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妓瓊春殉節之處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一日盛服而入 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 其年十六 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 此眞烈女也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乙卯八月 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순절비의 기록
이 문장은 1735년(영조 11년)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쓴 〈월기경춘순절비(越妓瓊春殉節之處)〉의 비문이다. 당시 강원도 도순찰사였던 이선(李選, 호 손암)이 영월을 지나다 이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 참된 열녀의 고결함을 보여주었다"고 감탄하며 비석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조선 시대에 영월의 기생 경춘(瓊春)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금장강(동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越妓瓊春殉節之處 (영월 기생 경춘이 순절한 곳)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영월의 기생 경춘은 옛 이 시랑[侍郞]이 영월에 부임했을 때 사랑을 받았는데, 그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
이 때문에 스스로 순결을 지키고자 했다. 후임 관리가 부임한 후, 관아의 사람이 경춘을 강요하며 여러 번 매질을 하니 거의 견딜 수가 없었다.
一日盛服而入 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하루는 그녀가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관아로 들어가 평소처럼 말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며칠 동안 저를 부르지 않으신다면, 이 병든 몸을 추스른 뒤에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마침내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집으로 돌아와 동생들의 머리를 빗겨준 뒤, 일어나 금장강[錦障江, 지금의 영월 동강] 가로 갔다.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위에 앉아 노래 몇 곡조를 부르니 눈물이 흘러 치마를 적셨다. 슬픔과 한을 이기지 못할 때 어린 동생이 곁에 있자, 동생을 속여 다른 곳으로 보낸 뒤 곧바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
歲壬辰十月 其年十六
때는 임진년[1712년, 숙종 38년] 10월이었으며,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郞筆
가족들이 급히 달려가 강물에서 그녀의 시신을 건져내어 옷깃을 살펴보니, 무언가 은은하게 비치는 물건이 있었다. 옷솔기를 뜯어서 보니, 바로 이 시랑이 직접 써 준 글씨(필적)였다.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아! 그녀의 죽음은 옛날 침착하고 대담하게 의로움을 좇아 죽은 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어떠한가!.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지금 도순찰사[都巡察使]이신 손암[巽菴] 이공[李公]께서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관동[강원도] 지역을 순시하며 관할 부서들을 시찰하셨다.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 此眞烈女也
영월[越州]을 지나다가 이 사연을 전해 듣고 기이하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천한 기적[賤籍: 기생 명부]에 몸을 담고서도 이토록 정조를 지켜 도리를 분별해 냈으니, 이분이야말로 진짜 열녀다"라고 하셨다.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어찌 후대 사람들을 감동시켜 깨우칠 도리[樹風聲之道]를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마침내 녹봉을 내놓아 영월부사[越守]에게 부탁하여, 한 조각 비석을 세워 그곳을 기록하게 하셨다.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또한 나에게 그 전말을 기록하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생각건대, 경춘이 죽은 지가 지금으로부터 24년이나 지났다.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내어 표창하게 되었으니, 우리 이공(손암 이선)이 아니었더라면 경춘의 절개는 장차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乙卯八月 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을묘년[1735년, 영조 11년] 8월,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록하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쓰다.
*의미: 경춘의 신분은 낮았지만 옳고 그름을 아는 정절(辨此)을 공인받아, 국가적으로 기려야 할 '참된 열녀'로 인정받는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 시대 신분 사회 안에서도 '정절(貞節)'이라는 가치를 지켜낸 인물이라면 기생이라 할지라도 사대부와 고위 관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선(李選)의 주도로 경춘의 사연이 조정과 지역 사회에 공식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영월의 낙화암 근처에 그녀를 기리는 비석(越妓瓊春殉節之處)이 세워지게 되었다.
*의미: 손암 이공이 경춘의 고결한 지조를 후세에 널리 알려 풍속을 바로잡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자(樹風聲), 개인 재산(녹봉)을 기부하여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시간적 배경: 경춘이 순절한 임진년(1712년)으로부터 비문을 짓는 을묘년(1735년)까지 정확히 24년이 흘렀음을 명시하고 있다.
*의미: 글쓴이는 손암 이공의 혜안 덕분에 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위대한 정절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며 이공의 공로를 찬양하고 있다.
*기록의 주체: 비문의 내용을 지은 사람은 이웃 고을의 수령이었던 평창군수 남희로이며, 비석에 새길 글씨를 직접 정성스럽게 쓴 사람은 당시 영월 고을의 책임자였던 영월부사 한정운이다.
