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蓋島) 여행
여행일 : ‘18. 3. 23(금) 소재지 : 전남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트레킹 코스 : 여석선착장→모전삼거리→샘골고개→생금산 팔각정→봉화산(338m)→천제봉(天祭峰, 320m)→화산마을→개도막걸리 도가→개도선착장→여석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남쪽으로 21.5㎞쯤 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이 9.94㎢이니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섬으로 보면 되겠다. 섬은 산이 많은 편이다. 봉화산(烽火山, 338m)과 천제봉天祭峰, 320m) 외에도 200m 내외의 산들이 많다. 산행은 3개의 큰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평범한 육산이지만 짙푸른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을 보면서 걷는 매력적인 산행이다. 개도는 남쪽의 금오열도를 비롯해 월호도·자봉도·제리도·하화도·백야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다. 개도라는 이름도 주위에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뜻에서 덮을 개(蓋)를 썼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개도의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화개산(華蓋山)의 모양이 솥뚜껑 모양을 닮아서 그렇게 붙여졌다는 게 정설이다. 봉화산과 천제봉이 개의 두 귀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섬에서 길게 튀어나온 지형이 개 꼬리 모습이라 개도라는 얘기가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개이도(介伊島)’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개도’를 ‘이두식(吏讀式)‘으로 표현한 이름이란다. 참고로 개도는 2010년 행정자치부 선정 ‘명품 섬 베스트10’에 뽑힌바 있다. 맛과 멋이 잘 어우러진 ‘친환경 명품 섬’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란다.
▼ 찾아오는 방법 개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백야도 선착장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 동순천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방면으로 달리다가 덕양교차로(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22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여수죽림개발지구와 화양면을 지나 백야도의 관문이랄 수 있는 백야대교(白也大橋)’에 이른다. 백야도와 육지를 연결시키기 위해 2005년 4월에 놓은 다리로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백야도에 오려면 화양면의 ‘힛도선착장(안포리)’에서 도선을 타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백야도(白也島)는 여수시에서 남서쪽으로 18.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여수시 화정면(華井面)‘의 소재지인 백야리(白也里)가 이곳에 있다. ’백야도‘란 섬의 주봉인 백호산(白虎山) 정상의 하얀색 바위들로 인해 섬까지도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하얀색 바위의 모습이 호랑이를 닮아서 백호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1896년 돌산군(突山郡)을 설치할 때에는 그 이름이 섬의 이름(白虎島)이 되기도 했다. 1914년에 여수군에 편입되면서 다시 백야도가 되었다. ▼ 배를 기다리는 중에 일출(日出)을 만났다. 올 정초에도 나는 이곳에 있었다. 새로운 해에 걸맞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집을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활짝 퍼져버린 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산자락에 막혀 해가 올라왔을 때는 햇살이 이미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가 오늘은 산자락을 비켜나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번 여행 또한 행운의 연속이 될 것만 같다. ▼ 운항중인 배는 태평양해운 소속의 ’대형카페리3호‘, 차도선(車渡船)인 이 배는 제도와 개도, 상화도, 하화도, 사도를 거쳐 낭도까지 운행한다. 개도의 여석항까지는 1일 4회(6:55, 8:00, 11:30, 14:50) 운항되며, 돌아올 때에는 종점인 낭도에서 배를 돌려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운항하는데, 7:20, 10:30, 14:00, 17:20에 여석항을 출발한다. 참고로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백야도에서 들어오는 것보다 2배나 더 오래 배를 타야만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 30분 조금 못되게 달려온 배는 우릴 ’여석항‘에다 내려놓는다. ’개도‘의 주된 항구는 ’화산항‘이나 먼저 멈추는 곳에서 내리기로 한 것이다. 참고로 ’여석‘은 숫돌 '여(礪)'에 돌 '석(石)'자를 쓰며 ’숫돌기미‘라고도 부른다. 마을 부근에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병기를 다듬던 숫돌의 재료가 되는 돌이 많다고 해서 ’숫돌기미‘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친 것이란다. ▼ 여석마을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여석삼거리(이정표 : 여석마을↑/ 생태탐방로→/ 여석선착장↓)‘에서 오른편의 생태탐방로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또 다시 나타나는 ’모전삼거리‘에서는 왼편 화산선착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생태탐방로↑/ 화산선착장←/ 여석선착장↓)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으로 인해 다소 헷갈릴 수도 있으나 곁에 ’개도사람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될 것이다. 