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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2) 아시아 신학과 시노달리타스
한국교회가 아시아 교류와 연대 주도하며 복음화 희망 제시하자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은 지난 6월 7일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아시아교회의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교류와 연대’라는 대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문화와 종교가 다양한 지역에서 참가한 학자들은 아시아교회들이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시아 지역 교회는 공통으로 성직주의의 특징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평신도들이 고유한 신원을 깨닫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과연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가톨릭교회의 시노달리타스는 가능한가? 아시아 지역 교회들은 대개 가난과 문화와 종교 간의 갈등을 안고 성장에 대단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아시아 가톨릭교회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아시아교회의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려면 한국교회의 역할이 긴요한 때이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이 교회를 창립한 역사와 복음화와 민주화에 있어서 아시아교회들의 시노달리타스의 한 모델로서 복음화의 희망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 여정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톨릭교회의 선교 활동은 1549년 일본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처음 시작했고, 1583년 중국에서 마태오 리치와 미켈레 루지에리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하며 저술한 천학(天學) 서적들이 조선에 전래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천학을 접촉하며 천주교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박해 시기에 점차 중국교회와 교류하며, 현대에는 아시아교회들과 널리 연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여정은 선교 활동의 형태에 따라서 “자발적 선교 모델, 주도적 선교 모델, 수용적 선교 모델”로 구분해서 볼 수 있겠다.
첫째, 자발적 선교 모델은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하느님의 종 이벽, 권일신, 이승훈과 같은 유학자들이 천학 서적을 읽고 연구하며 토론하며 삼위일체 천주와 인간의 영혼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하여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립한 사례다. 처음에는 유학자들이 연구해서 시작한 천주교 신앙은 인간 존엄성을 깨닫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평등사상을 실천하게 했다. 이는 유교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비판과 박해를 초래했지만, 교우들은 친교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둘째로 주도적 선교 모델은 가톨릭교회가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 의식으로 활동했던 일반 선교의 모습이다. 특히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 운동과 적극적인 선교 운동을 하고 민주화에도 참여하면서 많은 입교자로 팽창하는 시기를 보냈다. 한국교회가 파견한 선교사들은 공동체가 없거나 침체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서 신앙을 활성화해 놓기도 한다. 반면 성직자 중심주의 체제와 신자들의 수동성이 굳어지는 문제를 형성하게 됐다.
셋째는 수용적 선교 모델이다. 선교사가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주도하지 않고, 현지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현지인들이 복음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방식이다. 마닐라의 가장 열악한 파야타스 지역에서 활동한 어떤 평신도 선교사는 극도로 빈곤한 이들이 주는 작은 선물을 기쁘게 받아줄 때 그들이 무척 기뻐하는 모습에서, 항상 가르치고 이끌고 베풀어야 한다는 주도적 시혜성이 아니라 수용적 선교관의 가능성을 체험했다.
삼중대화: 가난, 문화, 종교와의 대화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의 필리핀 마닐라 방문을 계기로 김수환 추기경의 적극적인 리더십으로 시작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의 주교들은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협력 방안을 모색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의 대화, 문화와의 대화, 종교와의 대화 등 삼중대화를 제시했다. 조선에서 유학자들은 천주교 사상을 수용하면서 이미 삼중대화의 경청이 시작되었으며, 그런 개념을 알지 못했지만, 복음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친교, 참여, 사명의 실천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81년 한국교회가 파푸아 뉴기니아에 네 분의 사제들을 파견한 이래 많은 선교사는 아시아 지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격려가 되고 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전통과 언어와 기후에서 정치와 사회 체제가 다르고 험난한 선교지에 적응하며 가난한 주민들과 접촉하고 도우면서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는 선구자들이다.
선교사들이 아시아교회와 교류하며 시노달리타스의 문을 열었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극소수에 그치고 한국교회 전반에 좀 더 널리 확산하여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길로 연결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선교 여정은 평신도들이 스스로 진리를 찾고 교회를 세우고, 사제와 평신도들이 서로 아끼고 협력하는 전통과 선교사들이 아시아 지역에 투신해서 신앙을 증거한 경험이 있다. 한국교회는 내부의 성직자 중심 문제에 치중하기보다는 가까운 아시아교회들에 관심을 두고 친교를 나누고 사명을 실천한다면 좀 더 활기를 찾고 성숙해질 것이다. 교회는 복음대로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발전이나 쇠퇴가 좌우된다.
