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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베르트1세
열다섯
헤리베르트는 카를만1세의 장남이다. 1348년 2월에 났다. 아버지가 죽던 1363년 6월에 열다섯이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의 기록이 한결같다. 참을성이 있었고, 가진 것에 만족하였으며, 한번 정한 것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다.
슈타이어마르크백 볼프람 에티코넨이 섭정을 맡았다.
부왕이 죽고 두 달 뒤인 8월부터 상부르군트공 미카엘2세 폰 뉴엔부르크를 상대로 연이어 이기고 성을 빼앗았다. 이듬해 정월 바이블링겐에서 상부르군트군이 전멸하였다.
그달에 전쟁이 끝나고 일족 고첼로 에티코넨이 베른백이 되어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 모든 것이 소년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나 소년왕이 한 것은 없었다. 볼프람이 승전을 아뢰러 들어왔을 때, 왕은 창가에 앉아 있다가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볼프람이 답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 되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서른다섯 해 동안 그가 이 대답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혼인
1364년 2월에 성년이 되었다. 셈에 밝고 씀씀이가 박하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고 곳간을 아는 왕이라 하였다.
그달에 도피네 여공 게르트루트 드 포레즈와 혼인하였다.
혼례 다섯 달 뒤인 7월, 도피네에 반란이 일어나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아내의 땅으로 갔다. 곁에서 아뢰기를,
"슈바벤의 군사를 도피네에 쓰시나이까."
왕이 말하였다.
"아내의 땅이다."
훗날 그 아내가 무엇을 하였는지는 뒤에 적는다.
두카스의 피
1366년 7월, 왕이 비잔티움과의 싸움에 나섰다가 황제의 동생 마우리키오스 두카스와 마주쳤다. 왕이 그를 베었다. 그때 왕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이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슈바벤의 소년왕을 물었다 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던 아이가 황제의 아우를 벤 것이다.
이듬달인 8월, 니코메디아의 자카리아스라는 자에게 크게 다쳤다. 들것에 실려 나올 때 살아나지 못하리라 한 자가 많았다. 상처가 아무는 데 네 해가 걸렸다.
1370년 8월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흉터가 남았다.
기록을 정리하며 이 대목에서 오래 붓을 멈추었다. 그가 벤 사람은 두카스요, 그의 손자가 훗날 쓰게 될 제관도 두카스의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칼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 그때 그가 알았을 리 없다. 사람은 자기가 자른 자리에 무엇이 자라는지 보지 못하고 죽는다.
두 누이
왕에게 누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왕비 클라라 우도넨이 낳은 클라라요, 하나는 부왕이 이르멜트루드라는 여인에게서 얻어 감추지 않고 제 자식이라 밝힌 이르멜트루트다.
1364년 3월, 왕이 두 누이의 혼처를 같은 달에 정하였다. 클라라는 덴마크 국왕 스벤드 블릭센에게 보내고, 이르멜트루트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데 바르셀로나에게 보냈다. 페르난도는 사생아의 몸으로 왕이 된 자였다.
곁에서 아뢰기를,
"한 분은 왕비가 되시고 한 분은 사생아왕의 아내가 되시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둘 다 왕관을 쓴다."
1366년 3월에 클라라가 덴마크로 갔고, 1378년 8월에 이르멜트루트가 아라곤으로 갔다. 부왕이 그 딸을 감추지 않은 것이 열여섯 해 뒤에 나라 하나를 얻는 일이 되었다. 감추었더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감추지 않는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로 여러 번 이득을 보았다.
동생 로타르
동생 로타르의 혼사는 두 번 정해졌다. 1368년 5월에 왈라키아공 비올라 알바와 약혼하였다가 1371년 10월에 깨졌고, 그해에 대모라비아의 공주 유타 폰 바이마르와 다시 약혼하여 1372년 6월에 혼례를 올렸다.
혼사가 깨졌을 때 로타르가 낙심하니 왕이 말하였다.
