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주의자(主義者)’가 되었다”
|
▲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앞쪽) 전경. 구상은 이곳 신학교에 들어가 살다가 중등과 3학년 때 자퇴했다. |
구상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찬(프란치스코)씨가 쉰에, 어머니 이정자(마리아) 여사가 마흔넷에 얻은 금지옥엽 늦둥이였다.
본이름은 구상준(具常浚)이지만 어려서부터 ‘상아, 상아’ 하고 불러서 외자 이름으로 굳어졌다. 구상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가톨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한집안인 아산 이씨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아버지는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구상은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아 태어나자마자 요한 세례자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할아버지께서 울산 부사, 큰아버지 한 분은 창녕 현감, 또 한 분은 현풍 군수를 지내셨고, 아버지는 요즘 말하면 청와대 곧 궁내부의 주사셨어요. 경술국치 뒤에는 경찰학교에서 한문 교관을 하시다가 연금을 받게 되어 은퇴하셨지요.”
이렇듯 반가 집안 후손인 구상은 서울 백동성당(혜화동성당)에 다니다가, 북녘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네 살 때 원산시 근교로 이사를 하여서 자랐다.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 우거진 수풀 속에 베네딕도 수도원 종탑이 보이고 발치로는 찰싹이는 동해가 보이는 90호 남짓의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부근 읍면에 ‘해성학원’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셋이나 세운 원장으로, 마을 초입에 예순여섯 마지기 문전옥답을 가진 지주로 유유자적하였다.
구상은 1960년대에 연작시 ‘밭 일기’를 쓰게 된 동기가 농촌에서 자란 소년 시절의 체험과 회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밭 일기 첫 편에서부터 자연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는 어린이의 눈길이 느껴진다.
|
▲ 대학 시절의 구상. |
“밭에서 싹이 난다/ 밭에서 잎이 돋는다/ 밭에서 꽃이 핀다/ 밭에서 열매가 맺는다//
밭에서 우리는 심부름만 한다.”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날, 양복에 란도세루(일본 초등학교 학생들이 메는 건빵처럼 생긴 가방)를 맨 ‘서울집 도련님’은 선망과 질시를 한몸에 받는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글짓기를 잘했는데, “돈이라는 것은 없애고 온 세상이 네 것, 내 것 없이 살 수는 없을까?”라거나
“염소의 뱃속엔 어떤 장치가 되었기에 그 똥이 콩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만들어져서 나오는가?”라고 해서 담임선생과 동급생들의 웃음을 샀다.
구상은 위로 형님이 둘 있었는데, 맏형은 동경에 유학 중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행방불명되었다. 구상은 열다섯 살에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형인 구대준이 다니던 베네딕도 수도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들어간다.
구상과 신학교 입학 동기인 윤공희 대주교(광주대교구 원로 사목자)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구상은 덕원 수도원 밑 어운리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신앙이 두터운 교우 집안이었어요.
당시는 중등과 5년, 고등과 2년 해서 7년이 소신학교 과정이고,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 해서 6년이 대신학교 과정이라 사제가 되려면 13년을 공부해야 했지요.
중등과 1학년에 24명이 입학해서 1년이 지나고 8명이 쫓겨났어요. 구상 신학생은 3학년 때 자퇴했는데 나이보다 성숙했던 거 같아요.”
구상이 신학교를 나온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간호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실존적 욕구가 성직자의 규범 생활을 해낼 자신이 없고, 나는 어려서부터 레지스탕스 기질이 있었다”고 훗날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구상은 일본 왕후의 사진을 오려내 모독하는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한 자퇴 당시의 상황을 시로 묘사한다.
“소신학생이/ 정월 초하루 아침/ 백설 차림의 황후폐하 사진을/ 신문서 도려 갖고/ 후들후들 변소로 들어섰다//
창세기의 배암이 온몸을 조여/ 모독의 정열을 고름 빼듯 한 후/ 3년간 머물던 수도원을 등졌다//
나는 주의자가 되었다.”
