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길 단둥, 중.조 국경지역 방문 스케치
2013년 5월 6-12일 중국 연변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을 시작으로 두만강을 따라 도문 훈춘 방천을, 안도를 거쳐 백두산 탐방, 용정을 거쳐 기차로 요녕성의 단둥을 방문하고 페리로 귀국했다. 일주일간의 여행을 통해 연변자치주의 모습 조.중 국경지대의 자연적 조건과 역사와 사람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정전 60주년 역사화해를 위한 준비와 향후 평화기행을 준비하기 위한 방문이었기에 간단히 스케치해서 올린다.
첫날,
2013년 5월 6일 오전11시 연길공항에 도착해 마중나온 이원장님의 안내를 받아 예약해 둔 숙소에 짐을 풀고 점심약속을 해 둔 연변대 김태국교수와 통화를 하고서 학교 근처 전주식당으로 향했다. 김광희 교수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연변대로 이동해 김광희교수 연구실에서 화천댐와 한국전쟁 희생자 공동추모 활동을 위해 한국전쟁 참전 중국 군인 찾기 등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김광희교수는 수업 준비로 분주한 중에서도 자신의 활동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에 관한 궁굼증을 표하면서 대화하다가 교환학생의 한국방문시 아평에서의 활동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제안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구체적인 방안까지 거론되었다. 담당주임인 강수옥교수까지 참석해 올 8월까지 방문하게 될 학생이름을 들어가며 연락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길후대 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에 관해 설명하면서 다음카페까지 소개해 주어 더욱 반가웠다. 이어서 조선문학을 전공한 최일교수를 만나러 갔다. 이미 최교수의 지난 3월 성공회대에서의 발표논문 조선전쟁과 조선족을 읽었기에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최교수는 큰 아버지가 신의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 지원해 참전했다가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 주면서 공동 추모행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평에 관해 설명하자 한국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며 이제 중국에서도 회비 내고 참여하는 단체 활동도 가능해진 시대라고 공감해 주었다. 평화여행도 가능할 것이라고 해 격려가 되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함께 정문에서 헤어지고 이원장과 함께 약속장소를 이동했다. 연변박물관의 연구위원인 원로 이송덕선생과 교직 출신의 김동섭선생 그리고 공안직을 은퇴한 이혜란선생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준비중인 공동추모사업과 평화기행 등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송덕선생의 작업내용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참전군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혁명은 술을 마시면서 하는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는 이송덕선생과 김동섭선생은 친구간이라 허물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엇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둘째날, 아침 일찍 잠이 깨 주변 산책을 시작했다. 연길역까지 걸어서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지도를 구입하고 주변 대 도시로 가는 버스들도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예약해 둔대로 이원장께서 이춘자주임과 함께 오전 9시 숙소 앞으로 와 주어서 임대한 미니 승합차로 연길 시내를 거쳐 도문을 향했다. 곳곳에 연변 자치주 60주년 홍보문구가 걸려있다. 인구 2백만의 연변에 40%까까운 조선족이 살고 있고 중국의 창지투(장춘 지린 투먼) 개발과 나진 선봉과의 연계로 동해안 물류거점을 확보하면서 붐을 일으키고 있음이 보있다. 러시아의 프리모스키(극동 연해주)와 나진 선봉 그리 훈춘이 연계되는 모양이다. 두만강을 경계로 하면서 급속히 발전하고 있어 환동해권 경제권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도되고 있고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일이라 관심가지고 봐야 할 것 같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훈춘역에 잠시 들러 보니 북조선의 나진으로 관광을 가는 버스 안내가 있고 러시아인들도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와 조선 국경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가 있는 곳이다. 다시 두만강을 따라 방천으로 달려가는데 경비병들이 출입을 막는다. 외국인들은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함께 간 이주임의 덕분에 겨우 허락을 맡아 삼각휴게소에 도착해 다시 전용 버스를 타고 가니 토사패라는 국경경계가 보인다.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라 그런지 한산한 편이다. 방천 유료 전망대를 올라가니 두만강 하류에서 러시아로 조선으로 철도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언제쯤 이 길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까 싶다. 도문시내로 들어가 두만강변으로 가서 남양 맞은편으로 갔다. 몇발 걸으면 국경에 닿을 정도의 거리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서 다시 시내를 거쳐 연길로 향했다. 6시를 넘기고서 숙소에 도착해 쉬었다가 숙소로 와준 안금송사장을 만났다. 반가운 해후를 하면서 호텔바로 가서 생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연길에 살고 있고 폭넓게 사업을 해 온 터라 정보도 많았고 시대흐름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셋째날. 새벽 4시 이주임이 숙소로 와 주어서 함께 택시로 연길역앞에 도착해 백두산행 버스를 기다렸다. 시간이 일러 호텔 로비에 들어가니 연변 관광안내 지도가 있긴한데 큰 제목외에는 모두 한자다. 아직 외국인 관광을 제대로 받을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았다. 4시반이 되어 대부분의 좌석이 차서 출발했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온 분들이 있어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안도역에 도착해 내려보니 제범 규모가 큰 신설역사가 거창하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예약승객을 태우고 출발해 산길을 오르다가 허름한 식당에 내려 아침을 먹게 되었다. 딸이 결혼한 덕분에 한국 부모와 조선족 부모가 사돈간에 아들을 길잡이 삼아 함께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한 상에 앉아 준비해온 채소와 과일로 푸짐한 아침 식사를 할 있었다. 중간에 농촌마을 한 가운데 기독교회당이라는 간판을 건 교회당도 보였다. 중간 휴게소 겸 가게를 들러 봐도 별로 매력적인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 아래 허베이(白河)를 통과해 오전 10시경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를 바꿔타고 산길을 올라 다시 마지막 입구에서 입장권을 받고서 버스를 바꿔타고 올라가 다시 집차를 타고 백두산 천지로 향했다. 11시경 천지 아래 도착하니 눈이 아이들 키만큼 쌓여 있는 길을 내서 천지에 오를 수 있었다. 겨울 천지는 얼음이 얼어있고 주변은 흰눈으로 덮여 있다. 기념촬영을 하고 한참을 바라보다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 가에 열사기념비가 많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송덕 선생과 통화해 내일 아침 한국전쟁 참전군인과의 만남 약속을 잡았다.