연대를 위한 친교와 참여와 사명
2023년 3월 16일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가 발표한 아시아 대륙회의 최종문서는 시노드 여정이 모든 사람을 품는 포용성의 공간으로서 하느님의 성령이 작용하는 ‘천막으로서의 교회’(Church as tent) 이미지를 제시했다. 아시아교회는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포용성을 강조했다. 종교와 정치 체제가 너무나 다양한 아시아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와 종교를 포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접촉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며 함께 나아가는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미래 복음화 방향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교우들의 자발적인 신앙으로 탄생하여 인간 존엄성과 평등 정신을 조선 사회에서 실천했고, 현대에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실현하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지난 50년간 세계 여러 지역에 사제와 수도자들을 파견해 선교 활동에 적극 임했다. 한국교회사에서 발견되는 이 모든 것들이 시노달리타스의 경험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아시아교회의 일원으로서 시노달리타스 정신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실현하기 위해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도 교우들이 아시아 지역의 선교지와 접촉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길을 함께 열어가는 활동을 제안한다. 일례로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과 직암선교후원회는 가톨릭교회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교회를 창립한 이벽 요한 세례자 등 132위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원하며 아시아 선교지 133 지역과 자매결연해서 해외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속해 후원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교구와 본당에서 교우들이 아시아 지역교회의 교류와 연대를 주도하고 아시아 선교에 참여하도록 구조적, 교육적, 재정적으로 지원한다면 복음화 사명의 의식과 역량이 훨씬 더 발휘되고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3) 존 헨리 뉴먼 추기경과 시노달리타스
구성원 모두의 조화로운 일치로 ‘함께하는 교회’ 방향성 제시
신자들에게 교회의 신앙을 묻다: 존 헨리 뉴먼의 교회 이해
존 헨리 뉴먼 추기경(John Henry Newman, 1801~1890)은 19세기 영국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이고, 신학자이자 존경받는 사목자였다. 그는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며 가톨릭교회의 진리와 교회의 현대적 적응을 위해 활약했다.
89년의 생애는 부침이 심한 인생이었다. 특히 그가 살던 시대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이 꽃을 피웠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욕망을 자유롭게 펼쳤고, 교회 가르침과 기존 사회의 도덕적 규범 역시 약화됐던 시기였다.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는 학문과 사회적 분위기는 교회에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다. 그때까지 교회는 근대주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며, 새로운 환경에 맞는 교회적 쇄신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20세기 중반 제2차 바티칸공의회 때까지 지속됐다.
특히 근대의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특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이었고, 교회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신앙의 전통을 염두에 두면서 변화된 사회와 의식에 맞는 교회 문화를 창출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미 그는 150년 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관, 즉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된, 교회 구성원의 평등과 고유한 역할에 대해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교회의 시노달리타스가 뉴먼 추기경의 정신적 유산에서 기인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는 어느날 한 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며, 세대를 거치며 변하지 않은 채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깊어지고 넓어지는 강물이나 성장하는 씨앗처럼 활발한 변화의 역동 속에서, 생명체와 창조물이 다양한 모습과 의미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예컨대, 삼위일체 교리가 예수의 첫 번째 제자 그룹 안에서 완전히 성장하고 완성된 다음, 후배들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장하는 데에도,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세월이 걸렸다. 뉴먼은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중요한 교리가 결정되는 데도 늘 질문하고, 숙고하고, 논의하면서 발전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단순하게 시간이 흐르면서 여물어 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고민하는 충만한 마음의 작용이 발현되는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성직자들의 몫이 아니라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몫이라고 설파했다.
