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이씨 조선(이 이름은 쓰면 안 된다. 나라는 한 집안의 소유물이나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세조선’이라는 말만 써야 한다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을 1392년부터 28대, 519년의 단일 왕조로 여기지만, 정확히 말하면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은 두 개의 왕조다.
1897년(고종 35년)부터 일제에 합병된(무너진 – 옮긴이)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국호도 변경하였고,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실시하는 등 정치 체제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체제일 뿐이었고, 표면적으로는 독립 국가였어도 사실상은 준 식민지 체제였을뿐더러, 황제 두 명을 내고는 곧 일제에 합병된 단명한 왕조이기 때문에 거의 무의미하다(이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요되기 전까지는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 옮긴이).
그래서 일제에 합병된 뒤에는 한반도(코리아[Korea] 반도 – 옮긴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다시 ‘조선’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참고로, 일제가 ‘한’이라는 이름을 부정하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다시 쓴 까닭은, 한국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국[倭國]에서 ‘조선’은 경멸하는 뜻을 담은 이름으로 쓰였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은 욕설로 쓰이지 않으나, ‘조선인’이라는 뜻을 담은 ‘조센징’은 왜국에서 한국인을 깎아내리는 욕설로 쓰인다 – 옮긴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다. 조선이라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름을 팽개치고 전혀(완전히 – 옮긴이) 새로운 국호를 책정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50여 년 후인 1948년 (양력 – 옮긴이) 8월 15일 남한에 수립된 분단 국가의 국호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 이름했기 때문이다(사실, 대한제국이 망한 지 아홉 해 뒤인 1919년에 중화민국 상해[上海 : 상하이]시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의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끼워 넣어야 한다. 나는 남경태 선생이 왜 이 사실을 빼 버렸는지 그걸 이해할 수 없다 – 옮긴이).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제정(帝政. 황제의 정치 – 옮긴이)과 공화정을 상징하는 제(帝)와 민(民)이라는 글자 하나 외에는 한자까지 똑같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정할 상황에서는, 중국(사실은 청나라 – 옮긴이)의 속국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일제의 의도가 있었으므로, 기존의 조선이라는 국호와 전혀(조금도 – 옮긴이) 연관이 없는 새로운 나라 이름이 필요했다. 일본이 볼 때 조선은 그동안 중국이라는 황제국 아래에 있는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고려(후기 고리 – 옮긴이)의 뒤를 이어 건국한 조선 왕조는 고대 삼국 시대 이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했다(고대의 조선을 고조선이라 하는데, 이는 후세의 이씨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 것뿐이지, 실제 고대에 ‘고조선’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 되어 새로운 국호를 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고종 휘하 군신(群臣. 많은 신하 – 옮긴이)들은 당연히 앞선 보기를 좇아 고대의 역사에 주목한다.
고려는 조선이 멸한(멸망시킨 – 옮긴이) 왕조의 이름이니 쓸 수 없겠고, 그렇다고 분열된(갈라진 – 옮긴이) 시대였던 삼국 시대의 국호(고구리/백제/신라 – 옮긴이)를 따다가 쓸 수도 없고, 그래서 떠오른 것이 ‘한’이라는 이름이다.
조선에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삼한(三韓)’이라는 말을 자주 썼고(후기신라의 지식인인 최치원도 “삼한”이라는 말을 썼다 – 옮긴이), 더구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에서는 우리 민족(밝달민족 – 옮긴이)을 통상 ‘한족(韓族)’이라 부르지 않던가(중국 문헌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 흔히 삼한이라 불렀다. 분열된 삼국을 오히려 중국이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 보았던 셈이다. 그네들은 삼국이 다 같은 ‘오랑캐[東夷]’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한’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지금의 국호에도 중심 글자로 들어가 있으며, 우리 민족을 한민족, 우리가 쓰는 글을 한글이라 부르므로 ‘한’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한’은 – 옮긴이) 한자로는 ‘韓’이라 쓰는데, 중국 역사상의 한나라 왕조와는 물론(말할 것도 없이 – 옮긴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중국 역사에는 韓[발음은 ‘한’ - 옮긴이]과 漢[이것도 발음은 ‘한’ - 옮긴이] 왕조가 모두 있었다). 고대사에서 한자어의 뜻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본 바 있다. 그렇다면 역시 여기서도 발음이 중요하다 하겠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전 직할시(이 글은 ‘광역시’대신 ‘직할시’라는 말을 쓰던 때인 서기 1990년대 중반에 쓰였다 – 옮긴이)의 옛 이름은 ‘한밭’이다. 한밭은 ‘큰 밭’이라는 뜻이므로 한자어로 훈역하여 ‘大田’이라 이름한 것이다. 한강(漢江)도 원래 ‘큰 강’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다산 정약용은 ‘한’의 기원에 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을 내놓고 있다.
