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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학개-01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학개 1장 1절-6절)
성경말씀은 학개서 1장 1절에서 6절까지 봉독합니다.
[학개 1장]
1 다리오 왕 이 년 유 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 학개서 같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잘 설교하지 않는 그런 책인데, 오바댜서가 아마 구약에서 제일 짧을 것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짧은 책이 아마 이 학개서 같은데,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도 많은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이 있고, 또 꽤 페이지수가 많지만 그렇게 내용이 많지 않은, 담긴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은 책도 있습니다.
이 학개서 같은 경우에는 짤막한 책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기본 자세를 가다듬는데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책이예요.
때가 어느 때냐 하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잡혀 가서 한 70년 포로 생활하다가 돌아온 것이 1차 귀환이 BC536년경에 이루어졌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한 만 1년 지나고 한 두어달 더 지났을 때에 성전 기공식을 했죠.
그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에스라서에서 그것을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기공식을 하고 터를 고르고 거기에 돌을 준비해서 전 지대를 놓고 돌 몇켜 쌓아올리고 하여튼 공사가 어느 정도까지 몇프로까지 공정이 진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으나 공사가 중단되었는데, 그 중단된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 내지는 그 주변에 있는 소수민족들이 담합을 해가지고 페르시아 황제 아닥사스다라고도 하고 캄비세스 2세라고도 하는 왕에게 투서를 넣은 거예요.
그 때는 고레스가 아마도 전쟁에 나가고 그 아들 캄비세스 2세를 왕위에 앉혀 놓고 갔을 겁니다. 대행자로..
그래서 사실은 페르시아 제도는 나라에 전쟁이 터지면 후계자 될 사람을 자기 대신 왕위에 앉혀 놓고 가요.
그래서 그 페르시아 황제가 전쟁하러 갈 때에, 조그만한 전쟁 같으면 황제가 직접 가지 않고 군사만 보내는 수가 있지만, 큰 전쟁을 할 때 황제가 직접 전쟁에 참여하면서, ‘내가 만약에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면 네가 곧바로 이어서 공백없이 국가를 경영해가라.’ 하는 사람을 앉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후계자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캄비세스 2세라는 사람이 왕위에 있을 때 같은데, 이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의사(議士)들, 그 당시 페르시아 국회의원들 국무의원들 이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런 투서를 한 거죠. 고발장 비슷하게..
그리고 무함하고 그런 투서를 보냈는데 이것을 읽어보고 공사 중지 명령이 내려오니까 공사가 중지되었단 말이죠.
그러면 그 때가 공사를 시작한게 BC535년경으로 보는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짐작이 되는데, 몇년도 정도 이렇게 진행되다가 중단되었는지, 다시 말해 중단된 해가 몇년도인지는 여러 역사 사료를 찾아보아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아마도 BC530년경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데에서는 제가 확실한 연대를 찾을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했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제 2권에 읽어보면 공사가 중단된 기간이 9년 이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9년..
그런데 여기 학개 예언자가 시작한 다시 공사를 시작하도록 독려했던 이 해가,
[학개 1장]
1 다리오 왕 이 년 유 월,
다리오 왕 2년이면 BC520년경 됩니다.
여러 학자들이 다 일치하는 견해죠.
BC520년경 되면 기공식 한 날로부터 중단된 기간은 15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세푸스라는 유대 역사가가 공사가 시작해가지고 얼마 진행되다가 중단된 해로부터 다시 재개된 해까지는 한 9년 되었다 하는 것을 볼 때에, 총 시작한 날로부터 같으면 15년, 그리고 그 9년을 빼면 5년으로 보면, BC536년에 공사가 진행되었다가 BC530년경에 중단되었다가 9년만에 다시 한번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의 책망과 격려를 받고 재개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정도까지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연대는 언제나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 고증을 봐도 그 이상은 찾을 수 없어서 저는 연대 정리를 하기를 BC530년경에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한 9년 지나서 BC520년경에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가 거의 같은 시대에 나타나서 책망도 하고 그리고 권면하고 또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그런 내용으로 썼다고 봐요.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 분위기 내지는 배경 어떤 사연 이런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이런 부분이 이해가 될 겁니다.
이 다리오 왕은 고레스 다음에 캄비세스 2세, 캄비세스 2세 다음에 가짜 스메르디스, 가짜 스메르디스 다음에 이 다리오 왕인데, 다리우스 히스타페스 1세라고 하는 아주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었어요.
1 다리오 왕 이 년 유 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스룹바벨은 자기 아버지가 스알디엘이고 자기 할아버지가 여호야긴 왕이죠.
그래서 유다 왕손을 타고 내려오는 아주 지도자인데, 대학자였다고 해요.
그리고 여기에 학개라는 예언자를 잠깐 언급하면, 이 사람은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봐서 예루살렘 옛날 성전, 다시 말하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그 영광스럽고 웅장한 모습을 봤던 사람이야.