넷째날, 아침 일찍 산책을 하다 연변열사능원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조건축물들이 서있다. 먼저 도착한 이태길어르신과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이송덕선생이 오셔서 함께 참석한 권수복(서울출생) 리종호(인천출신) 한태악(함북출신) 첫날 만나 뵌 김동섭어르신과 함께 역사기념관을 돌아보는데 꼼꼼한 설명이 있어 한결 이해하기가 좋았다. 전시물이 잘 못된 부분도 지적하셨고 함께 한 분과의 직접적인 연고도 설명해 주셨다. 회의실에 들어가 취지를 설명하고 한 분씩 차례로 영상인터뷰를 시작했다. 휴전회담 7인 대표의 1인이셨다는 이태길 어르신은 좀 강직한 분위기로 평화에 관해 설명하고 자신이 만든 평화노래를 불러주셨다. 군가에 가사를 붙인 분위기 였다. 평화전사임을 강조하셨다. 향토사학자인 이송덕선생께서는 자신이 인터뷰로 참가했던 책 '중국조선족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을 소개 해 주셨는데 리종호 한태악어르신이 참여하셨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친숙해 하셨다.
12시가 다 되어 인사를 하고 함께 점심을 드시도록 부탁드리고 헤어져 숙소에서 짐을 챙겨 다시 이틀전에 탄 승합차로 용정으로 향했다. 이원장께서 먹을 거리를 잔뜩 준비해 오셔서 이동하면서 김밥도 먹고 곳곳을 안내 받으면서 다닐 수 있었다. 명동학교 그리고 용정의 용두레 우물가 윤동주생가 명동교회까지 돌아보는데 아쉬움을 토로하신다. 윤동주생가를 다시 조성하고 있는데 조금은 격이 떨어지는 분위기까지 느껴 졌다. 윤동주의 작품을 중국어로 동일하게 바위에 새겨 넣고 중국조선족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동북공정의 일부로 보였다. 조선족 자치주로 인정된 것이 1952년인데 일제말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이라고 표현하다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용정역에 도착해 보니 초라한 역이 그나마 공사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렸다고 이원장과 함께 단둥행기차에 올랐다. 4인용 2층 침대칸인데 둘 밖에 타지 않아 편안했다. 푸짐한 먹을거리를 펼쳐놓고 맥주 한잔을 함께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철도여행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깊은 잠이 들지 못해 중간에 조금씩 잠이 깼다. 이원장께서 며칠째 감기가 멈추지 않아 고생하셨다. 이틀간 우전하느라 수고한 이명운기사(중국에서는 사기라고 부른다)는 한국에서 수퍼에 근무한 적이 있었고 비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셨다. 친절하게 잘 운전해 주어서 편했다.