교리문제를 신자들에게 자문하기
평신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영국의 가톨릭 신앙교양지인 「램블러」의 1859년 7월호에 실린 뉴먼의 논문 ‘교리 문제에 대해 신자들에게 자문하기’(On Consulting the Faithful in Matters of Doctrine)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뿐만 아니라, 시노드 교회 만들기가 한창인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즉 함께 가는 교회를 향한 길의 주체들과 그 관계의 방향성에 대해 이미 19세기에 뉴먼 추기경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뉴먼은 교회의 일, 심지어 교리와 같은 것을 정할 때도, 그 준비 단계에서 주교단만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응당 물어야(consult)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나뉘어 이해됐다. 즉 당시 교회는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성직자와 그것을 수용하고 배우는 평신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뉴먼은 영어에서 ‘자문 consult’은 누군가와 의논한다는 용례로만 쓰이지 않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신뢰의 태도를 함의한다고 설명한다. 대중적이고 일상적 용례에서 ‘자문’은 신뢰와 경의를 나태내며 복종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권위가 어떤 사안에 관해 물어지는 사람의 의견에 귀속된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나아가 뉴먼은 ‘자문’ 혹은 ‘묻는 것’(consult)의 영어적 의미에서는 ‘판단을 청하다’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신앙이 사도 전승의 증거로서 존재하고 있기에, 주교단은 그것을 감지하고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례나 의식의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전례의 습관이나 보편성의 증인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의해 결정됨
뉴먼은 교리 결정에 있어 신자들에게 물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세례받은 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성령을 식별하는 능력인 ‘신앙 감각’에서 기인한다. 즉 교회에서는 교의결정의 준비단계에서, 교황좌는 예전부터 신자의 신앙 상태를 논외에 두는 것이 아니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자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과 신자의 동의(consensus fidelium)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시노달리타스 교회 쇄신에서 중요한 수행 주체로서 세례받은 ‘하느님 백성’이 신앙적 삶 안에서 일치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이유가 신자들의 ‘신앙 감각’ 때문이라는 의미다.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준거해 신자들에 대한 자문의 정당성을 뉴먼은 ‘성모무염시태 교리’를 예로 설명한다. ‘성모무염시태 교리’가 비오 9세에 의해 교의로 선포된 것과 관련하여, 뉴먼은 신자들의 신앙에 대해 주교들이 그들과 함께 묻고 들음으로써 이 교의가 확정됐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원래 “성모무염시태 교리”의 전례는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존재해 왔던 것이고, 교회의 판단에는 원천적으로 사목자와 지혜로 인도된 신자의 신앙이 함께 녹아 있다.
신자들은 이렇게 교도권과 함께 교회의 교리를 결정하고 교회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신앙 감각에 기초하여 교회의 사목자와 신자가 함께하는 실천·전례·기도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조화로운 일치 안에서 이뤄내는 신앙 전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뉴먼은 교도권을 정의하며, 그 중요 요소로 성직자뿐만 아니라 신자 전체 교회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의 새로운 이해와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이정표로 간주할 수 있다. 뉴먼은 신자들의 신앙교리 관련 의견에 대해서 주교에게 자문하기보다 신자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당시 놀랍고도 독창적이었다.
신앙의 문제에 대해 신자의 공통된 판단과 공유감각이 중요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맥락에서 신앙의 교의 결정에서 신자의 동의를 고려해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 요구에 뉴먼은 응답한 것이다. 시노드 교회 혹은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교회 만들기가 한참인 오늘날, 150년 전 개혁가의 치열한 고민은 여전히 울림이 있다.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4) 주교회의와 시노달리타스
중앙 집중화 벗어나 다양한 하느님 백성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와 주교회의
현재 전 세계 가톨릭 교회는 다가오는 10월 로마에서 개최 예정인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1회기에 집중해 있다. 지난 6월 21일 교황청 세계주교시노드 사무처가 발표한 제1회기를 위한 「의안집」은 2021년 10월부터 전 세계 지역 교회와 대륙별 총회에서 진행된 시노드 과정의 결실이고, 각 개별 교회는 다시 지역 교회의 특수성 안에서 「의안집」이 제시하는 질문들을 토대로 성찰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주교시노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지속적이고 순환적인 상호 소통이야말로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하느님 백성의 한 일원으로 자신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주제인 ‘주교회의’와 관련해서도 「의안집」은 시노달리타스와 주교 단체성이 충만하게 실현되려면 주교회의는 어떤 구조를 가져야 하는지 질문하고 있다.(B 3.4 참조) 「의안집」은 이 주제를 성찰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초기인 2013년에 보편 교회의 사목 청사진으로 발표한 「복음의 기쁨」을 인용하고 있다. 교황이 지역 주교들을 대신해서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이른바 ‘건실한 분권화’(16항)의 증진과 ‘진정한 교리적 권위를 포함하여 구체적인 권한을 지닌 주체’(32항)로서 주교회의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에서도 주교회의를 통해 주교 단체성의 정신을 증진시키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희망이 아직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건실한 분권화의 관점에서 이를 더욱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재차 강조한 바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래 주교회의에 대한 이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헌장」을 통해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여러 곳에 세웠던 교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집단을 이루고, 보편 교회의 단일성과 신앙의 일치를 보존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주교회의들은 비슷한 방법으로 단체 정신을 구체화하는 여러 활동들을 공동으로 펼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23항) 또한,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인 「주교 교령」은 주교직의 성사성과 단체성 개념을 명시한 뒤에(3항), ‘제3장 여러 교회의 공동선을 위한 주교들의 협력’ 가운데서 주교회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37-38항) 공의회 직후인 1966년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자의 교서 「거룩한 교회」를 통해, 주교회의가 아직 없는 곳에는 주교회의를 설립하고 주교회의가 있는 나라는 알맞은 정관을 만들도록 촉구하였고, 이를 이어받아 1983년 교회법전은 13개 조항(제447-459조)에 걸쳐 주교회의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주교회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현대 교회 안에서 사목적인 중요성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신학적 교회법적 지위에 대한 논쟁이 교회 안에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공식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2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임시 총회였는데, 핵심 요지는 주교회의의 교도적 임무 수행이 교황과 주교단, 그리고 개별 주교의 교도적 권한을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임시 총회 이후 13년이 지난 199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교회의의 신학적 법률적 성격에 관한 자의 교서’로 일단락되었다. 자의 교서에 따르면 주교회의가 단체 정신의 구체적 적용 형태라고 단언하면서도, 그것이 주교단의 지위와 성격을 혼동하게 하거나 개별 주교의 자율성과 권한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였다. 결론적으로 자의 교서는 주교회의의 유권적 교도권을 인정하였지만 그 조건은 극히 제한하고 있다.
