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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토포스의 하이퍼성․2
김지숙
전쟁이란 무력을 써서 자국의 이익을 구하는 싸움이다. 강대국 간의 이권 다툼으로 빚어진 한국 전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분단 상태로 남아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한편, 우리 민족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국현대시에서 전쟁을 다룬 시들은 전쟁현장을 고발하거나 전투의욕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혹은 전쟁기의 개인적 집단적 내면을 위해 쓰여졌다. 혹은 이들 시가 선동성 기록성 서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개는 전쟁참여시 상황시 비판시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전쟁시의 논의는 비문학성을 비판(김병린 1987)하거나 혹은 남북한 공통분모를 밝히고 이질화를 검토(이지엽 1997)하는데 이는 전쟁시는 주로 주제와 전쟁이 이루어지는 관계에 따라 작품의 범주가 정해진다.(임도한 2000)
문덕수의 시집 『우체부』는 서두에서 보면 국가 지역 종교 추억 신화를 넘어서 사랑 자비 애환에 접근하려는 뜻으로 쓰였으며 욕망의 경계를 지우고 분열과 갈등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은 경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느 곳이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우체부 조셉 롤랭’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환 의식이 나타나는 한편, 전쟁 현장을 되새기거나 기억 속에서 직면하는가 하면 지구를 넘나들고 우편물들을 전달하는 경계를 초월하는 집배원의 일상을 읽게 된다.『우체부』에 실린 시들 가운데 전쟁시를 중심으로 하이퍼리얼리티를 의미 단위로 고찰하였다.
포탄이 날아올 땐 인지(人指)를 펴어 밑을 가리키고/전란과 굶주림 속의 모든 염원과 기도를 도맡아 손바닥을 위로 하고 다섯 손가락 다 펴니/두 발의 결가부좌가 받드네 -1단위
어버이 부축한 외나무 다리 길도/5백 킬로 상공의 무중력 궤도도/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뛸 우체부도/두 다리네 -2단위
『우체부』Ⅰ. 조셉룰랭 16쪽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과 상기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상기란 기억된 것 중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어 들추어내려는 의도적인 노력으로 보고 상기적 기억과 관련된 ‘장소(topos)’를 중요시 여긴다. 이 시의 단위들을 읽으면 거대한 서사극을 보는 느낌이다. 포탄 우체부 등과 같이 각각 이미지는 단절성을 확보하는 몽따주 형식과 포탄 전란 굶주림과 같은 각박하고 거친 삶을 표현하고 기도 두발 가방 외나무다리 손바닥 등과 같은 인체와 유관한 오브제들이 뒤섞이는가 하면 전쟁터에서 겪는 실존 감각을 죽음이미지와 더불어 표현하는데 이는 현실 속에서 전쟁 우체부와 같은 다양한 일상이라는 복합적 상황과 더불어 수용한다. 이 시는 4개의 단위로 이루어지며 공통된 소재는 두 ‘발’이다. 1단위로 연상되는 두 발은 전란 고통을 겪는 공간과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종교적 초월성을 읽게 된다, 2단위에서 자유로운 우체부 두 발은 외나무 길과 무중력 궤도도 마다 않고 발걸음이 닿는 곳이면 어디라도 걸어가는 시공간의 초월성 나타난다. 르페브르는 밖에 존재하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곳으로 공간을 보고 하비는 사회적 구성율 혹은 사회적 효과로 장소를 본다(D. Haryvey) 이처럼 장소에 대한 인간 관계는 몸 정서 등을 매개로 체화된 삶에서 나아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확장된 삶을 산다. 위의 시에서 전쟁 토포스는 ‘발’과 관련된다. 시에서 두 발로 링크된 2가지 상황으로 확장되고 때로는 초월되어 전쟁 공포감을 드러낸다. 우체부의 발은 역동감을 지닌 채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현실 공간 가상공간 기억 속의 공간 상상 공간 등을 넘나드는 시공간의 초월성을 지닌다. ‘전란’ ‘굶주림’은 현장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전쟁터 군인 우체부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외나무 다리길’과 ’무중력 궤도‘의 길이라는 개념의 병치 군인의 발과 우체부의 다리와 같은 걷는다는 개념들의 병치로 다의미성을 지닌 ’발‘을 구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시에서는 전쟁에 관련된 포탄이 날아오는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강박증이 발과 결부된 채 일차적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뒤얽힌 여러 사건의 전달자로서 혹은 개인적 정서를 통해 상처를 걸러내는 과정에서 내면 깊숙이 들어있는 전쟁 토포스가 외형화되지만 이러한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내적 숙련과정이 필요하다.
