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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전12:14 단5:25-31 마12:36
요즘 뉴스의 화두는 의대 2000명 증원에 대해 의사들의 집단이탈과 의대생들 수업거부가 이어지면서 정부와 의사협회간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 의사는 환자의 곁에서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데 저들은 지금 환자를 담보로 정부와 맞장을 뜨고자 하는 모습이다. 2000년 의약분업, 2014년 원격의료 반대, 2020년 의대 정원 확대 반대 사태 등 정부가 매번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이겨내지 못한 탓에 이번 사태가 야기된 점도 없지 않다. 이제 정부 손에 남은 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카드와 '법치주의 확립'뿐이다. 환자에게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사들의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번에도 이들에게 양보하고 구제책을 던진다면 의료개혁은커녕 철밥통을 더욱 굳건히 지켜주는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집단이탈한 전공의 1만1900여명에 대한 면허정지 사전통보가 이어지자 병원을 지켜온 의대 교수들이 잇따라 사직 의사를 밝히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면서 의료 대란은 더욱 심각해진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사 수가 1000명 당 의사 수 2.6명…‘우리나라 의대 한 학년 정원 평균이 77명인데, 독일은 243명, 미국은 146명으로 최저 수준이라며 OECD 평균보다 낮다는 것은 팩트이다. 현재 전국 40개 의대 정원은 3058명으로 지난 2006년 이후 19년째 제자리다. 의대 정원은 1998년에 마지막으로 늘었던 이후 3507명을 유지하다가 2000년 의약분업 때 의사 파업으로 정부가 의료계 손을 들어주면서 감축돼 2006년부터 19년째 3058명으로 묶여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건강보험이 처음 도입된 1977년 이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116배, 국민 의료비는 511배나 증가했지만, 의사 수는 7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며 의료 수요 증가 대비 의사 수 증가가 미미하다는 취지로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정부는 국민안전을 위해 의사수를 늘이자고 발표하자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흰 가운을 입고 졸업식장에서
1.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2.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3.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의사의 길을 걸었던 전공의들의 대규모 사직서 제출과 의료현장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마다 극단적인 의사들 반발이 돈벌이와 무관하다고 볼 국민은 거의 없다. 세계의사협회도 환자 생명은 지키면서 단체 행동을 하라고 돼있다"며 그런데 응급실에서도 나가고, 중환자실에서도 나가고 어떻게 보면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의대 증원에 찬성하거나 전공의들의 병원 이탈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보면서 하나의 기득권도 놓지 않겠다는 의사집단의 ‘민낯’을 본 여론이 좀체 의사들 쪽으로 돌아서진 않다는 것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권순만 교수는 의사수 늘어나면 의사간 경쟁 심화돼 의사들 소득 감소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반대한다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들의 ‘밥그릇’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해온 거의 유일한 의료계 인물이다. 지난달 문화방송 ‘100분토론’에선 의사의 공급 부족을 설명하면서 2019년 2억원 남짓하던 종합병원 연봉이 최근 3억~4억원까지 올랐다고 말해 의사들의 반발을 샀다. 서울대 의대 교수가 TV 토론에 출연해 종합병원 봉직의(월급의사) 연봉이 최근 3억~4억원까지 올랐다고 말한 것을 두고 여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외신도 이를 주목했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보도에서 한국의 수련의와 전공의 수천 명이 사직서를 제출한 이유로 ‘적은 의사 수’와 ‘높은 연봉’을 꼽으면서 한국 의사 평균 연봉 3억~4억원이며 1000명 당 의사 수 2.6명…‘최저 수준이라고 하면서 한국은 선진국 가운데 환자 대비 의사의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지만 한국은 고도로 민영화된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의사들의 연봉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전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대 증원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다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최근 의대 증원에 찬성하거나 전공의들의 병원 이탈에 반대하는 의사들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익명이다. ‘배신자’를 낙인찍는 의사들의 집단문화 즉 SNS나 댓글 등에서 그를 향한 공격과 비난은 일상이 됐다. 자신을 전공의로 소개한 A씨는 ‘복귀하고 싶은 전공의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게재했다. A씨는 “처음부터 정부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파업에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참여하고 있다”며 “업무개시명령, 3개월 면허정지보다 제가 속한 이 집단이 더 무섭다”고 했다. A씨는 “복귀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선후배, 동기들과 3~4년을 지내야 하는데 온갖 눈초리와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사집단의 반대를 뚫지 않으면 의료개혁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정부의 의지대로라면 미복귀자들은 최소 3개월의 면허정지 처분을 받거나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우리나라 전공의 약 1만여명이 면허가 정지되는 상황은 가능하다지만 이럴수록 환자의 생명과 국민의 건강을 인질로 한 의사들의 이런 행태에 정부는 단호한 입장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마음이다.
