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믿음의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野
정몽주선생 초상화
1880년 이한철 중모(重摸) 지본채색 61x35.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은(圃隱) 鄭夢周(정몽주)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영일정씨세보〉에 의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과 검교직(檢校職)을 지냈는데, 이는 그의 집안이 지방에 거주하는 한미한 사족이었음을 보여준다.
1360년(공민왕 9) 김득배(金得培)가 지공거, 한방신(韓邦信)이 동지공거인 문과에 응시,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첫자리를 차지해 제1인자로 뽑혔다. 1362년 예문검열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친원파인 김용(金鏞)의 계략에 빠져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함께 상주에서 효수당했는데 그는 스스로 김득배의 문생(門生)이라 하고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장사지내주었다. 1364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삼선(三善)·삼개(三介)를 쳤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 朱子集註〉뿐이었는데 정몽주는 그것을 유창하게 강론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뛰어났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많이 의심했다. 그뒤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을 얻어 참조해보니 그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다.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색(李穡)은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했다.
1372년 서장관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난징[南京]에 가 촉(蜀)을 평정한 데 대하여 축하하고 돌아올 때 풍랑을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전임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가 처음 건국되었을 때 그가 힘써 요청하여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일로 국내가 뒤숭숭하여 명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자, 사신을 보내 사정을 고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얼마 후 북원(北元)에서 사신이 오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반대했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이당시 왜구가 자주 내침하여 피해가 심하므로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 화친을 도모했는데 나흥유는 투옥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이에 정몽주를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보내 해적을 금할 것을 교섭하게 하자 이웃나라 간의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이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당시 명은 고려에 출병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으나, 정몽주는 사신으로 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1386년 명에 가 명의 갓과 의복을 요청하고 해마다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이를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했다.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같은 해 도당(都堂)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법의 자의적 운영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고자 통일된 법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는데, 정몽주는 〈지정조격 至正條格〉·〈대명률 大明律〉, 그리고 고려의 고유형법을 수집·연구하여 왕에게 바쳤다. 또한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했다. 한편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도통(道統) 중심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도통의 기준을 주자학의 학문적 공적으로 한 공적론(功積論)과 의리명분으로 한 의리론(義理論)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주자학의 학문적 성숙이 심화되면서 후자를 대표하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백과사전>
정몽주 유허비 /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구정리 124-2
정몽주선생의 생애와 작품 (1)
1. 어머니와 아들의 노래
가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아 씻은 몸을 더러힐 까 하노라
雨行泥汚遍 우행니오편 비내려 모두가 진흙탕 세상인데
熱走汗霑頻 열주한점빈 신나게 돌아다녀 땀에 자주젖는다
沂浴思春暮 기욕사춘모 기수에 목욕하고 저문 봄을 그리며
湯銘誦日新 탕명송일신 탕명의 ’나날이 새롭다’를 암송한다
氤氳喜有水 인온희유수 성한 기운 기쁘게도 물에 있어
淸淨洗無塵 청정세무진 흙먼지 씻어내니 티끌 하나 없도다
頓覺精神爽 돈각정신상 문득 정신이 맑아짐을 깨닫고
臨風更網巾 임풍경망건 바람을 맞으며 망건을 고쳐본다
湯銘 : 湯之盤銘(탕지반명) 殷(商) 나라 湯王이 쓰던 쟁반에 새긴 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임을 우리는 위의 두 시를 통하여 간단히 깨닫는다.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아들에게 당부한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아들 포은 정몽주는 진흙탕 세상을 걸은 후에 깨끗이 목욕한
몸으로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옳은 길로 걸어가고자 노력했음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구약 성경 잠언 맨 끝장인 31장에는 르무엘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잠언 31장 3절 - 9절 )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정몽주의 어머니나 르무엘왕의 어머니나 모두 아들이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간절한
기원을 담아서 훈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는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좇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충의의 길을 걸어갔다.
르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헌신한 자" 또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이라고 하며 ,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처럼 북아라비아에 있던 마사(Massa)의 한 왕이 아닌가 추정한다.
르무엘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어머니의 교훈을 귀하게 여겨
얼마나 즐겨 지킬려고 했으면 성경의 잠언 마지막 장에 실리게 되었을까 살펴볼 수 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잠언 23 :19~35)
아마도 르무엘왕의 어머니는 이 잠언 23장에서 포도주나 독주의 폐해를 잘 알고 그것이 아들의
政事정사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깨우쳐 주기 위하여 어머니의 간절한 애정을 담아 이런 교훈을
주었고 이 교훈을 깊이 마음 판에 새기고 왕위에 오른 아들이 그 어머니의 교훈을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여 온 대조 백관과 백성들이 같이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언서에 기록되게 하였다고
짐작해 본다.