"깨진 혼사는 세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것만 센다."
1374년 7월, 유타의 형제들이 모두 후사 없이 죽어 유타가 대모라비아의 여왕이 되었다. 깨진 혼사 하나가 왕관 하나로 바뀐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이 왕의 안목을 말하였으나, 사료를 아무리 뒤져도 왕이 유타의 형제들이 죽을 것을 알았다는 흔적은 없다. 사람이 뒤에 서서 보면 모든 우연이 계략처럼 보인다.
한 걸음
이 무렵 왕의 누나 소피에에게 일이 있었다.
소피에는 하로트링겐공의 후계자 안셀름에게 시집갔고, 그 할아버지가 제관을 써서 안셀름1세가 되었다. 부왕 카를만1세가 그 혼처를 두고 제관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이라 하였으니, 남편이 할아버지를 이으면 소피에는 황후가 될 사람이었다.
1369년 2월에 안셀름1세가 승하하였다. 그런데 제일 서열이던 장남 안셀름이 참살당하였다. 제관은 같은 이름을 쓰는 조카에게 돌아가 안셀름2세가 되었다.
소피에의 남편이 언제 죽었는지는 사료가 어긋난다. 어떤 기록은 1369년에 베여 죽었다 하고 어떤 기록은 1372년에 요절하였다 한다. 이름이 같은 안셀름이 셋이나 되니 필경사들이 헷갈린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한 걸음이 남아 있었는데 그 한 걸음을 디딜 사람이 없어졌다.
1372년 2월에 소피에가 크리스토퍼 폰 노르트가우와 재혼하였다. 그 남편도 먼저 갔다.
1382년 4월, 왕이 누나를 위하여 리투아니아공 리우다스 폰 쿠르스에게 세 번째 혼처를 주선하였다. 소피에가 사자에게 물었다 한다.
"이번에는 어디냐."
"동쪽이옵니다."
"제관에서 몇 걸음이냐."
사자가 답하지 못하였다.
돌아가는 제관
안셀름1세가 죽은 1369년부터 1383년까지 열네 해 동안 제관을 쓴 자가 다섯이다. 안셀름1세, 안셀름2세, 만프레트1세, 고트샬크1세, 그리고 레오폴트. 모두 에티코넨이다.
차기 황제로 점쳐지던 헬러공 군트람은 1374년에 미쳤다. 만프레트1세는 즉위 다섯 해 만에 병으로 죽었고, 그 장남이 서열 첫자리에 있었으나 제관은 삼남 고트샬크에게 갔다.
고트샬크는 두 해를 채우지 못하였다.
이 가문이 제관을 얻은 뒤로 제관은 접시처럼 돌았다. 왕이 이를 두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안이 황제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를 오래 두지 못하는 것이다."
1382년 2월, 고트샬크1세가 룩셈부르크백 에렌프라이트의 종주권을 왕에게 넘겼다. 제관은 돌아도 슈바벤은 그때마다 무엇인가를 받았다. 왕은 제관을 쫓지 않고 제관 곁에 서서 떨어지는 것을 주웠다.
상트갈렌의 일도 이 무렵이다. 그 백작령은 본래 슈바벤 왕 아달베르트1세가 차남 필리베르트에게 내린 땅이니, 곧 두 눈을 내주고 비잔티움의 옥에서 나온 그 사람의 것이다. 필리베르트가 죽은 뒤 그 아들 아담이 대폴란드와 마조비아를 물려받으면서 상트갈렌도 함께 폴란드로 흘러갔다. 1379년 12월에 황제 만프레트1세가 그 땅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폴란드에 선전포고하였고,
1381년 12월에 고트샬크1세가 이겨 백작령을 도로 빼앗았다.
눈먼 사람의 땅이 삼십 년을 떠돌다 제국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땅을 되찾은 자들 중에 필리베르트의 눈을 기억하는 자는 없었다.
