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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라, 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 속으로
--- 한현시 시집 {눈물만큼의 이름}의 시세계
김지윤
기억: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하기
삶은 기억이다. 가브리엘 G. 마르케스는 말했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것이라고.
시간이 ‘흐른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물질로 표현한다면 마치 ‘물’과 같기 때문이다. 물이 흘러가며 증발되어 다시 구름이 되고 비가 내리고 하는 동안,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물살들은 서로 뒤섞여 어제와 오늘의 물결이 구분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나온 시간은 그 사람의 안에서 물방울처럼 뒤섞이고, 기억 속에서 시간은 결코 시계의 시간처럼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와 ‘어디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느냐이다.
한현수 시인의 5시집 『눈물만큼의 이름』 속 작품들에는 기억과 소리, 그리고 기다림이 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며 스쳐가고 머물렀던 순간들의 흔적을 기억하며 지금 옆을 지나가는 물줄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새로운 흐름을 기다린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시간의식이란 공공적이고 보편성을 띤 ‘세계시간’이 아니라 ‘내재적 시간’이다. 그의 시는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시간은 경험되는 것이며 내적으로 체험된 시간은 겪은 사람에 따라 다른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시간은 기억이다.
그는 「생일」에서 “보랏빛 사이로 시간을 읽어내는 날”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감각으로 기억된다. 촉각,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이 동원되어 소리로, 색깔로, 느낌으로 시간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내 안에 당신이 축적해 놓은 시간”은 보랏빛이다. 그것은 “어둠의 휘장을 찢어내고 올라온/ 보랏빛 묻어있는 제비꽃, 그 첫 표정”과 같은 것이다. 시적화자가 “당신”의 손목에 채워주는 시계가 “당신의 맥박이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리는/ 제비꽃 닮은 시계”인 이유는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그렇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시계를 벗어난 시계이며, 시간 밖의 시간이다. “새들이 다녀가며 깊어지는 하늘/ 아래에서/ 끝과 시작의 반복”인 시간은 직선적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며 흐르는 ‘시계의 시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끝과 시작이 맞닿아 계속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벚꽃이 질 때」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저마다 열려진 끝에서/ 절규과 떨림과 호흡” 그는 벚꽃의 낙화를 두고 그것을 “열려진 끝”이라고 부른다. 벚꽃의 시간은 닫힌 것이 아니라 틈을 열어둔 것이다. 열린 끝으로 다시 시간은 새로워진다. 연암 박지원이 『초정집서』에서 “천지가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나 끊임없이 새롭고, 일월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나 빛은 날마다 새롭다”라고 말했던 동양적 시간관과 닮아 있다. 그러니 끝은 마지막이 아니다. 이런 시간은 과학이나 합리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시인은 “바람은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가 이렇게 묻는 까닭은 시간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다시 새로워질 수 있기에 무한한 것이며 소모되지 않는다. 기억 속의 시간은 소진되지 않으며 심지어 제 몸을 늘리기까지 한다.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늘어나기까지 한다면 여유와 여백이 생긴다. 시간의 빈 공간 속에서 시인은 모든 것들을 느리고, 가깝게 인지하려고 한다. “절규와 떨림과 호흡”까지 느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미세한 것들은 가까이 서야만 알 수 있다. 먼 곳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갈 때는 결코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는 것들이므로.
사실 우리는 여백의 미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닌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빽빽하게 가득 차 있고 빠르게 돌아가야 하기에 조금의 빈틈이나 어긋남을 용납할 수 없는, 딱 맞는 퍼즐이나 맞물린 기계 부속을 닮은 정합(整合)의 세상이다. 등을 떠밀리고 조금의 여백이 생기면 바로 채워야 하는 세상이라면 멈춰 서 있고 바라보고,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잠옷단추를 풀자
창밖에서 아침이 흘러들어왔다
갑자기 너를 소모하지 않는 네가 좋아졌다
소모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너의 눈에 달려있지
마음에 달려있지
내게서 무엇이 보이니? 무엇이 느껴지니?