격군(格軍)의 노는 탱크의 캐터필러/사부(射夫)의 화살은 105미리 155미리 야포네 -1단위
쇠나팔이 울둘목을 휘감아 길게 세 번 울고 그 꼬리 허공으로/풀리니 발진 명령이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되네/배의 노가 일제히 물위로 치솟다가 내려가고/이 물에 덤비는 물결은 길길이 뛰며 달라들고
-2단위
-『우체부』Ⅱ 격군들17쪽
부딪친 물결이 깨어져 갈리며 소용돌이치네/노 한 자루에 네 사람이 붙어/서로 마주보면 몸을 숙이고 젖히네/온 몸이 북소리 한 번에 앞으로 밀고/또 한 번에 뒤로 당기네/노를 질타하는 북소리 다급해지니/빠른 뇌고(雷鼓)로 바뀌고/역류로 달라드는 물결과 북소리 틈새에서/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
-3단위
-『우체부』Ⅱ 격군들18쪽
대개 전쟁은 상대에 대한 비판과 사기저하 아군 독려와 심리전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자유 평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도식적 입장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전쟁은 한 개인이 겪은 전쟁이라는 비극적 기억에 초점을 두었다. 위 시 1단위에서 ‘노’와 ‘캐터필러’ ‘화살’과 ‘야포’에서는 임란이 일어난 공간과 한국전쟁의 공간이 겹쳐지면서 시간적 상황이 배제된 채, 기억과 생각 그리고 임란의 상상이라는 3개 층위로 표현된다. 이러한 3중 층위를 병렬관계에 두어 전쟁 불안감은 오히려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경험과 의식을 교란시켜 자율성을 확장하고 다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2단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울둘목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때로 돌아가 쇠나팔이 울고 명령이 하달되고 물결이 덤벼드는 순간을 상상한다. 3단위에서도 전쟁은 여전히 임진왜란이 일어난 현장으로 울둘목 물결이 갈라지고 노자루를 잡은 네 명의 군인이 밀고 당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칸트에 따르면 공간은 주관적 속성으로 바라보는 한편 외적 직관을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주관적 조건이다. 말하자면 공간은 공간적 현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틀이나 공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사물의 대상적 속성이 아니라 감각 인지 능력의 요청이며 직관 형식 지각이 가능하기 위해 있어야 하는 조건들로 보았다. 그에게서 공간은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내면에 가깝다 위 시의 단위에서 전쟁 토포스는 비선형구조로 나타난다. 화자가 현재 공간에서 임란과 한국전을 오가는 등 시공간의 초월성이 나타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의미에서 볼 때 전쟁을 주제로 겪은 다양한 심리현상들과 급박한 이미지 전개와 더불어 비선형적이며 무의식적인 환상으로 표현된다.
