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몹쓸 사람

[조희자]

  을유년 닭의 해, 새벽녘 수탉의 울음소리는 해방둥이 내 인생의 여명을 열어주었다. 칠 남매 중의 막내로 위로 여섯 형제는 모두 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얼떨결에 가문의 어르신이 되어 대소 간의 화합과 화목을 위해 성심을 쏟고 있다. 선대께서 물려주신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갈수록 정떨어지는 씨족문화에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다.

금전 관계로 피를 나눈 혈육을 형사 고발하는 형제를 보고 분개한다. 형제간의 법적 분쟁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무리 금전 만능시대라고 하지만 혈육 양심으로 보면 용납이 안 된다. 오죽하였으면 아버지가 기소한 아들을 손찌검하고 어머니는 남세스러워서 즐겨하던 방송마저 중도 하차하고 말았을까. 물론 동기간을 속이고 금전을 갈취한 것은 엄연한 범법행위이다. 하지만 혈육 간의 우애 정신으로 용서하고 금전적 손실을 감수하면 될 걸 최악의 수단을 택한 형제의 난을 저주한다. 돈이 피보다 진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 해에 수십억을 버는 사람이 친형한테 수십억을 사기당했다고 한들 부모님의 속을 갈가리 찢어놓고 혈육을 난도질할 만큼 치명적이었을까. 한 해 덜 벌었다고 생각하면 될 터인데. 천하에 몹쓸 형제들. 돈독한 우애 정신은 가문의 화목과 혈육의 정을 보존하는 근본인 것을.

가족관의 예절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산교육일까. 청년기 시절을 뒤돌아본다. 설 명절이면 소죽 솥에 물을 끓여 새벽 목욕을 하고 부모님께 세배하고 형제간에도 맞절을 한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는 예절교육이다. 집안의 어르신들도 찾아뵙고 세배를 올리고 다과상을 마주하며 덕담을 나눈다. 타성 어르신께도 예를 갖추어 세배를 올린다. 지금도 연장자를 만나면 윗전으로 모신다. 몸에 베인 습성이다.

몇 년 전 설날이었나 보다. 그날따라 손주들의 세배가 끝난 후에 아내의 세배를 한번 받아보고 싶었다. 나만의 사랑놀이다. “세뱃돈 줄 테니 세배 한번 해 보시오.”라고 했더니 생난리다. 당장 백 번 절 할 테니 백만 원을 달라고 한다. 아니면 날 보고 백 번 절하란다. 백만 원을 주겠노라고, 기가 찰 노릇이다. 결국은 세배받기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낭군님한테 세배 한 번 하는 것이 그렇게도 모멸스러웠을까.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50년 전 정씨 가문으로 장가가던 날, 신랑 방에 처가댁 어르신들이 많이 모였다. 처 당숙분이 혼례식 예법에 따르자면 각시는 신랑한테 두 번 절하고 신랑은 각시한테 한번 절한다고 하면서 맞절을 시켰다. 그렇게 못한다면 신랑을 벌주겠다고 하면서. 그랬더니 각시가 불공평하다고 난리굿이다. 자기는 죽어도 두 번 절은 못 하겠다고, 내 사정을 봐서라도 그렇게 하자고 통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다. 결국,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걱으로 발바닥을 때리는가 하면 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돌렸다. 아팠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도 각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요리조리 도망질이다. 애정의 결핍이었을까. 허기야 딱 두 번 만나보고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한 결혼을 하였으니 사랑은 무슨 사랑. 나의 비명소리와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그녀에겐 한 편의 코미디였을까. 피식피식 웃으며 즐긴다. 지금 생각해도 분하고 괘씸하기가 짝이 없다.

작금의 시대적 현상을 눈여겨보면, 남존여비 시대에서 여존남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닌가 싶다. 친정이 시댁보다 선순위인 경우를 가끔 보고 듣는다. 사위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해도 예사롭다. 대체적으로 아내 쪽보다 남편 쪽이 이혼을 많이 당한다. 이러다가 신랑이 각시에게 두 번 절해야 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시대의 흐름을 탓하기가 꼰대 스러워서 구역질 나지만 참는다. 남성들이여 분기(奮起)하라. 한평생을 마누라 등살에 짓눌려 살아가야 할 굴욕적인 세상을 그대들은 그대로 방치할 텐가.

모닝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살아온 인생길을 되돌아본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허!” 헛기침 한 번 하면 조용히 꼬리를 내리던 그때 그 각시가 한없이 그립다. 지금은 성질내다가도 그녀가 씩씩대면 내가 꼬리를 내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속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들하고 있으니 다음 세대에는 차라리 여자로 태어나고 말까 한다. 아니면 타임머신을 타고서라도 신랑은 한 번 절하고 각시는 두 번 절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라.

이보시게, 자네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고 있는가. 인공위성이 하늘을 날고 있고 피골이 상접한 여인이 당신과 함께한 50년 세월을 흐느끼고 있는데, 천하에 몹쓸 사람 같으니라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아내의 세배를 받지 못했다. 이번 설날에는 맞절 세배라도 꼭 한버 받아보고 싶다. 머잖은 인생, 서산으로 기울기 전에.

[조희자]

참 재미나는 얘기입니다. 많이 웃었답니다.

[데이빗구]

[조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