시합과 반란
1373년 정월, 왕이 제국의 무예 시합에 나갔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던 사람이 창을 들고 장막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해 5월에 졌다.
돌아오는 길에 시종이 위로하니 왕이 말하였다.
"내가 진 것을 본 자가 몇이냐."
"제후들과 그 종자들이 다 보았사옵니다."
"그러면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
그가 이 말을 지켰다. 이후 그가 시합에 나갔다는 기록이 없다.
같은 해 3월, 아내 게르트루트 드 포레즈가 제국의 중간 권위를 세우려는 제국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홉 해 전 왕이 몸소 군사를 몰아 지켜준 그 도피네에서 일어난 일이다.
왕은 아내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아내를 치지도 않았다. 다섯 해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378년 3월에 게르트루트가 패하여 옥에 갇혔다.
1379년 3월에 풀려났다. 풀려난 그달에 왕에게 돌아왔고, 4월에 아이를 배었다.
이 부부에 대하여 사람들이 여러 말을 하였으나, 이 붓으로 적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가 아내를 위해 싸운 적이 있고, 아내가 그를 두고 싸운 적이 있으며, 두 사람은 다섯 아이를 두었다.
헬레네
1379년 4월, 왕이 장남 카를만을 비잔티움의 바실리사 크리소고네 두카스의 딸 헬레네와 약혼시켰다. 열한 살짜리 아들에게 동방의 제관 냄새가 나는 신부를 붙인 것이다.
이듬해 7월, 폴란드와의 싸움 중에 왕이 처음으로 겁 없이 싸웠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용감하다 하였다. 서른두 살이었다. 어릴 적 그를 수줍다 하던 자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1379년 12월에 왕이 큰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를 두고 어떤 기록은 폴란드 전쟁을 앞둔 결의라 하고 어떤 기록은 며느릿감을 알리는 자리라 한다. 어느 쪽이든 그해에 왕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만프레트
1383년 7월, 왕이 사람을 모아 만프레트 에티코넨을 죽일 일을 꾸몄다.
만프레트는 바실리사 크리소고네와 레오폴트 에티코넨 사이의 아들이며, 헬레네의 오라비다. 그가 있는 한 동방의 계승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가 없으면 계승권은 누이 헬레네에게 갔다. 헬레네는 왕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다.
일을 꾸미는 자리에서 곁의 한 사람이 아뢰었다.
"헬레네는 며느리이지 아드님이 아니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며느리가 낳는 자가 내 손자다."
8월에 일이 틀어졌다. 사람이 잡혔고 뒤에 누가 있는지 드러났다. 9월에 왕이 계획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9월에 다시 시작하였다.
11월에 만프레트가 죽었다. 그리고 다시 드러났다. 두 번을 꾸며 두 번 다 뒤가 밝혀졌으니,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는 성공하였고 감추는 데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그날 이후 제후들이 그를 볼 때 눈을 먼저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를 일족을 죽인 자라 불렀다. 왕은 이 말을 금하지 않았다. 다만 한 번, 미사를 마치고 나오며 사제에게 물었다 한다.
"죄를 지은 자가 그 죄로 얻은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면, 그 아들도 죄인이오."
사제가 답하였다.
"아들은 죄를 물려받지 않사옵니다. 다만 값은 물려받나이다."
왕이 더 묻지 않았다.
하르가니
1384년 7월, 왕이 토스카나공 하르가니 쿨름바이드에게 공작령을 내놓으라 명하였다. 하르가니는 만드 부족에서 온 사내로, 부왕 카를만1세가 대장군에 앉히고 베산콘의 들판을 갈아엎게 하고 마침내 이탈리아를 내려준 사람이다.
하르가니가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전하기를,
"선왕께서 주신 것이옵니다."
왕이 답하였다.
"그러하다. 선왕께서 주셨다."
1385년 5월에 왕이 이겼고 토스카나를 거두었다.
