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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까리따스수녀회 (상)
창설과 한국진출
"선교는 까리따스회의 사명이며 나의 생명입니다"
까리따스수녀회의 창설자인 안토니오 가볼리(1888∼1972) 신부의 삶과 소명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가볼리 신부는 예수 성심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고, 이를 위해 1937년 일본 미야사끼에 '까리따스수녀회'를 설립했다.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인 가볼리 신부는 1926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의 영향으로 경제는 점점 피폐해져갔으며, 사회 전체가 극도의 긴장과 궁핍에 시달렸다. 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는 했지만 거의 소멸된 상태였고, 불교에서 파생된 일본 특유의 여러 교파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야사끼의 본당에 발령을 받은 가볼리 신부는 직접 발로 뛰며 사람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보면서 복음선포보다는 굶주림과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1932년 미야사끼에 최초의 양로원 수용시설인 '구호원'을 설립하고, 신앙심 깊은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애자회'를 만들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당시 장상이었던 빈첸시오 치맛티(가경자) 신부로부터 "애덕사업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수녀회를 설립하라"는 권고를 받고, 1937년 8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미야사끼에 까리따스수녀회를 설립하게 된다.
한 수도회에 속한 수도자가 새 수도회를 세우는 것은 힘든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가볼리 신부는 주님의 뜻에 따르는 철저한 순명정신으로 '애덕(까리따스)'을 실천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둥지를 틀게 됐다.
이렇게 설립된 까리따스수녀회는 고아원, 양로원, 유아원 등을 운영하며, 전쟁귀환자, 전쟁고아, 노인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다. 이어 1951년 본부와 수련원을 미야사끼에서 도쿄로 옮기고 본격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가볼리 신부는 "온 세상을 두루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 7)는 말씀에 따라 회원들이 예수 성심의 도구로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직에 헌신하기를 열망했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 까리따스수녀회 영성의 큰 줄기를 이룬다.
무엇보다 예수 성심의 사랑을 전하려는 가볼리 신부의 뜨거운 선교열의는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는 선종할 때까지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힘쓰면서 1956년 한국에 선교수녀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남미의 볼리비아, 브라질로 선교수녀를 파견하며 선교활동에 힘썼다. 그 이후에도 회원들은 창설자의 뜻을 이어받아 페루, 이탈리아, 독일, 파푸아뉴기니, 호주, 미국, 필리핀 등지에서 선교활동과 교포사목을 펼치며 예수 성심의 사도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국진출
1956년, 까리따스수녀회는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헨리 대주교에게 선교수녀 파견을 청했고, 현대주교가 승낙함으로써 수녀회의 한국 진출이 이뤄지게 됐다.
표 알로이시아, 고 비르짓다, 최 알비나 한국인 수녀 3명이 광주 남동성당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전남 나주수녀원에서 최초의 지원자를 받음으로써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1959년 광주 학동에 본원과 수련원을 세운데 이어 61년 8월, 광주 북동성당에서 현 대주교 주례로 첫서원 미사를 봉헌하고, 한국진출 5년만에 7명의 서원자를 냈다.
현재 까리따스 회원들은 12개 교구의 71개본당(2002년 1월 현재)과 미국, 호주 등지에서 본당활동과 교포사목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1986년에는 한국관구에서 처음으로 파푸아뉴기니에 선교수녀를 파견했다. 현재 한국관구에는 499명의 서원수녀와 50여명의 예비수녀들이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월 27일, 박경희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까리따스수녀회 (중)
영성
까리따스수녀회의 영성은 예수성심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까리따스(Caritas)를 실천하는 삶,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 바탕을 둔다.
까리따스수녀회 수녀들은 하느님께 대한 봉헌을 통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자비로운 사랑을 살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근본 정신은 회헌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면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마음의 무한하신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서 실현된다. 따라서 까리따스수녀회 수녀들은 주님 성심의 사랑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고자 한다"(회헌 2조).