김정은 서울대 의대 학장은 졸업생들에게 "의사가 숭고한 직업이 되려면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직업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의식도 윤리의식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지만, 지금이라도 국민들의 신뢰를 찾고 권익을 챙기려면 스승의 충고를 흘려들어선 안 될 것이다. 한 단체의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된 의료대란은 성경말씀을 비쳐봐도 잘못된 행동이다. 대통령의 지시와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이익만을 지키겠다는 의사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실까? 의사가 환자를 돌보지 않아서 환자가 생명을 잃는다면 의사들은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게 된 것이 자신들의 밥그릇투쟁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런 무지한 자들은 언젠가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할까?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자.
(전12:14)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을 심판하시리라.(고후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국가의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시다. 내가 이렇게 하여도 어떻게 할 것인데 하는 교만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이번 불법을 저지르는 의사라면 들어야 한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른다면 누군가가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을 때 원인은 나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 아닌가?
이스라엘사람들이 읽고 있는 탈무드에는 "하나님은 부자가 인색한지 가난한 자가 불평하지 않는지 저울질 하신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같이 영혼을 달아보신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집단으로 환자들을 떠나 자기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다른 사람들도 저들과 같이 의대증원 반대에 동참해라는 의사들이야 말로 학교다닐 때부터 공부잘하였던 학생이었고 가장 치열했던 의과대학들을 통과하여 이제는 국가가 보장해주고 사회가 존경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치료해준다는 자부심과 또 경제적인 부를 누리면서 소위 1%안에 들어온 특권층이 아닌가? 이러한 특권층이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환자를 떠나고 집단행동을 한다는 것은 존경받는 의사들이 할 일이 아니라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진정한 히포크라테스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는 우선 외모와 직업에 호감이 가고 말을 잘하면 일단은 좋은 인상을 준다고 한다. 영국 시골에 얼굴도 못 생기고 공부도 못하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전교생 중에서 성적이 맨 뒤에서 세 번째였고 학적부에는 "이 학생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어렵고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 학생이 훗날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인 윈스턴 처칠이다. 윈스턴 처칠하면 신장은160cm 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총리였으며 학생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여서 처칠은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어려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는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처질이 한 명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은 것입니다. 명예를 잃은 것은 크게 잃은 것 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2. 전쟁에서 오직 한 번 죽지만은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는다.
3. 경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
윈스턴 처칠처럼 어렸을 때는 전혀 뛰어난 점도 없는데 훗날에는 훌륭한 인물이 되어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각자에게 맡겼는데 어떤 평판을 받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 책임이며 자신이 할 나름이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사사기에 입다는 그의 아버지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가지고 데려 왔는데 본처 자식들에게 구박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가 입다는 본처의 형제들로부터 쫒겨 나서 이방 돕 땅에 가서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으며 후에는 보스가 되어 기반을 잡게 되었다. 한편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로 쳐들어 왔었을 때 나라가 위급해지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하였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입다가 처음엔 거부하였지만 결국 입다는 승낙하였고 맨 앞장서서 암몬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 그는 약속을 지켰던 신실한 사람이었다.
(삿11:30-31) 30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까지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입다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무남독녀인 입다의 외동딸이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퍼하였고 마음이 참담하였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 입다는 하나님앞에 서원한대로 두 달 후에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입다는 자신에게 큰 손해가 와도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입다의 행위가 종교적이냐? 윤리적이냐를 떠나 진짜 딸을 죽여 바쳐도 되느냐? 등등 많은 의견 등이 있으나 성경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입다의 신앙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직분자는 물론이고 성도들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속을 하고도 안지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은 바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뿐입니다. 오늘만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내일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자신의 인생을 점검하면서 신실한 성도들이 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달아보십니다. 오늘은 "인생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의 말을 달아보신다
입다는 자기 딸에게 말하기를
(삿11:35)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 한 마디도 다 듣고 계시며 말한대로 행하였는가 저울에 달아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한 말도 더러운 말도 불평의 말도 하지 말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을 안지킨다는 것은 결국은 거짓말을 한 것인데 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거짓말을 한다면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중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전매특허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사주하는 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에 대해 말하기를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선악과를 먹어도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선악과를 먹어도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로 하와를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자는 거짓말과는 상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오직 거짓말만은 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아멘.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다 진리였습니다. 나를 믿으면 네 죄가 사함받는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내 죄가 사함받는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알고 계시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의 아비 마귀를 따라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짓말 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12:36)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보고를 하리라.