1387년 5월, 피렌체백으로 강등되어 있던 하르가니가 옥에서 죽었다. 아버지가 세운 사람을 아들이 무너뜨리는 데 한 해가 걸렸다. 세우는 데는 열 해가 걸렸었다.
이 사람의 일생은 따로 적을 자리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줄인다.
한 달
1385년 6월, 왕이 장남이자 후계자 카를만에게 토스카나 공작령과 슈비츠 백작령을 내렸다. 하르가니에게서 거둔 바로 그 땅이다. 아들은 열일곱이었고 이듬해에 헬레네를 맞을 참이었다.
1385년 7월, 카를만이 병들어 죽었다.
토스카나와 슈비츠가 왕에게 돌아왔다. 아들에게 준 지 한 달 만이었다.
왕이 상을 치르고 나와 명하였다.
"혼약을 하르트만에게 옮겨라."
하르트만은 차남이며 그때 열두 살이었다. 이 아이의 혼사는 이미 두 번 깨져 있었다. 1382년 2월에 안할트백 마리아 폰 뉴엔부르크와 약혼하였다가 그달을 넘기지 못하고 마리아가 거절하여 상부르군트공에게 갔으며, 3월에 에스테르곰공 마르가레타 아르파트와 다시 정하였다. 이제 그것마저 깨고 형의 신부를 앉히는 것이다.
곁에서 아뢰기를,
"신부가 같사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신부는 같다. 신랑만 바꾼다."
두 해 전에 사람 하나를 죽여 얻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힐 아들이 죽자 다른 아들을 앉힌 것이다. 사제가 값은 물려받는다 하였는데, 값을 물려받을 아들이 먼저 갔다가 다른 아들이 대신 들어선 셈이다.
1389년 7월, 하르트만이 성년이 되었다.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하였고, 뜻이 크고 셈을 공평히 하되 욕심이 많고 겁이 많으며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그달에 왕이 그에게 토스카나 공작령과 슈비츠 백작령을 내렸다. 네 해 전에 형이 한 달 동안 가졌던 그 땅이다.
1393년 5월, 토스카나 사람들이 그를 공정공이라 불렀다.
겁이 많은 자를 공정하다 부르는 것은, 그가 아직 겁낼 일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벽
1387년 6월, 사람들이 더는 왕을 용감하다 하지 않았다. 그 용기가 일곱 해를 갔다.
이듬달인 7월, 왕이 튀빙겐에 성벽을 쌓게 하였다. 1390년 정월에는 그 안에 큰 성채를 올렸다. 곁에서 아뢰기를,
"튀빙겐은 적의 길목이 아니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길목이 아닌 곳으로 오는 자가 있다."
돌을 쌓는 데 세 해가 걸렸다. 그동안 그가 몸소 나간 싸움이 없다.
호전왕
1392년 10월, 사람들이 왕을 '호전왕'이라 불렀다.
그가 이 칭호를 듣고 물었다.
"누가 지었느냐."
"백성들이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백성은 내가 성벽 쌓는 것만 다섯 해를 보았을 터인데."
곁의 사람이 답하지 않았다. 왕이 다시 말하였다.
"이름은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짓는구나."
그가 열여덟에 황제의 아우를 베었고, 서른둘에 용감하다는 말을 들었고, 서른아홉에 그 말을 잃었고, 마흔넷에 호전왕이 되었다. 이름이 사실을 따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르눌프
1393년 5월, 삼남 아르눌프가 성년이 되었다.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있어 조부 카를만1세를 닮았다 하였다.
그해 7월, 아르눌프가 산티아고 기사단에 들어가겠다 하였다. 왕이 축복하여 보냈다.
이 집안에서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카를만1세의 아버지 아달베르트가 칼을 놓고 구호기사단으로 갔고, 훗날 구호기사단의 대기사단장이 되어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순 해 만에 그 증손이 같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떠나는 날 아르눌프가 하직하니 왕이 말하였다.
"내 조부께서도 아비를 그리로 보내셨다."
