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하는 호기심에서 보게 되다
이게 뭐야? 짜증이 나려는 찰나
어, 보면 볼수록 이상하고 신기하네, 하면서 보게 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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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무언가 특별하고 극적일 때 ‘영화 같다’고 하지요.
그렇게 특별한 영화 속에서 우리는 늘 삶을 발견하고 나를 찾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영화와 인생이 하나이고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 못지않게 현실에서 영화가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한편 우리는 조금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소설 쓴다’고 말합니다.
소설은 얼마나 허구적이면서도 사실적인지요.
이처럼 이야기가 있는 예술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
1분 1초 계획적이고 수학적인 일상을 사는 해롤드의 일상에 어느 날 ‘목소리’가 침투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 등 일거수일투족을 3인칭 시점으로 설명하는 여성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 내레이션은 영화를 보는 모두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해롤드가 일상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인지, 강박적인 일상이 그에게 정신분열증을 가져다 준 것인지 고민할 때, 영화는 소설가 케이 에이펠의 장면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두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진행 방향이 쉽게 예측되지 않습니다. 해롤드의 정체에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지는데, 이는 케이 에이펠의 작업 과정이자 그의 소설이기도 한 동시에 실제인물 해롤드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문학은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은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있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다, 모든 삶이 예술이다, 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비극으로 본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어차피 비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와중에 우리는 수많은 희/비를 겪습니다. 해롤드가 줄스 힐버트 교수와 나누는 대화를 보면, 작품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희극과 비극 중 어떤 것이어야 하고, 장르가 정해져야 하는, 어떤 규칙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 삶이라는 작품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케이 에이펠의 작품처럼, 결말이 꼭 비극이어야만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한편 이 영화가 바탕으로 한 스페인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들의 자살입니다.) 소설가와 소설 속 주인공 사이, 보이지 않는 그 긴밀한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있고, 주인공은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영화가 남기는 강렬한 메시지는, 반복되는 일상 속 사소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삶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고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일상 속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의미 없는 것은 없으며,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소설가의 현실과 처음으로 일상에 혼란을 겪는 한 남자의 삶의 변화를 깊이 있게 엮어냈습니다.
픽션보다 사실적이고 논픽션보다는 허구적인 영화.
첫댓글 얼마전 '소설 쓰시네' 가지고 벌어진 일들.
그리고 불쑥 나타난 '소설가협회' 때문에 드러난 소설가의 민낯.
그분들 덕에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지요.
정말 희한한 세상이에요.ㅠㅠ 왜 그런 성명을 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요. 코미디 같은 세상.
이 영화 본듯 안 본듯해서 찾아 봐야겠어요.
내용은 본 거 같은데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이 나왔던가?에서 걸려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