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6층 석탑
불탑은 불교의 탑을 지칭하는 말로 쉽게 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탑이란 불교와 상관없이 조성된 모든 탑형의 건축물을 포괄하는 용어임으로 사찰의 탑을 가리켜 불탑으로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절의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탑과 법당이다. 탑과 법당을 그렇게 많이 보아왔는데도 탑의 층수를 셀지 모르고, 법당 이름에 따라 법당 안에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지를 잘 모른다. 탑의 층수는 물론 탑이 본래 제 탑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과, 법당의 현판만 보고도 전각 안에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가를 알면 선운사가 아닌 다른 절에 가서도 그 절에서 추구하는 신앙의 형태를 대강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불교는 통합불교 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탑부터 살펴보자.
탑은 본래 승려의 유골인 사리를 봉안하는 묘라는 뜻이다. 탑의 역사는 불교의 역사 문화와 같이 발달해 왔다. 불탑은 불가에서 매우 존엄한 존재이고 예배의 중심이므로 법당 앞에 세웠다. 그런데 큰 탑에다 사리를 봉안(奉安)하다 보니, 비용도 많이 들고 땅도 많이 차지하고, 공력 또한 많이 드는 등 번거로웠다. 그리하여 탑의 형태를 작게 축소할 필요가 생겼다. 축소한 탑은 종(鐘) 모양ㆍ연꽃 모양ㆍ등(燈) 모양 등 여러 형태로 만들어 그 안에 사리(舍利)를 안치하고, 그러한 작은 탑들을 한태 모아 놓은 곳이 부도전(浮屠殿)이다. 그러니까 부도전은 절의 공동묘지란 뜻이다. 그러나 절에서는 공동묘지라 하지 않고 그냥 부도전이라 한다.
우리나라 탑의 시작은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시기였고,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여진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 석탑(石塔)을 발생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은 삼국 중에서 건축술이 가장 발달한 백제에서 7세기 초부터 시작하였다 한다.
그것은 신라의 황룡사 九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거역(巨役)을 담당한 사실, 그리고 일본의 초기 사원(寺院) 창립(일본의 비조사(飛鳥寺)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기와박사 등이 건너간 사실 등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보존된 것은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祉)의 석탑과 충남 부여읍 정림사지(定林寺祉)의 석탑뿐이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이고, 이 석탑은 백제의 무왕대(武王代)와 같은 시기인 선덕여왕 3년(634년)에 건조된 것으로 신라 석탑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선운사의 6층 석탑은 사적기에 조선조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9층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했고,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 이상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고만 기록되어있다.
행호선사는 이 9층석탑을 보고 대웅보전 등을 중창하였다.
탑의 층수를 어떻게 헤아리는지 알아보자. 탑의 층수만 볼 줄 알아도 탑을 보는 눈이 한층 달라지는 것이다.
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눈다. 탑의 층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밑 부분을 기단부(基壇部)라 하고, 탑의 층수로 셀 수 있는 부분이 탑신부이며, 층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윗부분을 상륜부라 한다.
(지방유형문화재(73.6.23지정)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탑에는 옥개석(지붕돌)과 옥신석(몸돌)이 있다. 옥개석 밑에는 반드시 옥개 받침(층급받침: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층급받침이 있는 것만 탑의 층수로 세어야 한다. 옥개석 밑의 층급받침은 탑이라면 어느 탑이든지 다 있다. 다만 탑마다 층급받침의 줄의 숫자만 틀릴 따름입니다. 줄이 쳐있지 않는 것을 층수로 세어서는 안 된다. 기단부 첫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없다. 층급받침이 없는 것을 층수로 세면 헛 층수가 나온다. 그럼 이제 어떤 탑이든지 층수를 셀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탑이 본래 쌓을 때 형태 그대로 유지된 제 탑인가 제 탑이 아닌가를 알아보자. 탑이 본래 제 탑이기 위해서는 맨 밑층의 층급받침의 숫자나 맨 위층의 층급받침의 숫자나 중간 어느 층이든 숫자가 같아야 한다. 선운사의 6층 석탑을 보면, 1, 2층은 층급받침이 넉 줄, 3, 4층은 석 줄, 5층은 두 줄, 6층은 한 줄 그어져 있다. 이렇게 각각 층급받침의 줄 수가 틀리다는 것은 제 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침입하여 어실각(御室閣)을 제외한 선운사의 모든 전각들을 다 불 질러 초토화시켜버리고, 9층 석탑도 무너뜨려 버렸다. 무너져 있는 것을 근방에 사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돌로 깨서 써버린 것이다. 무너진 탑은 광해군 때 다시 세우면서, 기단부에서 2층까지는 제 탑을 세웠고, 없어진 3, 4층은 다른 탑에서 떼어다 맞춘 것이며, 5. 6층은 당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2층까지는 고려 중엽, 3,4층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5,6층은 광해군 이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 층수를 셀 수 없는 탑이 있다. 김해에 있는 인도에서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탑이다. 김해 지방의 풍습에 의하면 층급받침이나 부처님의 코를 긁어 그 돌가루를 먹으면 아들 난다는 설을 믿고 층급받침을 어찌나 많이 긁어댔던지 층급받침이 달아졌거나 마모되어 층수를 셀 수 없는 것이다.
