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復活節-Easter day!
부활절과 윤회輪廻는
죽음의 공포가 만들어낸 인간의 이벤트.
우리들 대부분이 시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인간은 시간에 의해 산다.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즐겨하는 도피의 게임이다.
심리적 시간이란 생각과 행동의 간격이다.
시간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간격이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부활을 믿으며 시간을 초월한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정신적 실체, 즉 아트만atman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이 있는지의 여부를 스스로 알아낸적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생각인가?
생각을 넘어선 영속永續적이고 연속적인 어떤 것이 있는가? 만일 생각이 죽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의 장場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영속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각의 장 안에는 영속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것이 없음을 발견하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으며 그러면 거기엔 커다란 기쁨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그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죽음은 말이며, 공포를 낳는 것은 이 말이요, 이미지이다. 죽음의 이미지 없이 죽음을 볼 수 없다. 그 이미지때문에 생각이 죽음의 공포를 만든다.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합리화하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항하거나,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 많은 믿음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사이에는 시공時空의 틈이 있다.
우리는 삶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저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통과 절망이 있는 삶을 수락했고 그것에 익숙해졌으며, 죽음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 없이 살 수 없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롭게 살기 위해서 어제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는 자유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산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불완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전이 없다는 것을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움직임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부활절과 죽음에 관한 단상斷想으로 지두 크리스나무르티 글을 인용했다.
구경회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