펜대를 쥐었던 연역한 손이/M1을 받들어 총의 자세로 잡고/하낫 둘 하낫 둘 역사의 구령에 깃들여지네//구슬땀이 염주알로 익어 한겹 두겹 모가지를/두르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화랑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진 전우야/한 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바로 네 턱 앞의 헉헉거리던 한 병사의/묵직한 M1총대가 두 손아귀에서 빠질 듯 미끄러져 내리니 - 1단위
-『우체부』Ⅱ 격군들19쪽
어디서 번개불처럼 채찍이 날아와 다그치네/행진을 이끄는 구령이 더 촉박해지고/움찔 놀라 추스러 끌어 올리나, 그뿐 다시/미끄러져 내리네, 땀 훔치며 히끈 들어올리니/아이고매 죽여줍소 아이고매 죽여줍소/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유고매 죽여줍소 데이고매 죽여줍쇼 소름이 돋혔지/옴마니밧메훔으로도 들렸지/그 소모품 육군 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네/에카스민 사예 에카스민 사마예
-2단위
『우체부』Ⅱ 격군들 20쪽
밤비가 주룩주룩 죽죽 내리네 퍼붓네/한낮의 찐 더위도 밤에는 오히려 초겨울/지옥보다 더 캄캄한 비의 산길을 더듬어/헤드라이트를 근 군용차들이 앞차의 반딧불만/한 미등을 따라/진흙이 튕겨서 유리에 칙칙 부리는 도로를 꼬불고불 도/네 우체부 가방도 진흙 투성이네/병사들은 군복 위로 들러쓴 판초에 머리만 내어놓고 -3단위
『우체부』Ⅱ 격군들 21쪽
므네모시네(Mnemosyne)는 기억의 여신으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칼리오페를 비롯한 9명의 뮤즈를 낳았다 이들 뮤즈는 아폴론을 도와 신전에서 연주하였으며 당대는 악보없이 기억에 의존한 연주였다 이 점은 고대 서구인에게 기억이 예술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키케로는 기억이 사물과 단어를 정신에 붙들어 둔다고 보았으며, 플라톤은 기억을 선악판단과 진리추구에 포함시키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의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회상의 연관법칙이 대조 유사성 인접성을 통해 생긴다고 보고 인공 기억이 장소와 이미지를 통해 조직화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다(Sloane 484) 1단위에서는 당대 상황에서 벗어난 회고 속에서 전쟁을 역사의 장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전쟁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기억 재현 행위 속에서 총을 잡고 총대가 미끄러지는 모습들이 생사 갈림길에 섰던 불안감과 겹쳐지고 ‘M1을 받들어 총의 자세’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같이 전쟁 일선에 부르던 노래 소리는 당시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2단위에서는 여전히 링크된 채 잔존하는 ‘우체부’는 남겨진 채 새로운 개별 링크들을 변형시켜 교체하면서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또한 신화라는 가상현실에서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표현된다. 불교에서 ‘축복이어라.’는 말의 ‘삼략삼보리’와 기독교의 ‘엘리엘리...’는 유사한 의미이며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영웅의 전쟁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쟁 묘사에 중심을 두기보다 ‘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 ‘아이고매 죽여 줍소’ 등과 같이 놀라고 움츠린 표정이 역력하여 더 이상 진취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군인이 아닌 공포 무력감, 두려움이 엄습한 상황이 재현된다. 이런 상처의 재현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전쟁터에서 입었던 상흔들은 벗어던진다. 3단위에서는 전쟁터에서 비가 내리고 진흙탕 속에서 힘들게 행군하는 군인들과 진흙투성이가 된 우체부 가방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장면 변화와 진흙이 묻어버린 자유 연상으로 변화한다. 우중행군을 하며 진흙물이 튕기며 산길을 가는 모습이 기억 속에서 재현되지만 그 장면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전쟁 직후의 문학작품들은 숨 막히는 시대정신을 직설적이며 사실적으로 증언하거나 혹은 전쟁의 상처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아가 전쟁 이후 고통을 다룬 실향 이산 이별 등은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개인적 고통이자 민족 비극을 함축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찾는 세계의 상실이 아니라 상처에 깊이 개입한 구체적 상처(송희영외,2004)가 된다. 위 시의 단위에서 전쟁 토포스는 상흔을 벗어던지려는 정황에 있다. 전쟁을 ‘한 시대가- 달구어지네’ ‘들렸기’에서는 현재 장소에서 기억 속으로 비순차적 구조로 회상한다. 