(탑의 각 부분 명칭)
불탑의 의미
본래 불탑은 고대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하여 솔도파(率堵婆)ㆍ솔탑파(率塔婆)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이 차츰 줄여져 탑파(塔婆)ㆍ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을 쌓아올린,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멸하시자 제자들은 세존의 유해를 다비(화장)하였다. 그때 다비식에 참석한 당시 인도의 여덟 나라 왕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무력까지 동원할 태세를 취하였다. 이때 석가세존의 제자 도로나의 중재로 불타의 사리를 여덟 나라에 골고루 분배하였는데,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한다. 여덟 나라 왕은 나누어 가진 사리로 각기 탑을 세우고 생전의 부처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 8탑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사리신앙과 더불어 불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인도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이전에 세운 8개의 탑을 해체한 뒤 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8만4천 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불교가 유입된 후에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불탑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수량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차츰 불사리 대신 불경이나 불상 등의 법신사리를 봉안한 탑도 건립하게 되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 당우(堂宇) 가운데 하나.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중대,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이다.
불탑은 조성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 목탑, 전탑, 모전석탑, 금동ㆍ청동ㆍ철탑 등으로 구분된다.
목탑(木塔)
우리나라는 평면에 여러 층의 누각형태로 세워진 목탑이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 백제의 건축가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였던 사실이『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백제의 건축가와 승려들이 건너가 일본 최초의 가람인 아스카사(飛鳥寺)에 목탑을 세웠는데, 오늘에까지도 아스카시대에 축조된 목탑의 유구가 전해진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은 목탑의 나라로 불릴 만큼 교토와 오사카, 나라(奈良) 등지를 중심으로 전국에 수많은 목탑이 조성되었다.
오늘날 목탑양식을 전해주는 유규로서는 조선 후기(17세기 초)의 건축물인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 등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중 쌍봉사 대웅전은 1986년에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는데, 3층 목조탑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조선시대 인조2년(1624년)에 벽암선사에 의해 중건된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한국 유일의 목조 5층탑양식의 건축물이다.
석탑(石塔)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석탑 조영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학자 간에 다소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석탑이 처음 세워진 것은 대략 삼국시대 후기인 A.D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372년경부터 약 200년 후까지는, 목탑이 건립되었다가 그 사이에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석탑을 건조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전국 각지에 전해지는 1,300여 기의 불탑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탑이다. 백제의 석탑으로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오늘에 전해지는 많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가운데에서도 불국사 석가탑은 각 부의 비례가 안정된 균형으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석탑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
현전하는 전탑으로는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16호),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57호),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189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 등이다.
모전석탑(模塼石塔)
모전석탑이란 전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모전탑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신라지역에서 전탑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전탑보다는 오히려 모전석탑이 더욱 활발히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모전석탑으로는 경주 분황사 모전탑(국보 30호)을 비롯하여, 제천 장락리 7층석탑(보물459호) 영양 현희동 5층석탑, 영양 봉감동 5층석탑, 영양 삼지동 석탑, 상주 상병리 석심회피탑 등을 들 수 있다.
금동탑ㆍ청동탑ㆍ철탑
금동이나 청동, 철 등 금속제 탑은 옥외에 설치하여 예배하기보다 건물 내에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일반적인 탑이라고 하기보다는 소형의 장엄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리를 담은 사리장엄구도 작은 탑의 모양을 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경제적 윤택함과 주조기술의 발달로 청동불상과 더불어 대형의 청동탑이 조성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금동탑으로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213호 금동대탑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청동으로 소형의 불탑을 제작하여 절에 봉안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불탑들은 대개 높이가 30cm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탑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형에 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