자의 교서가 발표된 뒤로도 주교회의의 신학적 교회법적 지위를 둘러싼 논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비판자들은 이 자의 교서가 결과적으로는 사도좌 중심의 지나친 중앙 집중화를 가져와서 지역 교회의 복음 선포 노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실제로 이 자의 교서가 발표된 1998년 이후에 전 세계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사회 교리 관련 문헌들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보고도 있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한 노력은 이러한 중앙 집중화에서의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주교회의에 관한 기존의 신학적 논의가 주로 주교단과 단체성에만 주어졌다면, 이제 하느님 백성과 시노달리타스라는 더욱 넓은 신학적 배경으로 그 장이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도좌 중심의 중앙 집중적인 영향력의 가속화는 지역 교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한 주교회의의 구조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가 펴낸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주교회의의 시노달리타스 실현과 관련해서 주교회의 차원의 사목 지침 작성 과정에 신자들의 폭넓은 자문, 다양한 교회적 체험을 받아들이는 적절한 절차, 평신도 전문가들의 참여 등을 꼽고 있다.(90항) 이번 「의안집」에서도 시노달리타스 실현의 핵심 요소로서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안한 역삼각형의 교회 모습을 주교회의 안에 제도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시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는 통로를 마련하되 정기총회를 앞두고 이를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별도의 모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개최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총회에서는 각자의 교구에서 사목평의회를 비롯한 참여 기구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해 온 회원 주교들 간에 격의 없는 토론이 이어지면서 도덕적 만장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교구와 주교회의 차원의 경청과 식별 작업을 모델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주교회의의 논의 내용과 의사 결정 과정, 그리고 후속 실천 사항 등도 가능한 좀 더 충분히 공유될 필요가 있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 책임을 일깨우는 일련의 순환 과정을 통해 발표되는 주교회의의 사목 지침들은 피상성을 벗고 하느님 백성 안에서 폭넓은 지지와 적극적인 실천을 이끌어 낼 것이다. 나아가 주교회의의 이런 노력은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 등을 통해 보편 교회의 사목 정책 마련에 기여할 것이며, 보편 교회의 사목 정책 역시 지역 교회의 삶과 만나서 어떤 복음적 융합에 이르러야 할지 치열하게 숙고하게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5) 교구에서의 시노달리타스
담대하게 발언하고 경청하며 창조성 발휘하는 자문 기구 갖춰야
“보편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진 ‘개별교회들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in quibus et ex quibus) 유일하고 단일한 가톨릭교회가 존재”(교회헌장 23항; 교회법 제368조)하는 교회의 특성을 염두에 둘 때, 교회의 생활 방식이자 활동 방식인 시노달리타스는 개별교회의 차원에서 더욱 명확한 형태로 실현되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구조는 ‘모든 사람’과 ‘몇몇 사람’과 ‘한 사람’ 사이의 친교적 역동성 안에서, 즉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체적 측면과 합의체적 차원, 그리고 직무적 권위가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노드적 구조를 교구의 범위 안에 적용하면, 개별교회인 교구의 목자인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교회헌장 12항) 참여와 공동 책임의 논리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자리한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바로 ‘자문’(votum consultivum)에 있다. 국제신학위원회의 문헌에서도 언급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시노드적 삶의 쇄신을 위해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자문을 구하는 절차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5항)하다.그런데 이 ‘자문’의 개념을 단순히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자문’의 가치는 상실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교회의 의결 과정에 있어 ‘결국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 성직자에게 있다면, 자문을 해봐야 소용없는 것 아닌가?’하는 회의론이 자리한 현실이다. 그러나 “의결 투표와 건의 투표를 구별한다고 해서, 표현된 의견과 투표 결과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다만 ‘건의 투표(자문)’라는 표현은, 만일 그것을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사회법의 정신에 따라서만 이해한다면, 부적절하게 된다”(68항)는 문헌의 언급처럼, 교회에서의 자문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시노드적이고 교회론적인 시각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의 주도권 논쟁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 백성이 ‘함께 식별’한다는 것에 교회의 삶의 방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교회적 자문의 가치
