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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믿는 자가 어려움을 당하면 (고후 4:7-10)
사람은 아무리 잘나도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했어도, 돈이 많아도, 권세를 가졌어도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그릇이어도 그 안에 무엇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보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은 보배 이신 주님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질그릇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보배이신 주님의 가치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돈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 따라서 천원도 될 수 있고, 만원도 될 수 있습니다. 수표도 종이이지만 거기에 1백억이라고 쓰면 1백억 원이 되는 것이고 천억이라고 쓰면 천억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는 주님의 가치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그릇인 우리 안에 보배이신 주님을 모셨으니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만사형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보배이신 주님을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일도 있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만사형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격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7절에서 밝힙니다. 보배를 가진 질그릇인 믿음의 사람들은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여기서 말한 ‘심히 큰 능력’은 ‘최상의 능력’, ‘한량없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는 최상의 능력이요 한량없는 능력인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세 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대는 10마력, 또 한 대는 50마력, 나머지 한 대는 10,000마력입니다. 참고로 에쿠스 4500cc가 270마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좋은 자동차는 부가티 8,000cc인데 1001마력으로 최고속력을 시속 406km까지 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시간이면 간다는 말입니다. 엄청나죠. 그러니 10,000마력의 자동차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자동차가 급경사의 언덕길을 오른다고 생각해봅시다. 10마력의 자동차는 부르릉 거리기만 하지 언덕을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50마력의 자동차는 굉음을 내고, 매연을 뿜어내면서 아주 힘겹게 겨우 오를 것입니다. 10,000 마력의 자동차는 평지를 달리듯이 아주 쉽게 언덕길을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10,000마력의 자동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신 보배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인생의 어떤 난코스를 만나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상의 능력, 한량없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숙제는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히 큰 능력, 최상의 능력, 한량없는 능력이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까? 그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10절에서 그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 불의, 병, 저주, 죽음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걸머지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그리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도, 친자식이라도 죽으면 무덤에 가서 묻고 살아있는 세계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제가 초겨울에 독감주사를 두 번 맞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 독감바이러스에 대해서 면역이 생겼습니다. 독감주사를 안 맞은 사람은 감기에 들려서 콜록 콜록 해도 저는 담대하게 추운데도 걱정 없이 돌아다닙니다. 면역이 생겼으니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 몸 안에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나는 면역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에 독감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은 늘 예수님의 십자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 충만하면 죄도, 세상도, 마귀도, 질병도, 저주도, 사망과 음부도 가난도 나와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하면 담대하게 “마귀야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죄야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 “병아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 “저주야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 “사망과 음부야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감예방주사를 맞았어도 독감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도 고난의 바이러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침투할 수 있습니다. 독감예방주사를 맞은 사람에게 독감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약간의 미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감기기운이 나타날 수는 있지만 곧 그 사람의 몸에 짊어진 면역에 밀려서 독감바이러스는 잡아먹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의 바이러스가 찾아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있으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늘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십자가의 공로를 말하고, 십자가만 붙들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인 성도들에게 바울이 8,9절에서 말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에 대해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를 욱여싸는 것들이 많습니다.
1) 원수가 욱여쌉니다.
원수가 사방으로 욱여싸고 공격을 해도 우리는 싸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 3:5,6에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 이다”라고 담대한 말을 합니다. 그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붙들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아람군대가 도단성에 있는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엘리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이 영적인 눈이 열려서 보니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도단성의 아람군대를 포위하고 엘리사를 보호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다가 원수들에게 우겨 싸일 때 두려워하지 말고 내 속에 계시는 보배이신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싸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5월 하순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30만 명이 던커크에서 독일의 기계화 부대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30만 명이 전멸하면 구라파는 독일의 손에 넘어가고 영국까지도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전 국민에게 기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의 성가대석 앞에 엎드려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영국국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갑자기 던커크만 일대에 큰 폭풍우가 다가와서 비바람이 치고 엄청난 파도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독일 비행기가 뜰 수가 없어서 폭격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던커크만에 진치고 있던 독일 잠수함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데리안 장군이 이끄는 독일의 기계화 부대는 던커크 마지막 방어선인 운하를 깨치고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히틀러가 구데리안 장군에게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 히틀러가 철수를 명령했을까요? 이것은 역사가들에게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사건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 결과 포위되었던 연합군은 11일간의 철수작전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원수에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면 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죄악이 욱여쌉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들이고 사단은 강한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 때 사단은 우리를 죄악으로 우겨 싸이게 만들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절망감에 우겨 싸일 때 주님이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십시오. 히 9:22에서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말했고, 계 1:5에서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죽으심, 십자가를 의지하면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기에 죄악에 우겨 싸이지 않습니다.