"돌아오셨나이까."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러면 저도 돌아오지 않겠나이다."
왕이 붙잡지 않았다.
리치와라
왕의 장녀 리치와라는 1369년에 났다.
1375년 12월에 프랑스 왕자 피에르 드 부르주와 약혼하여 1385년 12월에 혼례를 올렸다. 1390년 정월에 피에르가 죽었다.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에 보헤미아공 알브레히트 프르셰미슬과 다시 정하여 1391년 10월에 혼례를 올렸다. 1397년 9월에 알브레히트가 죽었다. 역시 스물한 살이었다.
두 남편이 같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 이 지방에 말이 돌았다. 리치와라를 두고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였는지는 여기에 적지 않겠다.
다만 그 사이인 1391년 10월에 리치와라가 후폴트 폰 엥겔베르크라는 자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이름을 게르트루트라 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이다.
1397년, 왕이 누이가 아니라 딸의 혼처를 다시 구하였다. 이번에는 헬러공 구젤린 에티코넨이었고, 나이가 마흔하나였다. 리치와라가 물었다.
"이번에는 몇이옵니까."
"마흔하나다."
"그러면 오래 사시겠나이다."
왕이 답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차녀 도로테아가 조지아왕 아쇼트2세 바그라티오니에게 갔다. 왕은 딸 둘을 각각 서쪽 끝과 동쪽 끝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가 딸들에게 해 준 마지막 일이다.
신실한 자
1394년 5월, 사람들이 왕을 신실하다 하였다. 일족을 죽인 지 열한 해째 되는 해였다.
1396년 2월에 흘로에거르를 향한 십자군이 일어났다. 3월에 왕이 참전하였다.
1397년 4월, 사람들이 더는 그를 독선적이라 하지 않았다. 평생 남의 말을 듣지 않던 사람이 마흔아홉에 이르러 남의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6월, 바다 건너로 나간 슈바벤 군사가 전멸하였다.
왕은 물러나지 않았다. 부왕 카를만1세가 이교도를 사람들 앞에서 태워 죽인 일이 있었고, 그 넉 달 뒤에 뷔르템베르크백이 이교도의 제단에 산 채로 올랐다. 아들은 그 셈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남았다.
샤티용
1398년 12월, 흘로에거르를 벗어난 아즈텍의 군사가 유럽으로 들어왔다. 연합군이 샤티용에서 그들을 맞았다.
그 자리에 후에틀라토아니 치말리가 있었다. 왕도 그 자리에 있었다.
왕이 죽었다. 향년 쉰이었다. 서른두 해 전 니코메디아에서 그를 반쯤 죽여 놓았던 상처는 아물었고, 그 자리에 남은 흉터를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 들판에서였다.
차남 하르트만이 스물다섯에 슈바벤 왕국과 그 부속령을 이었다. 그가 맞을 신부는 열세 해 전에 형의 신부였던 헬레네였고, 그 신부가 가진 것은 열다섯 해 전에 아버지가 사람 하나를 죽여 만들어 준 자리였다.
소평
수도원장이 이르되, 헤리베르트1세를 두고 호전왕이라 하는 것은 그를 절반만 본 것이다.
그는 평생 두 가지를 하였다. 하나는 자기 손으로 사람을 베는 일이요, 하나는 남의 손으로 사람을 없애는 일이다.
앞의 것으로 그는 이름을 얻었고, 뒤의 것으로 그는 손자에게 제관을 얻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앞의 것을 할 때 벤 사람이 두카스였고, 뒤의 것으로 얻은 자리도 두카스의 것이었다.
한 집안의 피를 흘려 그 집안의 관을 가져온 셈이니,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의 뜻이라 한다. 나는 그렇게 적지 않겠다.
슈바벤 왕 본기 상권 논찬(論贊)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카를만1세와 헤리베르트1세는 모두 왕관을 썼다. 그리고 둘 다 남의 제국의 재상 노릇을 하였다.
