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 정유정 / 은행나무
우리 나라 작가 중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계속 머리속에 자리잡았다.
<다섯번째 아이>의 독후감을 뒤져보니 "헤리엇은 다섯번째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힘들어 했고, 뱃속의 아이가 다르게 느껴졌으며 심지어는 빨리 꺼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독후감의 말미에는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나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꼭 읽어야할 책인 듯 하다."라고 썼다.
<다섯번째 아이>가 가족애와 가족으로 인한 가족의 파괴에 대한 근원적 고찰이라고 한다면, <종의 기원>은 작가도 말했지만 악의 기원보다는 악이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적응하는지 "악"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길거리에서 뒤를 쫒던 여자를 살해하고, 이웃과 가족을 살해하는 한 젊은 청년의 이야기이다.
처음 살해를 한 것은 가족여행 중이었다. 형과 서바이벌 게임을 하면서 형을 고의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아버지도 바다에 빠지고. 그 모든 과정을 엄마는 지켜보았다. 그러나 경찰에서 아들의 진술을 묵인해 준다.
내 곁에 남은 건 유진뿐이라는 자각, 무차별로 쏟아질 세상의 비난, 채 피어나기도 전에 파멸해버릴 유진이의 미래, 내가 잘못 봤는지도 모른다는 의심, 내가 본 것을 평생토록 숨기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회의. 새끼 새처럼 속삭여오는 유진의 목소리.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 310
주인공 유진의 이모, 혜원은 청소년 행동장애 전문의이다. 그녀는 조카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 그의 문제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검사를 해볼 것을 권한다. 아이의 나이가 17살이 아닌 7살이라고 대답한다.
혜원은 열일곱이면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맞받았다. 이미 소년원에 가 있을 테니까 - 254
혜원에 따르면, 유민과 유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지의 방식'이었다. 유민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자하는 성격이라면, 유진은 모든 채널을 오롯이 자신에게만 맞춘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도 하나뿐일 거라고 했다.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 249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이 속하는 프레데터." - 259
포식자는 보통 사람과 세상을 읽는 법이 다르다고, 혜원이 말했다. 두려움도 없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감정은 귀신처럼 읽고 이용하는 종족이라고 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다고 했다. - 300
유진은 법조인이 되기를 원한다.
"40년 결혼 생활 끝에 아내를 도끼로 찍어 죽이고 토막 낸 명망있는 의사, 두 번이나 은행을 털고도 법의 선처를 받은 운 좋은 도둑놈, 남동생을 욕조에 눕혀 죽이고 자기도 목을 맨 아름다운 첼리스트....." 이런 사람들을 변호했다는 한 변호사가 쓴 책이었다.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 144
"악"은 이런 곳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가 보다. 그렇게 진화해간다는 것이리라.
유진은 엄마와 이모에 의해 관찰되고 그의 정신은 약물로서 제어된다. 약이 그의 육체를 무척 힘들게 했지만 정신은 정상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우연챦게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의 몸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발견한 유진은 간혹 복용을 중단한다. 그때면 어김없이 환각 증상이 따라온다. 그는 그의 일탈이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알았지만, 엄마는 그가 몰래 외출을 할때면 미행을 하기도 했다. 로스쿨 합격자 발표가 있기로한 바로 전 날 밤, 그는 길거리의 여자를 미행하다 살인을 하고 그 광경을 엄마는 목격한다.
<다섯번째 아이>처럼 유진이에게도 동기가 있었다.
나는 내가 아이를 만드는 데 비범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민이를 낳은 지 딱 석 달 만에 유진이가 들어선 것이다. 유민이 연애 시절 남편과 보낸 첫 밤에 가진 아이엿다면, 유진은 출산 후 첫 관계에서 생겨난 아이엿다. 아직 수유중이니 괜챦겠지, 했다가 된통 걸린 셈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짐승이 된 것 같았다. - 246
둘째를 임신했다는 것을 안 어머니는 결국 산부인과를 가지로 결정했으나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마음을 바꾼다. 그 사실을 태중의 아이가 알았을까?
반대로 유진은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임산부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만큼 얌전했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 아는 양, 숨죽이고 눈치 보며 자라는 느낌이었다. 열 달을 다 채우지도 않고 성급하게 세상에 나왔다. 태반조기박리로 인한 조산이었고, 제왕절개로 태어았다.나는 엄청난 출혈로 쇼크애 빠졌다. 살기 위해 자궁을 들어내야 했다. 아이는 나를 죽일 뻔 하면서 태어난 셈이다. 아홉 달 전 일에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 248
사람의 나이를 셈할때, 우리민족은 태어나면 한 살로 친다. 배속에서의 일 수도 인생에서 일년으로 셈하는 것이다. 얼마나 지혜로운가. 일년이 아닌 최소한 2-3년을 주어도 될 만큼 그 기간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많은 심리학이 엄마와의 관계 특히 수유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유진은 엄마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태중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해 자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나면 안 될 자", "함께 하면 안 될 자" 그것은 "악" 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기본적인 선악의 형태는 태중에서 결정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선과 악의 종(種)은 자라면서 환경에 적응하는가. 종의 기원은 "태중(胎中)"에서 결정된다는 것인가.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기 전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이다. 세상에 어떤 어미가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 - 78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사람의 못된 행실이 주요 주제였다. 사람의 밝고 아름다운 면을 이야기의 주제를 삼아 글을 쓴다는 것은 쓰는 자나 읽는자가 모두 행복한 일이겠지만 정 반대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의 경우, 읽는 것도 힘이 무척 드는데 쓰는 사람은 취재하고 연구하고 줄거리를 만들고 글를 쓰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상상해 본다. 탈고 후에 심리치료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눈에 밟힌 글귀....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206
어젯밤 12시에서 2시 30분까지, 기억에서 사라진 2시간 30분을 열어줄 열쇠 - 170
(2016.12.2. 평상심)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읽기 쉽지 않으셨겠네요.
그렇게 보이시나요?
실제로도 읽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덮기도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