현재 상황 속에서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을 비선형구조로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는 다선 구조의 두 층위 시간적 공간을 넘나든다 ‘역사의 구령’ ‘연기 속으로 사라진 전우야’ ‘한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처럼 이미 지나간 일들이 과거의 사실 그대로 기억하기보다는 현재 상황이 감안된 기억들이 오랜 세월이 흘러 전쟁 상흔이 씻겨나간 자리에는 개인적 정서가 실존 정황에서 벗어나 비교적 차분하게 객관화되고 상처의 현장에서 떨어져 나간 모습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여유로 표현된다.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말이 끝난 뒤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뻑’하고 죽습니다./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1단위
『우체부』Ⅲ불의 기호 38쪽
캥캥 캥 대굴대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 개/골들 -2단위
『우체부』Ⅲ불의 기호 39쪽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ādor)를 들러쓴 주/검들//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소리/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3단위
『우체부』Ⅲ불의 기호 40쪽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4단위
『우체부』Ⅲ불의 기호 40쪽
어떤 특정한 장소에 대해 기억을 가진 사람은 그 기억에서 떠나고 싶어도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곳에는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고 이는 몸을 기반으로 삶 정서 체험 기억 등으로 공간과 교류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들은 각 단위별로 내용이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면서 기능별로 단위로 분할한 모듈(module)화 된다. 1단위에서는 전쟁터에서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에서 ‘뻑’이라는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는 강화되고, ‘으으이 윽’ 소리를 내며 유언하는 장면에서는 청각적 요소를 더한다, 그리고 ‘죽어갔네’ 등과 같은 유사어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전쟁터를 재현하면서 기억 속에서 이를 되새긴다. 그리고 시의 전체적 맥락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우체부 존재가 다시 링크되어 그의 가방에는 전사소식을 전해야 하기에 그 소리는 곡소리마냥 슬프다. 2단위에서는 개 짖는 소리 두개골 구르는 소리 우는 소리 몰려오는 소리 등 여러 소리들이 섞여 있다.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현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후반부에는 pun이 나타난다. 3 4단위에서는 맥박소리로 사금파리 깨어지는 소리 등이 표현된다. 주검과 맥박소리, 불발탄과 파편 등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공간 넘나들기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반된 상황의 결합으로 이미지 극대화가 나타난다. 장소는 물리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활동 범주로 만든 풍경에 가까우며 이에는 인간의 생태 정신 사회 환경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토포스란 공간이나 배경보다는 더욱 역동적이며, 주체가 신체적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장소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행위의 장면은 풍경이나 장식적 배경 묘사에 그치지 않으며 대상 세계가 반영되는 텍스트 전체 공간을 점유하는 구체적 토포스를 형성한다.(Yuri Lotman 1991) 즉 인간 정신에는 근본적으로 공간적 사고가 미리 자리 잡고 있다. 위 시의 단위에서 전쟁 토포스는 ‘전쟁터’에서 나타난다. 시에서는 전쟁이라는 몸체는 각 단위별로 분할된 된 채 그 내용들이 모듈화되고 각 부분이 세부 내용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각각의 전개된 내용들은 쉽게 떼어낼 수 있고 또 그것은 다른 내용들로 쉽게 교체되어 여전히 불덩이 속 전쟁 상황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된다. ‘죽어갔네’를 반복하고 ‘두개골’ ‘주검들’ ‘뼈다귀’같은 전쟁을 매개로 하는 가장 부정적 어휘로 이루어져 어두운 측면을 나타내는가 하면, 희망을 담은 ‘편지’, ‘엽서’가 사라진 상황으로 부정적인 느낌은 더욱 강화한다. 또한 ‘왁자그르’ ‘캥캥〜’ ‘맥박소리’ ‘깨어지는’ ‘녹이는 소리’ 등으로 청각적 요소 각각이 의미 작용없는 단절의 원리가 더해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가중된다.
