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북 (1986)
- 최일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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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평생을 북을 치며 방랑하다가 아들 집에 얹혀 살게 된 민 노인(민익태)은 며느리 송여사에게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한 후, 손자 성규와 만나기로 되어 있는 포장마차 '중역의자'로 향한다. 자기를 축출하는 것만 같은 자물쇠 잠그는 소리를 뒤로한 채, 민노인은 그날 밤의 사건 이후 나름대로의 기쁨과 일종의 해방감을 확인하다.
그날의 초청객들은 고급관리인 아들의 고향 친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민노인에겐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들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후, 술이 오르자 민노인에게 북을 청한다. 처음엔 거부하던 민노인은 이 잔 저 잔 받아 마시며 가슴이 덥혀진 데다 간곡한 청에 못이겨 북을 치게 된다. 자리는 유쾌하게 끝났으나, 손님이 돌아간 후 아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민 노인을 다잡으며 자신의 체면과 위치를 우그러뜨린다고 항변을 했다. 언젠가 아들은 일부러 마신 듯한 술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자신의 고통스럽던 과거의 책임을 민노인의 북으로 돌리며, 아버지는 나타나지 말았어야 옳다고, 북을 없앤 후 아버지가 허깨비로 사신다 한들 자신에겐 큰 문제가 아니라고 포악스럽게 퍼부은 적이 있었다. 민노인은 아들이 날씬한 생활 속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고자 하는 까닭이,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고통과 낭떠러지의 세월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민노인은 집안에 손님을 모시기로 한 날이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민노인은 포장마차 '중역의자'에서 성규를 만난다. 민노인과 허물없는 사이가 돼 버린 손자 성규는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탈춤 공연에 북장단을 맡아 줄 것을 제의한다. 성규의 제의를 수락해 버린 민노인은 조금은 후회도 했으나 손자의 대학에 찾아가 연습을 하며 감동과 편안함을 맛본다.
공연을 무사히 마친 민노인은 근래에 흔치 않은 노곤함으로 깊은 잠을 잤다. 그러나 저녘때가 되어, 외출에서 돌아온 며느리는 춤판에서 북을 친 것에 대해 다짜고짜 민노인을 몰아 붙인다. 저녁을 마친 후 아들은 민노인을 몰아붙이는 대신 성규를 몰아붙인다. 성규는 자신의 춤판에 할아버지를 동원한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자신과는 무관하며, 전 세대끼리의 갈등이 다음 세대에서 쾌적한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고 그것이 역사의 의미가 아니냐며,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할아버지의 예술혼 또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일이 터진 것은 일주일쯤 후였다. 저녁 준비를 하다 말고 전화를 받은 송여사는 성규가 데모하다 잡혀갔다고 소리치며 급하게 나간다. 민노인은 아들이 먹다 남은 양주를 찾아 조금씩 홀짝거리다 극히 자연스럽게 북을 껴안고 북채를 잡았다. 수경이가 새살거리며 이것저것 물었으나 민노인은 자신의 역마살과 성규의 데모가 닮아있지 않는가 자문하듯이 말한다.
인물의 성격
민노인 :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예술인.
민대찬 :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아들. 세속적 가치관에 충실한 인물.
성규 : 민노인의 손자로,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도 이해하고, 할아버지의 삶에서 긍정적인 가치도 찾을 줄 아는 인물.
송여사 : 민대찬의 아내로서 시아버지에 대해 냉정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임.
수경 : 당돌하지만 할아버지와 친밀한 손녀. 할아버지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함.
구성 단계
발단 : 민노인이 손님이 오는 날 집을 비우게 된 내력과 아들(민대찬)과의 갈등의 원인 소개
전개 : 민노인과 성규(손자)의 관계 소개. 성규의 부탁
위기 : 민노인이 성규의 부탁을 받아들여 대학에서 학생들과 공연을 함.
절정 : 민노인의 공연으로 인해 민대찬과 성규가 충돌함.
결말 : 성규가 데모하다 잡혀가고, 민노인은 자신의 북을 울리며 생각에 잠김.