교회에서의 자문 절차는 곧 신앙 감각을 모으는 과정이다. ‘신앙 감각의 수렴’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하느님 백성의 신원은 개인적 성숙이 아니라, ‘개별 신자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s)으로부터 비롯되는 신앙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적)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으로 승화시키는 가운데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 그 과정이 길어지더라도 ‘자문’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러한 신앙 감각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모으는 데에만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자신의 자리에 두도록’ 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자문은, 우리가 사회적 관념 안에서 쉽게 떠올리는 것과는 그 의미와 가치가 상이한 것이다.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차원’이 사회적 자문이라면, 교회적 자문은 ‘기도하고 경청하고 분석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조언’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와 공동책임의 과정이다. 요컨대 교회적 자문이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문제를 연구 및 검토하고 필요한 모든 생각과 의견을 모아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하는 과정’을 통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담대한 발언’과 ‘경청’의 태도가 요청된다. 모든 하느님 백성 ‘사이’에 이루는 ‘상호경청’과 모든 하느님 백성이 ‘함께’ 이루는 ‘공동경청’으로써,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식별해 가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자문절차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떠한 결정에 이르는 것은, 단순히 다수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체를 통해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뜻인 ‘신앙 감각’의 은사를 수렴하고 식별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민원 해결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기 위한 복음화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교회 자문 기구 더 활성화 돼야
교회 역사 안에서 때로 그 중요성이 잊혔을지라도 그 존재 자체는 절대 상실되지 않았던 시노드 정신을 담고 있는 제도와 기구는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제도와 기구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우선적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먼저 개별교회 안에서 제도화된 시노드적 기구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교구 시노드’이다. 교구 시노드는 시노드 정신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되는 정점에 있는 도구로서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 유지되어 오던 제도이다. 단순히 교구 설정 기념일을 전후하여 개최되는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교구 사목의 통상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교구의 개별법이나 관례에 따라서 특정한 주기마다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개별교회 안에 존재하는 시노드적 기구에는 각 평의회(사제평의회, 사목평의회, 재무평의회 등)들이 있다. ‘평의회’(consilium)라는 용어 자체가 ‘자문’이라는 것에 있듯, 시노드적 절차이자 방법론을 실현하는 ‘자문 기구’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교회적 자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 평의회들이 그 가치와 자리를 잃은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도 사회 논리에 젖어 신속성과 효율성 중심의 결정 과정만을 추구해 온, ‘가치의 세속화’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에 따라 함께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임을 주지할 때, 충분한 대화와 경청, 식별의 과정을 포괄하는 ‘자문’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더디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평의회’들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제자리 찾기’가 필수적이다.
또한 교구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자문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절차와 제도화된 구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문의 절차가 더욱 역동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그 상황에 맞추어 ‘교구에서부터 지구, 본당에 이르기까지’ 창조성을 발휘한 새로운 자문기구와 구조도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노달리타스의 토착화’이자, ‘실질적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effectiva)를 향한 개별교회의 기반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6) 본당 사목과 시노달리타스
적극적인 성찰과 나눔으로 공동체 앞에 놓인 장애물 극복해야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복음의 기쁨 28항)
대부분 신자에게, 신앙생활의 중심은 본당이고 본당이 곧 교회다. 선교, 전례, 양성, 만남, 봉사 등 교회의 거의 모든 중요한 활동을 다 포함하는 것이 본당 사목이다. 성직자가 평신도와 만나고 교회가 세상과 만나는 가장 주된 통로도 본당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교회의 길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이라면, 그것이 가장 잘 실천되고 실현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곳은 본당일 것이다.