고니는 높은 소나무 가지의 둥지에 알을 낳고/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오가며 놀고/푸른 숲속 백로의 하얀 몸빛 유난히 눈부시지만/철조망 안의 DMZ네 -1단위
『우체부』ⅣDMZ 46쪽
공은 스스로를 지우네/굴러가면서 제 온갖 몸짓을 지우네/날아가면서 날아간 길을 지우네/폭발과 살육 속에서도/숨쉬며 지우네/폭발과 살육 속에서도/숨 쉬며 지우네/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네/사무실의 안팎과/도시의 미로에 가득차 넘실거리는 것/만지거나 볼 수는 없으나/나무와 꽃을 가꾸듯이 기르고 있는 300층을 300층으로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213360 네군번까지 지우네/피구슬 번호와 한 자 한 자/ 전선에 한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날리네 -2단위
『 우체부』ⅣDMZ 52쪽-53쪽
키케로에 따르면 ‘숨겨진 장소가 보이면 숨겨진 물건이 쉽게 보이듯이 논의를 하려면 그 장소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이 느끼는 공통 감각을 장소와 관련지어 언어로 표현하려면 우선 먼저 몸이 말하는 바를 읽어내야 한다. 1단위에서는 DMZ 안이라는 시간적, 지리적 공간을 넘나들면서 또 과거와 현실의 환상이 교차되고 낯설지만 공통된 장소가 불현듯 나타난다. 고니 다람쥐 백로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상황이 나타낸다. 2단위는 공동된 소재가 공이다. 시대를 넘어 공은 풍선 탁구공 축구공으로 변화하면서 공이 지니는 둥근 이미지는 반복되지만 그 의미는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현실과 가상, 환상이 교차되는 이질적 시공간의 세계를 오간다. 움직이면서 지구를 도는 공간을 넘나들면서 우체부의 불룩한 가방으로 자유 연상되는가 하면 피구슬 번호가 전선에 앉은 꽃새로 바뀌는 과정과 더불어 슬픈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되새기는 과정에서 슬픔이 완충 장치를 거치지만 그 의미는 확장된다. 아르망(Armand Fernandes)의 표현을 빌자면 일단 전쟁이라는 일정한 큰 범주 안에서 주변에 실존하는 공 폭탄 살육 사무실 도시 나무 꽃 군번 피구슬 꽃새와 같은 사물들이 지니는 우연한 만남을 토대로 끊임없이 지우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시행되면서 움직이는 과거의 기억 속에 있던 고통은 자연스럽게 극복된다. 한편 ‘지우네’는 그 의미가 무한히 쌓여 새로운 방식으로 시간을 저장하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한다. 아르망은 사물에 사물을 더하는 ‘집적(集積)’의 형태를 지닌 오브제 방식으로 사물의 성질을 파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도구로 반복 사용한다. 사물을 대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이 사물들이 서로 동떨어진 이미지를 야기 시킬 때, 새로운 조형은 탄생되며 엉겨 모이는 혼잡 속에서 개체는 정체성을 갖는다(임선희, 2008) 위 시의 단위에서 전쟁 토포스는 반복적으로 사용된 어휘 ‘지우네’에 집적된다. 구르는 ‘공’은 스스로 그 흔적을 지운다는 의미로 반복적인 ‘지우네’가 나타난다. '지우네’로 링크된 과거 공간 속에서 기억하는 전쟁 살육 현장도 지우고 현재 공간에 있는 사무실 안팎과 도시 공간도, 군번도 지우고 피구슬 번호도 지우는 기억의 재현과 수정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초월하는 시간 의식을 택하고 나아가 시공간을 넘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면서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지우네’라는 주문을 건다. 화자는 과거의 전쟁 상흔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그 과정에서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다.