까리따스수녀회 영성의 큰 줄기는 성 요한 보스코의 그리스도교적 낙관주의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애덕과 자비로 이루어져 있다. 살레시오 가족의 일원인 까리따스수녀회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서 발원하여 성 요한 보스코를 통해 설립자 돈 가볼리와 돈 치맛티로 이어지는 살레시오 가족의 사명을 시대와 장소에 알맞은 방법으로 실현한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라든가, 더 나아가서 사도적 활동의 효과를 위해 "대상자들로부터 사랑받도록 하라"라는 성 요한 보스코의 말처럼 자발적이고 흘러넘치는 신앙과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이, 병든 이, 무력한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살레시오적 특성 안에서 까리따스수녀회의 영성인 예수성심과 성체에 대한 신심을 강화하고 대상자의 범위를 넓혀 청소년뿐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적 사랑을 실천한다. 다시 말해 수도회의 탄생 배경인 살레시오적 영성을 가지고 빈첸시오적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원들은 이 두 가지 영성을 일치시켜 예수성심의 사랑을 살고, 그 사랑의 증거인 성체를 삶의 중심으로 하며, 까리따스수녀회의 실천을 돕는 정결,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으로 청빈을 실천한다. 또한 노동과 절제로 '까리따스'를 완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한가족으로서 자매적 사랑을 살아간다.
성무일도를 바치며 하루를 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와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 끊임없이 일치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기는 회원들은 '활동과 관상의 조화'를 넘어서서 '활동 안의 관상'을 추구한다. 단순히 이웃을 돕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고 살아가는 예수성심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도적 활동 안에서 그 사랑을 관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로서 까리따스수녀회의 고유한 기도의 하나인 '사랑의 메시지'를 들 수 있다. 이는 수녀회의 영성을 함축하고 있는 6개의 성서구절을 각자가 하루 중 적절한 시간에 하나씩 기도로 바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기도는 예수성심의 사랑을 성서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 안에서 묵상하고 찬미하면서 낮기도로 바치는 '예수성심 기도'이다. 이렇게 회원들은 예수성심의 사도로서 말씀의 선포와 섬김을 통한 자신과 이웃의 복음화를 생활 안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예수성심의 사랑을 살아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2월 3일, 박경희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까리따스수녀회 (하)
사도직 활동
선교열의에 가득 찼던 설립자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는 시대와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현대적 수단을 동원해 선교활동에 임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까리따스수녀회는 설립 초기 주된 사도직 활동이었던 방문선교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복음선포의 장을 넓히기 위해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면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여왔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까리따스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은 본당, 해외선교, 사회복지, 의료, 교육, 출판사업 등 그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특히 그 가운데 까리따스수녀회에서 중점을 두는 활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사회복지사도직과 본당사도직을 들 수 있다.
까리따스수녀회가 1956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처음 시작된 본당사도직 활동은 현재 12개 교구 71개 본당(올 1월 현재)에 수녀를 파견하는 등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하는 직접적인 복음전파의 현장으로 성장해왔다. 특히 수녀회 설립 초기부터 행해왔던 가정방문은 개별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쉬고 있는 신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들을 본당의 신심단체와 연결시켜줌으로써 도움을 주는 등 효과적인 선교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까리따스수녀회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말씀을 행하기 위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사회복지활동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6년 광주에 성요셉 양로원을 개원한데 이어 87년 갈 곳 없는 아이들의 보금자리인 목포 '경애원'의 운영을 맡았다. 이어 91년 가난한 환경의 청소년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서울 마포구청에서 건립한 '청소년 두리나눔터'의 운영을 맡아 청소년에게 건전한 놀이문화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또 서울 까리따스방배종합사회복지관, 잠실종합사회복지관, 양재복지관을 운영하며 노인학대문제, 알코올치료 등에 관한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앞서 까리따스수녀회는 1974년 9월 독일 가롤로 보로메오수녀회로부터 순천에 있는 '성 가롤로의원'을 인수한 후,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의료복지에도 힘써오고 있다. 현재 성 가롤로 병원은 700병상 규모의 정신과 병동, 노인전문 병동, 말기암환자의 임종간호를 위한 호스피스병동, 심혈관센터 등을 갖춘 지역 최대의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특히 까리따스수녀회의 잘 알려진 현대적 선교방법의 하나로 월간지 '생활성서'를 통한 출판사도직이 대표된다. 