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통일과 재통일 / 독일 통일 방식만 쳐다보지 말라|자유게시판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독일의 통일과 재통일 |
독일의 통일과 재통일
|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 독일 재통일(Deutsche Wiedervereinigung)을 이끈 베를린장벽 붕괴가 지난 9일로 25주년을 맞았다.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옛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 속하던 주(州)들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연방의 일원으로 가입하면서 통독(統獨)을 이뤘다. 국가 대 국가가 아니고, 지방자치단체가 개별적으로 연방에 가입하는 ‘지자체 연합’ 이라는 통일 형식에 눈길이 간다. 한국도 통일에 대비해 전략적인 지방분권제 정비가 필요함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90년 통독(統獨)을 굳이 재통일로 부르는 이유는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이뤄졌던 독일 통일(Deutsche Einigung)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영어로도 1871년의 독일 통일(Unification of Germany) 과 90년의 독일 재통일(German reunification)은 용어가 다르다.
흔히 독일 통일은 무력으로, 재통일은 외교협상으로 이룬 것으로 보는 경향이다. 독일 통일은 1864년 덴마크, 1866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 1871년 프랑스와 벌인 세 차례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해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통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가 ‘철혈재상’으로 불린 것도 이런 믿음에 일조했다. 이 별명은 그가 1862년 9월 30일 프로이센의 의회 격인 란트타크의 예산위원회에서 했던 연설에서 비롯된다. 당시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통일)는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이뤄진다” 고 말했다. 그는 통일 논의를 위해 1848 · 49년에 열렸던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연설과 다수결에 의존하다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것을 “큰 실수” 라고 비난했다. 여기서 언급한 ‘철혈’은 무력이라기보다 공허한 말과 주장에 대비되는, 경제력 · 군사력 등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모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호쾌한 무력보다 신중한 외교를 늘 강조했다. 군사력에서 절대 우위란 있을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언제 어떤 역습을 당할지 모르는 게 국제관계라는 이유에서다. 힘으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짓밟거나 모욕을 주는 행동은 피했다. 대표적인 것이 1866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와의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령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래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대승한 직후의 일이다. 상대가 궤멸하자 국왕 빌헬름 1세와 장군들은 보헤미아를 접수하고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에 입성하려고 했다. 이에 반대한 비스마르크는 군 사령관으로 참전하고 있던 왕세자를 통해 국왕을 설득함으로써 가까스로 진군을 멈추게 하고 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부드러운 평화’를 원했다. 상대에게 치욕을 안겨 줘 나중에 보복을 부를 수 있는 영토 병합이나 대규모 승전 퍼레이드를 삼갔다. 대신 오스트리아와 신속하게 친선관계를 복구했다. 덕분에 프로이센은 비수에 등을 찔릴 염려 없이 또 다른 통일 견제세력인 프랑스와 1870~71년 전쟁을 치러 승리함으로써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사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 직후 암살당할 뻔했다.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반대한 독일의 급진주의자 페르디난트 코헨블린트가 가까운 거리에서 다섯 방이나 총을 쐈지만 비스마르크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다. 통상 그런 위해를 당하면 분노 때문에 감정적이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억누르고 냉정하게 재상의 역할을 다했다. 우리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얼마나 냉정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가.
- 중앙선데이 제402호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201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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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과 재통일
| |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 대사 | 한국 사람들은 종종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분단된 나라가 한국과 독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도 쪼개졌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단은 굉장히 짧았다. 미군과 소련군은 1945년 12월 각각 서부와 동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다. 오스트리아는 훨씬 더 길었다. 독일처럼 오스트리아도 4개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나뉘었고, 수도 빈도 베를린처럼 4개 지역으로 쪼개졌다. 1955년에 이르러서야 영세중립을 선언하는 조건으로 통일된 상태에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통일과 독립을 얻을 확률은 한국보다 낮았다고 할 수 있다.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치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정치인들은 좌우를 떠나 통일을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앞세웠고 그 결과 연합군과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통일을 이뤄냈다.
한국도 그렇게 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해방 이후 1948년 남북한 국가 수립까지 3년 동안 한반도의 통일을 논의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도 통일 논의가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기간, 한반도에서의 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이 통일된 1990년 남 · 북 예멘도 통일했다. 남북한이 한국전쟁에서 서로 싸운 것처럼 남 · 북 예멘도 72년과 79년 두 차례 동족끼리 전쟁을 벌였다. 남북한 회담처럼 결렬됐다 재개되기를 반복한 협상을 거쳐 예멘은 자본주의 북예멘이 대통령을, 공산주의 남예멘이 총리를 하는 조건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남예멘이 북예멘보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했다. 남예멘은 94년 다시 독립하려고 했고 작은 전쟁도 치렀다.
성공한 통일 사례도 있지만 예멘처럼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일부 한국 사람은 한국을 ‘세계 유일의 분단국’ 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랍인들과 소말리인들도 여러 나라에 걸쳐 살고 있고, 쿠르드족도 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중앙아메리카의 사례도 강조하고 싶다.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 과테말라 · 엘살바도르 · 온두라스 · 니카라과 · 코스타리카는 하나의 국가였다. 하지만 1838년 내전 때 각각의 나라로 갈라졌고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중미 국가들은 시간상으로 한국보다 2.5배는 더 길게 분단돼 있는 셈이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는 한국 사람들은 들어본 적이 없을 중앙아메리카통합체제(SICA)이라는 기구의 사무국이 있다. 이 기구는 중미 국가들이 완전한 통일의 전 단계로 합의한 사안들을 집행하는 업무를 한다. 중미 의회, 통합 대법원, 각종 경제기관 등이 그 합의 사안이다. 코스타리카를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은 여권(旅券)도 같다.
영국의 통일 경험도 공유하고자 한다. 1707년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엄연히 다른 나라였다. 하지만 그해 스코틀랜드는 혹독한 경제 상황에 직면했고 많은 국회의원이 재앙적인 금융상품에 투자했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잃었다. 이것을 기회로 본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의원(귀족의 경우)들에게 오늘날 25만 달러(평민 의원에겐 절반)에 상응하는 뇌물을 제공하고 국회를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많은 스코틀랜드 의원은 국회 해산에 찬성표를 던진 뒤 국민의 폭동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했다. 시작은 이렇듯 해괴했지만 두 나라는 현재까지 통일을 유지하고 있고 최근 국민투표도 잘 넘겼다.
한국은 이런 다양한 사례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독일 방식 이외에도 다양한 통일을 향한 길이 있다. 독일의 사례는 한국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둘째, 통일 시도는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오래 협상을 해도 매우 어렵고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다. 셋째, 통일이 성공적이어도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넷째, 중앙아메리카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통합 방식도 있다. 예를 들어 남북한이 개별 국가로 존속하면서도 둘 사이의 군사적 갈등 가능성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서로 왕래할 수 있으며,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상태가 그것이다. 이 통합 방식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나는 모른다. 내가 제시한 사례들 중 어떤 것이 한반도 통일에 가장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반도 전문가들이 최대한 많은 사례들을 들여다보길 간절히 희망한다. 통일 논의에 창조적인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존 에버라드 = 전 영국 외교관. 벨라루스ㆍ우루과이 대사 거쳐 2006~2008년 주 북한 영국 대사 역임. 전 스탠퍼드대 쇼렌스타인 아태연구센터 팬택 펠로.
- 중앙선데이 제402호 |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201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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