아버지 로봇과 아들 로봇/울둘목의 일자진 뒤에 배치한 가병들이/큰 로봇이 대장선의 좌현을 막아/ 칼을 빼고 다가오는 적병을 돌로 찍네/큰 로봇이 노를 맡고 작은 로봇이 돌을 들었네/칼을 빼어든 적의 배에 큰 로봇이 뛰어들/때 적의 칼을 맞아 물 위로 꼬꾸라지네/작은 못봇이 에비를 벤 적의 머리를 돌로 치고/다른 적병이 그의 허리를 베었네 -1단위
『우체부』Ⅴ지금 여기 67쪽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굴러다니네/어깨에 맨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저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가 남겨놓은 굴라그//(Gulag)/으슥한 흉안령 기슭을 돌아 밤의 두만강을 건넌/굴라그 구라게 굴라그 구라게/것 속에서 촉수의 쇠그믈 늘여친 クラゲ 굴라그 -2단위
『우체부』Ⅴ지금 여기 68쪽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사절싸 어울리네/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
윈 혼령들이/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부 숲으로 얼른 숨거나/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 -3단위
『우체부』Ⅴ지금 여기 69쪽
지렁이로/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4단위
『우체부』Ⅴ지금 여기 70쪽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3개 공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몸이 존재하는 제1의 공간, 전자공간인 제2의 공간, 전자 공간과 물리적 공간이 만나서 이루어진 공간인 제3의 공간이 그것인데 흔히 이를 초공간(Inter-Space 또는 Hyper-Space이라고 한다.(하원규외 2004) 이 공간은 물리적 세계와 가상 세계를 연결 가능하고 언제 어디서든 사용 가능하다. 시키지 않아도 일을 처리하고 하찮은 물건에도 심을 수 있으며 할 일이 미리 계획된 공간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정보를 수신하고 발신하는 등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여 ‘유비쿼터스 공간’이라고도 한다. 또 공간은 물리적 인지 재현 공간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물리적 정신적 공간으로 이분하기도 한다. 이분화된 정신적 공간은 문화적 공간이 인지와 재현 과정을 거쳐 정신적 공간으로 변화한다. 1단위에 이르면 상상 공간은 역사 속의 사건인 ‘임진왜란’이라는 초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의 잔혹성이 나타나고 상상공간과 역사적 공간이라는 이중 층위 속에서 전쟁은 화자의 기억 속에서 재현된다. 2단위에서는 ‘굴라그’ ‘구라게’ 라는 반복 어휘로 두개골 공 가방 솔제니친의 굴라그 등 청각적 요소들이 언어화되면서 연이어 링크된다. 3단위에서는 망령, 해골 야윈 혼령 등이 죽음과 링크되고 신화 상상 가상이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4단위에서는 로봇이라는 가상 군단과 기억 속의 전쟁을 재현하게 되고 현재 공간에서 우체부가 맨 덜거럭거리는 빈가방 파편 보석 두개골 등이 한 공간에서 비논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고대의 기억술은 상기적 기억과 관련되고 장소(topos)를 중요시 여긴다. 기억은 장소를 중심으로 순서있는 기억의 배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감각 인상의 작용 결과 남아 있을 것이 심상이며 심상의 재현을 상상으로 본다. 위 시에서 주된 전쟁 토포스는 ‘전사(戰死)’에 집중된다. 각각 독립된 상황으로 그러나 슬픔이라는 유사한 모습들은 영상처리 하듯이 나열된다. 그리고는 시간 공간 인물 등을 초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변화하고 유사 어휘를 반복하는 가운데 이를 독자에게 각인하려는 효과도 나타난다. ‘받을 이 없는’ 편지를 전하는 우체부의 우연한 등장으로 부재하는 슬픔을 부가시키는가 하면 기표가 건너뛰는 과정에서 슬픔은 더욱 가중되고 의미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느닷없이 로봇 전사들이 등장하고 로봇의 가슴에 단 수류탄으로 전쟁 기억을 재현하고 다시 현실 공간으로 돌아오면 선 채로 총알을 쏘아댄다. 