당시 ‘주의자’(主義者)는 저항적 지식인들을 일컫던 말이었다. 구상은 신학교를 뛰쳐나와 노동판에 뛰어들고 야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다가, 일제가 말하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 곧 불평불만을 일삼는 조선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신학교를 나간 다음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금방 퇴학을 당했다던가?
얼마 안 있어 일본에 가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더라고. 방학 때에는 신학교에 놀러 오곤 해서 만났는데, 문학청년으로 머리도 기르고 말하는 것도 우리하고 달라 굉장히 성숙해 보였어요.”
윤 대주교 말대로 구상은 열아홉 살 되던 해 봄에, 교회에선 이단아요, 가문에선 불효자요, 마을에선 주의자가 되어, 밤의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밀항을 한다.
“역사의 쇠사슬을 찬 젊은이는/ 망토를 재끼며 일어나 앉아/ 이름 모를 짐승이 되어/ 치를 떤다/ 스승도 없는 갈릴래아!/ 암흑의 파도를 타고 ‘사의 찬미’가 들려온다/ 머리 푼 ‘윤심덕’이/ 손짓한다.”
“개항 후 바야흐로 일제의 식민지 강탈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에게 현해탄은 어쩔 수 없이 건너가야 하는 비장한 각오와 아픔의 바닷길이었다”(유홍준, 「일본문화유산 답사기」).
현해탄은 1926년 8월,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김익진(평화신문 1291호 2014년 11월 30일자~1300호 2015년 2월 1일자 연재)의 맏형인 극작가 김우진이 몸을 던진 비련의 바다로도 알려져 있다.
동경에서 구상은,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일용 노동자로, 연필공장 직공으로 일하며 망국민의 설움과 방랑자의 고독과 감상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스무 살의 화창한 봄날, 사회주의 학자의 서적을 끼고 종일을 헤매며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던 구상은, 동경만 근처 빈민촌인 기다센쥬의 어느 목로판에서 한국인 노동자들 틈에 끼어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댄다.
그러다가 선배의 권유로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시험을 쳤다. 동시 합격이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이 강했던 구상은 종교학을 택했다.
그때부터 고국의 형님과도 타협해 집에서 학자금을 받아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구상은 청춘의 찬란한 낭만과는 등진 일종의 정신적 우범자의 오뇌와 고독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교수는 거의 승려 출신이요, 학생들도 서른이 넘는 현직 승려나 목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강좌에서는 당시 가톨릭이 들으면 질겁할 학설들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구상의 정신의 근원을 다져 준 다시없는 시간이었다.
사계절을 검은 중절모에 검은 코르덴 양복이나, 무명에 물을 들인 옷을 걸치고 병정 구두를 신은 장발의 그로테스크한 청년 구상은, 반신(反神)적이 되고 니체에 심취하였던 20대 초반의 치열했던 상황을 이렇게 시로 썼다.
“그때/ 라 로쉬코우 공과의 해후는/ 나의 안에 태풍을 몰아왔다./ 선한 열망의 꽃망울들은/ 삽시에 무참히도 스러지고/ 어둠으로 덮인 나의 내부엔/ 서로 물어뜯고 으르렁거리는/ 이면수의 탄생을 보았다.//
자기 증오의 밧줄이/ 각각으로 숨통을 조여오고/ 하늘의 침묵은 공포로 변했으며/ 모든 타자는 지옥이요/ 세상은 더할 바 없는 최악의 수렁…//
하숙방 다다미에 누워/ 나는 신의 장례식을/ 날마다 지냈으며/깃쇼지 연못가에 앉아/ 짜라투스트라가 초인의 성에 오르는/ 그 황홀을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청춘의 반역과 방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3개월 빨리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귀향할 이유는 없었으나, 1940년 여름,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은 사제품을 받아 육순의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자 1941년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