회계보고라는 것은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이익인지 손해인지 보고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해가 끝나면 행복침례교회 재정보고를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심판날 말한 것에 대한 회계를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입으로 말이 나오고 그 말에 의해 그 사람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말은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은 최후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가들 중에 말 때문에 낭패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자신이 성남시장으로 있었을 때 대장동 개발한 것이야 말로 단군이래 최대의 치적이라고 말하였던 그 말이 그의 정치를 옥조이고 있습니다.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어지럽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못하니 너는 실패자야"라는 말도 있으며 "이런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문제를 자신에게 찾지 않고 남에게 돌리는 사람이며 그들은 이처럼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자신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선교를 해온 분이 이런 통계를 내놓았습니다. 교도소에 온 사람들 중에 어린 시절 집에서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넌 교도소 가서 살 놈이다" "넌 하는 짓이 콩밥 먹을 짓이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운명이 부모님의 아무 생각없이 하는 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한 사람을 보면 성공한 사람은 남을 칭찬하지만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크게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성공한 자를 보면 "야! 훌륭하다. 감동적이다"하며 칭찬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성공한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기를 "재수가 좋았다느니, 누가 도와 줘서 그렇게 되었다고 폄하하거나, "어쩌다 맞아 떨어졌지",하거나 "미꾸라지가 용 되었네"하며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할 확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런 생각은 다 마귀가 주는 생각인 것을 알고 속히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거나 마음을 저울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천국도 갈 수 있고 지옥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24:12)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저울질하시는)이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시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그것을 알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했습니다.
(잠16:2)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나 주께서는 (심령) 영들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말은 마음을 달아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마음을 달아보실 때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요?
(1) 정직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정직한 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노아, 욥, 요셉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고 합니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이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창39:7-9) 7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였으나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은즉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늘 말씀하시는 것은 정직히 살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정직과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기본 덕목입니다. 정직의 반대인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거짓 말, 거짓 행동, 거짓 생활 모두 다 버리고 마음이 정직해야 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 온 세상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였고 그 무서운 홍수심판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요셉도 애굽에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가 정직했으므로 보디발은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2) 겸손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었지만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빌2:6-8)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약 4: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신을 종으로 낮추신 최고의 겸손입니다.
마귀는 사람에게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나 주님은 원래가 겸손한 분이셨으므로 겸손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의인도 겸손한 자도 악인도 있지만 악인들의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 된 것을 한번 보겠습니다.
3. 하나님의 저울에 부족함을 보였던 벨사살 왕
단5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이었지만 BC 562년에 죽은 후 바벨론 역사는 539년 마지막 왕 벨사살에 와서 메데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86년 동안 번창하였던 바벨론이었지만 갑자기 멸망하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수도는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둘러 쌓인 천연적인 요새였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폭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 사이에는 78㎢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 깊이의 수로가 벽 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으므로 바벨론 제국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 어떤 막강한 적도 감히 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수 없어 보였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볼 때 바벨론은 강력하게 보였고 또 벨사살 왕은 전쟁을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견딜 수 있었으나 바벨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을 때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는데 벨사살 왕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바벨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천명을 초빙했는데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벨사살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잠20:1)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떠들게)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그것들로 말미암아 속는 자(미혹)는 자에게는 지혜롭지 아니하니라.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 은 잔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 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벨사살은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단5:5-6) 5 바로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등잔대 맞은 편에 왕궁의 회칠한 벽에 글을 쓰는데 왕이 글을 쓰는 손의 일부를 보니라. 6 그때에 왕의 안색이 변하고 그가 자기 생각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므로 그의 허리뼈 마디가 풀리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매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툭 튀어나와서 글씨를 써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자 모두가 놀라서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벨사살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했으나 그 해석을 왕에게 해석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5:10에 보면, 바로 이때 왕비가 들어와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하는데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때부터 하나님이 함께하는 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선친 느부갓네살이 왕궁에서 쫓겨나서 7년이나 짐승처럼 살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느부갓네살왕은 내가, 나의 도성, 내 위엄의 영광같은 말을 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채는 교만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여지없이 낮추셨습니다. 왕의 교만한 말이 그 입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단4:31) 아직 그 말이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내려와 이르시되 오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이것을 말하노니 그 왕국이 네게서 떠났느니라.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백성들로부터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 털은 독수리 털과 같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짐승보다 더 못하게 낮추셨습니다. 왕은 짐승과 같이 되어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인간의 고귀함은 상실하고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제한적 육신의 자유를 갈망하여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지만 그 결과는 파멸에 이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단4:34) 그후 7년이 지났을 때 그 날들의 끝에 나 느부갓네살이 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매 내 지각이 내게로 들어오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그의 이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근거로 벨사살 왕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 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받았는데 그는 이런 하나님의 겸손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다.