사람은 사람을 소모하는 동물
신비로움이 고이도록 나를 기다려준다면
너를 소모하지 않는다면
보고도 싶고 만지고도 싶고
우린 사랑하고 싶어지지
기다려 준다! 신의 형상은 지워지지 않아
이제 가려져 있는 눈을 뜨는 아침
잠옷단추를 풀자
내게서 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네가
좋아졌다
-「아침의 단추」 전문
아침이 흘러들어온다는 것은 꿈의 시간에서 일상의 시간으로 건너 갈 때라는 뜻이다. 일상의 시간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한 방향으로 가는 흐름을 가지고 있지만, 꿈의 시간은 다르다. 꿈은 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비하다. 시적화자는 “너를 소모하지 않는 네가 좋아졌다”라고 한다. 일상의 시간은 빠르게 돌아가고 틈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깊이 들여다보고 느끼기는 어렵고, 사람들은 무감각하고 무심해진다. 그런 시간은 소모적이다.
잠옷의 단추를 푸는 순간은 꿈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때이다. 그는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수도 있지만, 나신이 되어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다시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려진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언제나 현실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이제 가려져 있는 눈을 뜨는 아침”에, 시의 언어는 꿈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그러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한현수의 전작들 중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듯, 그는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기다리는 일이 ‘버릇’으로 체화되어 있다고 할 정도다.
“신비로움이 고이도록 나를 기다려준다면/ 너를 소모하지 않는다면/ 보고도 싶고 만지고도 싶고/ 우린 사랑하고 싶어지지”라면서, 시적화자는 다시 신비가 차오르고 꿈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의 눈”과 “마음”에 달린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게서 무엇이 보이니? 무엇이 느껴지니?”라고 묻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깊이 묻혀 있는 것을 꺼내어 느낄 수 있으려면 기다리고, 바라고 집중해야 한다. 느려져야 하며, 때로는 멈춰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면에 몰두하는 신비롭고 영적인 시간 속에서 “신의 형상은 지워지지 않”지만, 범속한 일상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순간 신화는 끝나버린다. 꿈과 상상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신화적 세계의 흔적 역시 지워져버릴 것이다. 시적화자는 “잠옷단추를 풀자/ 내게서 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네가/ 좋아졌다”고 말한다. “사람은 사람을 소모하는 동물”이지만 소모적이지 않은 시간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한다. 기억에는 장면과 느낌이 필요한데, 결국 ‘본 것’과 ‘느낀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럼 이렇게 고쳐 써보면 어떨까. 우리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보고, 느껴야만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문장에서 하나를 더 덧붙인다. 보고, 느끼고, 들어야 한다고.
소리: 알고 이해하기 위해 듣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시계의 시간은 무심하고 기계적이며, 시인은 이런 시간에 내적인 저항감을 느낀다. “거리의 시계탑부터 부숴버린 프랑스 혁명의 출발을 부러워했다/ 시간은 얼마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가?”(「그해 겨울은 15분 전에 억류되었다」)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현수는 페루 내전 속에 고통 받는 여성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과 위안부 피해 여성(「귀향」), 죽은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 등 폭력 앞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낸 시들과 집단광기에 휩쓸리는 눈 먼 군중의 파국을 상징한 「개미방아」 등의 비판적 시들을 통해서 폭력이 자아낸 비극을 그려냈다. 그런데 “벌레가 그늘을 갉아먹는 것처럼/ 점령당하는 꽃 무더기// 하나씩입을 결박당하며끌려나오더군” (「벚꽃이 질 때」)에서처럼 그의 시에서 ‘폭력’은 침묵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며, 그러한 무거운 침묵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사월의 꽃은 배고픈 짐승처럼」을 보자. “누군가가 비워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을 할퀴며 수직을 소진하더니/ 죽을 만큼 가만히 있어요/ 죽을 만큼 묵언의 향기를 쏟아내요”라고 시인이 표현한 시 속의 ‘꽃’들은 결국 저항의 소리로 침묵을 깨뜨린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 꽃피지 않아요/ 꽃은 포효하고 있어요”라는 것이다.