그러면 적어도 포로되어간 해가 1차 2차 3차에 걸쳐 포로잡혀 갔는데, 1차에 갔었는지 2차에 갔었는지 3차에 갔었는지 잘 몰라요.
1차는 BC606년경이었고, 2차가 BC597년, 3차가 BC586년 이렇게 세번에 걸쳐 포로잡혀 갔는데, 어느 포로회기에 포로잡혀 갔는지 모르지만, 만약에 BC606년에 포로잡혀 갔다면 연세가 90세가 훨씬 넘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 가서 70년만에 돌아오죠.
그러면 10살에 갔다가 돌아오면 80세가 있는 것이고, 돌아와서 공사가 시작되었다가 중지되고 15년 되었으니까 95세..
10살에 포로잡혀 갔으면 95세이고, 15살에 포로잡혀 갔으면 100세죠.
20살에 포로잡혀 갔으면 105세..
이런 정도의 어른입니다. 민족 지도자이고 연세가 많은 어른인데,
여기 말씀하시는 것을 봐서 상당히 연세가 많았던 것 같아요.
총독을 보고도 아주 호되게 책망을 하고 대제사장 여호수아까지도 싸잡아서 잘못되었다고 준엄하게 꾸짖는 것을 볼 때, 아주 위엄이 추상같은 그리고 아주 절개라 할까.. 그런 지조가 있는 분이예요.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앞에 눈을 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아주 담대하고 단호하고 그러면서도 참 인간미가 넘치는 그런 예언자 같아요.
이런 인물 스케치는 얼른 봐서는 잘 안 보이는데, 당시 정황이라든지 또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여기 숙연하게 듣고 온 지도자들까지 경청하고 순종한 것을 봐서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사무엘은 제사장이기도 하고 선지자 사사 이렇게 다 할 수 있는데,
여호수아 사사들 그 이후로 해서 지금 학개 예언자까지 수많은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이런 사람 말고도 엘리야 엘리사 아히야 오뎃 할 것 없이 수많은 예언자가 나타났는데,
그 어떤 예언자가 이스라엘 지도자를 쳐서 예언했을 때 그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왕들이 숙연하게 경청하고 회개했던 그런 사례가 없었단 말이죠.
그런데 지금 학개 예언자가 외쳤을 때, 스룹바벨은 대학자요 총독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권위로 하면 세상적 권위로 하면 총독이하예요.
심지어 학개까지라도..
또 종교적으로 하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수장이니까, 종교적으로 한다 할지라도 여호수아가 어른이죠.
그러면 도대체가 학개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예요.
페르시아 황제의 이름으로 파송된 총독보다도, 그리고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
여러분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백성 편에서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위치에 있어요.
그리고 예언자라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분이죠.
그래서 그런 어떤 영적인 질서까지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굉장한 사건이 이 학개서라는 책 속에 나오기 때문에 작은 책이지만 소홀히 할 수 없고, 우리가 진지하게 들어볼 책입니다.
2절입니다.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대체로 백성들이 그야말로 평범한 백성들이 하는 말 중에 때로는 옳은 말도 있지만, 때로는 옳지 않은 말도 많아요.
분별없이 그저 함부로 하는 말도 많고, 생각없이 막 떠들어대는 말도 많고, 과장된 말도 있고 왜곡된 말도 있고 아전인수격으로 하는 말도 있고 이런게 있는 거야.
제가 TV를 잘 안보다가 오랜만에 TV를 틀었어요.
뭘 봤겠어요?
쇠고기 때문에 온 전국이 그저 먹지도 않고 병든 것 같아.. 온 한국교회가..
그래서 그것을 듣다가 거기 보니까 시간이 부지런히 달려가도 예배시간에 맞겠나.. 서둘러 왔어요.
그런데 거기 학자들도 나오고 시민단체 국회의원 여당 야당 중간당 얼치기당.. 여러 당이 나와서 떠드는데 악당들이 작당을 하는 거야. 다..
하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떻게.. 내가 쫓아갈려하다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근원적인 문제 근본적인 문제를 안 다루고, 계속해서 유언비어를 가지고 어린 분별력 없는 사람 선동한다고 하고, 학자들 시민단체들은 실제로 위험한데 무슨 말이냐. 하고..
1라운드는 국회의원들만 하고 2라운드는 참고인들 불러서 하는 것을 들었는데, 말은 굉장히 난무하는 것 같아요.
무책임한 말도 많고 과장된 것도 많고 떠도는 말 중에 유언비어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볼 때..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도 잘못해 놓고도 계속 비호하는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것 저것 다 마음에 안 들어서 들어봐야 시간 낭비다 하고 쫓아왔는데,
어떻든 백성들이 함부로 해대는 말 중에는 더러는 옳은 말도 있지만, 틀린 말도 있는 거야.