다니엘은 왕의 교만을 책망한 후 글자들을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단5:25-28) 25 기록한 글은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니이다. 26 그것의 해석은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세셨다는 것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다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며 28 베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니이다.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 왕의 나라가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단5:30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62세에 죽임을 당하였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9:3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행로(길)와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고,
욥14:16에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들 일거수 일투족을 다 세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의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했는지 악한 일에 사용했는가를 계산하시기 때문입니다.
(1) 우리의 신앙을 달아 보십니다.
'데겔'이라는 뜻은 '무게를 잰다, 저울에 달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준에 미달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놓여져 있는데 그 결과 '함량미달'로 나왔습니다. 이처럼 저울에 달린 후에는 우바르신이라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이라는 말에서 '우'는 AND(그리고)의 뜻이고, '바르신'은 '베레스'라는 말의 복수형인데 '나누다'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시고 믿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섰을 때 '함량미달'이 아닌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2)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전쟁중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는데 술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음란에 취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부정한 짓을 즐기는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벨사살 왕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가장 겸손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금, 은, 동, 목석으로 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면서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나라는 나뉘어 져서 메데와 페르시야로 넘어가 찬란했던 바벨론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저울입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인지 재어보십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1) 예배를 평가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할 일들이 쌓였들지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하신 백성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지 아닌지를 평가하시므로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먹고사는 것보다 자식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배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최우선시 하면 남은 일들은 덤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열매들을 달아보십니다
(마7:18-20)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속에 던져지나니 20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셨듯이 우리들도 죽은 후에는 그분의 저울에 우리들의 삶을 측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렘17:10)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심판하신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상을 줄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지나간 노아 때의 물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함'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성적타락으로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달아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도 달아보아서 어느 분량이 차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삼상2:3) 주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므로 친히 사람의 행동을 다시는 도다.
이 말씀은 한나가 오랫동안 애타게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아들 사무엘을 얻은 뒤에 고백한 신앙 고백입니다. 기도와 구제도 분량이 차야 합니다. 행10장에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고 구제했더니,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며 주께 드리는 예배행위,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모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3) 인간의 진실함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라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또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달아보십니다.
사무엘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러 베들레헴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외식과 가식과 형식과 체면치레는 정성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 중에 하나가 외식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외식에 치우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진실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신의가 따라야 합니다. 신앙은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러러 보게 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1804)는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의 철학자이자 현대철학의 핵심인물 중 한사람입니다. 그의 일화중 하나는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폴란드 슐레지엔으로 가던 중 말을 타고 깊은 산길을 가다가 강도떼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겼습니다. "이제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속에 금 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강도들에게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몸속에 금 덩어리가 들어 있던 것을 모르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다가 몸속에 금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하고 이제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 덩어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거룩은 여전히 거룩이고,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경외하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악해지고 무서워집니다. 거짓말의 아비인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거짓말로 들려도 여러번 반복하게 들으면 참되게 들린다는 것을 마귀는 이용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계속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여도 양심이 화인맞았으므로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이런쪽에 속해있습니다. 지금 우쿠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을 보세요. 우크라인들에게 무차별 폭탄을 퍼부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이고 땅을 빼앗고 명분없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전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염려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모도, 스승도, 어른도 이제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벨사살왕도 보세요! 이 사람도 세상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되었던 잔에 감히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그 잔을 사용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루었는데 이 사람은 겁도 없이 거기다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거룩을 지니지 않게 되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벨사살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진실성이 없는 메네 메네 데겔한 함량부족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바르신이라고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마음에 거룩한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저울이 들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방종하지 않고 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들의 신앙을 달아보십니다. 우리 모두 함량미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차고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