세계 시노드 사무국은 시노달리타스를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크게 애쓰지 않았다. ‘함께 걷는 교회’의 체험을 나눔으로써 신자들이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이미 살아오고 실천했던 시노달리타스를 기억해내고 서로 나누도록 이끌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찾도록 격려하였다. 그리고 이를 더 깊이 논의할 수 있도록 10가지의 핵심 주제를 제시했다.
참가자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말을 경청했다는 사실을 가장 감명 깊게 느꼈다고 말했다. 지금껏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내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초대됐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교구, 주교회의, 대륙 회의를 거쳐 보편교회 차원에서 논의되고 그 결과가 발표될 것이다. 하지만 사무국에서 밝혔듯이 이 시노드에서 문헌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의 체험이 더 중요하다면, 우리는 문헌을 기다리는 동시에 그 체험이 잊히고 식어버리기 전에 그것을 본당과 교구에서의 변화로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구에서는 본당 소그룹에서 논의한 내용을 취합하고 정리한 후에, 본당별, 지구별로 모은 논의 내용들을 공유했다. 어떤 본당에서는 그 본당의 논의 내용을 복도에 큰 글씨로 게시하기도 하고, 사목 계획에 반영하기도 했다. 교구 경청의 날을 통해, 주보를 통해, 각종 연수를 통해 그 내용을 다시 나누고 논의했다. 그런데도 시노달리타스가 본당 안에서 잘 이해되고 실현되기에 뭔가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사제들이 이 주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본당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러면 권위주의나 성직주의 등과 연관하여 사제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주제라고 느낄 수 있다. 신자들을 존중하고 그 의견에 경청하는 것은 사목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이며, 부족하지만 사제들이 이미 많이 신경 쓰고 노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또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물론 본당에서의 시노달리타스가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본당 공동체의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며, 같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위해 성령이 바라시는 길을 함께 찾고 일하는 이상적인 지향을 사제들은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사제들은 바쁜 삶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에 대한 적극성이 부족하고, 지식과 역량이 부족하고, 제대로 양성되지 못해서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를 극복하고 함께 걸어가는 길은 험난하고 오래 걸리는 길이다. 사제도 평신도도 더 많은 것을 투자하고 더 노력하고 시행착오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본당을 책임지는 사제는 기존의 방법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모든 짐을 혼자 지고 이끌어가려고 한다. 혼자 지고 가는 것도 힘들지만, 새로운 길로 사람들을 이끌고 같이 가는 것은 더 어려울 것 같다.
사제들이 본당에서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봉사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반장을 뽑을 때도 최소한의 일만 하면 된다고 달래면서 뽑는다. 그러니 어려운 길을 함께 가자고 이들을 초대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당의 사명과 그 길을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 본 일이 없다면, 그런 역할과 자리에 초대되어 본 적이 없고 수동적인 봉사만을 요청받는다면 교회와 복음을 위한 봉사의 열망이 불타오르기는 힘들지 않을까?
평신도들은 어떤가? 시노드에 참여한 체험이 본당의 변화에 대한 희망과 열의로 연결되고 있을까? 코로나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소그룹 나눔에 참여했고, 이를 위해 본당의 사제들도 많이 협조했다. 또한 그 체험 자체에 대해서도 기쁨과 희망을 느꼈다고 많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체험이 본당 안에서 무언가를 실천하거나 변화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비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 내 생각과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교회가 경청해 주었음을 기뻐했지만, 거기서 보편 사제직과 공동 책임 등 더 깊은 주제로 연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봉사자도 자주 바뀐다.
그래서 대개 본당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사제가 해야 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의 목소리와 요청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평신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부담이 되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평신도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사제가 마련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자들 사이에서도 경청과 존중이 필요하고 교회의 사명에 대해 함께 공부하거나 나눌 수 있는 모임을 만들려고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주임 신부가 바뀌면 본당의 모든 것이 바뀐다고 불평하지만, 정작 신자들이 먼저 노력하고 준비할 것은 없을까?
사제나 평신도나 시노달리타스를 단번에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시노드의 체험이 그 시작이었다면, 뒤이어 더 깊고 넓은 성찰들이 주어지고 있고, 그것은 개인적인 성찰과 나눔을 통해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그 실현에 있어서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느끼는 벽과 장애물도 우리의 분명한 현실이다. 이것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하나씩 함께 극복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미 실천하고 노력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시노드의 여정과 그 이후에도 시노달리타스를 본당에서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지속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는 가능하면 각 본당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함께 참여하여 고민하지 않고 밖에서 주어진 방안으로는 나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7) 수도회와 시노달리타스 (상)
세속화·개인주의 등 대화와 소통 방해… 수도 정체성 이해가 우선
최근 가톨릭교회의 뜨거운 화두는 아마도 시노달리타스일 것이다. 사실 시노달리타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의 원리였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잠들었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다시 깨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된 새로움’이라 하겠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백성이 친교와 일치 안에서 경청과 나눔으로 서로 소통하며 식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면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백성은 각자의 부르심에 따른 사명 수행으로 이 여정에 참여한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경험과 좁은 식견으로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한국교회 수도회의 상황과 역할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나누어 보려 한다.