시인은 작은 존재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림자가 부르는 노래까지 들으려고 (“그림자는 노래를 부른다”, 「그림자놀이」) 애쓴다. 비록 조그맣지만 있는 힘껏 지르고 있는 그들의 포효와 비명, 그리고 노랫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가려져 있고, 망각의 자리에 놓인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 오고 싶어 한다. 이런 그의 마음은 2016년 구의역 승강장안전문을 수리하다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을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지하철 역 벽에 붙여놓은 노란 포스트잇을 매화말발도리꽃이 핀 것으로 비유하는 시 「기억의 공간」이나 “한 번도 꽃피운 적도 없고 변변한 그늘을 소유해본 적도 없”이 “가진 것은 가시와 바람 뿐”인 가시떨기나무가 “가장 맑은 소리로/ 마음의 가시 끝부터 불꽃이 일어나는 기적”을 보여주는 장면을 “불에 타지 않는 문장”으로 그려내는 「가시떨기나무」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존재의 소리는 시인에게 음악과 같이 들린다. 「여름 계곡」에서 그는 물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다. “지나간 마음의 절벽을 씻어내며/ 휘돌아가는 소리들// 서로 부딪히고 깨어나는 소리들”을 들으며 “눈을 감으면/ 맑은 화음이 만들어지고// 내 영혼은 물방울처럼/ 꽃잎을 두드린다”라고 쓴다.
시인은 소리로 존재를 인지하는데, “새소리가 들린다면/ 분명 새가 날아가는 곳에 나무가 있어요”(「손가락 끝에서 나무가 자란다」)라는 서술에서처럼 소리는 대상과 이어져 있으며 그 대상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 시 속에 나오는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로 나무를 말하고 있”는데, “손가락 끝에서 나무가 자란다”고 생각되는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시인이 언어를 통해 의미를 짓는 행위와 닮아 있다.
시인은 작은 소리를 찾고, 그 소리의 근원이 되는 존재들을 발견하려 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숨은 소리를 찾고 잠든 소리를 깨우는 시다. 시인은 침묵 속에 잠든 소리를 깨우고 난 후에 귀 기울여 경청하려고 한다. 시인이 백지에 글자를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소리를 찾는다 당신은 먼저 울림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껴안은 구멍이 점점 커져 자신의 심장처럼 따뜻해 질 때까지 별들이 들어앉은 우물을 상상하며 구멍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소리에 집중한다 활을 크게 잡고 우물을 바라본다 소리를 꺼내기 위해 구멍에 손을 밀어 넣는 것처럼 구멍을 긋는다 구멍은 꿈틀거리며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당신은 구멍이 붙들고 있는 소리를 깨운다 눈과 귀를 낮추어 조금씩 이끼 낀 벽을 타고 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이미 수천의 소리를 소멸시킨 우물에서 소리를 불러낸다 우물 바닥으로 당신의 얼굴이 떨어진다 손가락이 떠다니고 머리카락이 현처럼 흘러내린다 구멍 밖으로 나온 소리는 핏줄처럼 흐른다 숨결을 휘감으며 누군가의 심장으로 들어간다 소리는 플랫되는 법이 없다 별들이 침묵하는 소리까지 다 불러내면 당신은 구멍에서 젖은 손을 꺼낸다 - 「콘트라베이스」 부분
숨은 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울림을 읽을 수 있어여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구멍” 속을 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구멍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우물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서 “소리를 꺼내기 위해 구멍에 손을 밀어 넣는 것처럼 구멍을 긋는” 사람은 깊이 숨겨진 존재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한다. “눈과 귀를 낮추어 조금씩 이끼 낀 벽을 타고 내려가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우물’은 보이지 않는 것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그것을 숨기고 은폐하고 있는 벽이기도 하다. 우물 속에 가려져 망각된 존재의 내면들은 이미 사라졌다. “이미 수천의 소리를 소멸시킨 우물”을 찾아 그 안에 잠겨 있는 생성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이 시인이다. 밖으로 나오면 다시 생명을 갖게 되기에 “구멍 밖으로 나온 소리는 핏줄처럼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숨결을 휘감으며 누군가의 심장으로 들어간다.” 이제 그 소리는 다시 낮추어지지 않는다. “플랫되는 법이 없”이 “별들이 침묵하는 소리까지 다 불러”낸 이후에야 “당신은 구멍에서 젖은 손을 꺼낸다.” 그의 손은 막 새로운 생명을 자궁에서 받아낸 산파의 손처럼 젖어있다. 이제 소리는 세상의 것이 되었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세상으로 띄워 보내는 일이 이런 것이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의 구절처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현수의 시에는 사막에서 발견한 우물과, 그 속에서 찾아낸 비밀을 세상에 내보이는 시인의 떨림과 전율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금의 세상이 상실해가는 아름다움이 있다.