이 때 바로 그 당시 백성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하다가 지금 어떻든 15년간이나 지연되고 있는데, 중단된 해로부터 거의 9년 10년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집을 짓다가 9년 10년 방치해 놓아 보십시오.
보나마나 쑥대밭이 되고 동네 개 화장실이 되고 엉망이죠.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아마도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지나갔는지, 아니면 거리끼지만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묵살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책망하는 내용 중에 하나가 이 백성이 언필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안 되었다. 때가 안 되었다. 우리가 너무 서둘렀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거야.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맞는 말이 아니야.
때가 되었으니까 예레미야의 예언을 응하게 하실려고 고레스 칙령이 난건데, 왜 때가 안 되었겠어요?
눈앞에 딱 펼쳐진 현실만 놓고 함부로 속단 한다든지 이러면 곤란하다는 거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은 짓다가 말아서 10년 이상 공사가 중단 되어서 황무지처럼 황무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판벽한’ 이란 말은 ‘사펜, 사판’이라고 하는 말인데, 이것은 지붕과 벽을 완벽하게 갖춘,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위급하면 지붕은 없고 바람막이만 해가지고 위에 나무 작대기 몇개 걸쳐가지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런게 아니고 완전히 지붕까지 갖춘 덮개를 제대로 덮은 집이야.
하나님의 집은 황무하게 해 놓고, 자기 집만 그렇게 건사하게 판벽하게 그렇게 살면 그 양심이 편안하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리해도 괜찮은 것이냐?
5절,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소위’라는 것은 행위나 삶의 자세를 말하는데, 영어로 번역할 때는 ‘your way’ 너희의 길을 한번 살펴봐라.
너희가 지금 이런 식으로 인생길을 걸어가서 되겠느냐?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지금까지 그 마음에 품은 생각과 그 실천에 옮긴 삶을 그 소위를 살펴 봐라.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리고 결과를 놓고 말하면, 너희의 소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이상하게 농사를 짓고 뿌리는데, 수입은 별로 없다는 거예요.
..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먹으면 배가 불러야 되는데 먹어도 배가 안 부른거야.
..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이야기 할 때, 자기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을 것이다. 이게 복입니다.
우리가 손으로 수고하고 땀흘린 것이 헛되지 않으면 그게 복이예요.
복이라는 게 내가 노력은 조금 했는데, 하나님께서 대박이 터지게 했다. 이게 복이 아니고 그것은 요행히 그런 수가 있지만, 자꾸 그런 간증하고 다니지 말라고.. 위험해요.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은 그런 간증을 들으면 나는 복을 못 받았구나. 하고 이래가지고 낙심한다니까..
여러분 어디에다가 땅을 샀는데 땅이 한꺼번에 500배가 뛰어가지고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그것을 간증하고 다닐 일이 아니라고..
성경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노력한 것이 헛되지 않으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괜히 어떤 투기나 이런 것을 해가지고 엄청나게 올랐다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그러면 나는 투기도 못하는데 나는 복 하나도 못 받았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건축헌금을 엄청나게 하고 고기를 잡았는데, 방어가 몇천만원어치 몇억원어치가 잡혔다..
그것은 보편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다가 방어가 길을 잃어서 그물에 들어간거지..
그러면 방어 못 잡은 사람은 복 못 받은 사람되게..
그런 것 위험하다니까 그런 간증이라는게..
그런 케이스는 하나의 케이스이지 보편성이 없어요. 그런 것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든지 그런 것을 심으면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을 간증해야지..
너무 특수성이 강하고 보편성이 떨어지는 그런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거예요.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긴거야.
소가 뒷걸음치다가 뒷발길에 개구리 잡는 식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그게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냐?
이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사람들 신앙들이 그런 상당히 사행심 요행심 이런 것으로 간증하고 다니는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야.
그리고 그런 간증을 자꾸 하다보면 간증이 자꾸 불어나요.
그래서 저는 간증하고 다니는 사람 별로 그렇게 존경스럽지 않아요.
간증 실컷 하고 일본가서 또 터뜨리고..
7절입니다.
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우리가 이따금 살아가다가 한걸음 물러서서 나 자신을 놓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 삶을 소위를 살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8절에,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절,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그러니까 많은 것을 바랐는데,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복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바랐다는 거야. 잘못된 거죠.
그래서 우리의 노력한 것이 헛되지 않기를, 저도 그 기도는 자주하는 편입니다.
우리 손으로 한 것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지도 않고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만장자 되게 해달라고 그런 것은 안 돼요.
저는 그래서 평생에 복권을 단 한장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샀다는 것이 나쁘다는게 아닙니다.
사가지고 주택복권 해가지고 주택공사에 도움을 줬으니까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런 것을 가지고 요행을 바라거나..
어떤 분은 그것 해가지고 당첨되면 건축헌금 하겠다..