참고로 ’모전삼거리‘는 ‘모전마을’로 가는 길이 나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모전마을은 ‘띠밭몰’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잔디의 다른 말인 ‘띠’가 많은 지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띠’는 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는 식물이다. '삐비'라고도 불리는데, 잎으로 피기 직전에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줄기를 쪽 빼내서 하얀 솜털 같은 것을 입에 넣어 껌처럼 씹어 먹으면 달짝지근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조금 못되어 ’샘골고개‘에 올라선다. 이곳에도 역시 ’개도사람길 안내도‘와 함께 이정표(팔각정(봉화산) 전망대→/ 한려선착장←)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화산마을에 있는 선착장의 이름이 ’화산‘에서 ’한려‘로 바뀌어 있다. 사소한 잘못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곧장 직진하면 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화산마을에 이른다. 반대편, 그러니까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은 개도의 여섯 마을 중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마을인 서삼리(여석·모전·호령)로 연결된다. ▼ 오른쪽 산자락으로 난 산길로 들어선다. 팔각정(봉화산) 방향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것도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심하게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 그렇게 15분쯤 오르면 ’생금산(191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팔각정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생금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을 일절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정상표지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준비해온 주전부리나 하면서 쉬었다가라는 듯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정자에 오르면 맑은 바다위에 누에모양 섬이 반긴다. 하화도다. 그 뒤로 상화도와 추도, 제도, 낭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스탬프로 꾹 찍어 갖고 싶은 한 폭의 그림엽서 같다. 고흥 쪽의 여러 섬들과 여수도 한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바닷가 포구에 자리 잡은 서삼리의 세 마을 전경이 눈에 닿을 듯 내려다보인다고 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 봉화산으로 향한다. 팔각정에서 100여m 거리에 있는 전망바위에서는 화산마을 전체와 가야할 봉화산이 삿갓처럼 보인다. 이어서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해발이 200m에도 못 미치는 산 치고는 많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서니 너른 초지(草地)가 나타난다. 옛날 군마(軍馬)를 기르던 곳이란다. 개도는 조선시대에 화양면 ’곡화목장‘에 속했다고 한다. 지금은 소를 키우지만 그 때만 해도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초지에다 판석(板石)을 깔아 놓았다. 사방에 널린 소똥으로부터 길손을 보호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왕에 나온 김에 이와 관련된 전설 한 토막을 옮겨볼까 한다. 요 아래 화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는 ‘마녀목’이라 불리는 300여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마녀목’의 ‘마녀’란 ‘악마’를 뜻하는 게 아니고, 말을 좋아했던 한 소녀를 뜻하는 마녀(馬女)이니 오해말기 바란다. 조선시대 이곳 개도에서는 군마들을 길렀는데, 마부 이돌수의 딸 ‘복녀’가 ‘점박이’라는 어린 말 한 마리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나자 조정에서 군마를 동원했는데 이 어린 말도 끌려갔고, 소녀는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얼마 뒤 어린 말이 바다를 헤엄쳐 섬으로 돌아와 소녀와 만났고, 끝내 소녀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말의 주검을 묻은 곳에서 나무가 자라 올랐는데, 이것이 ‘마녀목’이라는 얘기다. 이후 이곳 주민들은 남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점박이 말만도 못한 사람'이라며 나무랐다고 한다. ▼ 초지는 한두 곳이 아니다. 어떤 곳에는 돌담까지 쌓아 아예 방목장(放牧場)으로 꾸며놓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은 안부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생금산과 천제봉 사이의 재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호령(號令)’ 마을이 나온다. 마을 뒷산이 꼭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야개', '호녁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호령마을이 되었다. 왼편은 물론 화산마을로 연결된다. 개도에는 이 두 마을 외에도 월호와 신흥, 월항, 여석. 