2. 정몽주의 서정 시
春 (춘) - 봄
春雨細不滴 춘우세불적 봄 비 가늘어 방울 없더니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밤 되자 빗소리 귀에 들리네.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눈 녹아 시냇물 불어날 테고
草芽多少生 초아다소생 파릇파릇 풀 싹도 돋아날 거야.
감상
春 雨 細 不 滴 터니
봄비 가늘어 방울짓지 않더니,
기구
起句는 시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구이다. 시각적인 묘사를 하고 있으나 두드러지는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소재로써 봄비가 선택되어 있으며 가늘다는 표현 다음에 다시 물방울이 짓지 않는다(처마 끝에
낙수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표현이 등장하여 아주 가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夜 中 微 有 聲 이라.
밤중에 가늘게 소리가 있네.
승구
承句는 기구의 詩想을 이어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어가 무엇
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細와 微는 서로 가늘고 미세하다는 뜻으로 공통점이 있다. 이 구는
청각적 감각이 두드러지게 이용되고 있는데 주위가 굉장히 고요해 낙숫물조차 맺히지 못하는
보슬비의 소리가 들린다고 뻥을 치면서 아주 고요한 밤을 묘사하고 있다.
雪 盡 南 溪 漲 하니,
눈 녹아 남쪽 개울이 불어나니
전구
轉句는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구이다. 전환이 없으면 한시는 단조로움을 극복하지 못한다.
변환은 곧 雪盡이다. 시상을 이어 받고자 한다면 降雨라고 썼을 것이다. 소재의 전환은 구체적
으로는 개울의 불어남이 봄비 때문이 아닌 눈이 녹아 내리기 때문이며, 동장군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서서히 봄이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漲도 윗구의 細와 微와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는
시어이다. 시의 흐름을 바꾸어주는 시어이다.
草芽 多 少 生 고.
풀싹은 얼마나 돋았을까 !
결구
結句는 시상의 맺음을 의미한다. 풀싹이 의미하는 상징은 곧 봄(春)이다. 결국 해석의 궁극적 의미는
봄이 얼마나 우리 곁에 다가왔을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제는 작가의 봄에 대한
기대감이다. 부분은 작자의 상상력이 동원된 구이다. 풀싹은 눈으로 보고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녹고 있음을 보고서 자연히 봄이 돌아와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작자가
유추한 것이다. 이 봄의 모습이 봄비에 의해 촉촉하게 젖고 싱그러운 것임에는 틀림 없다.
飮酒 음주 - 술을 마시다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나그네 길 봄 바람에 미친듯이 흥이나서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였네
還家莫怪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집에 돌아와서 돈 다 썼다 후회말라
剩得新詩滿錦襄 잉득신시만금양 새로지은 시가 비단 주머니에 가득하나니
吟詩 음시 - 시를 읊는다는 것
終朝高詠又微吟 종조고영우미음 아침이 다하도록 읊다가 또 음미해 보노라니
若似披沙欲練金 약사피사욕련금 모래 속 파혜쳐 금싸라기 찾으려는 것 같다오
莫怪作詩成太瘦 막괴작시성태수 시 짓느라 말라버린 일 괴상타 여기지 마소
只緣佳句每難尋 지연가구매난심 오로지 좋은 싯귀란 어렵게 찾아지는 것이라오
위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 같은 범인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호방함과 낭만적인 기개와 아름
다운 시를 찾는 뜨거운 열정을 얼마나 포은이 지니고 있었는지 또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3. 정몽주의 애국시
봉사일본(奉使日本)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 흐드러졌구나,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하늘 끝(떠도는) 나그네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초련천리록 풀은 끝없이 푸른데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달빛은 두 나라를 밝게 비치네.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하다 보니 돈은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희어졌네.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의 큰 뜻이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오직 이름만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네.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고국을 그리는 심정을 쓴 것임
양향 : 우리나라와 일본
유세 : 다른 나라의 군주를 방문하여 자국의 국정에 유리하도록 설득하는 일
萬景臺 만경대 - 만경대에 올라
千刃崗頭石徑橫 (천인강두석경횡) 천길 바윗머리 돌길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 (등림사아불승정)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靑山隱約夫餘國4) (청산은약부여국)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黃葉賓紛5)百濟城 (황엽빈분백제성) 누른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九月高風愁客子 (구월고풍수객자)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깊고
百年豪氣誤書生 (십년호기어서생)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으로 그르쳤네
天涯日沒6)浮雲合 (천애일몰부운합)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矯首無由望玉京7) (교수무유망옥경) 속절없이 고개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남고산은 천경대,만경대,억경대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데 그 중 중앙의 만경대 남쪽 벼랑
바위에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성계가 고향인 全州 梧木臺에서
승전 자축연회를 베풀면서 야심을 유방(劉邦)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얘기하자1) 혼자
만경대에 올라 쇠퇴해 가는 왕조의 한(恨)을 읋었다는 鄭夢周의 시(詩)가 새겨져 있다.