소리는 존재를 인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겨울의 바가텔」에서 시인은 소리를 통해 사라져가는 존재를 붙들어보려 노력한다. “빗방울 소리가 수액줄을 타고 들어온다 사라지는 소리에 사라질 소리들이 붙어있다 떨어지면 고요가 무섭도록 가까워진다”라는 표현에서처럼 시인은 완전한 고요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 전에 미세한 마지막 소리까지도 듣기 위해 귀를 세운다. 그는 대상의 소리를 듣기 위해 숨죽인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돌들이 말을 시작”(「돌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슬픔은 바람에게 물어요」에서 “바람은 들어주고 바람은 이해해요”라고 쓰고 있듯, 시인에게 듣는다는 행위는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 듣다보면 “숨겨놓았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뭔가가/머리 끝에서/ 오래된 시간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걸 알아요”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바가텔은 가벼운 작품, 소곡(小曲)을 말한다. 인간은 유한한 삶 속에서 작은 시간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은 마치 한 편의 바가텔과 같다. 죽음을 향해 가는 한 인간의 한정된 시간은 거꾸로 세워놓은 모래시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막을 수 없어 쓸쓸한 것이다. “켜켜이 붙박아둔 흔적의 층위가 소리 없이 무너진” 이후에 “당신에게 들어왔던 세상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소멸이 아니며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초기화에 불과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어진다. “낮아지고 깊어지고 투명해지고 자신은 끝에 와 있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또 시작이다”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당신은 소멸하는 자리”에 있지만 그 시간은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계절의 CPR」에서 시인은 흘러간 계절을 향해 “돌아오라”고 말하는데, “돌아오라, 말하기만 해도 살아나는 것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불러주지 않으면 소멸하는 맥”을 살리기 위해 시인이 계속 ‘부른다’는 행위를 한다는 게 주목되는데, 사실 그는 부른 후의 반응과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멸에서 생성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에서 ‘소리’는 생겨난다.
시인은 “잠시 헝클어지는 적막 속에서/ 머리카락 끝 스치는 가위질 소리를 듣는”(「우리가 수선화처럼 비를 맞을 때」) 행위를 통해 “사각사각/ 옆, 이란 감정이 만들어진다”라고 쓴다. 그에게 있어 함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소리를 공유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곁에 있게 된다. “눈높이를 낮추어 눈빛이 머물게 하는 옆이/ 눈빛과 눈빛을 만나게 하는 또 하나의 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이 “사각사각”이라는 소리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이처럼 그는 소리로 인해 생겨나고 일깨워지는 느낌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손수건」에서처럼, 두 사람이 “봄날에 빗소리”를 함께 듣는 순간은 “시간이 그만 멈추어졌으면 하는 곳에/ 서로를 묶어주는 밧줄”이거나 “둘 사이/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순간에 느낌표”가 되어줄 수 있다.
다양한 존재들이 내는 세상의 모든 소리는 그만큼 숱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누군가는 불쾌한 소음(騷音)이라 할지 모르지만 물줄기 속에 뒤섞인 수많은 물방울들처럼 작은 존재들의 소음(小音)들이 있기에 세상에는 무수한 가능성과 변수가 존재하고, 거기에서 세계의 비밀과 아름다움이 생겨난다고 그는 믿는다. 그 작고 미세한 소리들로부터 빛나는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시인은 오래 귀를 열고 기다린다.