모전 등의 단위마을들이 있다. ▼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 구간 전체가 힘들다는 얘기는 아니다. 10분 정도 잡목 숲을 지긋하게 오르는 동안 섬다운 조망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왼편 발아래에는 화산마을이 똬리를 틀고 있고, 다른 편에는 아까 생금산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화려한 그림으로 변해있다. ▼ 밋밋한 구릉(丘陵)처럼 생긴 정상에는 ‘정상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적혀있는 지명(地名)이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봉화산(337.8m)’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등산안내도나 이정표 등 여수시에서 설치한 모든 시설물들은 하나같이 이곳을 ‘봉화산’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국토교통부의 산하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작한 지도(地圖)에는 ‘천제봉’으로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관할 지자체에서 표기한 지명이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온갖 사료(史料)와 구전(口傳)들을 다 뒤진 뒤에 결정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틀린 지명을 바로잡는 것도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일 테니, ‘국토지리정보원’에 지명변경 요청을 추진해 주었으면 좋겠다. ▼ 이곳이 봉화산이라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조망(眺望)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금오도 쪽으로 시야가 열릴 따름이다. 봉화대의 특징이 툭 트이는 시야(視野)인데도 말이다. 또한 봉수대(烽燧臺)였음을 알려주는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참고로 여수에는 돌산의 ‘방답진 봉수대’와 화양면 봉화산의 ‘백야곶 봉수대’가 서울로 올라가는 봉수로의 직봉 역할을 했다. 직봉 사이를 잇는 간봉과 요망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곳 개도의 봉화산은 금오도의 망산에서 백야곶 봉수대를 잇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다음 봉우리인 천제봉으로 향한다. 산길은 옛날에는 따로 떨어져 섬이었다는 곶(串). 즉 ‘육고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바위전망대를 지난 다음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래서 천제봉의 원래 이름이 ‘화개산’이었나 보다. 봉화산과 화개산이 완전히 별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이다. ▼ 천제봉과 봉화산 사이의 안부에는 널따란 재가 있다. 바다에서 오르는 ‘만낭골’과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논밭골’이 만나는 지점인데, 방향표지판이 사라져버린 이정표의 기둥만이 이곳이 ‘갈림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지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 산길은 안부를 지나자마자 오름짓을 시작한다. 곧이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9부 능선에서 너덜지대로 우회(迂廻)를 한다. 하지만 가파름 때문은 아니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벼랑이 그 원인이다. 그렇게 우회를 한 산길은 반대편 능선에 오르고 나서야 끝을 맺는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천제봉← 0.1Km/ 개도사람길→ 0.5Km/ 봉화산↓ 0.3Km)가 길이 둘로 나뉨을 알려주고 있다. 천제봉의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하지만 개도의 절경이라는 해안절벽을 보려면 오른편으로 가야만 한다.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잠시 후 천제봉 정상에 올라선다. 봉화산에서 20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분이 지났다. 정상은 무너져 내린 옛 성터처럼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실은 제단(祭壇)이란다. 요 아래 화산마을에서 지내오고 있는 민속행사인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해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상당’이라 부르며, 산 중턱에는 기우집이 있어 매년 음력 3월1일 자정 무렵이면 제를 모시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고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또 다른 민속행사인 당산제(堂山祭)는 3월2일 오후 5시쯤 지낸단다. ▼ 정상은 삼각점 하나만 외로울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정표(화산마을 1.2Km/ 봉화산 0.4Km, 개도사람길 0.6Km)를 겸한 정상표지판(천제봉 해발 328m)을 세워두었다. 이곳의 지명도 역시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와는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천제봉’의 원래 이름은 화개산(華蓋山)이라고 한다. 명칭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으나 ‘덮을 개(蓋)’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의 생김새가 ‘솥뚜껑’을 닮았다는 데서 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천제를 지낸다고 해서 ‘천제봉(天祭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됐을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훌륭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에는 동남방향으로 금오도와 동북방향의 돌산도, 서북쪽으로는 하화도와 사도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쪽으로 팔영산과 나로도까지 보일 정도다. 