건축헌금 안 해도 좋으니까.. 그런 것 바라지 않는게 좋아요.
그것 안 도와준다고 하나님 원망하지 말고..
그런 것은 좋은 믿음이 아녜요.
..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여러분 사람이 조그만한 손으로 부지런히 갖다 날라봐야 하나님의 큰 입으로 불어버리면 끝나버리는 거지.. 뭐가 남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좀 생각해 봐야 돼요.
여기 불어버렸다는 말이 ‘나파흐’ 라는데, ‘불다’ 하는 것도 있고 ‘흩다’ 하는 말도 돼요. 불어서 흩어지게 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거야.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해야 될텐데, 자기 집 짓는 것을 더 우선으로 생각한 거야.
이렇게 볼 수 있겠죠.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한다든지 한 민족이 민족 성전을 건축한다 할 때 노력동원도 해야 되고, 또 헌금도 해야 되고 부담이 될 수가 있어요.
부담이 하나도 안 되게 하는 것은 그것은 일도 아니죠.
여러분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거나 할 때, 그게 하나도 안 아까운 사람은 바보거나 아니면 성자거나 둘 중에 하나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안 드리고 그것을 내가 쓰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게 정상입니다.
나는 아깝지만 드린다.
여러분 아까운 것을 드려야 드리는 거지, 아깝지도 않은 것 10원 짜리 동전 별로 안 아까워요.
아니면 내가 미쳤으면 하나도 안 아깝겠죠.
그런게 좋은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내가 쓰면 더 좋은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면 가치가 있는 거죠.
그리고 내 먹을 것 다 먹고 내 쓸것 다 쓰고 남는 것 남아 처분곤란해서 바친다.
그런 것은 별로 가치가 없어요.
우리가 이웃에게 시제할 때도 내가 충분히 쓰고 남으니까, 물론 남아도 안 주는 사람도 있지만, 남으니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손을 펴는게 아름다운 것이죠.
그래서 여기 각각 자기 집에 빨랐다.
하나님 성전을 먼저 짓고 해야 될텐데, 이게 부담스럽던 차에 건축허가가 중지 명령이 나니까 사람들이 겉으로는 우려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
아이고 잘됐다.
울고 싶을 때 뺨맞은 것처럼 잘 됐다. 그냥..
짓기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하던 사람들은 속으로 잘 됐다 하면서 그때부터는 돌이든 나무든 반듯한 것 있으면 자기 집 짓는데 잽싸게 가져가는 거야.
성전같은 공동으로 하는 일에는 지지부진하고 잘 안 되는데, 자기 집 짓는데는 굉장히 열심을 가지고 빨리 빨리 짓는 것 하나님 그것 안 봅니까? 다 보고 있는 거죠.
그런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셨다는 거야.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마음이 우주만큼 넓어서, 우주보다 더 넓겠죠. 우주를 만드신 분이니까..
우주만큼 넓으니까 째째하게 집 한채 안 지었다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섭섭해하시겠나.. 섭섭해하신다니까 여기 보니까..
아니 버러지 같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사랑해봤자, 그 하나님은 욥의 말대로 같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드릴 수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봐야 하나님이 무슨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있는게 좋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기는 백향목 집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하고 가슴아파 하면서 성전을 짓겠다 하니까, 사무엘이 말하기를, ‘이보시오. 당신은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 목동이 아녜요. 왕입니다. 왕.. 마음에 있는 바대로 행하십시오.’ 했어요.
사무엘은 일반적인 논리만 가지고 왕은 뭐든지 할 수 있다. 좋은 일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은 노(No) 한거죠.
다윗이 하나님 성전 짓는 것은 하나님 말렸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내가 너로 하여금 내 성전 짓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 참 좋다.’
그런 거예요.
저도 우리 딸들이 ‘아빠 바지를 살까요? 샤쓰를 살까요?’
‘아무 것도 사지 마라.’
실제로 더 필요가 없어요.
제가 있는 바지만 해도 평생 입고도 남을 거야.
와이셔쓰도 앞으로 50년 입을 것이 남은 것 같아..
전혀 여러분도 사지 말고 살 필요가 없거든요.
살 필요가 없고 내게 있는 것도 넘치지만, 딸이 그런 마음이 있는게 참 좋다는 거야.
여러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도 꼭 우리 아버지 같습니다. 꼭같아요.
원하고 바라지는 않지만 그런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참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때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도 불구하고 안 하고 각각 자기 집에 빨랐다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한 것이 열매로 안 남아요.
그래서 그 뒤에 보세요. 10절,
10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재앙이라는 것이 어쩌다가 국소적으로 조금 부분적으로 그런 것 자연속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하는 것마다 안 되고, 손을 대는 것마다 자꾸 망하고 뭔가 잘못될 때는 생각을 해봐야 돼요.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소위를 한번 살펴봐야 돼요.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잘못된 것이 없는가 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그게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다른 동물들은 거의 그런 것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회개할 수 있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동물에게는 정죄가 없어요. 심판도 없고..