사회홍보수단들을 개척해 시대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설립자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1983년 9월 창간된 '생활성서'는 신자들의 영성, 신앙생활 뿐 아니라 선교에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또한 성서사도직 활동으로 '생활성서' 뿐 아니라 성서교재인 '여정'을 보급하는 한편, 1999년 서울 노원구에 '생활성서 문화센터'를 열어 '여정' 입문과정, 쓰기성서강좌, 성서통독 강좌 등 말씀을 맛들이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까리따스수녀회는 1986년 한국진출 30주년을 맞아 파푸아뉴기니에 5명의 선교사를 파견한데 이어 92년 7월 수도 포트 모레스비에 '까리따스 기술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아울러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강조한 요한 보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라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교육사도직에도 임하고 있다. 현재 까리따스수녀회는 서울 성요셉유치원, 광주, 나주, 제주 까리따스유치원을 비롯해 광주 성요셉어린이집, 서울 까리따스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상)
창설과 역사
"이웃과 같이 웃을 수 있는 동정이 있고, 타인을 보살펴주는 일에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남이 먹도록 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행복이 우리에게 있으리라"(1963년 8월 인보회지 '내 재산은 극빈자, 병자들이다' 중에서)가진 것 없고 돌보아줄 이 없는 이들,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을 한가족으로 껴안은 인보성체수도회 수도자들. 그래서일까. 전주 시내 한켠에 자리잡은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에 들어서자 여느 평범한 가정집 안방에 들어온 것 마냥 편안함이 풍겼다. 수녀들도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르며 가족애를 나누고 있었다.
인보성체수도회(총원장=박승애 미카엘라 수녀)의 시작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윤을수(라우렌시오, 1907~1971) 신부는 경기도 부천에 골롬바사(社)를 설립하고 전쟁고아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것이 윤신부가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든 첫 계기였다. 또한 그는 더욱 적극적인 사회복지사업을 펼치기 위해 인보성체수도회를 창설하게 된다.
1932년 사제품을 받은 윤을수 신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제였다. 그는 학위 취득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문화원 교수를 역임,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현재 가톨릭대학의 전신) 학장을 맡으며 국내외에 그 학식을 떨쳤다. 특히 한국어판 '준주성범'을 발간하고 많은 호교 논문과 성서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학자신부로서의 길을 걷던 그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복지사업에로 뛰어든 것은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도 서울에 남아서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지하교회를 이끌고 있던 윤신부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관심은 자연히 버려진 고아들에게로 모아졌다. 1953년에는 한국 가톨릭 사회사업협회(Caritas Coreana, 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의 전신)를 설립,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윤신부가 더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사업에 나서게 된 것은 1956년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사업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부터였다. 유럽 선진 국가의 사회사업이 양로원 보육원 무료급식소와 같은 형태의 자선사업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복지 및 개발 위주의 사회사업으로 전환되는 모습은 큰 감명을 줬다. 그는 자선사업이나 소규모 시설 사업의 형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 사회사업도 광범위한 사회복지사업으로 전환돼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19일 골롬바사 내에 사회사업 전문인재를 양성하는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곳의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사업과 함께 전교활동도 할 수 있도록 교리신학, 윤리신학, 전례, 영성신학, 교회사, 라틴어, 종교음악 등의 과정을 수료했고, 주말에는 보육원, 산간벽지 등에 나가 현장 실습을 했다. 윤을수 신부와 당시 정부는 장차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대학으로 발전되길 기대했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구산후생학교 내에 수도 성소자를 중심으로 수도반을 별도로 편성해 인보성체수도회의 회원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도회는 1958년 6월 5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서울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고 같은 날 24명이 첫 서원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2월 24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중)
영성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여야 한다"(요한 13, 14~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6)인보성체수도회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루가 10, 30)들에게 인보의 덕을 실천하는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협력함으로써 시대와 지역교회 요구에 응답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인보성체수도회 회헌 1장 2절).