■ 수도회의 상황
한국교회 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수도회가 있고 수도자의 수도 적지 않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카리스마가 있고, 그에 따라 교회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지역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와 협력을 위한 노력, 사회 문제와 생태환경 문제 등 우리 사회와 시대의 긴급한 문제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 그리고 세상에 대한 개방과 환대를 위한 노력은 한국교회 수도회의 긍정적 측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하느님 백성뿐만 아니라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걸어가는 보편적 시노달리타스 여정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세상에서 물러남(fuga mundi)이라는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세상과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했던 점을 생각하면 분명 긍정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긍정적 측면이 많지만, 굳이 여기서 다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직면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 개인주의 문제
저출산으로 인한 핵가족 사회에서 각자의 개성과 고유성에 대한 강조, 이로 인한 공동체성의 약화는 일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이제는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우선되고 강조되는 풍조가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수도공동체 역시 다르지 않다. 수도공동체 안에 이런 개인주의 경향은 공동체성의 약화와 공동체 생활의 와해를 낳는다. 그 결과 공동체와 타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참된 의미와 중요성은 망각되고 각자 자기 건강과 행복, 자기 시간 챙기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시노달리타스의 정신과 삶을 구현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 세속주의 문제
세속주의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남들 위로 올라가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 안으로만 모으려는 것이다. 반면 복음적 가치란 아래로 내려와 남을 섬기는 것,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고 자기 밖으로 나누는 것이다. 수도자는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를 포기한 사람이다. 하지만 수도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포기한 가치를 다시 찾으려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는 격이다. 오늘날 수도 생활 안에 침투한 세속주의는 수도자 자신도 모르게 복음적 가치에서 멀어져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게 한다.
이런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경향은 시노달리스 측면에서 깊은 우려를 낳게 한다. 한국교회 시노드 여정 종합의견서(이하 ‘종합의견서’)에서도 “수도자들 가운데서는 수도자들의 세속화, 개인주의, 세대 차이 등이 시노드 정신과 삶,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종합의견서 6쪽)는 우려가 있었다.
-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 문제
한국교회 내 대부분의 수도회가 외적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다 보니, 상대적으로 내적 생활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과도한 치우침은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을 낳아 내적 깊이의 결여와 신앙과 영성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수도자의 모든 활동은 관상이 그 토대가 되고 관상의 열매로 표현되어 나올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으로 초래되는 현상들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도 수도자의 증거적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요사이 한국교회 수도회들이 너무 획일적이고 평준화된 방향과 활동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기능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적 차원에서 수도회 고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다소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든다. 외부적 활동에 참여하고 투신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교회 내 다른 공동체가 줄 수 없는 수도회 고유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놓쳐서는 안 되는 과제 중 하나는 수도자의 정체성, 소명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우리 시대 수도회의 진정한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지역교회와의 관계 문제
이는 특히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가 겪는 어려움이다. 실제 본당에서 적지 않은 수녀들이 공동체 운영과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한국교회 종합의견서에도 본당에서 “수도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때 무력감을 느끼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공동 협의의 한 주체로서 역할이 존중받기를 희망하였다”(종합의견서 8쪽)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어려움은 수도자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 부족에서 올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수도 생활과 수도자의 소명에 대한 사목자의 이해 부족에 기인하기도 한다.