다섯째날, 열차 중간 정차역에서 계속 사진을 찍어 보는데 어렵사리 철도 노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열차 노선이 제대로 표기된 지도 한 장이 없으니 조금 답답했다. 열차는 계속 달려 오후 2시경 단둥역에 도착했다. 거대한 마오쩌뚱의 동상이 환영한다. 블라디보스톡역에서 레닌 동상이 환영하듯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원장의 차로 위사장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이원장 집을 거쳐 다시 숙소인 아파트 2층에 도착하니 고급스러운 방인데 깔끔했다. 오후에 단둥어학연수와 여행센터를 방문해 강만석 원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족 출신의 부인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단둥 사정과 어학연수원 여행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간에 연락이 닿아 국제구락부 커피숍에서 단둥문화원 부설 항일역사연구소의 김영식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북조선의 국경지대라는 조건에서 공식기구인 영사가 움직이기 어려운 점도 적지 않아 영사 지원업무도 맡고 있었고 단둥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해 설명해 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북조선 국경이 닿아 있는 곳이라 남한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고 했고 남북이 협력해 할 수 있는 항일역사 찾기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헤어져 근처 한국성 지역을 돌아보다 예배당도 보이고 한국식품 가게도 보이고 한글 간판의 시장 가게 들도 보였다.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압록강 철교를 찾았다. 압록강변에는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았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면도 많이 보여 참 평화로워 보였다. 강건너 신의주는 어떨런지 모르지만 불빛이 별로 보이지 않아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소원을 비는 풍등도 보였고 좌판에는 남한과 북조선의 담배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고 북조선 담배가 훨씬 많았다. 거리에 줄지어 있는 조한백화점에 들어가 보니 북조선 상품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화폐개혁으로 무용지물이 된 지폐들이 조선돈이라는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우표책도 기념품으로 그리고 장뇌삼주를 비롯해 몇가지 술이 있을 뿐이었다. 비둘기 한마리가 날고 있는 '평화'라는 담배디자인에 끌려 기념품삼아 15위안에 구입했다.
여섯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항미원조기념관을 찾았다. 높은 계단을 올라 항미원조전쟁기념탑을 찾아 도착해 보니 네방향에 육해공군의 전투참가 형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단체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길래 무료표도 받고 줄을 서서 입장해 보니 정면에 마오쩌뚱과 팽더화이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관에 관한 안내책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시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시기별로 그리고 각종 자료가 잘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바깥에는 전투기와 야포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화연락을 받고서 서둘러 이원장의 안내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호텔 1층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식에는 빨간색 봉투에 축의금을 넣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 유학을 한 중국인교수인 신부와 신랑은 경찰관이었다. 서양식 웨딩드레스에 자유분방한 복장이었다. 상차림은 넘쳐날 정도로 음식이 많았고 담배도 마련되어 있어 아직은 흡연의 자유를 만끽하는 분위기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압록단교와 중조우의교를 방문해 입장료를 내고 직접 걸어보았다. 폭격으로 다리 중간이 끊어진 곳에 기념비를 세워두고 방문자들이 사진을 찍고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철교 중간 중간에 압록강 및 철교와 관련된 사진등이 걸려 있었고 대현 전광판에서 한국전쟁 관련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한국의 단체 관광객도 만났다. 다시 단둥 항미원조열사능을 찾았다. 직위와 상관없이 모든 전사자의 비석은 같은 크기고 출신지역과 사망전투일자와 계급 등이 적혀있는 정도였다. 전화용 칩을 100위안에 마련해 빌려준 스마트폰에 장착하니 중국내 통화가 가능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좀더 편리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연길로 전화해 만났던 분들께 감사와 안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일곱째 날, 아침에 짐을 정리하고 이원장의 승용차로 함께 조선족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했다. 정식으로 간판을 달지는 못했고 건물 1층에 빨간 십자가가 작게 썬팅되어 있다. 주보에는 안동교회라는 명칭이었고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9시 예배가 시작되어 10시 50분에 마쳤다. 그리고 모두 헤어졌다. 이어서 한국인들이 다니는 온누리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어버이날이라 카네이션도 달아 주었다. 파출소옆에 자리잡았는데 임시거처라고 간판이 붙어 있다. 서울의 온누리교회에서 개척된 20년이 되었고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점심식사 후 단둥역으로 이동해 한참을 찾다가 20위안의 셔틀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무런 표식이 없어 눈치껏 알아봐야 했으니 외국인들은 헤맬 수 밖에. 역 서점에 들러 중국전역의 여행안내 책자를 구입했고 이원장께서 가면서 먹으라고 과일을 한 봉지 사 주셨다. 이번 방문을 위해 수고해주신 이원장께 감사드린다. 1시간을 달리는데 커다란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북조선과 연결될 대규모 높은 다리도 교각이 세워지고 있었다. 단둥항에 도착했다. 석탄이 실리고 컨테이너가 보이는 널따란 항구였다. 이원장께서 예약해 준 오후 4시 출발 1060위안의 6인실 선표를 발급받았다.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편안함을 주었다. 통관구역에는 단둥항에 근부하는 직원 중 중국공산당원 명부가 붙어 있어 눈길이 갔지만 사진은 찍지 못했다.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한데 어떤 의미인지 궁굼했다. 일본의 페리와 구조가 조금 달랐다. 공용공간이 많았고 6인실의 경우 화장실과 샤워욕조가 실내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구분되는 점이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많았고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조선족들도 꽤 많이 보였다. 방에는 창춘과 단둥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다는 남성들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북조선의 수산물 수입을 위해 방문하면서 겪은 이야기, 남한에서 돈 벌어 아파트 마련하고 자식 대학보낸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다. 세 명 밖에 타지 않아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9시 인천항 부두에 도착해 한국인이 우선 내리도록 배려 해 주는데 편하기는 했지만 차별로 느껴졌다. 셔틀버스로 제1터미널로 이동해 통관장 입구에 도착해 통관을 마치고 나와 24번 버스로 한참을 돌아 동인천역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