이 우국시가 만경대에 각자(刻字)한 시기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1675-1755)이 임술년인 1742년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했던 李書九가 포은시를 차운(次韻)한
시(1820년)가 적혀 있다.2)
주해:
1)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면서 고향 沛패현 豊풍읍에 들러
연회를 베풀면서 지은 노래로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바람이 부니 구름이 높이 날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해내혜위고향 위엄이 세상에 떨치니 고향에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어찌 용맹한 장수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출처 : 史記 <高祖本紀>와 文選에 수록>
2) 우국시의 刻字각자에 관하여는 전주문화원 후암선생의 고견에 따름
3) 김정석의 지적은 經-徑이나 후암선생 의견에 따라 逕으로 함
4) 부여국은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추측
5) ?紛빈분은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모양을 말하나 여기서는 휘휘 날리다로 풀이함
6) 김정석의 풀이는 沒-暮이나 고치지 아니함
7) 玉京은 옥황상제가 산다는 가상적인 서울이나 여기서는 개경을 뜻함으로 봄
< 참고문헌 : 송영상편 <우리고장 전주>, 전주문화원 총서>
임고서원에 전해오던 선생의 초상화 /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정몽주선생의 생애와 작품 (2)
1. 생 애
1) . 출 신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 경북 영천에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의종(毅宗)대에 추밀원지주사로 인종(仁宗)의 유지를 받들어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 간신들의 비방을 받고 자결한 정습명(鄭襲明)이다.
정몽주의 초명(初名)은 몽란(夢蘭)과 몽룡(夢龍)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에 놀라 깨어나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또 정몽주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낮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을 꾸다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배나무에 그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몽룡이라고 고쳤으며, 그가 성인이
된 뒤 다시 몽주(夢周)로 고쳤다. 정몽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일곱 개나 있었다고 한다.
夢 꿈
世人多夢寐 세인다몽매 세상사람들 꿈을 자주 꾸나니
夢罷旋成空 몽파선성공 깨어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自是因思慮 자시인사려 스스로 그로 인하여 깊은 생각하나니
何能有感通 하능유감통 어떻게 해야 감통을 얻으리오
殷加得傅說 은가득부열 은나라 고종은 부열을 얻었고
孔氏見周公 공씨견주공 공자는 꿈 속에서 주공을 뵈었다
此理人如問 차리인여문 사람에게 이 이치 적용을 묻는다면
當求至靜中 당구지정중 먼저 정신을 고요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정몽주는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수학하여 1362년에는 예문관이 수찬,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고,
1364년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삼선(三善)·삼개(三介) 형제의 여진족(女眞族)을 화주에서 토벌할 때에
그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瞻星臺 - 첨성대
瞻星臺兀月城中 첨성대올월성중 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솟아있고
玉笛聲含萬古風 옥적성함만고풍 옥피리는 만고의 풍여를 머금엇도다
文物隨時羅代異 문물수시라대이 문물은 시대에 따라 신라와 다르나
嗚呼山水古今同 오호산수고금동 아, 산과 물은 옛날과 지금이 한가지로다
이후 정몽주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올랐다. 이때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상제(喪祭)가 문란하고 해이해져 사대부들마저도 100일이 지나면 탈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몽주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상례를 극진히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 그의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 이를 표창하였다.
冬至吟 1 동지음 1 - 동지를 노래함 1
乾道未嘗息 건도미상식 하늘의 도는 일찍이 쉼이 없는 것이고
坤爻純是陰 곤효순시음 땅의 효는 순전히 음의 기운이라네
一陽初動處 일양초동처 일양이 처음 움직인 곳에서
可以見天心 가이견천심 하늘의 마음을 살필 수 있다
1367년, 정몽주는 예조정랑으로서 성균관 박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밖에 없었는데, 정몽주는 성균관 박사로서 유교 경전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
하였으며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그러나 정몽주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해석을 듣게 되자 그의 학문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사서통(四書通)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이 일치하자 사람들은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하며 오해를 풀었다.
