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스타치석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에서 조각가의 역할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조각가는 돌을 깎아 사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사자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내가 처음 이 돌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돌 속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떠오르는 형상을 발견했습니다. 나에게만 이렇게 보이는 걸까요. 돌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어느 순간 깊은 사색에 잠긴 부처님의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한복입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어머니가 보이기도 합니다.
돌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돌은 다르게 존재하고, 내 해석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문득,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위덩어리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 안에는 세월이 새긴 패임과 씻김, 굴곡이 가득하고, 그 골짜기와 능선 사이로 수많은 이야기와 상징들이 흘러갑니다. 어떤 것은 스며들어 흔적이 되고, 어떤 것은 순간의 빛으로 반짝이며 사라집니다.
한평생을 돌아보면, 삶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많은 산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며, 저마다의 지형을 만들어갑니다. 그 흐름을 읽고,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보물찾기 놀이와도 같지요.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어도, 그중 단 1%라도 찾아낸다면 기분 좋은 소풍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나이 예순다섯. 숫자로 보면 제법 묵직한 연배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서툰 청년이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이제 좀 알겠다’ 싶다가도, 곧바로 ‘아니, 아무것도 모르겠네’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몇십 년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같은 한 해를 예순다섯 번 반복한 기분이랄까요. 평균 수명이 여든을 넘긴 시대에 예순다섯은 인생의 중반전을 갓 넘긴 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나이가 되면 뭔가 인생의 진리를 터득했으리라 기대하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인생 사용설명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받는지도 모르겠고요.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이 늦은 밤 창밖에 떠 있는 별처럼 오늘도 가만히 나를 바라봅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의미란 번쩍하고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언젠가 거창한 깨달음이 나를 덮칠 줄 알았습니다. “아, 이게 삶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순간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정작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대신 의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를 힐끔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꽃을 바라보던 시간, 새장 속 새가 쳐다보던 순간, 강가에서 흐르는 물살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날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한가한 소일거리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충만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혹시 의미란 애써 찾아 헤맬수록 도망가고, 오히려 그냥 있을 때 슬며시 다가오는 것일까요?
젊었을 때는 의미를 성취에서 찾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꾸리고, 맡은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면 내 삶이 더욱 빛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아마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삶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무거운 질문들이 찾아왔지요.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는가?' '내 선택들은 옳았는가?' 칸트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정과 일터에서 성실히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태도를 '평범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평범함이 내 삶의 뼈대를 지탱해 주었음을 압니다.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기준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칸트의 도덕적 의무론처럼,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존재 이유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달려오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누가 정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서 루소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책임감과 사회적 기대에 맞춰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흘려보낸 취미들을 하나둘 다시 붙잡아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를 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자연을 좋아하고, 작은 생명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산속을 거닐 때, 새소리를 듣고 나무껍질의 질감을 만질 때면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나 자신이 되곤 했지요. 아마도 그 순간이야말로 삶이 어떤 커다란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들꽃을 찾아 나서는 길은 생각보다 흥미로웠고, 새장을 직접 만들며 새들과 교감하는 시간은 나를 뜻밖의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살아보니, 인생의 의미란 꼭 사회적 역할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그냥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물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의미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의미를 쾌락이나 즐거움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해봤을겁니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요. 벤담이 말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시각은, 듣기에는 그럴듯했지만 내게는 그리 와닿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즐거움을 더하고 고통을 줄이는 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지요. 기쁨도 슬픔도 그 자체로 우리 삶의 풍경을 만들어 가는 필수적인 감정이었으니까요.
사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인생은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나에게 한참 후에야 그런 말을 했으니, 어쩌면 내가 먼저 그 말을 한 셈이지만, 아쉽게도 내 인생에는 철학서 한 권을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냈다면, 사람들은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지나치게 우울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도는 때때로 낯선 시선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이걸 왜 해야 하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각한 짝사랑에 빠졌을 때는 "왜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혹시 세상이 원래 이런 구조인가?"라는 의문에 빠졌습니다. 심지어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길에는 문득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이렇게 웃고 떠들었는데도 결국 또 혼자네. 이게 삶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역량이 닿지않아 그랬던 것 같지만, 그때는 모든 일이 심각했습니다. 아니, 사실 젊었을 때는 심각할 수밖에 없을겁니다. 10대와 20대에는 모든 일이 세계적인 사건처럼 느껴진다고 하지요. 첫사랑의 실패는 로미오와 줄리엣급 비극이고, 시험을 망치면 인생이 끝났다고 여겨졌지요. 그리고 고통은 삶의 의미를 묻는 순간들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때마다 멈춰 서서 내 존재를 다시금 돌아보았을테지요.
그리고 육십이 넘어갈 때, 나는 대체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 원래 이런 거였구나." 인생이 힘든 이유는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원래 그런 구조였던 거지요. 젊었을 때는 이 사실이 억울해서 투덜거렸지만, 지금은 그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웃긴 건, 이를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삶이 덜 힘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하는 황당한 승리감이 들었고, 그다음에는 "그래, 원래 이러니까 그냥 버티면 되겠네" 하는 이상한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왔다가 "어차피 이미 다 젖었는데 뭐" 하고 뛰어가는 기분이랄까요.
결국, 인생의 의미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변하는 질문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사회적 성취에서, 중년에는 가족과 책임에서, 그리고 이제는 물고기와 놀고 돌을 만지는 소소한 취미에서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의미는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대화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죽음’이라는 단어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삶이 더 선명해집니다.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에, 오늘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가는 동안 창밖 풍경이나 즐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니체는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삶이 본래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세우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으려 하면 끝없는 갈증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성공이나 행복, 누군가의 인정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변하지요. 하지만 내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갈 때, 그 의미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자유의지로 의미를 창조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환자를 보고 가족과 놀고 새소리를 들으며, 강가에서 낚싯줄을 던지다가, 수석을 만지작거리고 사진과 글을 남기면서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십오년, 아니 조금 덜 살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의미를 억지로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제대로 즐기다 보면, 의미는 저절로 따라올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인생의 의미란 어쩌면, 끝까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자구요. 어차피 다들 처음 살아보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