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에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넘겼으니 이제부터는 두 달의 방학에 들어간다.
방학
강의가 없다는 것이지 본연의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고
오래전부터 미루고 미루던 원고작업도 이번 방학중에는 끝낼 예정이다.
국민학교때의 방학은 첫날 동그라미 계획표 만드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6시에 일어나고, 10시에 자는 모범 계획표
그러나 지켜지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이다.
계획표는 계획표일뿐.
국민학교 4학년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그 전까지는 조부모밑에서 지내다가 본격적인 공부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부모님이 계신 서울땅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서울은 정이 없는 삭막한 도시로 마음 붙일곳이 없는곳이었다.
그럴수록 내가 자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을 그렸다.
나의 학기는 오로지 방학을 기다리는 낙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난 시골로 내려갔다.
지금은 대구광역시가 되었지만 파회라는 아담한 동네
왜관역에서 내려 11키로를 걸었다.
낙동강 옆을 낀 긴 신작로를 따라
겨울에는 강바람이 매서웠다.
그래도 난 할머니 보는 기대에 추위를 잊었다.
그때 이야기를 몇 년전 내가 쓴 한옥이라는 책의 서문에 적었다.
겨울의 하루해는 유난히 짧다.
긴 그림자를 뒤세우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사이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쏘아댄다.
강둑 옆길로 길게 난 신작로를 걷는다.
반 년 만의 귀향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야 육 개월이라지만 그에게는 육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세월이었다.
대처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한 기차는 저녁 어스름 때 되서야 조그만 시골역에 그를 내려놓았다.
조그만 읍을 지나 인적 없는 시골길 30리를 걸어 고향집을 향한다.
그 옛날이야 탈것이 마땅찮아 시골길 30리는 당연히 걸어 다녔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집들 사이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햇살이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얼마안가 수묵처럼 어둠이 번져 신작로에서 보이는 조그만 집에서는 가느다란 등잔불이 켜진다.
그 집에는 오늘 하루 힘겨운 농사일을 마친 농부들이 군불 따끈하게 지핀 아랫목에서 편히 쉬고 있으리라.
외양간에는 느긋하게 되새김질하는 황소의 표정이
여유롭고 황소코에서 새어나오는 콧김에서 겨울밤의 추위를 가늠한다.
가끔씩 정적을 깨려는 듯 개 짓는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겨울밤은 어두운 색 만큼이나 매서운 바람에 더욱 한기를 느낀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이곳에서도 봄이 오면 따스운 햇빛이 땅속을 파고들어 꽃을 피우고
싹들은 무거운 흙덩이를 밀치고 얼굴을 내밀 것이다.
그를 반겨줄 가족들을 보고픈 마음에 반갑고 익숙하고 편안한 길을 묵묵히 헤쳐 나간다.
한걸음 한걸음 떼어서 걸어가야 할 자리를 채우지 않는 한은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
하나둘씩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린다.
대처에서는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별이 쏟아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두워진 사위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앞을 내준다.
도시의 때가 묻은 짐가방이 무거운 줄도 모른다.
희미한 달빛 아래 저 멀리 고향 뒷산의 부드럽고 넉넉한 자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지고 서너 점 지난 시간이 되서야 뒷산을 휘돌아 고향집 앞 삽짝에 이른다.
어릴 적 보던 바로 그 풍경들이다.
집 앞으로는 넓은 들을 두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 그 산 아래에 웅크리듯이 몸을 낮춘 고향집.
그가 태어났던 집이고 그를 키워준 집이다.
세월이 흘러 집은 비록 쇠락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여기에만 오면 세월을 훌쩍 넘어 예닐곱의 개구쟁이 소년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오밤중의 귀향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빠끔 열어둔 문을 젖히고 안방으로 내닫는다.
인기척에 자다 깬 늙은 할미는 어린 손자를 힘껏 껴안는다.
내 새끼 노란 내 새끼
푹 파진 할미의 젖무덤에 안긴 손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여정 피로를 잊는다.
비로소 등잔불을 밝힌 할미는 손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훑어보곤 꺼칠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오랜만에 손자를 본 할아버지도 헛기침으로 손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제서야 시장기를 느낀다.
부엌으로 달려간 늙은 할미는 손자를 위해 상을 차린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할미의 솜씨다.
어떤 잔치음식이라도,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산해진미라도 이 맛만 못하다.
방안을 둘러본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커 보이던 방이 점점 작아져가는 것 같다.
윗목에는 맹장지를 바른 분합문
아랫목에는 조그만 유리창을 내둔 머름 위의 여닫이
구들의 온기에 까맣게 타버린 늙은 장판바닥
할미가 시집올 때 해 왔다던 오랜 장롱
다음 제사를 위해 담가둔 술독과 아랫목의 메주냄새…….
이 모두가 고향집 풍경이고 냄새이다.
바깥에는 겨울의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지만 따뜻한 아랫목에 할미와 나란히 누운 손자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진다.
고향집에는 언제나처럼 아련한 추억과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첫댓글 고향의 향취가 물씬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뜰에 나가 기다란 오이 하나 따다 듬뿍 된장찍어 왼손에 들고 오른 손에 양푼 막걸리잔 들이키고 오이 씹어 트림하고픈 마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