인보성체수도회의 수도생활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서 이어진다. 수도생활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성은 성체성사의 나눔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신, 또한 우리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그 모습이 수도생활의 표양이 된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요구호자(要求護者)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인보정신이다.즉 인보(隣保)정신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환자들을 물질로써만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무엇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 무릎꿇고 발을 씻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것의 여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주인으로 받들어 돕는다. 더불어 그들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이 인보사상의 핵심이다.
발을 씻어줄 대상은 도움을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이 된다.
창설자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는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형제, 자매라는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모두가 평등하며 인격을 존중받을 대상이라는 것이 사회복지사업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수도회의 가장 큰 이웃사랑 실천은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윤을수 신부는 사회사업은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업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사랑이 있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윤신부는 무료급식,겲渶?보육원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는 소규모 시설 위주의 자선사업적 사회사업에서 벗어나, 인권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생활력이 없는 이들이 국가 등을 통해 생활력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내포하는 적극적인 사회사업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복음말씀을 들려주지 못하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급선무로 필요한 것이 전교사업을 보조할 수 있는 사회사업가 또는 전도사의 양성기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견지에서 사회사업을 전교의 보조사업의 위치에 두면서 이를 실천할 기구를 조직하고자 하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보였다. 윤신부는 이 과제를 교황청 본부 천주교 사회사업 국제연합회에 호소했고, 1956년 한국 최초로 사회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윤을수 신부는 수도생활의 규칙을 마련하면서 특히 수도자의 잘못된 특권의식을 버리도록 했고, 수도복이나 규칙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도복도 굳이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수녀들의 바람으로 수도복을 마련하게 됐다. 또 회원들 서로간에는 '언니'라고 호칭하여 한국적이며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서로 지내게 했다. 이는 당시 수도자들에게는 획기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3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인보성체수도회 (하)
사도직 활동
인보성체수도회의 사도직활동은 특별히 한계를 지우고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 모두 수도회의 활동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관계없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될 수 있다.
수도회 설립 당시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후 창설자 윤을수 신부가 나환우 보호시설인 '성 라자로 요양원(현 라자로 마을)'원장을 맡으면서 함께 활동했고, 사제가 없는 도서지역이나 공소로 수녀를 파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에는 교리를 가르쳤다. 또 지역사회복지를 위해 개간·간척사업도 함께 했다. 그때는 본당신부가 없는 곳에 수녀를 파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수도회에서는 사목적 혜택에서 소외되기 쉬운 오지의 이웃을 먼저 선택함에 있어 망설이지 않았다.
70년대 들어서는 교리교사로서의 임무가 큰 몫을 차지했다. 당시 전국 교사들의 반 이상이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었다. 80, 90년대에는 선교사들에게 이 자리를 내어주고 주로 어린이 교육과 여성복지를 위해 노력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학교 등의 운영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늘려갔다.
수도회의 활동은 해외 선교에서도 발빠른 모습을 보여왔다. 196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경로수녀원에 수녀를 파견한 이후 양로사업과 보육사업 등을 위해 미국 엘가온에 분원도 설립했다. 특히 인보성체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1989년 4월 페루에 선교수녀를 파견, 현재 원주민 직업학교와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 미국과 독일에 수녀를 파견한데 이어 80년대 말부터 일본 교포 양로원과 미국 위치타 교구 양로원에 회원을 파견하는 등 해외선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 북한 선교를 위한 수녀 양성 등에 힘을 싣고 있다.
현재 인보성체수도회에서 가장 큰 관심과 활동을 보이고 있는 부분은 노인과 장애인 복지. 사회변화와 지역사회의 필요에 응답해 기존의 성모 조산소는 무의탁 할머니들의 보호시설인 인보의 집을 변경, 운영하고 있다. 또 90년대 이후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인 '성 요한의 집', 행려자 보호시설인 '사랑의 집', 양로원 '인보마을', '인보노인종합복지관' 등을 마련해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10여년 전부터는 신앙의 약화를 심각하게 우려, 신앙을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가정의 성화를 위해 특별한 관심과 활동을 보이고 있다. 수도회에서는 칠레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가정 교리를 도입, 우리 문화와 정서에 맞게 연구개발해 각종 책자 등을 펴냈다. 또 가정교리관련 책 발간과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가정에서 전담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주말 프로그램 등을 펼칠 수 있는 청소년 교육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며, 각종 프로그램도 개발 연구 중이다.