‘한(韓)’은 원래 ‘대(大. “크다”는 뜻 – 옮긴이)’의 뜻이다. 우리말(근세조선말 – 옮긴이)에 큰 것을 ‘한’이라 한다. 예컨대 노예가 주인을 ‘한물(韓物)’이라 하는 것은 중국어(한어[漢語] - 옮긴이)의 ‘대인(大人. “큰 사람/어르신”이라는 뜻 – 옮긴이)’과 같은 뜻이다(『 삼한총고[三韓總考] 』).
고대의 사람들이 남쪽에 살면서 그 수장(우두머리 – 옮긴이)을 ‘한’이라고 불렀으니 이러한 통치 형태에 의거하여 ‘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이 두 가지 설은 사실 서로 연관되어 있다. ‘크다’는 뜻과 ‘수장’이라는 뜻은 분명히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사실 ‘한’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역(사실은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 옮긴이)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었다. ‘한’의 발음은 ‘간’ 또는 ‘칸’과 통한다. 음운 구성상으로도 k(ㄱ, ㅋ) 음과 h(ㅎ) 음은 서로 통한다. Cossack를 ‘카자흐’로 읽는다든가 Khrushchev를 ‘흐루시초프(흐루쇼프 – 옮긴이)’라고 읽는 경우다.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국어(만주어)와 몽고어(몽골어 – 옮긴이)에 모두 군장(우두머리/임금 – 옮긴이)을 ‘한(汗)’이라 하는데, ‘한(韓)’과 ‘汗’의 음이 서로 비슷하므로(우리말[밝달말 – 옮긴이] 발음으로는 똑같다) 사서(史書 : 역사책 - 옮긴이)에 나오는 삼한 수십 국은 당시에 삼한(三汗. 세 한 → 세 임금 : 옮긴이)이 있어 (그 땅을 – 옮긴이) 나누어 통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언뜻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본명이 ‘테무친 웃치긴’인 – 옮긴이)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은 한자로는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쓴다. 그가 일으킨 세계 제국 원나라(사실은 ‘몽골제국’. 원나라는 한식[漢式] 이름이고, 원은 몽골제국을 이루는 네 개의 한국[汗國]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 옮긴이)는 나중에 네 개의 ‘한국(汗國)’으로 분리된다. 또한 원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세조(世祖)는 ‘쿠빌라이 칸’이라고 불렸다.
‘한 = 간 = 칸’의 공식을 염두에 두면 그 사례를 외부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신라의 왕명이었던 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도 모두 ‘한’이다. 또 하나의 신라 왕명인 이사금(尼師今)의 ‘금’도 간과 같이 왕이나 수장을 나타내는 존칭어다(덧붙이자면, 전기가야를 세운 수로왕과 다섯 형제를 맞이한 김해의 선주민들도 ‘구간[九干]’, 그러니까 ‘아홉 간[干]’의 통치 아래 살았다. 이 ‘간’도 ‘칸’/‘한’과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다 – 옮긴이).
그렇다면 단군 왕검의 ‘검’ 또한 존칭어로서, 여기서 ‘임금’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추리할 수 있다(단, 나는 생각이 다르다. ‘단군’이 군주를 일컫는 말이고 ‘왕검’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검’은 ‘지배자/지도자/신’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풀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왕검의 ‘검’과 같은 뜻은 아니다 – 옮긴이). 따라서 한, 간, 칸뿐 아니라 금, 검, 임금 등이 모두 수장을 나타내는 말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한’은 원래 수장, 왕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 나중에 점차 나라와 민족(겨레 – 옮긴이)의 이름으로 변한(바뀐 – 옮긴이) 것이다(일리 있는 이야기다. 비엣남[Vietnam]의 다수민족인 ‘비엣[Viet]’족도 ‘킨’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 ‘킨’은 서울 경[京]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 몰려 사는 중심 민족이라는 뜻인데, 그것이 겨레의 이름이 된 사실을 생각하면, ‘우두머리 겨레’/‘임금이 나온 겨레’라는 뜻으로 ‘한’을 쓰다가 그것이 아예 나라와 겨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옮긴이).[단, 나는 한민족의 ‘한’이 ‘큰’이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는 풀이도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은 원래 ‘큰’이라는 뜻과 ‘우두머리’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단군 신화(단군사화 – 옮긴이)에 등장하는(나오는 – 옮긴이) ‘환웅(桓雄)’, 환인(桓因)의 ‘환(桓)’도 ‘한’과 같은 말이라는 설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하겠다(나는 생각이 다르다. ‘환인’과 ‘환웅’의 ‘환’은 ‘하늘’을 줄인 말이지, ‘우두머리’나 ‘큰’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연 선사가 환인을 소개하면서 하늘의 신 인드라를 뜻하는 ‘제석’이라고 풀이한 점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 옮긴이).
― 『 상식 밖의 한국사 』(‘남경태’ 지음, ‘(주)새길’ 펴냄, 1995년)에서
― 음력 7월 23일에, 아사달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