왕관은 머리에 얹는 것이요 인장은 손에 쥐는 것인데, 이 두 사람은 제 머리에 얹은 것과 남이 쥐여 준 것을 한꺼번에 지고 다녔다.
무릎을 꿇는 왕이란 본래 있을 수 없는 것이나, 이 시절 슈바벤에는 있었다.
보에티우스가 옥중에서 운명을 두고 이르되, 바퀴를 돌리는 것이 그 일이라 하였다.
안셀름1세가 죽은 해로부터 열네 해 동안 제관을 쓴 자가 다섯이요 모두 에티코넨이다. 바퀴는 이 집안 안에서만 돌았다.
그런데도 이 두 왕은 한 번도 그 바퀴 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저들은 바퀴 곁에 서서 떨어지는 것을 줍는 자리에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종주권이 그렇게 굴러떨어졌고, 눈먼 필리베르트의 상트갈렌도 그렇게 굴러다니다 남의 손에 잡혔다.
아비는 값을 치르고 사는 사람이었다. 숙부는 두 눈으로 옥문을 나섰고 저는 이백팔십육 두캇으로 나왔으니, 그 값이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진 빚보다 쌌다. 그는 열여덟에 브뤼게를 잃고 서른에 되찾았다. 시작한 것 중에 끝을 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 다만 시작한 것이 적었다.
아들은 값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었다. 사람 하나를 없애어 며느리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자리에 앉힐 아들이 두 해 만에 죽었다.
그러자 신부는 그대로 두고 신랑만 바꾸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의 나라를 두고 지배하려는 욕심에 다스려진다 하였으니, 이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다만 그 욕심이 제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의 것을 위한 것이었음이 이 사람의 딱한 데다.
제 것을 탐하는 자는 죽으면 그만이나, 자식의 것을 탐하는 자는 죽어도 셈이 남는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늦게 왔다.
용감하다는 말은 황제의 아우를 벤 지 열네 해 만에 왔고, 호전왕이라는 이름은 그 용기를 잃고 성벽을 쌓기 시작한 뒤에 왔으며, 신실하다는 말은 일족을 죽인 지 열한 해 만에 왔다.
세상이 사람을 부르는 이름은 그 사람의 지금을 가리키는 법이 없다. 언제나 지나간 자리를 가리킨다.
복음에 이르기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하였다.
헤리베르트는 샤티용의 들판에서 이교도의 손에 죽었다. 그가 평생 모은 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도 그를 돕지 못하였다.
다만 그가 미뤄 둔 값은 남아서, 스물다섯 살 먹은 차남에게 그대로 넘어갔다.
내가 이 두 사람을 기리려고 붓을 든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동방의 만프레트가 의문 가운데 죽었다는 소문이 이 땅에 돌았다. 그 소문이 나를 수도원 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
사십 년이 지나 그 일의 앞뒤를 다 적고 나니, 소문이 옳았음이 드러났을 뿐 그것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다.
상권을 여기서 닫는다. 왕관을 쓰고도 자유롭지 못하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다음 권부터는 그 자유를 얻겠다고 나선 자와, 그가 남긴 것을 아무 애씀 없이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어느 쪽이 더 많이 얻었는지는 그 권을 다 읽고 각자 판단할 일이다.
첫댓글 글을 통장 재테크노하우에 쓰셨어요..
언젠가 이런 댓글이 달릴 날이 올거라 생각했죠(..)
사실 이 게시판은 제 연대기 전용 게시판입니다. 이름은 어그로성이었는데, 정작 연대기를 작성안하다보니 게시판 이름값을 한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잘 지었어야 했는데..
@통장 그래서 닉이 통장이시군요ㅎㅎ
내 마음의 고향 바이에른의 공작관을 가진 자가 지금의 본처 폴로니아를 때리는구나... 크흡...
크으...드디어 내용과 관련된 댓글이(..) 읽는 분이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트레잇의 모양새나 인물창 배열을 보니 고대 크킹의 향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