현재 인보성체수도회는 종신서원자 300여명, 유기서원자 60여명의 회원(2000년 말 현재)이 각종 교육과 사회사업을 비롯해 13개 교구 72개 본당, 국외 3개 본당에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보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회사업과 복음전파에 힘을 다하는 인보성체수도회.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 평등하고도 성숙된 삶을 꾸려나가는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노력과 희망이 공동체의 기도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살레시오 수녀회
역사와 사도직
교회 안팎에서 '청소년을 위한 삶', '청소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삶'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 살레시오 수녀회는 성 요한 보스코(St. Giovanni Bosco, 1815∼1888)의 청소년 사랑을 뿌리로 하고 있다.
오는 2007년으로 한국 진출 반세기를 맞는 살레시오 수녀회는 이 땅에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수도회로 굳건한 위상을 구축해가고 있다. 이는 수녀회 창립의 씨앗이 뿌려졌던 180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산업화로 인해 인구의 도시 집중현상이 심각하던 이탈리아 토리노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노동자들과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아픔이 실재하고 있었다. 이런 가난한 어린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이가 살레시오 수녀회 공동창립자인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St. Maria Domenica Mazzarello, 1837∼1881)였다.
1864년 돈 보스코와 마자렐로의 만남으로 싹이 트기 시작한 수녀회는 1872년 8월 5일 마자렐로를 비롯한 11명의 여성들이 서원을 함으로써 전세계 소녀들을 향한 교육사명의 닻이 올려지게 됐다. 마자렐로 성녀는 여성 고유의 스타일로 청소년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충실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살레시오 수녀회가 뿌리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살레시오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7년 4월 24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일본관구에서 파견된 5명의 수녀가 서울 도림동본당에 정착하면서였다. 이어 1961년에 광주교구장의 요청에 따라 살레시오 여자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와 초등학교 등을 차례로 설립함으로써 학교와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교육활동의 돛을 펼치게 된다.
1970년부터는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근로여성들을 위한 기숙사를 열어 젊은 여성들의 교육의 터를 일구는가 하면 1980년부터는 교구 교육사목의 일선이라 할 각 교구 교육국과 본당 사도직에도 수도자를 파견, 교회 안에서 활동영역을 넓혀 오고 있다.
특히 돈 보스코 성인 서거 100주년인 1988년 결손가정 소녀들을 위해 '신월동 나자렛집'을 시작으로 전남 대전 광주 부산 등지에 연 '나자렛집'은 청소녀들의 가정 공동체로 위험에 처한 청소녀들에게 한발 더 다가서 수녀회의 위상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청소년 문제가 새롭게 부상한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가출소녀나 학교생활 부적응 소녀들의 학업 및 직업교육을 위한 직업보도시설 마자렐로 센터를 비롯해 자원봉사센터, 복지관, 종합사회교육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마련해 청소녀들에게 올바른 영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을 위한 다채로운 활동을 기반으로 살레시오 수녀회가 운영하는 크고 작은 시설은 광주광역시 청소년수련관 등 8개의 청소년 수련시설을 비롯해 살레시오여자중·고등학교 등 10여개의 학교, 마자렐로센터와 한빛종합복지관 등 10개 복지시설 등 전국적으로 50여곳에 이르고 있다. 나아가 그동안 축적해온 역량을 바탕으로 1983년 에티오피아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가봉, 앙골라, 마다가스칼, 케냐, 토고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활발한 해외선교 활동을 펼치며 살레시오회 교육사명을 실현하고 있다.
지난 1985년 1월 한국진출 28년만에 정식관구로 승격된 살레시오 수녀회는 현재 154명의 종신서원자를 비롯, 유기서원자 51명 등 250여명에 이르는 수도자들이 '청소녀들을 위해 현존하는 교육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수도회의 손길을 더욱 넓혀나갈 계획이어서 청소년들에게는 물론 교회와 사회 전체에 희망의 전령이 되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상)
창설과 한국진출
1877년 1월 6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짐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의 전교자'라는 이름을 주면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Franciscan Missionaries of Mary)는 이 땅에 태어났다.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여자수도회로서 오늘날 국제적인 수도공동체로 자리매김하는데 겨자씨 역할을 한 사람은 수녀회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다.
