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 직지사(黃岳山直指寺) /전통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구미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
일설에는 아도화상이 일선군(一善郡, 지금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황악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 능여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붙인 이름이란 설도 있다.
창건설화는 직지(直指)를 미화(美化)한 전설이지만,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창건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불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름이라 하겠다.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극명(克明)하게 드러내는 사찰은 흔치 않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수하였다.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대사 (天默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경순왕 대 중수 기록이 자세히 전해진다.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역사에서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
직지사 사적, 이 시기에 천묵대사는 절을 중수하고,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하였다.
유품(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적기에서 언급한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한다.
우린 대장경을 해인사(海印寺)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대표로 삼았다.
고려대장경에 앞서 신라시대에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시사함이 크다.
금자대장경을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경명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를 물리쳤다.
이 인연으로 직지사는 국가의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긴 세월 중흥(中興)하였다.
금자대장경에 대한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린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다.
조선시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직지사로 출가(出家)하여 신묵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任辰倭亂) 때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직지사 홈페이지에 실린 내용을 간추림)
직지사 사적기를 언제 적었는지 알 수 있다면 직지사 사적에 대하여 생각을 더 깊게 할 수 있겠다.
아도화상, 역사계에서 분명히 밝히지 못한 인물, 선산 도리사와 같이 직지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는 설화일 뿐.
선종의 종지가 직지인심이라 직지사라면 창건은 통일신라 후대일 수 있다.
내가 역사를 전공하였다면 자료를 찾아 밝힐 수 있겠지만 고작 인터넷 찾아보기로 자료를 보는 처지에선 불가능.
직지사 홈페이지에 실린 설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건 내가 5년 동안 전통사찰에 대해 글을 쓰면서 얻은 지식에 따라 생각했다.
황악산에 터 잡은 직지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와서 보는 것도 좋겠다.
산문, 동국제일가람황악산산문
직지사 사적기
일주문인 자하문
대양문, 청소한다고 현판을 떼었다.
금강문
천왕문
사천왕상, 목조이며 얼굴이 무섭지 않다. 장난꾸러기 도깨비를 보는 느낌이다.
만세루
대웅전/보물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승려 인수, 명례 등이 중창하였다.
현 건물은 영조 11년(1735) 중건,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 종익, 태감화상 등이 사부대중의 지지를 얻어 지었다.
심검당
육화당
대웅전 안엔 그림이 많다.
대웅전 수미단/보물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
비단 바탕에 채색.
중앙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세로 610㎝, 가로 300㎝,
좌우 약사불회도·아미타불회도는 각각 세로 610㎝, 가로 240㎝. 1744년(영조 20)에 그렸다.
조선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 등 큰 전각에 세 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오전 10시 전에 들어와 한 바퀴 돌고 오니 장식하였던 화분을 다 치웠다.
감은전
성좌각
향적전
오유족지(吾唯知足) / 나는 오직 만족함을 알 뿐이다.
해석,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적은 것에도 만족할줄 알아야 행복해진다. / 설명문에 적힌 내용
지금 내 처지를 불평하거나 우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고마워한다면 행복하다.
적은 것에도 만족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고쳐야 한다. 적고 많음도 분별이기 때문이다.
지금, 지금 내 처지에 고마워해야만 만족을 느낄 수 있고, 만족감이 곧 행복임을 알 수 있다.
관음전
당호가 안 보인다.
응진전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대사가 지었다.
임진왜란에 전소,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하였다.
사명각
사명대사는 밀양 출신이지만 직지사로 출가하였다.
명부전
전 대통령,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왕이 되어 권력을 누리려고 꿈 꾸었던 고. 박정희, 부부 영정이 있다.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보물
통일신라시대, 9세기 석탑이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옛 절터에서 석 점의 석탑을 1974년 가지고 왔다. 두 점은 대웅전 앞에 있다.
상륜부는 1976년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같은 모양 석탑 세 개가 한 절에 있는 예는 우리나라엔 없다. 다층 기초석이 아닌 단층 기초석이다.
이런 형태는 문경, 상주, 선산지역에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 특색으로 인식한다.
비로전, 천불전
경주 옥석으로 천불을 만들었다고. 동자상이 있는데 비로전 들어가 동자상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조선 현종 2년(1661) 승려 인계가 처음 지었다. 숙종 28년(1702) 승려 성호, 인휘 두 분이 중수.
명월료
약사전
약사전에서 본 전각, 서전 또는 서전암, 극락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천불선원이다.
황악루
천불선원, 안양루
천불선원, 동상당
천불선원, 극락전
직지사 장경각, 템플스테이하는 곳;
법화궁
남월료
만덕전,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화엄일승 법계도, 의상대사가 법성게를 짓고 54각의 도장 문양을 만든 것.
서별당, 망일전 /승려가 거처하는 곳일까?
(전傳) 강락사지 삼층석탑 /보물
구미시 선산읍 원동, 강변 강락사지에 무너져 있는 탑을 1968년 선산군 군청 앞뜰에 복원하여 세웠다.
1980년 직지사로 옮겼고 상륜부는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석탑이다.
직지사엔 비슷한 석탑이 네 개가 있다.
응향각
고경당, 종무소
성보박물관은 휴관, 여기 새롭게 박물관 겸 수장고를 짓는다. 2024년 3월 완공을 예정이다. 내년 가을이나 볼 수 있겠다.
고령 반룡사 다층석탑과 동종,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사리기/국보, 석조 나한상/유형문화재, 대웅전 괘불도/보물,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와 쇠불/보물, 석조 약사여래좌상/보물,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 들을 내년엔 볼 수 있을까?
2023년 11월 16일, 오전에 직지사는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