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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증거
마태복음 11장 7-15절(눅 7장 24-28절)
마태복음 11장 7-15절/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온 두 제자가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좇아 에워싸고 있는 무리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물어보시고 그 자신 스스로가 답해 주시는 형태로 말씀하셨습니다. 무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황량한 유대 광야에 있는 요단강에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물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갈릴리를 떠나서 그곳까지 나갔었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계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물어보시는 것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너희가 광야에 나갔었는데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였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보려고 나갔었느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왕궁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었느냐?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었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사람인데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고 예언된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로 요한을 묘사한 것은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소신이 없는 허약한 마음이 아닌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현실을 생각해서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지금까지 한 일은 메시야가 올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백성들이 그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밖에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헤롯을 책망한 일로 인하여 옥에 갇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주 어려운 현실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죄인의 죄를 심판하여 멸하시고 죄를 회개한 자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케 하실 것에 대한 성취입니다. 그에 대한 소망이 그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하여 광야로 나간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그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 너희가 보는 것은 굳은 마음에 있는 세례 요한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시며, 그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예수님을 위하여 사역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하실 일이 가져올 소망에 있는 세례 요한임을 무리에게 인식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하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눅 7:25)를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표현으로 말하면 귀족, 왕족들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는 자들입니다. 돈을 잘 쓰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의식주에 걱정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화이트 칼라’(White collar)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흰 와이샤쓰에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입고 한 신사를 말합니다.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질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만일 그런 사람을 보려고 했다면 왕궁엘 가든지 했어야 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 안일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지내며 자기를 과시하는, 그러니까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하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과 생활에 대해 말하기를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야생 꿀)이었더라”(마 3:4)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 금방 선지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알므로 말미암아 자기의 소유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처럼 세례 요한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려고 나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이냐? 너희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세례 요한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려고 해서가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게 무엇이냐? 세례 요한을 어떤 사람으로 알았느냐? 선지자로 알고서 나간 것이 아니냐? 그래서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고, 선지자가 베푸는 물세례를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냐? 그렇다.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서 올바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세례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사람인데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심판과 구원을 행하기 위하여 주께서 오실 때,그 앞서 주께서 사자를 보내어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바로 그 사자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례 요한이 단지 선지자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라 예언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임과 그가 왔음으로 해서 주의 날이 도래하였음을 말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보다 큰 자입니다.“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사역과 주의 날의 도래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주의 날의 주인공임과 자신이 이 세상에 왔음으로 해서 옛 시대는 마감이 되었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신 후에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에 앞서 주의 길을 예비함으로써 주의 날의 도래를 알렸다는 이유로 해서 모든 선지자, 아니 그 어떤 사람보다도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지만, 그가 메시야의 사역이 속죄의 어린 양에 의한 구원 사역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의 생명의 첫열매가 되신 이 진리를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도 앞으로 나타날 구원의 진리의 계시의 신비함을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었던 속죄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 의한 구원의 계시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알고 있던 구원의 진리가 그의 믿음에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가 알고 믿고 있는 것으로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 의해서 주의 길이 예비 되고 그래서 예수를 주로 보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림자를 보았다고 하면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들은 실체를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다가옴을 바라보고 그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사람이라고 하면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들은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은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천국 밖에서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한 세례 요한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예수님은 누가 그 천국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 요한이 선구자로서 천국의 도래를 예고한 그 때부터 지금까지(미래적 완료형) 천국은 힘 있게 확장되어 가고 있으며, 천국의 성격에 부합된 믿음을 가진 힘 있는 자들이 그 천국을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다음과 같이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천국은 힘 있게 전진하고 있으며, 힘있게 전진하는 자들은 천국을 붙잡느니라.”(NIV) 앞의 번역(한글 개역성경)은 수동적으로 번역한 것이며, 뒤의 번역(NIV)은 자동사적 의미로 번역한 것인데, 후자의 번역이 본뜻을 이해하는데 보다 적합합니다. “천국은 힘 있게 나아가나니, 힘이 있는 자가 그것을 장악하느니라.” 이에 대해 김영철은 성경정독집 신약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상징적으로 또는 그림자로서 이 땅에 임했으므로 그 나라의 실현을 미래에 있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자 요한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고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바라보던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왕께서 몸소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시고 그 나라의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땅을 주관하고 있으며 죄악을 번성시키는 마귀의 세력이 그분의 능력 앞에 꺾여지고 밀려나고 무너지는 일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선포한 이후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힘 있게 전진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부합된 믿음을 갖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천국에 자동적으로 속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혈통적 소속을 인정치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위적인 것들을 모두 내버리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붙잡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붙잡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이 힘 있게 전진해 나가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의해서 그 현상으로 있은 일이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고 죽은 자가 살아남을 받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힘있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위대한 사람이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증거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할 것이며, 그 사람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라고 하는 논리로 사람들의 관심이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께로 향하여야 하며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주로 믿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말씀에서 다시 한 번 그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예언하고 있는 예언은 요한의 때까지로서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끝났음을 의미하며, 그 예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면 주님에 앞서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이 대망하고 있는 천국 도래와 천국의 주인을 영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가 증거하는 회개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천국을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증거를 다하신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만, 누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의 일은 육에 속한 사람이면 들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영의 일(하늘에 속한 일)은 육에 속한 사람은 들을 수 없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만이 영의 일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으며,“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땅의 일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전부 영에 속한 일(하늘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니 신령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지각, 곧 믿음과 깨달음이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여 받아들이는 믿음과 성령의 조명이 있어 깨달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증거 한 말씀을 경청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가져 세례 요한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고, 그래서 그가 증거하고 있는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을 차지하는 자가 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