사람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지나간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가능해요.
여기까지는 죄를 책망한 겁니다. 죄를 책망한 것이고, 12절,
12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줄을 그으세요.
청종하였으니..
오랜만에 나온 말입니다. 창세후에 오랜만에 나온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 갔다 왔으니까 이런 ‘청종했다’는 말이 나오겠죠.
이게 지금 여러분 이런 것을 우리가 창세기부터 쭉 연장선상에서 보니까 청종했다 이런 말이 귀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이렇게 문득 학개서를 보면 이게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이게 얼마나 희귀한 말인지 인식도 못합니다.
모세 이후로 이렇게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지도자나 백성이 다 청종하였다. 이런 일이 없었어요.
..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3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거의 줄을 그으세요.
오늘 드리는 말씀의 제목이죠.
우리는 그래요. 우리는 보통 하는 일마다 막 형통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가 보다.’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린가 보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입니다.
여기 보니까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1년 2개월 만에 건축 기공식을 했고, 그리고 한 얼마간 5년간 이렇게 진행되다가 중단된지 9년째 되어가지고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재앙들이 일어나고 이슬이 그치고 땅이 산물을 그치고 비도 안 오고 한재를 불러 산에 곡물에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사람의 수고하고 모든 일에 재앙들이 임하고, 많이 뿌려도 수입이 적고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어 버렸고..
이렇게 성전 공사도 중단되어버렸고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을 보니까 아니죠..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거예요.
이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데 왜 이런 말씀을 다시 하시느냐 하면, 이때부터는 여기 죄책 권면을 이들이 잘 받아들이니까 하나님께서 위로의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자꾸 낙심할 마음이 일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아까 얘기했죠?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 이런 말도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이런 말도 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무도 없을 때 자기들 끼리, 목사님이 시원찮아서 그렇다.
이 네 가지는 공식적으로 늘 나오는 겁니다.
때가 안 되었다는 원망이 나오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지도자가 시원찮다.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죠?
전부 이렇게 하나님 뜻이 아닌것 같다고 하나님께 돌리고, 시대에게 돌리고, 그리고 지도자에게 돌리고 자기는 잘못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워요.
이런 이야기가 학개서에 쭉 나오는데, 이것 다 틀린 말입니다.
때가 안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뜻이 아닌 것도 아니고, 지도자가 시원찮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그래서,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15 때는 다리오 왕 이 년 유 월 이십 사 일이었더라
여기 ‘흥분시킨다.’ 하는 그런 말 때문에, 오늘날 부흥강사들이나 찬양 집회를 해가지고 사람들 흥분시킬려고 감정적으로 막 흥분 시켜놓고 그것을 부흥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 히브리어로 흥분시키다는 말이 ‘우르’라는 말인데, 우르라는 말은 ‘깨우다’는 말이예요. 깨우다.
욕심에 잠들고 물욕에 잠들고 이기주의에 잠들어 있는 양심과 영혼을 일깨운다 그런 얘기지, 이게 무슨 흥분해가지고..
저는 흥분하면 아무 것도 결정 못하게 해요.
그리고 가능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절대 흥분으로 감정이 끌어오르지 않게 해서, 어떤 결정할 때는 조그만한 감정의 요동도 없이 충분히 냉정을 되찾은 후에 맑은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신앙 양심에 거리낌 없는 그런 결단을 하게 해요.
어떤 사람은 감정을 북돋아서 그 때 감정이 끌어올랐을 때 ‘쇠뿔은 단김에 뺀다.’ 그러면서..
그 때 8억원 10억원으로 결단해가지고 집에 와서 본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이고 내가 미쳤지.’ 그러면서..
그런 것은 잘못된 겁니다.
그것은 전혀 비인격적이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흥분’이라고 번역된 것은 깨우시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 양심을 일깨우는 거예요.
‘우르’라는 말이 ‘깨우다’는 말이예요.
2장입니다.
[학개 2장]
1 칠 월 곧 그 달 이십 일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라
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이 누구냐?
..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스룹바벨 성전과 솔로몬 성전의 규모가 현저히 차이나고 초라했어요.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서글프게 짓는 거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예배당을 옛날보다 더 잘 지어도 시원찮은데, 그렇게 거지같이 지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해요. 또..
그런데 뒤에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4절,
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초라해도 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만사가 안 되고 엉망진창인데도 성전 공사가 중단된 것이 15년 진행되었어도 그래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짓다가 말아버린 이 예배당이 초라하지만, 규모가 작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거야.
우리가 몇만명 되는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2백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는 함께 안 하고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성경은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5절입니다.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가 늘 그러죠?