전쟁 상처들은 초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흐트러진 초월성을 지니며 이로써 화자는 과거의 악몽같았던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집『우체부』에 수록된 시에 나타나는 전쟁 토포스들이 어떤 하이퍼적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 본 결과, 첫째, 이 시집에서 전쟁 토포스는 한국 전쟁에 국한되지 않고 아프간이나 임란 등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동시에 가상공간까지 넘나드는 점에서 시공간의 초월성이 나타난다. 둘째 이 시집에서 전쟁 토포스는 표현의 건너뜀이 나타나는데 이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혼란하고 당혹스럽다, 하지만 다양한 소재들이 시공간을 넘나들고 실체 양 질 장소 관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하이퍼성이 지니는 진정한 정신의 자유로움이 부각된다. 셋째로 이 시집의 전쟁 토포스는 생각 공간은 물론 상상 공간까지 자유로이 드나드는 한편 유사성에 근거한 자유연상 몽따주 등이 확산되어 있으며 우체부를 등장시켜 하이퍼시의 한 양상인 전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즉 독자와 더불어 우체부는 시의 곳곳에서 함께 상상의 공간을 걷게 한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를 표현하며 이미지는 찢기고 뚫리는 현상들을 통해 역사적 사건인 전쟁을 성찰하면서 삶과 예술의 거리를 좁히면서 전쟁에서 고통스러웠던 감정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려 한다. 넷째 시집『우체부』에서는 이전의 시집에서 보다는 공간이 확장되어 나타난다. 예를들어 신화 세계의 전쟁 역사 속 공간으로 이동하고 정권 쟁탈전을 벌인 수양대군과 비운의 단종 그리고 어소가 있는 ‘영월포’라는 장소를 언급하면서 시대를 초월한 전쟁에 관해 확장된 영역을 다루고 있다. 다섯번째『우체부』에서는 가상공간의 출현이 나타난다.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 로봇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가상 전쟁으로 가장된 임란 때 이순신이 승전고를 울린 울둘목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상호작용이 없는 시대와 공간의 단절 원리가 나타난다. 불교와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 일화가 나타나며 이는 종교적 현대 감각까지 확산하고 수용하는 다양체의 원리가 나타난다. 세계인의 결속과 화합의 의미를 지닌 올림픽을 통해 가상현실의 현존을 동시에 그려낸다. 끝으로『우체부』에서는 전쟁 토포스가 하이퍼 기법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심리적 정황들이 포착된다.
참된 기억은 망각의 방식에 의존하는 기억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집의 전쟁 토포스는 한국 전쟁의 기억들을 하이퍼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광범위한 소재들을 한 틀에 묶지 않고 순서 과정 중요도 경계 등을 무너뜨린다. 나아가 지구를 넘나들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장소를 링크하고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 전쟁의 상처를 시공간을 넘나들며 ‘지우’는 방식을 택한다. 위도와 경도가 뚜렷한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숱한 분열과 갈등을 무화해야 하기에 다양한 소재들이 시공간과 뒤엉겨 구분을 없애는 초월성을 택한다. ‘우체부’가 걷는 길은 경계가 없기에 불신의 골 종교적 골 반인권적 행위 등을 지우기에 충분히 적합한 존재로서 사랑과 배려 위로와 자비에 다가가려는 부단한 노력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점을 선명하게 담아냈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전쟁 토포스는 희생도 패배도 승리도 아닌 기억 속의 전쟁 상황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극복하려는 결연한 의지로 드러난다. 그리고 비인간적 전쟁 참상을 묘사 재현하는 과정에서 ‘거주하는 장소와 장소 없는 공간’(하이데거)를 구분하면서 진정한 공간을 찾기 위한 노력이 나타난다. 이는 가상 상상 현실을 오가는 ‘하이퍼’적 기법으로 전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가 하면 전쟁시의 운용의 새로운 방식을 내놓은 점에 있어 한국 시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독보적 의미를 시사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