마딘 루터는 하나님 앞에 늘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교회의 지도자로, 굉장한 인물로 알고 있지만 자기가 아는 자기는 늘 부끄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그와 자신이 아는 그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늘 괴로워하던 그가 하루는 밤이 늦도록 “하나님,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희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며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었습니다. 한 천사가 나타나서 흑판에 ‘마틴 루터의 죄’라고 제목을 적어 놓고 그 밑에 죄목을 적는데, 얼굴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죄를 다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망할 거야. 나는 영원히 죽을 거야. 죄 값으로 영원히 죽을 거야.’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피를 뚝뚝뚝 흘리는 못 박힌 손이 나타나서 흑판에 요일 1:7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그 피가 흑판을 덮으니 모든 죄목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내 죄가 흉악해도 주님께서 나의 죄를 다 사해 주셨구나!”하며 뛸 듯이 기뻐하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3) 질병과 슬픔이 욱여 쌉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질병과 슬픔이 파도처럼 우리에게 몰려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슬픔과 질병을 다 이겨 버리셨습니다. 사 53:4에서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질병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몸에 병이 찾아오고, 마음에 슬픔이 찾아오면 그 때도 역시 주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4) 가난과 저주가 우겨 쌉니다.
우리는 가난과 저주에 대해서도 주님의 십자가로 승리함을 확신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므로 승리합시다. 갈 3:13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저주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고후 8:9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가난의 짐을 짊어지고 33년간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모든 가난을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5) 죽음의 세력이 우겨 쌉니다.
가장 큰 절망이 죽음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죽음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도, 절대권력을 소유한 독재자도, 공부를 많이 한 박사들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성인군자들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에 죽음은 가장 큰 절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극복이 가능합니다. 히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 영광의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하다’는 말은 본래 당황하다, 어쩔 줄 모른다. 는 뜻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돌아갈 길이나 피할 길을 알지 못해 당황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갈 길이 막연하여 가슴이 심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사방을 살펴보아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과 같고 올무에 걸린 짐승과 같습니다.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요새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답답한 일들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수영 금메달리스트를 만든 김진호 선수 어머니의 간증입니다. 자기 아들이 자폐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절망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 자식과 동반자살 할 것이냐, 아니면 교회를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다가 교회를 나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4년간 하나님께 주야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자폐아 된 진호를 고쳐 주옵소서.” 4년 동안 기도해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4년 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없자 절망에 빠졌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자녀를 사랑하라. 내가 진호를 사랑하니까 내게 맡겨버리고 내가 기르는 데로 너도 진호를 사랑하고 따라가라!” 그 이후 수원에 있는 지체아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수영을 해서 세계장애인올림픽에 가서 수영 1등을 하고 금메달을 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절망했지만 어머니가 하나님을 만나 주의 음성을 듣고 나서는 마음에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보다 더 답답한 일을 만나기를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 문제가 크고, 병문제가 커도 자식문제 만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답답한 일을 만나더라도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나를 위하여 고난당하신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십시오.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상을 사는 동안 내적으로 외적으로 많은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우리들을 버릴지 몰라도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 들어간 사람은 세 사람인데 불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느부갓네살 왕은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박해를 받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과 불신앙이 믿는 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보배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아무리 큰 핍박이 있어도 주님에게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박해를 받는 자가 오히려 박해를 하는 자를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그 이후 70년 만에 다시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주후 70년 로마에 박멸을 당하고 온 천하에 풍비박산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2천년 동안 방랑하며 엄청난 핍박을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버린바 되지 않고 지금도 살아남았습니다.