冬至吟 2 동지음 2 - 동지를 노래함 2
造化無偏氣 조화무편기 조화는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어
聖人猶抑陰 성인유억음 성인은 여전히 음기를 억제한거네
一陽初動處 일양초동처 일양이 처음 움직인 곳에서
可以驗吾心 가이험오심 내 참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네
이색은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면서 그를 '동방
이학의 시조', 즉 우리 나라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자신의 스승
이었던 이색으로부터 이와 같은 극찬을 받을 정도로 정몽주는 성리학에 통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성균관 사예가 되었고 1371년에는 잠시 태상소경으로 옮겼다가 곧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1375년에는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제수되었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贈僧 증승 - 스님에게
松風江月接沖虛 송풍강월접충허 솔바람 강에 비친 달이 텅 빈 공중에 닿으면
正是山僧入定初 정시산승입정초 이 때가 곧 산속 스님 선정에 드는 처음이로다
可吲紛紛學道者 가신분분학도자 가소롭도다 어지러이 도를 배운다는 자들이
聲色之外覓眞如 성색지외멱진여 성색의 밖에서 진여의 진리를 찾는다고 하는구나
2) 위기를 기회로 바꾼 뛰어난 외교관
정몽주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정몽주가 배원친명주의(排元親明主義)를 내세운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따른 선택이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우자 원나라는 북쪽으로 좇겨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
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적인 주인으로 인식했다. 또한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 조정을 개혁
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이 의지하고 있는 기존의 원나라보다는 신흥국인
명나라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는 대의를 내세워 "요사이의 변고는 마땅히 국왕께 자세히 아뢰어 명나라로 하여금 의혹
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먼저 의심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짓게 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명나라로서도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몽주가 학문뿐 아니라
국제 정세 또한 정확하게 궤뚫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湖中觀魚1 호중관어1 - 호수에 물고기를 보다 1
潛在深淵或躍如 잠재심연혹약여 깊은 못에 잠긴 듯 혹은 뛰어오르는 듯
子思何取著又書 자사하취저우서 자사는 무엇을 취해서 책에 적었을까
但將眼孔分明見 단장안공분명견 장차 눈동자로 분명히 봐야 하는 것은
物物眞成潑潑魚 물물진성발발어 산물마다 활발한 물고기가 되게 하는 것
이때 명나라의 세력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 즉 북원(北元)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왔다. 그러자 권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나가 사신을 맞이하려 했다. 당시 고려의
지배층인 권문세족들은 원나라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과 중흥을 위해서는 원나라보다는 명나라를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정몽주로서는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문신 10여명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난번 원나라가 북방으로 쫓겨가고 명이 일어나 사해를 영유하자 공민왕께서는 분명히 천명을 알고
표문을 받아들여 신하라 일컬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에 책봉하였고, 주는 것과
바치는 것이 서로 연속하여 이제 6년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전하께서 영단을 내려 원의
사신을 잡고 원나라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과 장자온 및 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들을 모두 결박하여
명나라로 보내면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사실이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 다음 정요위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한 뒤 북쪽으로 향한다고 성명하면 원의 남은 무리들이 멀리 도망하여 나라의 복이 무궁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소로 인해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첫 시련을 맞게 된다. 친원파인 지윤과 이인임에 의해
언양으로 유배된 것이다. 정몽주는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채 곧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여기에는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친원파 권신들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湖中觀魚2 호중관어2 - 호수에 물고기를 보다 2
魚應非我我非魚 어응비아아비어 물고기는 당연히 내 아니고 나는 물고기 아니니
物理參差本不齊 물리참차본부제 사물의 이치는 제 각기여서 본래 같지가 않네
一券壯生濠上論 일권장생호상론 한권 장자의 호수 다리 위에서의 논변으로
只今千載使人迷 지금천재사인미 지금까지 천년 동안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구나
당시 왜구의 잦은 약탈과 방화로 해안가 마을 대부분이 텅 비기에 이르자, 고려 조정은 1375년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패가대에 보내 화친을 꾀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나흥유를 첩자라 하여
잡아 가두고는 굶겨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10월에야 겨우 풀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지윤과 이인임은 왜구가 계속해서 창궐하자 1377년 정몽주를 패가대에 사신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패가대의 주장을 만나 뛰어난
말솜씨로 고금의 교린하는 예를 이해시켰다. 정몽주의 인품과 학식에 탄복한 패가대 주장은 그를 공경
하며 후하게 대접했다. 또한 정몽주는 시를 써줌으로써 많은 승려들의 공경을 받았는데, 그들은 날마다
정몽주에게 경치 좋은 곳으로 구경가기를 청할 정도였다.