기다림: 발견하기 위해 기다리기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비밀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져서 바라볼 것도, 감각할 것도 없어지면 환상은 질식되어 사라진다. 비밀이 남아있어야 존재에 영적인 아름다움이 허락될 수 있다. 비밀을 만나기 위해서는 한정 없는 기다림과 느림이 요구된다. 그리고 깊이가 필요한데, 얄팍한 곳에는 비밀이 깃들 틈새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빈틈들, 생각의 ‘사이’들은 기다림에서부터 온다. 그 틈새에서 존재의 진짜 면모가 드러난다. “바람과 바람 사이로 새가 앉아 있”고 “그 사이에서 바람에 흙과 섞인 향기가 있”으며, “바람과 바람 사이로 공간이 열리는 게 보”인다고(「손가락 끝에서 나무가 자란다」) 시인은 쓴다. “진지하게 이때 시를받아 적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 말과 말 사이에 비밀의 방이들어서고/ 날을 세운 바람을불러들이는 것이다” (「말을 구경하는 도서관」) 라는 말처럼 ‘시’ 역시 말과 말 사이에 있는 “비밀의 방” 속에서 나온다. 빛나는 찰나의 순간과 그 의미를 잡아내어 시의 행간에 묻고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작은 일면에 깊이 몰두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시의 시간’이라 바꾸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 초침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현상학적 시간의식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시계의 시간’, 보편적인 세계시간과는 구분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한현수 시에서의 시간은 내재적 시간이며, ‘기다림’의 시간이다. 겨울이 봄을 준비하고, 빈 가지가 다시 돋을 새순을 예비하듯이, 우주적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동시에 흘러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곳에선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요 출입하는 순서와 관계없이 동시적으로 존재해요 언제나 지금일어나는 것처럼작동하지요수십 년 전의 일을 지금처럼 꺼내 보여줘요 수천 년을 허락해도 그럴겁니다” (「기억사용설명서」)라는 시는 바로 그런 시간 속의 존재를 표현하려 한 것으로 읽힌다. 신은 인간들이 만든 시계의 시간 속에 있지 않다. “시간 밖에서움직이는 신을 닮았어요 신처럼항상 오늘이니까”라는 말처럼 현실의 시간이 아닌 신화적 시간 속에서 기억은 점차 영원을 닮아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겁을 ‘어두움의 심연’이며 ‘꼴이 없는 두루뭉수리’라고 했다. 이 영원한 시간에는 경계가 없어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다. 기억은 그렇게 편재(遍在)한다.
「첫」에서 ‘너’는 한 계절을 걸어오지만 “나는 100년을 기다려서”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는 시적화자에게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그 첫”경험으로 새겨져 있다. 시간은 그들 사이를 관통하면서 흐른다. 내 안에서 ‘너’는 “물의 발자국으로 흘러/ 내 마음에 강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흐름은 서로에게 다른 궤적을 남긴다.
사랑은 마치 시간처럼 지나가고 흘러간다. 「시베리아, 사랑이란 낯선 추상」에서 “사랑은 지나가는 것”이며 “지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창밖에 스쳐가는 풍경들이 마치 추상화의 붓질 아래 뭉개지는 물감처럼 “달려가는 하얀 자작나무와 뭉뚱그려/ 하나의 긴 초록빛 띠의 행렬”로 남는 것처럼 지나버린 사랑은 하나의 인상(印象)으로 남는다.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이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것과 상대의 마음에 새겨진 것은 서로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상대적이며 개별적인 시간으로, 사람마다 다른 기억의 층위를 만든다. 이 다양한 층위가 세상을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로 가득 차게 만들며, 여기에서 발생되는 존재의 깊이는 미적 거리를 생성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종종 무언가를 호명한다. 누군가가 부르고, 그 대상이 대답하는 순간 존재의 의미는 되살아난다. 그런데 무엇을 호명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 「눈물만큼의 이름」에서 시인은 꽃 이름 하나를 불러내기 위해 애쓴다.
“꽃 이름 하나가기억에서 없어진다/ 기다려도 꽃이름을 불러 낼 수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라는 질문은 계속 그를 괴롭힌다. 그는 “좀 더 기다리기로 한다. / 문밖에서, 그 이름이걸어 나올때까지.” 왜냐하면 “꽃은 그렇게 얻는 이름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상상을 한다.
“눈을 감는다, 나무처럼 기다리는 자리에서/ 나는 그 이름과 똑같은 꽃을 피우는 상상을 한다/ 오지 않는이름을기다리며”라는 표현처럼 이름을 얻어 존재를 호명하기 위해 그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눈물만큼의 이름’은 “망각에 저항하는 이름”이며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과 같은 것이다. 대상과의 만남은 시적 주체를 흔들리게 한다. 아도르노는 『미적이론』에서 주체가 자연의 숭고 앞에 눈물을 흘린다고 표현했다. 자연이 나를 다시 받아들이고 눈물이 솟구치는 순간, “자아는 자기 안의 감금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벗어나며”, “주체가 자연 주위에 걸어놓은 마법”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존재를 불러내어 자연의 숭고와 마주치게 되는 전율의 순간, 시인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린다. “눈물만큼의 이름”이 그에게 올 때까지.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올 때까지 시인이 얼마나 오래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왔을지 생각해본다. “당신이 꽃받침이라면 그렇게 때를 기다려요”(「달이 없어도 달맞이꽃처럼」) 라는 시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나 역시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내가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 내 꽃받침 위에 피어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의 시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화답하고 싶다. “당신은 저녁의 언어를 꽃으로 바꿔 놓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