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개 / 기 형 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
▶ 강에 끼는 자욱한 안개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읍에 처음 오는 사람이 거쳐야 할 안개의 강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 의인화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걷히지 않는 안개의 군단(軍團)과 사람들의 무감각한 습관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 맑고 쓸쓸한 아침이 드문 안개의 성역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 의인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 저녁이면 읍을 감싸는 안개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읍에서 벌어진 사건과 비정한 인심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 배경이 되는 읍의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냄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기업의 횡포에 도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미 고장은 사람이 살만한 사람이 못 된다.
▶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폐수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 역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반어 (현실에 대한 시인의 좌절과 분노가 응축됨)
▶ 창백한 여공의 얼굴과 어린 나이에 공원(工員)이 되는 현실
■ 핵심정리
․ 감상의 초점 :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환경 오염의 문제를 다룬 일종의 문명 비판시
농촌에까지 밀어닥친 산업화의 물결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환경 오염 및 점차 각박해지는 인심을 객관적 어조로 고발
․ 성격 : 문명 비판적
․ 어조 : 매연과 폐수로 오염된 농촌(읍)의 현실을 고발하는 객관적, 비판적, 단정적 어조
․ 표현 : 산업화의 미명 아래 자행되는 환경 오염과 차차 각박해지는 농촌의 인심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 특징 : ‘안개’라는 다분히 몽상적인 소재를 공장의 매연과 연결시킨 상상력이 돋보이며, 여공의 겁탈이라든가 취객의 동사 같은 사건을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기는 비정한 인심을 반어적 어조로 제시하여 비판적 기능을 강화한다.
․ 시상전개 :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 이 시는 각각의 단락이 엄청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샛강에 자욱이 낀 안개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병들어가는 자연과 인간의 실상을 병렬적으로 묘사한 뒤 마지막 단락에서 아이러니(반어)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 구성 : 병렬적, 점층적 구성
1연 : 강에 끼는 자욱한 안개
2연 : 읍에 처음 오는 사람이 거쳐야 할 안개의 강
3연 :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걷히지 않는 안개의 군단과
사람들의 무감각한 습관
4연 : 맑고 쓸쓸한 아침이 드문 안개의 성역
5연 : 저녁이면 읍을 감싸는 안개
6연 : 읍에서 벌어진 사건과 비정한 인심
7연 :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폐수
․ 제재 : 샛강 주변 공단의 안개(매연)와 각박해져 가는 인정
․ 출전 : 동아일보 (1985)
․ 주제 :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는 자연 환경과 물신주의에 빠져드는 인정 고발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환경 오염의 문제를 다룬 일종의 문명 비판시라고 할 수 있다. 농촌에까지 밀어닥친 산업화의 물결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환경 오염 및 점차 각박해지는 인심을 객관적 어조로 고발하고 있다. 공장 주변 사람들은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폐수에 무감각해진 채 이웃들의 불행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물신 사상과 이기주의의 대표적 징후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고된 노동에 시달린 여공들의 창백한 얼굴과 아이들마저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공장으로 가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는 우리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삶의 질을 현저히 향상시켜 놓았지만, 각종의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자연 환경의 파괴와 상부상조의 전통적 관습의 붕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산업화, 도시화의 폐해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소재를 사용하여 산업화의 부정적인 양상을 역설적으로 비판한 시의 기법이라든가, 안개를 의인화하여 그것이 얼마나 공단 주변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으며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드러내 보인 솜씨는 높이 살만한 것이다.
시인은 산업화의 부정적 양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 거기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이나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여공의 겁탈과 취객의 동사 사건을 '사소한 사건', '개인적인 불행'으로 단정짓는 것은 시인의 판단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감각에 대한 분노의 반어적 표현이다.
시인의 비판적 시선은 경제적 이익에만 얽매여 매연과 폐수를 함부로 방출하는 기업을 겨냥하고 있는 한편, 그러한 현실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공단 주변 사람들의 비정한 인심도 겨냥하고 있다. 제6, 7연은 그러한 현실을 전혀 과장되지 않게 그리고 있는데, '그 누구도 /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기업의 횡포에 도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이미 그 고장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8연의 마지막 2행은 가혹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여공들이 생기를 잃고 시들어 가는 모습과 아이들마저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반어와 역설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상황이 전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좌절과 분노가 응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의 소재로 사용된 '안개'가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
2. '안개'를 의인화한 구절 둘을 찾아보자.
▶ 안개의 군단,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3.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읍의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두 어절의 시구를 찾아보자.
▶ 폐수의 고장
4.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에 쓰인 수사적 기법을 생각해 보자.
▶ 반어법, 역설법
5.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자.
▶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 이 시는 각각의 단락이 엄청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샛강에 자욱이 낀 안개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병들어 가는 자연과 인간의 실상을 병렬적으로 묘사한 뒤 마지막 단락에서 아이러니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