夜客 야객 - 밤 손님
客夜人誰問 객야인수문 나그네를 밤에 누가 찾으리
沈吟欲二更 침음욕이경 조용히 읊조리니 이경이 되려 한다
詩從枕上得 시종침상득 시는 베개머리쫓아 얻고
燈在壁間明 등재벽간명 등잔불은 벽 사이에 있어 밝구나
默默思前事 묵묵사전사 묵묵히 지난 일을 생각하며
遙遙計去程 요요계거정 곰곰이 앞으로 갈 길을 헤아려 본다
俄然睡一覺 아연수일각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童僕報鷄聲 동복보계성 아이놈이 닭이 운다 알려 주노라
정몽주는 그 해 7월 귀국하면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윤명과 안우세 등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그를 죽이고자 했던 지윤과 이인임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는
오히려 이 공로로 승진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378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에 제수된 데 이어 전공, 예의, 전법, 판도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했으며 1380년에는 이성계와 더불어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시키고 돌아와 밀직제학으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정몽주는 참서밀직시시에 올랐다가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다.
石鼎煎茶 석정전다 - 돌솥에 차를 다리며
報國無效老書生 보국무효노서생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늙은 서생이
喫茶成僻無世情 끽다성벽무세정 차 마시며 세상피하니 세상 마음 없도다
幽齊獨臥風雪夜 유제독와풍설야 눈보라치는 밤에 그윽한 재실에 홀로 누워
이때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고려가 명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세공(稅貢)을 늘리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또한 지난 5년 동안 고려가 바친 세공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다며 사신으로 간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笙) 등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에도 고려는 태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모두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밀직부사 진평중(眞平仲)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진평중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권신 임견미(林堅味)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로 사퇴해 버렸다. 그러자 임견미는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그 또한 지윤, 이인임 등과
같이 평소 정몽주를 눈에 든 가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와 같은 음모에 전혀 개의치 않고 흔쾌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때 정몽주는 우왕(禑王)에게
"왕명이라면 물불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명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남경까지는 무릇 8천리나 되어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빼면 실제로 90일의 일정입니다.
이제 성절까지의 날자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또한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고 나면
겨우 50일이 남을 뿐이니, 다만 이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征婦怨1 정부원 1 - 전쟁 나간 병사 아내의 원망
一別年多消息稀 일별년다소식희 한번 떠난지 몇 년인가 소식도 없어
寒垣存沒有誰知 한원존몰유수지 찬 병영에서 임의 생사를 그 누가 알까
今朝時寄寒衣去 금조시기한의거 오늘 아침 처음으로 겨울 옷 한 벌 부치고서
泣送歸時在腹兒 읍송귀시재복아 눈물흘리며 돌아와 아이를 가졌다고 하네
구약성경 사무엘 상하는 다윗 왕의 얘기로 거의 채워져 있다.
그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맺은 여자와의 불의한 관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사건이 솔로몬을 낳은 그의 어머니와 다윗 왕이 만나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간 우레아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 관계를 맺은 뒤 그만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자 전쟁터에서 한창 싸움에 임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을 며칠간 출장을 핑계로 왕궁에
왔다가 집에 들려 그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하였으나 이 고지식하고 충직한 사관 우레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가운데 유하고 사령관 요압과 다윗 왕의 중신들이 모두
바깥 들에 유진 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집에 가서 처와 같이 하룻밤인들 잘 수 있겠냐고
하고 이틀 밤을 집 밖에서 잤는데 어찌 보면 참으로 무정한 남편 같기도 하다.
아니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런 남자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여자가 없는 전쟁 터에서 상당한 세월을 건장한 젊은 남자가 성에
굶주릴 대로 굶주릴 수 밖에 없는데 특별 휴가를 얻어서 아름다운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렇게도 사랑스런 아내를 안아주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정몽주의 시에서 아래의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금해진다. 처음에 병영 나간 남편이
떠나간지 몇 년 째 소식이 없다고 하다가 겨울 옷 부치고 돌아와 눈물 흘리며 배속에
아기가 생겼다고 하니 이는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라 그렇다.
泣送歸時在腹兒 읍송귀시재복아 눈물흘리며 돌아와 아이를 가졌다고 하네
군대 가더니 몇 년 동안 소식 없는 남편의 무정함을 원망하여 복수하는 심정으로 나 아기
가졌소 하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인지… 물론 다윗 왕의 권위 앞에 옴쭉 달싹 못하고 옷을
벗었던 우레아의 아내 경우는 좀 다른 경우이긴 하다. 그러나 한번의 관계가 그녀의 배를
불러오게 한 임신이 된 사실에서는 어쨌든 위 시의 사연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왕명이 떨어지자 정몽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다. 그는 밤낮으로 길을 달려
가까스로 주원장의 생일에 맞춰 표문을 올릴 수 있었다. 명황(明皇) 태조(太祖)는 표문을 받고
날짜를 꼽으면서 "너희 나라 신하들이 서로 사신으로 오기를 미루니 날이 임박하여 이에 그대를
보낸 것이로다. 그대는 전날 촉의 평정을 축하하러 왔던 자가 아니냐?"하고 물었다.