이해와 감상
1986년 제10회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대학생들의 전통 문화에 대한 심취와 학생 운동으로 대변되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인 70년대와 80년대에서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대인의 삶의 가치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가족사적 구조로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가족사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또한 가족을 구성함으로써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면에서 가족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맞이하게 되는 본래적인 존재 조건이다. 누구도 이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가족은 인간이 맺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원형을 이룬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이 맺는 관계는 성장과 훈육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라든가 민족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연인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가족이 소설적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가족사 소설은 단순히 가족 구성원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의 상황이나 운명을 역사적 시간의 지속과 변화의 차원에 놓고 그리는 것이다.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가족사적 구조가 애용된 것도 이러한 예술적 가능성에 주목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북'으로 표상되는 본원적 삶을 추구하는 할아버지 세대와 실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아버지 세대의 갈등이 아들 세대에서 융합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당대의 사회 현실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문이나 뿌리를 따지는 풍토가 잔재해 있었다. 학생들은 데모를 통해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이며, 예술가나 장인들의 삶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천대받으면서도 북을 놓지 않았던 고집스러움을 예술혼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민노인의 삶의 역정은 자유분방한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아들인 민대찬은 아버지의 방랑으로 인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여 성공한 자수성가형 인물로서 명예와 실리를 추구한다. 한편, 손자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갖춘 인물로서,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 줄 것을 아버지에게 요구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가족사적 아픔이 아닌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각 세대의 상이한 가치관을 보여 주며, 나아가 각 세대 간의 갈등이 단절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나아가는 화해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것은 작품의 제목인 '흐르는 북'을 통해 상징적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단절된 듯이 보이는 세대라 할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고통을 공유하고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핵심사항 정리
갈래 : 중편소설, 사회소설, 가족사적 소설, 사실주의 소설
배경 : 1980년대 도시 중산층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표현상 특징 : 해학적 판소리 가락, 현재 진행형 어미, 토속어 구사.
우리 소설사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가족사적 구조를 취함.
역설과 풍자, 해학적 문체가 돋보임.
주제 ⇒ 세대간의 갈등과 화합 모색
예술혼과 인간의 본원적 삶의 추구.
출전 : 문학사상(1986)
<생각해 볼 문제>
1. 이 작품의 제목 '흐르는 북'이 의미하는 바를 인물 간의 갈등과 관련하여 서술해 보자.
⇒ 흔히 강이나 역사를 '흐른다'고 표현한다. 이 작품 속에서 '북'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 간의 단절의 원인이자, 할아버지와 손자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려고 하는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손자가 되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통해, 세대간의 갈등이 결코 단절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나아갈 때 극복될 수 있다는 주제를 '흐르다'라는 용어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2. 민노인의 '역마살'과 성규의 '데모'가 닮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일반적이고 평범한 삶의 방식과 거리가 있는 삶을 택하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거부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최일남(1932∼) 언론인 겸 소설가.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민국일보' 문화부장, '경향신문' 문화부장, '동아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1978년 편집부국장을 지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었다. 1984년 논설위원으로 복직되었으며 1988년, 이 해 창간된 '한겨레 신문' 논설고문으로 옮겨서 재직했다. 소설가이며 우리나라 현대 역사에서 민주화에 공헌한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평가받는다.
초기 작품의 특색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리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성을 확인해 보려는 데 있다. 그 후 작품의 영역을 확장하며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역사적 감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건강한 해학성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하였다. 현실에 기저한 인간의 본연적 자세에 천착하여 광복 전후와 1950년대의 역사적 격동을 살아온 변두리 인물들의 생생한 초상을 묘파하는 세태소설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등단 이후 1960년 무렵까지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하다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거의 창작을 중단했는데, 1973년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개시했다.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 이후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고향을 배경으로 그 고향의 희생을 딛고 출세한 시골 출신 도시인들이 느끼는 부재 의식 등, 이른 바 '출세한 촌놈들'이 겪어야 하는 복잡한 이야기를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더러는 쓸슬한 비애의 모습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울 사람들', '어디로 가시나요', '살아남은 자', '바랜 세월', '우화'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소설은 '고향에 갔더란다'와 '읍내 사람들'에서 1970년대적인 의미의 고향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시하는 동시에 그의 소설에서는 날카로운 역사적 감각,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노래'와 '누님의 겨울'에서 '흐르는 북', '그 때 말이 있었네'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민감한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타락한 정치, 위선적인 지식인의 모습, 물질만능의 세태 등이 역설과 풍자의 언어, 유창한 문체로 형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