고,
유생들의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대성전 분향문 앞에
위치), 그리고 내, 외삼문이 있다.
홍살문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교동 향교 하마비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고 적혀
있다.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모두 공자를 모신 사당인 향교 입구에서는 말에서 내리라고 세운 하마비
(下馬碑)다.교동도에서 높은 사람은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이니까 둘을 꼭 찍어서 이렇게 적었다.
변장(邊將)은 군사 우두머리이다. 이곳에서 향교에 말을 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령변장(守令邊將下馬碑)로 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 근처에 군부대가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향교 주차장 옆 으로는 비석군이 있다 교동도 지역을 방어하던 수군절도사, 삼도통어사 도호부, 방어사
같은 여러 관리들의 송덕비를 모아놓은 것이다.원래 교동면 관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강화군
유림에서 모두 모아 이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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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가운데쯤에는 유일하게 비머리를 갖춘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무늬가 있는 돌이어서 한눈에도
특이하게 보이는데 방형 대좌 위에 비머리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비신을 세웠다. 비머리에는 구름문양이
가득하다. 비석의 주인공은 부사 姜堬淸인 것 같다.40여개가 넘는 송덕비에 새겨진 공로들이 이곳
교동도의 중요성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것만 같다
우리 일행은 교동읍성 도착 한다.
교동읍성(喬桐邑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城)으로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교동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으며, 군데군데 문을 내어 바깥과 통하도록 만들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을 돌아 나와 강화도행 버스 승강장 에서 70번 마을 버스를 타고 강화도 풍물 시장에서 하차
하산주겸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서울행 3000번 좌석 버스를 타고 지하철 5호선 송정역에서 하차
지하철로 환승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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