*都巡察使(도순찰사) : 지방(地方)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임시로 파견하던 군관직 벼슬. 대개는 지방 관찰사가 겸임하여 순찰사(巡察使)라 하나, 중앙에서 정이품(正二品)의 재상(宰相)이 나가게 되면 이렇게 불렀다.
*인물 정보: 여기서 손암 이공은 조선 숙종~경종 때의 문신인 이선(李選, 1632~1692)을 가리킨다. 대총재(이조판서)를 지낸 고위 관료로서 강원도 관찰사(도순찰사)로 부임해 영월을 순시하던 상황이었다.
이선 李選 1631년(인조 9)~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응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 · 소백산인(小白山人). 이인건(李仁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욱(李郁)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후원(李厚源)이며, 어머니는 김반(金槃)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고, 1664년(현종 5)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초임, 이듬해 봉교, 1667년 정언, 1668년 교리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73년 응교로 재직중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시제(時祭)하고 황보 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사관으로 있을 때 강화도에 간직한 열성실록(列聖實錄)을 보수할 것을 청한 사건으로 우의정 허적(許積)의 비위를 거슬려 구성에 귀양갔다.
뒤에 석방되어 돌아와 노산군의 무덤에 수졸(守卒)을 두고 사시(四時)와 기일에 제수를 보내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다시 노산군 부인의 무덤에 수졸을 두고 제사물을 하사하기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75년(숙종 1) 형조참의로 있다가 송시열이 쫓겨나고 남인이 득세하자 사직하였으며, 다시 개성유수가 되어 정충신(鄭忠信) 등에게 시호를 주고 그들의 자손을 벼슬에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참판이 되어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689년 대간의 탄핵을 받고 기장(機張)에 귀양가서
1692년에 배소에서 죽었다.
1694년 복관되어 왕의 사제(賜祭)를 받았다.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저서로는 『지호집』이 있으며, 편서로는 『황강실기(黃岡實記)』 · 『시법총기(諡法摠記)』등이 있다.
*생몰년 : 『숙종실록보궐정오』 24권, 1692년(숙종 18) 2월 1일. "전 참판 이선의 졸기". 생년은 『국조방목』에 1632년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문집총간 『자저속집(自著續集)』의 행장[吏曹參判芝湖李公行狀]에는 1631년["仁祖九年辛未十二月二十四日公生" 인조 9년 신미년 12월 24일 공생] 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행장의 기록을 따른다.<한민족종합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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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8년 임신(1692) 2월 1일(신사) 전 참판 이선의 졸기
전(前) 참판(參判) 이선(李選)이 기장(機張)의 귀양간 곳에서 졸(卒)했는데, 나이는 62였다.
이선은 자(字)가 택지(擇之)이고 우의정(右議政) 이후원(李厚源)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성격이 강직하고 올바르며, 신의 있고 정직하여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를 가지고 자신을 신칙했었고, 풍상(風霜)을 겪을수록 의지와 기개를 더욱 가다듬었었다.
젊은 무리들이 분열될 때를 당해 극력 정론(正論)을 붙잡아 세우고 치우친 말과 과도한 의논을 배척하여 물리치므로 한 편의 사람들의 시기와 질시(嫉視)가 특히 심했고, 임금도 또한 좋아하지 않았었다.
여러 차례 총재(冢宰) 및 탁지(度支)와 사구(司寇)의 장관(長官)에 의망(擬望)되었었으나 그때마다 등용되지 않아 비록 벼슬길이 막히기는 했었지만 당시의 인망(人望)은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기사년의 화(禍)가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귀양가게 되었었다.
이때 전배(前輩)들은 거의 모두 죽고 남아있는 것은 오직 이선 등 두어 사람이었으므로, 이선의 벼슬이 아직도 높지 못하므로 세상에서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훗날의 석과(碩果)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게 되므로 사류(士類)들이 상심하며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선은 젊어서부터 문장(文章)과 역사를 복습(服習)하여 문견이 넓었고 누구보다도 국조(國朝)의 고사를 잘 알고 있어 묻게 되는 사람이 있으면 메아리치듯이 답해 주었다. 누군가 시(詩)를 짓기를,
“하나의 국자감과도 같아,
가슴 속에 전범(典範)이 그득하네.”
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잘 이해하고 있는 말이라고 했었다.【원전】 39 집 260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