1839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렌 드 샤뽀땡은 열두살 되던 해, 아버지의 동창인 샨스 주교로부터 미국 미시시피주 인디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전교자'의 꿈을 키워왔다. 수도성소의 부름에 따라 21세 때 글라라회에 입회한 엘렌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단순정신을 체험하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서 관상성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병으로 인해 수도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그녀의 열망은 1964년 '마리아의 속죄회' 입회를 가능케했고 이 때 마리 드 라 빠시옹(수난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당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곧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됐고 여학교 기숙사, 고아원, 의원 등을 설립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을 불태워갔다. 이같은 선교열정과는 달리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선교와 공동생활을 갈망한 결과 '마리아의 전교자'로서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탄생하는 기회를 맞았다.
1877년 총장으로 선출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 영성의 뿌리를 내려온 수도회의 보호 아래 수도회를 두고자 프란치스꼬 성인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는 1882년 10월 4일 프란치스꼬 수도3회에 가입했다. 이로써 수녀회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 받아 '마라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라는 명칭으로 수도회명을 변경하고 1890년 7월 17일 최종승인을 받았으며, 1896년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창립 석달만에 프랑스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스리랑카, 중국, 영국, 스위스로 진출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선교의 수도사명을 실천해나갔다. 1904년까지 전세계 26개국에 3000여명의 수녀들이 파견돼 학교, 병원, 무료 진료소, 검역소, 기숙사, 양로원 등 지역에서 필요로하는 사도직을 실천하면서 마리아의 전교자가 됐다.
이들의 세계선교는 일찍이 1886년 중국으로 진출했다가 순교한 7명의 수녀들에 의해 검증되고 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순교한 예수의 마리아 에르민 수녀를 비롯해 7명의 수녀는 46년 교황 비오 9세의 의해 시복됐고,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73개 국적을 가진 8000여명의 '마리아의 전교자'들은 1958년 한국교회에도 뿌리를 내렸다.
58년 6월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 수녀 6명을 포함해 11명의 수녀가 당시 부산 대목구장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게됐다.
성모여자중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머물고, 그들을 위한 활동에 힘써왔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을 거쳐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78년 관구로 승격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는 30여명을 선교의 첨병으로 전세계 각국에 파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며 마리아와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실천해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24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중)
영성과 사도직 활동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전세계적인 국제 수도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영성의 원천이 된 것은 조건없이 「예」 하는 마리아의 순종적인 자세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작은 자」의 정신이다.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글라라 수녀회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단순, 복음정신을 배웠으며, 속죄회에서 선교활동 동안 전교자로서의 사명을 깨달았다.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의 이같은 체험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영성의 근간을 이뤘고, 그녀는 회원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세상의 구원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며, 매일의 성체조배를 통해 선교활동에 필요한 힘을 길러내고 있다. 즉 선교의 도구가 되기 위해, 또한 하느님의 조력자가 되기 위해 회원들은 제물자, 전교자, 조배자로서의 하나된 삶을 살아간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성모님의 모범은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와 그의 뜻을 잇는 회원들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여기 있나이다(Ecce), 그대로 되소서(Fiat)」라는 성모님의 자세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십시오」라는 창설자의 정신을 실천케했고, 이것은 곧 수녀회의 사도직 사명인 선교로 드러나고 있다.
평화의 도구로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또한 수녀회를 지탱하는 큰 힘이다. 따라서 회원들은 그 영적인 힘을 바탕으로 진정 「작은 자」로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프란치스코적인 가난정신으로 복음적인 형제생활과 간단한 생활양식 안에 복음전파에 온전히 순응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며 살고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선교적 소명에 따라 특히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 다른 전교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해 복음을 전파했다.
