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위문 내 교지(敎旨) 등 선조(先祖) 유물(遺物) 관련 후기(後記)♢
필자는 2016년 9월 19일부터 교지 등 선조 유물 101점에 대해 SNS(밴드·카톡 등) 상에서 선조의 업적을 재조명하면서 종원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이해와 자긍심을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금번 本鄕을 중심으로 확인된 현존 교지(諭書·傳令 포함)는 순보공 1매, 청계공 1매, 호조판서공 11매, 상주영장공 1매, 안항공 1매, 충청수사공 4매, 청금공 2매, 웅천현감공 1매, 병조참판공 31매, 문화현령공 8매, 상원군수공 8매, 귤우헌공 1매, 송와공 1매, 삼수군수공 9매, 보성군수공 4매, 절충장군공 2매, 존재공 1매, 서계공 1매, 운수공 4매 등 92매와 판서공 종택 분재기 5점, 오헌고택 분재기 1점, 판서공 종택(초당 광량 종원 1점 포함) 준호구 3점 등 총 101점 입니다.
이러한 교지 등 선조 유물은 本鄕 방촌의 종가(宗家)를 포함한 종원들의 집에서 보관해오다가 2005년 5월 방촌유물전시관 개관(開館)에 맞춰 기탁하여 현재 1,000여점이 소장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중 판서공파(判書公派) 종택(宗宅)에서 소장했던 교지(敎旨) 52매, 기타 분재기(分財記) 5점, 준호구(準戶口) 3점(초당 광량 종원 1점 포함) 등 총 60점입니다. 이는 호조판서공, 병조참판공, 상원군수공, 귤우헌공 등 4代에 걸쳐 429~285년 前의 다수의 문서가 관직 별로 보관 등 관리가 양호 하여 현존(現存)의 의미(意味)가 큽니다.
행원문중(杏園門中) 교지는 1999년 방촌유물전시관(傍村遺物展示館)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사업을 추진하였던 香山(성렬) 종원에 의하면, 당시 건립추진위원회에서 長興郡廳과 全羅南道에 사업(事業) 제안서(提案書)를 제출 준비하면서 장흥읍 행원 괴봉공파 종가에 소장 보관하고 있던 교지를 규복(鑑軒 1918~ ?, 14대 종손) 종원의 협조를 받아 다수의 사진을 촬영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지 사진을 판서공파 종택에 보관되어 있는 방촌유물전시관 건립 제안서 내 사진 33장을 다시 촬영한 것입니다. 교지 33매 중에 운수공의 교지 4매는 직계 증손(曾孫)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여타 교지 29매는 어디에서,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어 행원문중 산하 각 종중(宗中)과 후손들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특히 조선시대 세종 때 생원공(諱 自恭)의 입북(入北)으로 관북 지역에서는 후손들이 번손하였습니다.
이중 의주부윤공(諱 漢良, 25세), 호조참의공(諱 昌祖 31세, 1703~1759)을 비롯한 다수의 선조가 文‧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남북분단의 현실로 인해 교지 등 선조의 유물(遺物) 자료를 접할 수 없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나마 현재 본향 방촌, 행원 등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유물이 다수 현존(現存)하고 있어 근본적인 역사(歷史) 고증(考證)과 선조(先祖)의 이력(履歷)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지는 족보 면주(面註) 및 기존 고증 자료와 약간의 차이가 있어 교지를 바탕으로 선조의 이력 재조명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長興魏門 후손들은 선조 유물을 집안 내에서 소장해오다가 자연적 훼손(毁損)과 도난(盜難) 사례 등 보관상에 문제점(問題點)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촌유물전시관(傍村遺物展示館)을 건립하여 방촌마을 거주 후손들 중심으로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선대 유물을 기탁하여 소장전시 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학계(學界), 관광객(觀光客) 등 여러 사람들이 한층 쉽게 선조의 유물을 관람 할 수 있어 長興魏門에 대한 우수성(優秀性) 등 홍보(弘報)에 큰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후손들 중 개인이 집안에서 선조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면 방촌유물전시관에 기탁(寄託)을 권유(勸誘)합니다. 훌륭한 선대의 업적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개인이 소장 관리하면 선조의 업적(業績)은 빛을 볼 수 없고 사장(死藏)됨은 자명(自明)합니다.
아울러 장흥위문 문중차원에서 교지를 포함한 유물에 대해서 체계적인 연구(硏究)와 고증(考證)을 통한 책자(冊子) 간출(刊出)을 하여야 합니다. 또한 이미 학계에서 가치성이 고증된 목판(木板) 환영지(寰瀛誌) 등 유물에 대해서는 문화재(文化財) 지정을 적극 추진(推進)이 후손의 중요한 과제라고 사료됩니다.
끝으로 교지 등 선조 유물에 대해 자문과 협조, 성원을 아끼지 않은 德雲(황량), 香山(성렬), 南田(정우), 씨족문화연구소장 圓山(정철), 장흥향교 전교 雅山(성태), 장흥종친회장 德山(계춘), 翠山(수환) 등 宗•門中 원로(元老)와 씨족문화연구위원 湖山(신복), 梧隱(승복), 苑谷(상복), 野雲(이환) 대종회 청장년회장 蟬巖(옥량), 총무 碧泉(윤기), 財痴(현동) 등 여러 종원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7년 1월 16일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삼가 씀
한마디로 고생하였네요.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바쁜 직업임에도 쉬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여 일일이, 꼼꼼하게, 대조, 분석해서 밴드에 게재하였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바쁜 공무에도 문중사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흥위문사랑'을 느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늘 문중사에 앞장서서 선조님들이 남기신 유물을 바탕으로 옛발자취와 업적을 연구하며 많은 문중상식으로 위문중 종친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이미지 관리와 단합과 화합을 강조하며 문중 종친분들을 사랑하는 백강의 그마음을 높이 평가하며 늘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기억납니다. 제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귀중히 여기고 잘 가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번 栢江위원의 교지연구는 2015년 편액연구에 이은 또 다른 보배(寶貝)입니다. 문중 어르신의 말을 빌리자면 ’대어(大魚)를 낚았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할까요? 교지고증을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무려 4개월간이나 101개나 되는 유물을 찾아서 수차례 방촌유물전시관을 찾았고, 수많은 종친들을 만났으며, 유무선 등 모든 통신수단을 동원해서 교지에 대해 고증하는 어려움을 자처했습니다. 그야말로 교지찾아 삼만리였습니다. 교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문중의 위대함과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고증과정에서 보성군수공 후손의 제주도 300년 거주사실이 밝혀진 것은 우리 문중의 전국화에 커다란 수확입니다. 제주도에 우리 문중이 300년이나 거주한 것을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때마침 위성곤 의원의 서귀포시 국회의원 당선과 맞물려 문중의 위대함과 자신감을 한껏 북돋아 주었습니다. 보성군수공과 같은 선현이 있었기에 위성곤의원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보성군수공의 선정비가 서귀포에 현존하고 이를 본받아 위성곤 의원께서도 선정(善政)을 펴시길 기대합니다. 또한 101개나 되는 교지를 비롯해 분재기 등이 ‘위씨네카페’에 게재되어 인터넷환경으로도 언제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BAND에 올리는 작업만으로 교지연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하여 도록(圖錄)이나 책자로 편찬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면이 허락한다면 제23호장흥위씨종보(2017.04.30. 발간예정)에,그리고 이후에 발간될 종보에 몇 번에 걸쳐 분할하여 게재해도 좋으리라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