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았던 바벨론은 온데간데없고 앗수르도 사라진지 오래고 메데 파사도 없어지고 로마도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을 짓밟던 구소련 공산주의자들도 없어졌고 6백만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일 나치도 사라졌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끈질긴 민족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버림바 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했습니다. 사단은 권력을 이용해서 교회를 없애려고 하지만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석권하고 나가서 구라파에 복음이 전파되고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자 마귀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로마의 10대 황제가 결심하고 연속적으로 핍박을 했습니다. 국력을 기울여 처참하게 예수교인들을 잡아서 원형극장에서 짐승들과 싸워서 죽게 하고 나무에 달아 기름을 붓고 횃불로써 태우기도 한 것입니다. 네로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디오클레시안 황제까지 3백년간 어마어마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3백 년 동안 국력을 기울여서 교회를 훼파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후 313년 밀라노칙령을 내려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서 온 로마제국 치하에 있는 나라들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예수를 믿도록 변화되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로마를 이겼던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와 그 핍박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대원군 시대에 프랑스 선교사 12명중에 6명이 순교를 당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6촌까지 처형을 해서 대원군이 8천명의 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불씨가 꺼졌나요? 일정 36년 동안에 일본 사람들이 2백 교회를 폐쇄하고 2천여 명의 성도들을 투옥시키고 죽이고 고통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당 십자가 위에 일본 신단을 설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했습니다만 교회가 망했나요? 일본제국주의는 망해도 교회는 안 망하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핍박이 있는 시대입니다. 뉴타운이다 재개발이다 해서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는데 문제는 교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개발 바람에 밀려서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땅을 싼 값에 사들이고 교회에게는 엄청난 값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00교회는 1700평의 땅을 20억 보상으로 넘겼습니다. 그 대신 1500평의 종교부지를 받을 수 있으나 종교부지의 가격이 110억이라 종교부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종교부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건축비가 없으니 건축도 불가능합니다. 마천동에 뉴타운이 들어서면 0000교회 하나만 남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교회들은 다 철거해야 합니다. 그 교회들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수많은 교회들이 이런 과정 속에서 성도의 수가 줄어들거나 문을 닫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을 교회가 11,000교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핍박입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결국은 승리케 하실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떤 박해를 받아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4.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한 다는 것은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망한다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천국에 있을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 14:1-3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거처를 예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났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한 세계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던 주님이 일어섰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당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홀로센버그 수용소를 담당했던 독일의 늙은 군의관 베스게씨는 1945년 4월 9일의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는 히틀러에 의해서 많은 독일의 장성들도 사형을 당하고 외국인들이 사형을 당했다. 오늘 새벽 5시와 6시 사이에 카나리 제독과 오스트 장군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본회퍼 목사였다. 본회퍼 목사도 히틀러 제거 운동에 관여했다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 처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잠시 기도했다. 그는 평화롭게 보였다. 그 얼굴에 너무나 평안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오랫동안 사형수를 돌보는 의사를 했지만 그런 사람을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50년 동안 의사 일을 했지만 저런 죽음을 본적이 없다. 저렇게 평안하고 저렇게 기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본회퍼 목사님은 그 속에 부활의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실상은 승리자였던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치가 그에게 목을 매달아 사형을 시켰지만 즉시로 그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그는 부활을 품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사망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생명 싸개에 쌓여서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형수들은 처절한 절망과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사형을 당했지만 본회퍼 목사의 얼굴은 한없는 기쁨과 평안과 담대함이 있었다고 그 의사선생은 일기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배이신 주님을 모신 우리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삽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합시다. 십자가의 능력을 입으로 고백하며 삽시다. 그리하여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영원한 승리자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