예언자의 패턴이 죄를 책망하고 권면하고 그리고 위로하고 소망을 약속하시는데,
6절은 소망 쪽에다가 포커스를 맞출 수 있겠죠?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의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그런 말씀으로 격려로, 책망과 함께 또 그들이 숙연하게 경청하고 반성하고 또 실천의 의지를 품고 하니까 그런 위로와 소망의 말씀으로 격려의 말씀으로 주신 거죠.
제가 짧은 세월 30여년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오면서 대형교회를 섬겨보지 못했어요.
개척교회 아니면 늘 작은 교회 채 200명도 안 되는 교회 이런 작은 규모의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가 맨날 어렵죠.
한번도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 평생에..
30년 목회하는 중에 교회 재정이 여유가 있다든지 아니면 무슨 생활비가 여유가 있다든지 그런게 잘 안 되는 거예요. 맨날 어려워요.
그런데 맨날 어려우니까 맨날 기적을 봅니다.
개척을 하다보면 참 노력도 해야 되고, 힘도 들고 눈물도 많지만, 위로도 넘치는 거예요.
아무 어려움도 없는 데는 위로도 없어요. 진짜..
그래서 여기 지금 참 어렵죠.
지금 형편이 성전 건축할 만한 형편이 안 돼요.
왜냐하면 15년 전에 돌아오자마자 열기가 일어났을 때 그대로 밀고 나갔으면 그런대로 건축할 수 있었는데, 한 15년 지나가다가 보니까 그 때는 돈 가져온 것 있었어도 전부 자기 짓는데 다 써버렸어요..
헌금 하자고 해봐야 나올게 없는게 뻔한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기적이 있어야만 건축이 되는 건데,
저는 시골 목회를 늘 하고 시골에서 개척을 하고..
제가 시에까지 나온 것은 간댕이가 부은거야.
맨날 ‘리’단위.. 리단위에서 조금 해가지고 면소재지, 면소재지에 가서 겨우 간이 커가지고 시외곽까지 와본 거예요.
그래서 늘 어려운 교회 작은 교회 개척교회 이런 데에 섬겨보면서 그래도 뭘 보느냐 하면, 제일 작은 문제 제일 간단한 문제가 돈 문제야.
물론 재정적인 압박이 되면 저도 겁이 납니다만, 그래도 지나놓고 보면 돈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예요. 마음..
사람들이 마음이 한번 상하면 이것은 돈으로도 안 돼요.
힘을 갖고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참 어려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보니까 돈 문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요..
우리가 마음만 바르게 먹으면 하나님이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돕느냐 하면 할려고 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보통 서양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성경에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 말이..
성경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오랜 역사를 겪어보면서 할려고 하는 사람을 돕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런 말이 있죠?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너무 위축되고, 누구말도 아니고 저에게 하는 말이예요. 사실은..
너무 겁이 많은 거야. 너무 믿음이 없는 거야.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싫어하면 하나님도 도울 수 없어요.
평양감사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죠.
그래서 하고자 할 때 하나님 도우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우리가 한걸음 내 딛어봐야 돼요.
모든 것이 다 준비되면 뭘 하겠다고 하는데, 물론 아무 준비도 없이 경거망동하는 만용도 경계해야 되지만, 다 갖추어 가지고 준비가 다 되면 내가 믿겠다. 그래가지고는 안 돼요.
예를 들어서 ‘나는 수영을 잘 할 때까지 물에 안 들어가겠다.’ 그래봐..
그러면 안 되죠.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서툴고 힘들고 해도 그래도 할려고 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개 발전도 성장도 진보도 없는 그런 교회에 가면 딱 안 되게 하는, 그 교회를 안 되게 하는 몇 사람이 있는데, ‘안 된다 장로와 하지 말자 집사’..
죽이 아주 잘 맞아요.
뭐든지 안 된다고 해.. 뭐든지 하지 말자고 그래요.
그러면 아무 것도 안 돼요.
똑 같은 도시안에 있는데, 어떤 교회는 하나도 안 되고 진보가 안 되고 자꾸 퇴보해요.
제가 어떤 목사님을 봤는데 우리 교단 목사님이예요.
아주 역사가 오래되고 그런 시 안에 있는 대표적인 교회인데도 20년 30년 지나갔는데는 교회가 아무 발전도 없는 거야.
그런데 목사님은 굉장히 독재야. 권위주의이고..
뭐든지 안 할려고 해요. 겁이 나서..
그 목사님 하나 때문에 성도들은 오히려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목사님이 너무 스스로 위축되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옆에서 볼 때 안타까운 거예요.
저도 늘 그분을 보면서 나도 너무 겁이 많은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늘 해요.
제가 하도 어렵게 빌립처럼 어렵게 살아와가지고 좀 통 큰 것을 잘 못해요.
또 성도들이 상처받는 것을 내가 너무 신경쓰니까 조금도 상처받을 말도 잘 못하고 일도 추진 못하는 거죠.