예전에 정몽주는 촉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듬해 겨우 돌아왔었다. 정몽주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태조는 그를 위로하고 예부를 시켜 후히 대접해 보내게 하였으며,
홍상재 등을 석방해 주었다.
이듬해 정몽주는 동지공거로서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1386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관복을
청하고 세공을 감면해 주기를 청했다. 이때 정몽주는 태조에게 고려의 사정을 상세히 알려 5년
동안 미납된 세공과 늘어난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의대와
안마를 하사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하였다.
3)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원칙주의자
이렇듯 정몽주가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고려 내부에서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정몽주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해 왔는데,
이에 고려 조정은 최영(崔瑩) 등 강경파에 의한 군사적 대응, 즉 요동 정벌을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고려는 1388년, 최영의 주도 아래 요동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처음부터 요동 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던 이성계가 그해 6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한 것이다. 이로써 친명파(親明派)가 득세하게 되었다.
征婦怨2 정부원2 - 전쟁 나간 병사 아내의 원망
織罷回文錦字新 직파회문금자신 회문시 짜고 나니 비단 위의 글자 새롭고
題封寄遠恨無因 제봉기원한무인 적어 봉하여 멀리 보내니 원망할 까닭 없네
衆中恐有遼東客 중중공유요동객 무리 중에 요동의 나그네 있을까 걱정되어
每向津頭問路人 매향진두문로인 매양 나루터 향해 길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동안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왔던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1389년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정몽주는 이성계를 쫓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를 내세워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했다.
그해 11월 김저와 정득후가 비밀리에 여흥에 있던 우왕을 찾았는데, 이때 우왕이 울면서
"여기 있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다. 이성계를 제거하면 과인(寡人)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과인이 본래 예의판서 곽충보(郭忠輔)와 잘 지냈으니 네가 가서 만나보고 계획을
도모하라."
는 말과 함께 팔관회 행사 때 거사하라며 구체적인 날짜까지 정해주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김저는
우왕의 말과 함께 우왕이 보낸 예검(銳劍)을 곽충보에게 전했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한
뒤 곧 이성계에개 그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가장 가까우니 그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정몽주도 이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창왕을 폐하여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 요를 군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다.
이 공로로 정몽주는 문하찬성사 동 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로 승진하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책봉되었으며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작호를 하사받았다.
1390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에 간 윤이와 이초가 명황(明皇) 태조(太祖)에게 이성계가
고려의 종실이 아닌 왕요를 국왕으로 삼았으며,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을 귀양보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방과 조반에 의해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대간이
잇따라 상소를 올려 윤이와 이초를 국문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우현보, 홍인계, 윤유린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고, 이색 등은 청주에서 국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사(明史)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색, 권근 등을 사면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라며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대사령을 내렸음에도 헌부와 형조에서는 다시
윤이와 이초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다. 이에 공양왕은 도당에서 그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는 또 다시 "윤이, 이초의 죄가 명맥하지 않으며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공양왕은 하는 수 없이 우현보 등을 귀양보내
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윤이와 이초를 두둔한다며 정몽주를 탄핵하고 나섰다.
哭李密直種德 곡이밀직종덕 - 밀직 이종덕을 곡하다
自是韓山積善餘 자시한산적선여 한산이씨 문벌은 선을 쌓은 일이 있는데
賢郞欠壽竟何如 현랑흠수경하여 아들이 오래 살지 못함은 어찌된 일인가
古來此理誠難詰 고래차리성난힐 옛부터 이러한 이치 정말 알기 어려웠네
孔聖猶曾哭伯魚 공성유증곡백어 공자 같은 성인도 일찍이 아들 백어를 곡하였다
이에 정몽주는 두번이나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불러 위로했다. 그리하여 공신각에 초상화가 걸리는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평의사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는 사실상 이성계 일파와 결별하게 된다.
1392년 국왕이 경연관에게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는 알면서 우리 나라의 일은 알지 못함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근대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고, 선대실록 또한
상세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의거해 수찬하여 열람에
대비하소서." 하고 대답했다. 공양왕은 정몽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록을 수찬하도록 지시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때 김주(金住)가 조민수(曺敏修)와 뜻을 같이하여 창왕을 세운 이색의 죄를 묻기를 청했다.
그러자 정몽주는 "조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조민수의 뜻입니다.
