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뜻에 따라서 살려고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힌다.>라는 말을 어려서 많이 들어왔는데 우리 동네의 어떤 새댁이 시집 온지 5년이 되어도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살림을 얌전하게 아주 잘하였지요. 그 부인은 남편이 너무 심하게 구박하고, 술만 취하면 매를 대고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시부모들의 구박 또한 심하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읍내 술집의 여인과 눈이 맞아서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더니 어떤 날 아예 집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화장을 짙게 한 그 여자가 들어오던 날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들어오는 여자를 구경하러 몰려들었지만 사람들은 착한 그 집 며느리를 동정하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아무도 어쩌지를 못했습니다.
그 후에 그 여인이 뒷동산 밤나무에 목을 매고 장례를 치르던 날,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향해서 침을 뱉으며 욕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그 여자가 그 집에 소 판 돈을 모두 가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남쪽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도망치다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데 배속의 아이도 다른 남자의 아이였다는 것이 경찰서에서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건소에서 검사를 해 봤더니 그 남자가 불임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술에 취한 그 남자는 집에 오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고, 아들이 죽자 상심한 노인들도 세상을 떠나고 그 집은 곧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이 한이 맺혀서 집안이 망했다면서 원수를 갚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씀은 악인에게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대하라는 것은 어느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정직한 삶인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는 그 집안을 보면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원망을 살만한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나도 그 집안의 몰락을 보면서 사실은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당에 다니면서 오늘 복음말씀을 들었고,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맹자는 진실로 어진 정치를 베풀면서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는 군주에게는 자연히 백성들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반대하는 세력이 없게 되고, 비록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인심이 떠나지 않아 총칼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 곧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양 혜왕이 맹자에게 전쟁에서 진 치욕을 어떻게 하면 씻을 수 있는지를 묻자, 맹자는 인자한 정치를 해서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장정들에게는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신용을 가르쳐 부형(父兄)과 윗사람을 섬기게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견고한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은 백성들이 일할 시기를 빼앗아 밭을 갈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는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형제와 처자는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데, 왕께서 가서 정벌한다면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르기를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仁者無敵)'고 하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내 삶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삶을 빼앗기며 다른 사람들의 욕심과 잘못에 내 가정과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 겉옷까지 내 주라는 말씀은 내 자존심과 위신, 명예, 체면까지도 내 주라는 말씀입니다. 내 자존심과 위신, 명예, 체면보다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견지(堅持)하라는 말씀으로 신앙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렇게도 지엄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내 삶은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짐한 것과 정 반대로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답니다.
나는 요즘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요구를 나는 묵살하였는데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올바르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그가 내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고, 또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함에 있어서는 그 동안의 삶을 통하여 경험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뜻이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용서를 청하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결국 어진 사람이 되어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것은 기쁜 마음으로 내가 노력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하는 희생과 봉사에 대하여 대가를 바라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의 가르치심은 도저히 아주 평범한 우리 인간이 지킬 수 없는 큰 격차가 있어서 때로는 도저히 따라 살 수 없는 가르치심입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그 길에 들어서려고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금씩 실행해 나가고 참고 살며, 아량으로 모두 덮어줄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그래도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