개도를 소개할 때 ‘거느릴 개(蓋)’ 자를 쓰는 이유이다. 크고 작은 한려해상의 섬들 중심에 왕좌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풍광은 육고여가 아닐까 싶다. 바다 쪽으로 길고 좁게 뻗어나간 곶(串)인데, ‘개도의 개꼬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또 다른 이들은 ‘지네능선’이라고도 부른단다. ▼ 화산마을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조금 전의 삼거리로 되돌아가 ‘개도사람길(2코스)’로 내려갔어야 했는데도 그만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답사기가 100만권이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표현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아무튼 이 말이 실감나는 하루가 되어버렸다.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개도 제일의 절경을 그만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코스 경관의 핵심은 길게 튀어나온 ‘뭍고여’(육고여)와 등대섬(고여), 그리고 바닷가 절벽이다. 2개의 바위로 이뤄진 등대섬과 뭍고여 등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망원경이 설치된 전망대도 한 곳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암릉지대가 형성된 능선을 따라 멋진 해안절벽들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큰 바위로 된 산등성마루는 곳곳에서 연속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 오른편에 ‘청석포 해변’과 그 너머의 ‘월항리’ 쪽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물이 잠겨 있는 곳은 상수도용 저수지일 것이다. 바다 건너에 보이는 커다란 섬은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가 분명하다. 참고로 ‘청석포’는 앞에 펼쳐진 바다가 망망대해에서 태풍과 거센 파도를 직접 받는 곳으로 돌의 색깔이 푸른빛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석포의 너른 바위는 예전 잠깐 시름을 잊고 흥겹게 화전놀이를 하던 곳인데, 반듯반듯하게 떼어 내어 온돌의 구들장으로 내다 팔았던 흔적도 볼 수 있다고 한다. ▼ 숲을 가운데에 두고 나타나던 바위등성이가 뚝 끊겨버린다. 이젠 바윗길이 끝나는 가 생각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사방으로 시야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이다. ‘고래등 바위’로 망루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 진행방향의 능선 뒤에는 월호도와 화태도, 대두라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오른편 바다 건너에서는 커다란 덩치의 금오도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함구미 용두에서 시작하는 ‘비렁길’이 켜켜이 싸여가며 나타날 정도로 지척이다. 왼편 발아래에는 화산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개도중학교와 화정초등학교의 체육관과 누런 운동장도 눈에 띈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신흥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화산←/ 신흥마을→/ 천제봉·봉화간↓)에 이른다. 이곳에서라도 우린 신흥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 배성금과 청석금 등 멋진 바위경관들을 눈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화산마을로 내려서고 말았다. 그런 멋진 곳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친김에 월항리까지 가보는 게 좋다고 했다. 일대 해안에 멋진 바위경관이 많다는 것이다. ‘월항(月項)’은 본디 ‘닭목’, 닭의 목처럼 가늘고 긴 지형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달목·달이목으로 불리다, 한자로 적으면서 월항이 됐다. 주민들은 지금도 월항리 일대를 달이목으로 부른다. 긴 목 주변에서 바라보는 내해의 바위자락 경관과 섬들 모습이 자못 빼어나단다. ▼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임도 수준이다. 두 명이 나란히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널따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곱다. 마을 앞 해안은 물론이고 야도와 자봉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일렁이는 파도에 통째로 몸을 맡기고 있다. ▼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화산마을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밭둑에는 매화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다. 마을 안길에 심어놓은 홍매화도 보조를 맞추었다. 나도 여기 있다며 꽃망울을 활짝 연 채로 짙은 매화향을 내뿜고 있다. 아무튼 섬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 산행은 2시간 50분이 걸렸다. 주요 포인트에서 조망을 즐긴 것 외에는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화산마을은 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큰 동네’ 또는 ‘대동’이라고 불러오다가 화개산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1952년경부터 화산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화산마을에는 웃몰, 아랫몰, 건너몰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별촌’이라고 부르던 작은 마을들이 있다. 