이때에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조민수의 뜻을 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색의 죄는 응당 가벼이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공양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조민수 등만 처벌했다. 또한 정몽주는 "지금부터
이후에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로써 논죄하게 하소서." 하고 쐐기를 박음으로써
더 이상 이색이 고통받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
이어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과 지경조격(至正條格) 및 고려의 법령을 참작하고 수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무너진 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4) 아! 선죽교에서 쓰러진 고려의 기둥이여
정몽주는 비밀리에 이성계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군정을
장악한 이성계의 위세가 갈수록 더해갈 뿐 아니라 그의 추종 세력인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의미했고 고려 5백년 사직의 끝을 의미했다. 고려의 사직을
계속 유지하려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정몽주에게 이성계와 그 추종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왕명을 받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몽주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정몽주는 대간들에게 사람을 보내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일파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서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이 기회에 조준, 정도전, 남은 등 이성계의 무리들을 제거해야만 장차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준은 멀리 귀양가고, 남은, 윤소종, 조박 또한
관직을 삭탈당한 채 귀양보내졌으며, 봉화에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보주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성계 일파에 대한 제거 노력은 의외의 사건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정몽주의 의도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즉시 해주로 달려가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이라고 전한 뒤 그날 밤 비밀리에 개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한 이방원은 이성계의 동생 이화 및 사위 이제 등과 의논한 뒤 휘하의 군사들에게 "우리 이씨
집안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이제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뒤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몽주는 좀 더 사태를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때 평소
정몽주의 학식과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이성계는 그를 반기며 후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방원은 돌아가려는 정몽주를 자신의 방으로 청해 하여가
(何如歌)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海東樂府(해동악부)에는 何如歌(하여가)로 한역되어 있는데 마지막 두 줄은 이렇게 직역된다.
此亦何如 彼亦何如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 성황당 뒷 제단이 무너진들 엇더하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하여 안죽은들 엇더하리
정몽주는 이에 대해 단심가(丹心歌)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여지)
이에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습격하게 하여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했다. 1392년 4월 4일의 일로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또한 이벙원 등은 정몽주의 지시에 따라 조준 등을 탄핵한 대간들을
국문하여 귀양보내고 그 일당을 유배시킨 뒤, 정몽주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거짓으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정을 혼란시켰다."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정몽주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고려 사직을 지키려던 정몽주의 마지막 몸부림이 이와 같이 물거품이 되어버림으로써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죽은 지 3개월 후인 1392년 7월 정도전, 조준 등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듬해 1393년 3월 15일 새 국호로 조선을 씀으로써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조선왕조 제3대 국왕으로 등극한 태종(太宗)은 정몽주가 죽은 지 13년만인 1405년 권근
(權近)의 건의에 따라 그를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
에 추층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방원이 임금이 되어 반역자로 자기가 죽였던 두 사람 정몽주와 정도전에게 취한 일련의
조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왕자 이방원이 아닌 임금 태종이 본 정몽주는 자기의 야심에 함께 하지 않은 반대자였던 반면,
정도전은 자기의 야심에 함께 하였던 배신자 곧 변절자였던 것이다.
권력자가 반대자에게는 관용을 베푼 대신 배신자에게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말충의열전(麗末忠義列傳)은 정몽주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몽주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높고 호탕하며 인품이 뛰어나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니 부지런히 성리학을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소 이성계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토벌할 때에 반드시 그와 같이 갔으며 여러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 이때 나라에 사고가 많아 정무가 번거로웠는데,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는데 있어 목소리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좌우에 응답하여 모두 그
적당함을 얻었다. 이때에 풍속이 오로지 불법(佛法)을 숭상하는지라 정몽주가 비로소 선비와
서민으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여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도성 내에 5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유학을 일으켰다. 그밖에 의창을
세워 백성들을 진휼하고 수참을 두어 조운을 편리하게 한 것 등이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다.
그의 시문은 호방하면서도 엄숙하고 깨끗하며, 포은집(圃隱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출처 : 大東民族史대동민족사 <네이버 불로그>
정몽주 선생 묘역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
나는 고등학교 때 부터 포은 정몽주선생이 이방원의 회유를 받았을 때 읊었던 시, 단심가를 많이 불렀
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 이 노래를 많이 부르셨기 때문에 나도 그 분을 따라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어떤 때는 너 댓 번씩 계속 부르며 눈물을 흘리면서 내 결심을 틀켜 쥐곤 하
였다. 나는 이번에 포은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 가면서도 차 안에서 단심가를 몇 번 불렀다. 옆에 동행
한 친구가 같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한 번 더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보통사람들은 단심가의 가사는
알아도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애천, 애인, 애국을 주창하고 조국통일과 평화
세계 건설을 위해 애쓰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마다 이 단심가를 불러온 동지들이 있다.
