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키는 일
무언가를 새롭게 움켜쥐는 것보다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어느새 그것이 일상에 스며들어 내 삶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최근 이사를 준비하면서 집 창고를 정리했다. 그냥 버리기 아쉬워 한쪽에 방치해둔 계륵 같은 잡동사니가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난 물건마다 서려 있는 추억을 담시 되짚어보고 싶었다.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분류도 할 겸 해서 손에 닿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 군대에서 소총을 분해할 때처럼 신문지 위에 늘어놓았다.
구멍이 나서 쓸모를 잃은 낡은 우산이 눈에 띄었다. 헝겊에 덧대 구멍을 꿰매볼까 하는 생각에 우산을 펴서 뾰족한 꼬쟁이 부분을 잡고 빙빙 돌려봤다.
‘가만 보자. 분명히 빗물이 줄줄 샜던 것 같은데 어디가 구멍 난 거지. 찾기가 쉽지 않네, 욕실에 가서 물이라도 뿌려봐야 하나….’
그러다가 우산을 거꾸로 뒤집어서 안쪽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바깥쪽에선 잘 보이지 않던 구멍들이 우산살을 따라 군데군데 나 있었다.
살다 보면 외부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문제의 답을 찾을 때가 많다. 하지만 꽃봉오리가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올라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듯, 어떤 답은 내부에서 자연스레 솟아난다.
때로는 먼 곳을 내다보는 것 못지않게 가까운 곳,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나 싶다. 삶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마음속 창고에 처박아두지 않고 말끔히 해결하려면 말이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성찰省察이다. 성찰을 의미하는 단어 ‘introspection’을 동강내보자. 앞부분 ‘intro’는 ‘앞’ 혹은 ‘안으로’라는 뜻이고 뒷부분의 ‘spect’는 ‘보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 ‘see’와 관련이 깊다. 달리 말해서 성찰은 내면의 세계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석학 퇴계 이황이야말로 끊임없이 내면을 닦고 수양한 자기 성찰적 인물이었다.
퇴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추앙받았지만, 번번이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하길 원했다. 주변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수양과 성찰에 도움이 되는 22통을 추려 《자성록自省錄》이라는 책을 엮기도 했다.
퇴계가 남긴 유훈 중에서도 그의 성찰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퇴계는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덤 앞에 커다란 비석을 세우지 말고 반드시 내가 지은 묘비명을 적어 넣어라. 또한 나라에서 국장國葬에 준하는 장례인 예장禮葬을 치르려 하면 극구 거절하라.”
실제로 퇴계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지어놓았다. 제자들이 임의로 적을 경우 문장을 화려하게 꾸밀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자신의 삶이 미화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자들은 유훈을 받들었다. 퇴계가 지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地墓”라는 묘비명을 비석 앞면에 간략하게 적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만년에 도산으로 물러나 은거했던 진성 이 공의 묘”라는 뜻이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의 묘비명치곤 소박하기 그지없다. 비석에 새기는 글은 한 인간이 세상이라는 여백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문장이다.
퇴계는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출한 문장을 남김으로써 품격 있게 삶을 정리했다. 마치 진흙 속에서 꽃을 피워내고도 아름다움을 함부로 뽐내지 않는 새하얀 연꽃처럼 말이다.
성찰은 서구 사상가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이자 삶의 목표였다. 초기 기독교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통해 젊은 시절 방황에서 벗어나 신앙에 눈을 뜨고 회심回心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작가로서의 성공만을 얻는 데 급급했던 자신의 과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통렬하게 반성했다. 요샛말로 치면 ‘셀프 디스’를 한 셈이다.
퇴계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교회의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1571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는 인류사를 바꾼 종교 개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출판인들 사이에서 회자하는 〈중쇄를 찍자〉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편집자와 마케터, 서점 직원과 작가 등 책을 쓰고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경쾌하게 그린 드라마다.
주인공이 다니는 출판사의 사장은 은행에 돈을 저축하듯 운運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태어날 때 운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살면서 얼마든지 쌓아나갈 수 있는 것이 운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말 같기도 하다.
운은 우연의 영역에서 뜻하지 않게 솟아나거나 사라지는 것이므로 신용 카드 포인트를 적립하듯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 삶의 꽤 많은 요소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지 모른단 생각만큼은 머릿속에서 밀쳐낼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린 각자의 운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만약 삶의 태도에 따라 운이 쌓이기도 하고 반대로 줄어들기도 하는 거라면, 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자세야말로 운을 모으는 방법이 아닐는지.
조선 중기 문신 이수광은 “두문정수杜門靜守”라는 글귀를 남긴 바 있다. 막을 두杜 문 문門, 고요할 정靜, 지킬 수守다.
“문을 닫아걸고 고요하게 지킨다”는 표면적인 뜻 외에 “밖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내면을 가다듬는다”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숨돌릴 틈 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성찰을 통해 내면을 살펴가며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뭐든 중심을 잃으면 기울어지거나 가라앉기 마련이다. 붕괴되는 건 순식간이다. 특히 사람 마음이 그렇다.
―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북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