이왕에 나온 김에 재미있는 얘기 하나쯤 더 짚어보자. ‘운꼬지’라고도 하는 별촌마을의 ‘찰떡여’는 파도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바위가, 파도에 부딪히면서 찰떡찰떡 소리를 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을 빠져나온 후, 화산(개도)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개도막걸리’ 공장이 나타난다. 재일(在日) 기행작가인 정은숙씨의 ‘막걸리 기행’에도 나왔을 정도로 입소문을 많이 탄 곳이다.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물, 즉 개도의 양대 산인 ‘화개산’과 ‘봉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만큼 깨끗하면서도 맛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죽어가는 말도 살렸다는 ‘복녀’의 전설에까지 나올 정도이니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어느 전문가는 개도막걸리를 ‘탁한 맛보다는 목넘김이 상큼하고 탄산의 쏘는 맛과 단맛이 가미된 느낌’이라고 평가하면서, 합성감미료를 섞었으니 ‘전통주’라기보다는 ‘가공주’로 보는 게 옳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미 명맥이 끊어져버린 ‘전통 개도막걸리’ 대신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맛을 변형시켜 기존 막걸리의 맛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맛으로 재탄생시켰다고도 했다. 그게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었던 모양이다. 전국 각지에서 개도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니 말이다. ▼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서니 사장님께서 어디서 오셨나며 길손을 맞는다. 그리곤 막걸리 한 병을 내놓으신다. 멀리서 왔으니 맛이라도 보고 가라는 것이다. 안주는 달랑 김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일단 한 대접 들이키고 본다.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이연복 셰프’가 극찬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걸리가 주스 같다. 단맛과 상쾌함이 돈다’는 표현을 썼었다. 그러나 난 ‘상큼한 우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선착장 근처의 횟집에서 반주로 내준 ‘개도막거리’가 내 입맛을 돋우었기 때문이다. 주인아주머니의 말마따나 일반인들의 입맛에는 약간 숙성된 막걸리가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친 난 발걸음을 돌려 양조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병을 챙겨 배낭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서울 도착할 때쯤이면 익어있겠지? ▼ 선착장으로 가는 길가에는 생선 횟집은 물론이고, 반듯한 규모의 철공소도 보인다. 부둣가에는 제법 큰 크레인(crane)도 설치되어 있다. 번성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들이 아닐까 싶다. 하긴 한때는 섬 인구가 3000명을 넘기도 했고 김 양식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는 강아지도 기왓장을 물고 갈 정도로 기와집이 많았었단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오른편에 보이는 엄청나게 너른 간척지(干拓地)이다. 그런데 황무지로 그냥 버려져 있는 게 아닌가. 염분과 칼륨 등을 제거하기 위한 물이 부족한 탓에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타 용도로 전환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 방치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얘기이다. ▼ 주조장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개도선착장’이 나온다. ‘개도사람길’은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면 된다. 그렇다고 여객선매표소를 그냥 지나치는 우(愚)는 범하지 말자. 건물의 안에 갤러리(gallery)가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60여 점의 액자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수 중앙동 동남스튜디오 소속 사진작가 김성환(37)씨의 작품인데,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삶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들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진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여객선을 대기하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무료함을 달래줌은 물론이다. ▼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식당을 겸하고 있는 ‘개도펜션’의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지만 역시 해안가를 따라 진행한다. 참! 깜빡 잊을 뻔 했다. 점심은 ‘갯마을 식당’에서 했다. 자연산 광어가 한 접시에 3만원, 날것을 못 먹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갑오징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고기나 조개를 잡으면 배에 매달아둔 그물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건져서 요리를 해준다니 모처럼 싱싱한 해산물로 배를 채워볼 일이다. 마침 주머니 사정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손님이 해주라는 대로 그 가격에 맞춰서 요리를 해준다니 말이다. ▼ 선착장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는 해안 산책로를 따른다. 