종합의견서의 다음 내용은 이 문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하다. “오늘날 많은 본당에서 수도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문만큼 교회 안에서 수도자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고 수도자들이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쇄신의 여정이 요청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수도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회 전체가 쇄신하는 이 여정에서 수도자들이 앞장서는 모습을 통해 성령의 활동이 역동성을 발휘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종합의견서 6쪽)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3일,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8) 수도회와 시노달리타스 (하)
복음적 공동체 보여주고 영성 심화 이끄는 것이 수도회 역할
수도회의 역할
극단적 개인주의로 인해 가정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공동체가 무너져 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참다운 공동체를 재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이 일이 바로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해야 할 일차적 역할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에 묘사된(사도 4,32-35)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을 삶으로 증거하며 이 여정에 참여해야 한다. 수도회는 초기교회 공동체를 본받아 친교와 일치를 이루며 경청과 나눔을 통해 하느님 뜻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친교와 일치의 모델
수도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Unum in Christo)로서 형제적 사랑으로 충만한 친교와 일치의 공동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수도생활 안에 만연해 가고 있는 개인주의와 세속주의다. 개인의 개성과 고유성만을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무시할 때, 모든 것을 세속적 가치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때, 수도원은 그저 독신자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수도공동체는 공동 목표와 공유 비전을 가지고 있다. 결코 각 개인의 이상이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장(場)이 아니다.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려 노력하는 공동 수행의 장이다. 공동체 친교와 일치를 방해하는 개인주의와 세속주의는 우리 시대 수도회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당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 나갈 때 수도회는 친교와 일치의 공동체 모델이 될 것이다.
- 소통의 모델
수도공동체는 소통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소통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대화에는 경청과 열린 나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전제된다. 소통은 수직적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평적 쌍방통행이다. 종합의견서에서도 말한다. “소통의 수평적 구조를 위한 필요성과 실행에 대해 주목했는데, 특히 담대하게 말하기(parrhesia)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종합의견서 4쪽) 권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잘못된 행사는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모든 일에 있어 일방적이고 독단적이게 한다. 권위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권위주의는 권위의 그릇된 인식의 산물이다.
성 베네딕토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스(장상)는 공동체 전체를 소집하여 형제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심사숙고하여 더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행하라고 권고한다.(「규칙」 3,1 참조) 이는 수도승 전통의 스승과 제자 관계, 즉 가르치고 명령하는 스승의 절대적 권위와 듣고 실행하는 제자의 순종 관계를 뛰어넘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베네딕토의 이 가르침을 염두에 둘 때, 수도회는 참된 소통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경청의 모델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열린 대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차단된다. 특히 윗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경청의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의 토대와도 같다. 종합의견서는 경청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현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교회 안의 다양한 관계에서 듣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대한 동반자적 인식과 믿음의 부족이 경청의 부족으로 이어진다고 진단되었다.… 특별히 경청이 요구되는 그룹이 바로 성직자와 수도자이다.”(종합의견서 3쪽)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수도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수도자는 ‘말하는 자’라기보다는 ‘듣고 실행하는 자’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과 인격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의 정신과 가치를 드러내려 노력해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복음을 희망과 위로를 주는 기쁜 소식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하느님 뜻을 찾는 모델
베네딕토는 말한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이 영광 받으시게 할 것이다.”(「규칙」 57,9)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한다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면 ‘공동 식별 과정’이 필수다. 그것은 한 사람이나 소수의 일방적인 식별과 결정 과정이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식별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다양한 소리와 관점을 듣고 수렴하여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가는 것이다.
일각에선 시노달리타스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단순한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베네딕토는 결코 다수결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말하고 있지 않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에 앞서 아빠스가 여러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참조하여 결정하라고 한다.(「규칙」 3장 참조) 여기서 강조점은 ‘경청’이라 할 수 있다. 또 아빠스 선출에서도 단순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가 아님을 볼 수 있다. “전 공동체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사람이나 혹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보다 더욱 건전한 의견을 지닌 공동체의 일부가 선출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규칙」 64,1) 비록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견이라면 이것을 채택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수’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이런 바람직한 모델이 되는 것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의 또 다른 역할일 것이다.
- 영성의 모델
지난 5월에 방한하여 강연한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현재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 개혁은 단지 교회의 제도적 구조를 새롭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성의 심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영성의 심화를 거치지 않는 한, 머지않아 대부분 교회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는 최근 우리말로 출간된 「그리스도교의 오후」(분도출판사·202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성은 살아 있는 신앙으로 (교의적 측면의) 지적 성찰과 신앙의 제도적 표현보다 앞선다. 영성이 그것들을 초월하고, 이따금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되살리고 변형시킨다. 신학적 사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교회 개혁을 이끈 자극들 대부분이 영성의 중심부에서 비롯되었다.”(226쪽) 영성은 교회 개혁의 원동력이자 그리스도인 삶의 토대다. 깊은 영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교회 개혁과 쇄신, 그리스도인 삶과 활동만이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회는 영성 심화를 위한 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상이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한국교회 수도회가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즉 친교와 일치, 소통과 경청,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을 통해 복음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영성 심화의 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10일,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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