나는 정씨가 아니다. 그러나 포은 선생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자 우리들의 조상이다. 위대한 정신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릴 일께워 주고 게신다. 오늘은 언젠가는 꼭 한 번 참배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
온 뜻 깊은 날이 되었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
용인 능원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안내 간판이 있는 곳으로 부터 400여 미터를 가면 왼쪽으로 포은 정
몽주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입구 오른쪽에는 안내판이 있고, 그 뒤에는 포은선생의 증손주사위인 저
헌 이석형선생의 신도비와 연안이씨 비석공원이 있다.
안내판 맞은편에 서 있는 비각
묘소 입구 오른 쪽에는 안내판 이 있고, 그 맞은편에 포은 정몽주선생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그러
나 안내표지판이 없어서 하마터면 이 귀한 곳을 그냥 지나칠번 했다.
신도비는 송시열이 찬했고, 글씨는 현종 때의 명신 김수증이, 전액은 김수항이 써서 1696년에 건립하
였다. 여기에는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참고로 부연하면 포은 정몽주선생은 경북 영천 임고면 출신인데, 영천에는 충신이자 성리학 대가인
포은을 배향하기 위해 조선 명종 8년(1553) 향내 유림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왕이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한 서원)인 '임고서원'이 있다.
정몽주 선생 묘역 안내도
홍살문과 묘소 부속 건물들
묘소를 향해 들어가는 길 앞에는 홍살문과 경모사(敬慕舍), 모현당(慕賢堂), 영모재(永慕齋) 등 기와
집 건물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영모재(永慕齋) 앞 마당
사진상에는 보이지 않으나 왼쪽에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멀리 앞ㅉ똑에 묘소가 보인다. 넓은 마당
은 주차장 표시가 되어있진 않으나 평소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입구에서 영모재 사이에 현재 밭
으로 있는 지역이 2차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 지면 별도의 주차장이 조성될 예정인듯 하다.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시설물 중 가장 왼쪽에 보이는 흰씩은 선죽교를 본따 만든 다리이고, 그 오른쪽
은 단심가 비석, 정몽주선생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비(白鷺歌碑),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 안내판이다.
나무 하나 사이를 두고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은 포은 선생의 증손부(증손주사위)저헌 이석형선생 묘소
안내판이다.
단심가비(丹心歌碑)
정몽주선생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비(白鷺歌碑),
두 비석 뒤에 새겨 놓은 건립 내역
묘역으로 들어가는 선죽교 모형의 다리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 /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 표지석
묘소 표지석 쪽에서 촬영한 묘소 전경
가운데 앞쪽에 있는 큰 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이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이고, 오른쪽이 포은선생의
증손부(증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소이다. 작은 골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모셔 놓았다.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
근접 촬영한 포은선생 묘소
묘소 앞의 석물들
묘소를 에워 싸고 있는 담장 모습
묘소 뒷쪽에서 건너다 본 전경
포은 선생의 묘소는 앞리 확트이고 'ㄷ'자를 옆으로 뉘어 놓은 형태로 담을 잘 쌓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건너편 앞산에는 3학사중 한 분인 해주오씨 오달재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위에서 바라 본 아름다운 자연경관
올라올 때는 우선 묘소 참배부터 해야되겠다고 생각하여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는데 묘소에 올
라와 내려 보니 주위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연못도 눈에 띄였다.
- 부속 건물들 소개-
나는 묘역을 돌아 보고 내려와서 영모재(永慕齋)를 들어가려고 하니 대문은 굳게 닫쳐 있고, 대문 앞
에는 책상위에 다녀간 사람들 이름을 남기는 방명록만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난 그곳에다 이름 주소
만 쓴 게 아니라 반드시 문화해설사나 안내원이 있어야 한다는 건의문을 써 놓고 왔다.
입장할 때와 반대 순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밖에서 본 영모재(永慕齋)
영모재(永慕齋) 편액
측면에서 본 영모재(永慕齋)
포은 정몽주선생 영정
모현당(慕賢堂),
영모재(永慕齋) 옆에 있으며 제를 지낼 때 비가 올 때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종친 일가들이 오면
이곳에서 자고 가지도 한다고 한다.
모현당(慕賢堂) 편액
경모사(敬慕舍)
경모사(敬慕舍)는 현재 관리사무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씨가 아닌 관리인이 기거를 하며 경내를
맡아 관리를 하고 있는 곳이다.
경모사(敬慕舍) 편액
주변지도
<출처: 반석같은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