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6장 17-25절
설교제목 : 우물 파기
사랑 엽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첫눈이 온다는 본격적인 겨울의 시간인 소설을 지나고 있습니다. 떠나가는 가을이 아쉽기만 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사랑 엽서”라는 시에서 노래합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시인은 나무 잎이 낮은 곳으로 내려앉으며, 대지 위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가진 게 없다 할지라도 타자에게 무엇을 나누어주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자연의 모습에서 자신을 반추하며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을 일깨웁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게 없다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나눌 수 있다면 세상은 살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인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낙엽에게 물어보라고 권유합니다. 왜 사랑이 낮은 곳에 있는지를요? 낮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 있는 자는 사랑조차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위해 자신을 덜어내고 비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덜어낸 낙엽을 보며, 우리 자신과 이 세계를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게 없어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주려할 때 기쁨과 감사, 풍요가 우리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할 때 평화와 사랑이 다시 우리 세계에 찾아올 것입니다. 떠나가는 가을 앞에서 시인이 띄우는 가을엽서를 다시금 음미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우물 떠나기
아브라함의 대를 이은 이삭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고 부족장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경험했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26:1). 주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 가지 말고, 너에게 살라고 한 땅에서 그대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말씀을 따라서 그랄에 머물며 살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랄 사람이 무서워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로 인하여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내 리브가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아들이 재연한 사건입니다. 아직 그는 아버지의 세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의 어두운 측면을 답습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리브가가 그의 아내임을 알고 이삭과 리브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조취합니다. 성서에 보면 이삭은 목축만 한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의 수확을 거둬들였습니다. 부자되었고, 점점 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로부터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거부가 되고 강해진 이삭에게 그 땅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이삭은 다시 그곳을 떠나 그랄 평원에 장막을 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파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는 샘줄기를 찾아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지역의 토착 목자들이 자신의 우물이라 주장하며 이삭의 목자들과 싸웠습니다. 그곳 이름을 ‘다툼’을 뜻하는 ‘에섹’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다툼을 피해서 또 다른 우울을 팠지만, 그들은 또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 우물 이름을 이삭은 ‘반대’를 뜻하는 ‘싯나’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주고 또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이런 본문의 내용들은 겉보이에 대단히 화가나고 고통스런 경험이지만, 이삭이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세계를 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판 우울은 어쩌면 다시 팠지만, 다시 사용할 수 없었기에 이삭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다툼과 반대를 통하여 이삭은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세계를 넘어서 자신의 삶의 역사를 새롭게 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삭의 삶은 우리가 부모의 세계를 넘어서 독립적인 삶의 가치를 실현해야할 본본기를 제공합니다. 모든 인간은 바로 부모의 구태의연한 세계를 답습하거나, 기존의 가치를 그대로 차용하면, 더 이상 의식의 발달이 일어나기는커녕 퇴행적 삶의 행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을 지닌 이전 체계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마모현상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갈등과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르호봇 파기
이삭은 시비를 걸면 다시 우물을 파서 자신의 우물을 계속적으로 파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 아무도 그 우물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명명합니다. 그 이름의 뜻을 말씀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22).”
‘넓은 곳’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이삭은 계속되는 다툼과 반대 속에서 불화하였지만, 그곳에 매몰되어 전쟁을 불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우물을 파서, 오히려 그 힘겨운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자신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이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우리 인생이 이런 다툼과 반대에 부딪히면 통상적으로 두 가지 양상에 드러납니다. 하나의 양상은 이런 다툼 속에서 오히려 뒷걸음질 치며 퇴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툼에 매몰되어 첨예한 갈등 속에서 인생을 소진하며 자신의 파괴적 정서를 폭발하며 오히려 삶을 과거의 시간 속에 고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우물의 정당성만을 강조한 채 과거와 당장의 현상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양상은 갈등과 반대에 매몰되지 않고 다투지 않음으로 또 다른 기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내면의 고요함을 통하여 새로운 우물을 찾아나서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노자는 인생사에서 싸움을 불가피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싸움에 탁월한 자에 대하여, “싸움에 탁월한 자는 결코 분노에 휩싸이지 않는다(노자도덕경 68장)”고 가르칩니다. 그는 “소심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니(노자도덕경 73장)”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수준의 이해에서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아도 이기는데 탁월하기에(노자도덕경 73장)” 싸움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전사로서 뛰어난 자는 어마어마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와 다투는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은 그가 다투려하지 않기 때문(노자도덕경 66장)”임을 분명히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툼과 시비, 반대에 부딪히며 삶의 혼란과 억울함, 고통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어쩌면 싸우려하지 않기에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어 진정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인생을 넓은 곳으로 확장할 수 기회입니다. 르호봇의 우물을 팔 시간임을 알아차렸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떤 우물을 파고 있으신가요? 다툼과 반대를 넘어서 넓은 곳에 이르게 하시는 르호봇의 우물을 팔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우물파기
르호봇의 우물을 파고 브엘세바로 갔는데 그 날밤에 주님이 나타나시고 그곳에 제단을 쌓고, 예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기를 간청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쫒아냈지만, 그를 보니 이는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사람임을 너무 선명하게 본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29).”
이삭은 다툼과 반대의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분노와 힘으로 싸우려들지 않았습니다. 오리혀 새로운 우물을 파는 기회로 삼고 넓은 곳으로 자신을 확장해 갔습니다. 그저 자신의 필요로 우물을 팠음에도, 주위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평화조약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는 신성함과 연결된 자이기에, 그저 주위로 그의 힘이 확산되었습니다. 자신의 우물에 집중하며 우물을 판 이삭의 영향력이었습니다. 바른 삶의 태도로 자신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향력은 주위로 확산되고, 그 힘은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우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영원한 물이 솟아나는 끊임없이 흐르는 무의식의 자원입니다. 이 우물 파기는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에 있는 생명과 치유의 근원을 찾아가서 접촉을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외부세계에 있는 것과 접촉하여 자신의 생명과 복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세상 한복판에 있습니다. 내면의 심층에서 길어오르는 생명의 근원을 찾아 접촉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쟁하며, 싸우면서 빼앗으려 급급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의 우물을 빼앗아 자신의 우물로 점유하면서도 반성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호의호식하려 합니다. 그러나 종국에 그런 남의 것으로 점유된 우물은 더욱 우리를 자극하며 비교경쟁하며 강박과 불안에 시달리게 할 뿐입니다.
오늘 아비멜렉과 이삭이 평화조약을 맺고 네 번째 판 우울을 ‘세바’라 명명합니다. ‘맹세’ 또는 ‘일곱’이란 뜻입니다. 이 우물이 있는 성읍을 ‘브엘세바’라 명명합니다. ‘맹세의 우물’, ‘일곱의 우물’이라 칭했습니다. 그 우울 파기를 통하여 평화의 마을, 맹세의 성읍이 세워진 것입니다. 결국 이삭의 우물파기는 집단으로 확장되어 맹세의 우물, 평화의 우물을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우물을 소유하고, 파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신가요? 자신의 심층에서 솟아나는 우물을 파내어 나뿐 아니라 집단에도 평화과 생명의 물이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