들머리에 이정표(생태탐방/ 화산선착장)가 세워져 있으니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시설물도 보인다. 개도의 명소를 소개하는 두 개의 ‘개도 안내판’과 함께 ‘개도사람길 안내도’, 그리고 ‘여수십경(麗水十景 : 진남관, 오동도, 향일암, 돌산대교, 거문도등대, 백도, 사도, 영취산진달래, 여수 국가산업단지, 여자만 갯벌)’과 ‘여수십미(麗水十味 : 서대회, 돌산갓김치, 갯장어회, 군평선이, 생선회, 장어구이, 굴구이, 해물탕, 찜, 한정식, 게장백반)‘를 홍보하는 ‘여수시 관광안내도’를 세워놓았다. ▼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들로 꽉 차있다. 이곳 개도가 본디 어류와 전복 양식의 천국이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이다. 특히 개도산 전복은 ‘참전복’이란 상품명으로 전국에 팔려나가고 있단다. ▼ 바닷가에는 팔뚝길이만한 숭어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물 반 고기가 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집사람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 그냥 지나치기가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 손에는 ‘투망’이 없는 걸 말이다. ▼ 이정표를 따르지 않고 바닷가 쪽으로 조금 더 나가자 또 다른 들머리(이정표 : 화산전망대 200m, 여석전망대 700m)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해안가를 따라 데크로 길을 내놓았다. ‘개도사람길’ 1코스일 것이다. ‘개도사람길’이란 개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온,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로를 따라 만든 둘레길이라는 뜻이다. 이 ‘둘레길’은 지금 걷고 있는 화산선착장에서 호령마을까지의 1코스(4.5㎞)와 호령마을에서 상수도용 저수지(배성금) 사이의 2코스(3.14㎞)가 마련돼 있다. 저수지에서 월항리 적목마을을 잇는 3.5㎞가량의 3코스는 현재 공사 중이란다. ▼ 길은 해안가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있다. 대부분은 흙길이나 그게 어려운 곳에는 ‘데크 로드’를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해안 가까이로 내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다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해송과 동백,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림이 우거진 오솔길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화산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데크로 만든 전망대에는 ‘화정면 지도’와 ‘개도사람길 안내도’와 함께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비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앞에 보이는 커다란 섬이 제도이며, 그 왼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백야도란다. 제도의 오른편에는 여수시가지와 그 뒤의 산들을 그려 넣었으나 실경(實景)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다시 나선 길은 아까와 다를 게 없다. 계속해서 해안선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주변의 풍광도 아까와 다름이 없다. 아니 바닷가 풍경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자주 나타나긴 한다. 누군가는 개도의 둘레길을 일러 ‘남해바다의 푸른 바람을 온 몸으로 안으며 한적한 여유와 섬사람들의 질퍽한 그리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해풍산행길’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변화가 별로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오솔길이 쭉 이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니 길이 둘로 나뉜다. 여석전망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곳인데 이정표(여석마을↑ 1.4Km/ 여석전망대→ 60m/ 화산마을↓ 950m)가 세워져 있으니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잠시 내려서면 데크로 지어놓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도 화산전망대와 같은 시설물들을 세워놓았다. 조망도와 비교해가면서 섬들에 눈을 맞춰본다. 제도와 백야도를 왼편에 놓고, 오른편에는 자봉도가 자리 잡았다. 그 사이에는 여수시가지를, 그리고 뒤에는 천마산과 대미산, 봉수산, 봉화산, 천왕산 등을 그려 넣었지만 시야에 잡히지는 않는다. ▼ 이젠 여석선착장으로 가는 길만 남았다. 1.4Km나 되는 이 구간은 아무런 볼거리도 없다. 그저 앞만 보며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여석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 밭고랑에는 여수의 명물이라는 ‘방풍나물’이 자라고 있다. 풍을 예방한다는 나물이다. '방풍나물'은 꽃이 피기 전에 모두 베어버린다고 한다. 웃자란 잎은 딱딱해서 먹을 수도 없지만 그대로 놔둬 꽃이 피면 다시 돋아나 감당을 못하기 때문이란다. 베어내고 놔두면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고 하니 경제성이 높은 나물이라 하겠다. 아무튼 저 마을에는 여수의 상징인 벅수 2기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2기의 돌벅수 중 남자상은 할아버지 벅수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여자상은 할머니 벅수로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다. 2기 모두 무관(無冠)의 민머리형이며, 명문은 여수 다른 벅수와 같이 ‘남정중(南正重)’과 ‘화정려(火正黎)’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