좋은 점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소극적인 데가 있어요.
그래도 성도님들이 나보다 믿음이 더 좋아가지고 ‘해 봅시다.’ 하면 저도 따라가기는 하는 거죠.
반대를 위한 반대는 잘 안하니까 제가..
그 때마다 보면 늘 느끼는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도우시는구나..
별로 우리가 준비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은 할 때 도우시는 거야.
그리고 돕는 사람이 나타나게 해요.
그래서 여기 지금 현재 그 당시의 현실로 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나 스룹바벨이 볼 때, 학개나 스가랴가 보거나 하나님이 볼 때 그들이 가진것이 별로 없어요.
가진게 진짜 없는 거야.
그렇지만 그들이 예언자의 말씀을 숙연하게 듣고 경청하고 그리고 가진 것 별로 없지만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하면, 여기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는데, 결국은 스룹바벨이 여기에서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못 받아요.
그래서 스룹바벨이 아예 사표를 내고 갔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떠납니다.
성전을 지을려고 하는데, 건축헌금 내자고 한번 말을 못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어요.
돌아갔을 때 다리우스 히스타페스 1세가 스룹바벨과 절친한 친구예요.
친구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왕이 잠이 안 오니까 하루는 문제를 낸 거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문제를 냅니다.
스룹바벨도 왕의 곁에 모시는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술이다, 여자다, 왕이다, 지혜가 제일 강하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스룹바벨이 여자와 진리가 가장 강하다. 스룹바벨은 위대한 사람이야.
술도 강한게 아니고, 왕도 강한게 아니고, 그것보다 더 강한, 왕 위에 왕비가 있는데, 왕비가 왕보다 더 강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게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야.
2500년 전 이야기인데,
그러나 왕비라도 진리앞에 서지 못한다.
그렇게 굉장히 열변을 토하는데,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돼.
장원급제를 해가지고 사실은 다들 왕의 일곱 모사 중에 왕의 참모 중에 한 자리를 원할 것이다 했는데,
스룹바벨은 그게 아니고 사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러 갔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있고 성도들이 다 재산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집 짓는데 써버리고 형편이 어렵다..
여러분 페르시아 황제의 영광이 인도부터 이디오피아까지 당시 세계 전체를 다스린다 할만큼 127개국을 호령하는 그런 황제인데,
집 한 채 짓는 그런 것은 한줌 떠서 주면 끝나는 거야.
아주 듬뿍 떠가지고 주는 바람에 스룹바벨이 그것을 가지고 와서 성전 공사를 재개하는데, 4년만에 완공해 버려요.
워낙 돈을 많이 가져와가지고..
이런 사실은 여기에는 안 나오는데, 유대 역사에 보면 요세푸스 같은 데에 보면 그런 사연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까 네가지,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것 같다든지, 하나님 뜻이 아닌것 같다든지, 지도자가 시원찮다 하는.. 그런 백성들의 말은 헛된 소리야..
단 제가 볼 때 스룹바벨 같은 학자가 추진력이 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인것 같아요. 내가 볼 때..
학자들이 좀 그렇죠?
제가 볼 때 학자출신들은 학문은 책상에서는 상당히 실력이 있는데, 현장에 가면 약하다는 거야. 현장에서는..
그런 면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스룹바벨에게 위탁하신 그 일을 조금 어렵다해서 그것을 빼앗거나 경질하거나 하지 않고, 그 학개 예언자가 외치는 말씀을 정말 경청하고 숙연히 듣고 회개하는 그 겸허한 그런 마음을 보고, 반드시 내가 스룹바벨 손으로 이 전을 마치게 하겠다.
그렇게 했는데, 그 모든 일들이 문자대로 이루어집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많이 무시하고 헐뜯고 비난하고 했지만, 그는 성전을 건축하고 제2성전 이름이 스룹바벨 성전으로 남습니다.
10절입니다.
10 다리오 왕 이 년 구 월 이십 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지금까지 다시 말하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지금까지 하는 것들이 제대로 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어.
다 부정하고 가증하고 이렇게 해왔다는 거야.
15절,
15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 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16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
1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때려도 너희가 몰라.
얻어맞고도 왜 맞는지 모르더라. 그 말이죠.
18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 월 이십 사 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19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시복언약(施福言約)이죠.
여태까지는 전혀 잘못을 깨닫지 못한거야.
그러니까 보세요.
예언자가 와서 책망을 하게 되면 학개도 책망을 했죠. 불같이..
이분은 아주 추상같은 위엄을 가지고 책망을 할 때는 수염이 바르르 떨릴만큼 대단한 분이야.
그런 책망을 들으면 기분 나쁘죠.
그러나 그 기분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소위를 살펴보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을 하지 않았다 하고 정말 마음을 부드럽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니까,
지금까지 하나님 볼 때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복을 주겠다는 거죠.