세계선교를 위한 수도회의 사명은 한국에서도 예외없이 81년 프랑스와 컬럼비아 선교를 시작으로 미국, 에콰도르, 페루, 가나, 이디오피아, 아르헨티나, 리비아 등으로 34명의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 치중해온 사도직 활동은 교육 · 의료사업 · 사회복지분야다. 수녀회 입국 초기에는 성모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 60년에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내 「성모의원」을 개원했다. 이에 따라 수녀회는 15년간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해왔고 이후 폐쇄했다. 이듬해에는 강원도 정선에 「성 프란치스코 의원」을 개원해 역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데 힘을 다했다. 수녀회는 초창기부터 오랜 시간 동안 일반 진료는 물론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는 등 의료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90년대 들어서도 한국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역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사도직활동으로 대신해왔다. 특히 행려자·무의탁 노인·근로자·여성복지, 도시빈민, 농촌, 탄광 지역에서의 활동을 넓혀왔다. 인천, 서울, 강원도, 전라도, 대구, 경북 등지의 본당에 파견된 회원들은 본당사도직 또한 지역사회에 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7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하)
사도직 활동
1954년 한국에 진출해 교육, 병원사업을 펼쳐왔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사도직은 크게 해외선교, 행려자, 무의탁 노인복지, 근로.여성복지, 지역민들을 위한 종합복지, 도시빈민.농촌.탄광지역민들을 위한 복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수도회는 지난 91년부터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에 「정하상 바오로의 집」을 시작으로 천호동본당 근처의 「강동 프란치스꼬의 집」, 안동의 「요셉의 집」 등을 운영, 행려자들과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오고 있다. 또한 수도회는 사회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던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지난 92년부터 경기도 광명시에 「글라라의 집」을 마련,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모시고 있다. 수도회는 작은형제회가 운영하는 프란치스꼬 요양원과 산청 성심원에도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다.
여성 및 근로자들을 위한 복지에도 투신해온 수도회는 서울 구로공단 내 위치해 지역사회의 필요에 부응하고자, 지난 77년 수도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단 여성 근로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설립했다. 이에 따라 근로자들의 숙식은 물론 영어회화, 성서공부, 풍물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그들의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줬다. 또한 사회악으로 만들어진 매매춘 여성들을 보살피기 위해 천호동 윤락지대에 「소냐의 집」을 마련해 그들의 결혼, 취업 등을 알선하며 사회복귀를 돕고 있다. 이와 함께 가출청소녀들의 단기보호소 「희망의 샘」 쉼자리도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어려운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이들을 위해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통해 학업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 수도회는 지난 96년부터 부산교구 위탁으로 부산 당감 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복지관에서는 가정, 아동, 청소년, 장애인, 지역복지 전반에 걸친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무료진료실과 생활보호 대상자 및 영세민을 대상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점심식사를 제공해주는 무료 급식소, 법률 상담소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80년대부터 도시빈민들과 함께해 온 수도회는 주거문제 개선을 위해 지역민과 연대해 정책적인 일을 진행하는 한편 맞벌이 부부를 위해 탁아소, 공부방, 실직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 등을 운영해왔다.
이농현상이 급증하는 농촌을 위해 80년대 중반부터 농촌 공소 사도직을 시작해온 수녀회는 경남 거창, 강원도 정선, 평창, 전라도 해남 등지에서 매년 실시되면서 큰 호응을 얻자 구체적인 농촌 사도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껴왔다. 그리하여 수도회는 경북 상주 화령본당 관할 공소에 공동체를 설립, 농번기에는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신자 재교육에 전념하며 비신자들을 위해 한글교실과 노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80년대 말부터 탄광지역 폐광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가정파괴현상이 급증하자 수도회는 지역사회에 실질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왔다.
가장 소외된 곳에서 힘없는 이들과 함께 복음화를 이뤄가는 수도회이고 보면 해외선교 사도직은 빼놓을 수 없는 사도직이다. 지난 78년 수도회 관구 승격 이후 해외선교에 힘쓰고 있는 이들은 현재 페루, 쿠바, 케냐, 리비아 등지에 30여명의 수도자들을 파견하고 있다.
온 세상 누구에게든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 그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명은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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