..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것을 다 축복의 약속이라고 하는데, 축복의 약속이 아니고 시복(施福), 축복(祝福)은 복을 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복을 빌데가 없습니다.
시복언약(施福言約)이예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20 그 달 이십 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그러니까 열국 강대국 두려워할 것 없다는 거야.
다 하나님이 끌어엎을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23절,
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인(印)’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호탄’이라는 하는 건데, 인장반지를 말합니다.
보통 오른손에 반지를 끼는데 반지에 도장이 있어요.
문서에 명령을 쓰고 그 문서에다가 왕이 인장반지에다가 인주라든지 잉크를 묻혀가지고 찍는 거예요.
이게 권력이예요. 이게..
딱 찍으면 결재가 나는 거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일을 해갈 때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인장반지처럼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너를 통해서 될 것은 되고 말것은 말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룹바벨이 이런 큰 보장을 받게 된 것은 그가 겸허하게 학개 예언자의 말씀을 받아들였을 때 그런 보장을 받은 거예요.
최고 귀한 것을 인장반지라고 해요. 인장반지..
보장되는 반지, 인을 삼는다.
서양사람들처럼 싸인하는게 아닙니다. 히브리인들 개념은 인장반지예요.
우리는 나무에 파서 인감도장 찍고 하는데, 그보다는 이게 폼이 있죠.
막 써가지고 딱 찍는게 권력 같잖아요.
그러면 그대로 기록하고 그대로 시행하라..
그렇게 하고 딱 싸인을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하나님의 손에 인장반지처럼 쓰시겠다는 거죠.
..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조금은 우리가 은혜받는 자리로 내려가서 겸허할 때, 그리고 경청하고 숙연히 하나님 뜻을 받아들일 때, 소원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끊겼던 은혜와 중단되었던 복이 다시 임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관계가 서먹했다가 화해해서 새로워지면 더 좋은 관계가 되는 수가 있어요.
부부싸움도 자주하면 안 되지만, 가끔 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 때 쌓아두고 참았던 말이 나타나면서 서로가 이해가 되고..
그것도 하나의 대화방법이니까..
그래가지고 완전히 정말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을 때는 마치 신혼초로 돌아간 것처럼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은 그렇게 안 되고 다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타락을 했기 때문에 항상 값진 것은 이런 저런 댓가를 지불한 후에야 깨닫게 되는 수가 많아요.
그리 안 하면 좋겠는데, 그리 안 한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있잖아요.
그 탕자가 집에 있었으면 자기 형님과 똑같이 탕자인지 몰라요.
안 고쳐지고 관계 회복도 안 되고,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지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을지 몰라..
그런데 나가서 쫄딱 망하고 물론 댓가를 지불했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지 가정이 얼마 소중한지 알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떠났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 소중한지 아는 거야.
제가 볼 때 어떤 경우는 모태신자라는 사람들 있죠?
차지도 않고 덥지지 않고 뜨뜻미지근한 수가 있어요.
세상길로 나가서 형편없이 타락했다가 우리처럼 극적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간증도 있고 그런데, 전혀 뭐 그렇게 얌전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감격이 없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타락으로 나가란 말이 아닙니다.
어떻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15년간 하나님 마음에 안 들게 했지만, 참 하나님 오래 참죠? 보니까..
15년씩이나 참는 거예요.
참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바보가 아녜요. 그냥 참는 거죠.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이고 참는 것이고, 그리고 때가 되니까 풍재나 한재나 깜부기나 팟종이나 이런 것 어떤 재앙을 만나면 깨닫고 돌아올란가 했는데 안 돌아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학개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고, 그 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다 그 말을 경청하고 회개하니까 다시 은혜가 회복되고, 또 스룹바벨과 이 사람들이 할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 공사 재개한지 4년만에 완공을 해서 BC516년에 완공이 돼요.
BC516년에 딱 완공을 하고 보니까 이게 70년 만이야.
BC586년 4년 9일에 함락되고 5월 7일에 불탔는데, 이게 정확하게 70년만에 완성이 된 거예요. 회복이 되었어요.
그래서 역사를 보면서, 야 정말 참 하나님의 시간표는, 인간이 더러는 성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서 그 일이 진행되고 있었구나..
그런 것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조급해도 안 되지만 선한 일을 두고 너무 자꾸 미루고 하지 말고, 때가 안 되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때가 항상 되었어요.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었다는 거야.
예수님께서 ‘내 때는 이르지 않았지만 너희는 항상 준비되었다’ 하셨으니까, 우리가 지금이라도 미루고 있던 일들을 할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학개 예언자의 책망과 권면과 또 위로와 소망의 말씀과 은혜의 회복 그리고 시복의 언약을 다시 들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도 세상 살아갈 동안에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나님이 나를 버렸는가 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는 음성이 들려지게 하시고, 그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며 은혜 받았던 자리로 돌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