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민주화의 첫 이벤트는 솔론이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 정계에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정권을 잡은 솔론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과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절충적인 개혁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원래 아테네도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왕정으로 시작했었다. 그러나 솔론이 등장했을 무렵, 왕정은 이미 사라지고 귀족들이 득세하는 귀족정으로 변해있었다. 왕의 통치에서 여러 명의 귀족 통치로 이행한 것이나, 이 ‘여러 명의 귀족들’은 아테네인 절대 다수인 시민들을 대변하지는 않았다.오직 귀족을 위한 귀족들의 통치였다.
귀족정의 수장은 ‘아르콘’(집정관)이라 불렸다. 그 외에도 군대 총사령관격인 대장군과 종교를 관장하는 대사제를 한명씩 두었다. 이 3명이 아테네 행정,군사, 종교의 중추였다. 또 그 아래로 6명의 하위 장관급 관리를 두어 총 9명의 주요 직책이 존재했다.이들은 모두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 행정관들은 민회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민회 역시 귀족에 의해 장악되다시피 했었다.
귀족들은 보통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피를 통해 내려온 집권세력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경제의 많은 부분을 농업에 의존하던 초기 아테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상업이라는 부를 창출하는 새로운 업종으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기존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보다 많은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상인들이 차차 경제적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평민들도 있었고, 이들은 점차 쌓여가는 부에 어울릴 정치적 입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귀족의 대토지 소유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농민들은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팔아야했고, 군인에게 있어 무기나 다름없는 토지를 잃어버린 많은 수의 농민은 농노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불만은 당시 아테네 하늘에 가득했다.
게다가 이런 힘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구체제 틀이 있었다. 그것은 솔론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제정된 일명 ‘드라콘’법이라는 악법이었다. 그 처벌조항이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아 이른바 ‘피로 쓰여진 법‘이라 불릴 정도였고 그 폐단도 극심했다.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의미는 있었지만, 사소한 잘못을 해도 사형을 당하고,빚을 지면 노예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였던 공포의 대명사였다.

솔론의 법
솔론은 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했다. 먼저 그는 말 많던 드라콘법의 처벌 조항을 완화하고, 빚더미로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시키는가하면, 시민들의 빚을 탕감해주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 애썼다. 위대한 솔론은 아테네 시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다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규정을 강화한 것이다.
더불어 솔론은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대폭 개방하는 혁신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인류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우선 그는 귀족, 중산층, 무산자 할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을 경제력에 따라 등급을 매겨 분류했다. 여기서 말한 경제력이란 ‘토지’를 기초로 했다.
즉 각자 소유한 토지의 면적과 수확량에 따라 모든 시민을 4개의 등급으로 나눈 것이다. 1등급이 가장 부유한 계층이었고, 그 아래로 2등급, 3등급 순으로 재산순위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었고, 마지막 4등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빼고는 재산이 없는 무산자들로 구분했다.


아테네의 새로운 법과 솔론
이 경제적 등급에 따라 전시에 동원되는 병과도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상위 두개의 등급은 기마 중장보병, 세 번째 등급은 말이 없는 일반 중장보병, 네 번째 등급 무산자들은 함대의 노를 젓는 노잡이로 배치되었다.
이렇게 경제력과 병과를 한데 묶어 동시에 취급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중장보병이 갖춰야할 무기나 갑옷 등 전투장비와 기마병에 필수인 말(馬)이 상당히 고가여서, 스스로 이를 구입하기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즉 솔론의 4개 등급은 경제력이라는 겉표지를 달고 있었으나 실상은 군사적 요소라는 내용물도 함께 담고 있었다. 물론 솔론이 추구한 개혁의 첫 번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귀족과 일반시민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보다 많은 이들을 중장보병의 대열로 끌어들이고, 또 점차 중요성이 높아가는 해군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수의 노잡이들을 무상으로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시간적 투자가 필요한 군사적 의무를 부여하면서, 그 보상으로 정치 참여 기회를 선사한 것이다.
드디어 4개의 등급으로 시민을 구분하는 작업을 마친 솔론은 이들 모두에게, 그러니까 귀족부터 무산자들에 이르기까지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민회 출석을 허용했다. 이제 아테네 시민 모두가 민회 위원이 된 것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아테네의 민회는 집정관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리를 선출하는 등 기본적인 국내 정책의 결정은 물론, 전쟁과 평화의 결정, 외교정책, 수출입정책 등 특히 대외 문제를 의결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솔론에 의해 이룩된 아테네 시민 모두의 민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리스 해군의 전함은 훗날 삼단 노를 가진 갤리선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무수한 노잡이들이 필요했고, 이 역할을 무산자 계급이 담당하며,
훗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이들 계급의 위상은 괄목상대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에게 민회 참석권을 일괄적으로 부여하고 끝낼 것이었다면, 어렵게 등급을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 등급은 아직 하나의 계층적 장벽을 남겨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즉 집정관 및 행정관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은 오직 상위 2개의 등급에게만 부여되었고 3등급과4등급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덧붙여 솔론은 민회가 어떤 안건을 의결하기 전에 민회가 결정할 안건을 미리 준비하는 기관으로서‘400인 회의’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참가가 가능한 등급은 1등급에서 3등급까지로 정했고, 역시 4등급은 여기서도 제외시켰다. 이렇게 경제력에 따라 약간씩의 차등을 두고 정치 참여를 허용한 솔론의 개혁과 정치를 흔히들 ‘금권정치’라고도 부른다.
물론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민 모두에게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하겠다. 신성한 피는 이제 신성한 돈으로 바뀌고 있었다. 타고난 피는 스스로 바꿀 수 없지만, 경제력은 바뀔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는 품고 있다. 즉 태생의 한계는 이제 겨우 벗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지배, 피지배 계층의 불만을 봉합한다는 목표를 미리 정해놓은 개혁이었으니 예초부터 중간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실 환영받는 것은 고사하고 반발이 심했다.
귀족들은 지배자로서의 고유 권한 일부를 뚝하고 떼어 평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평민들도 그들 나름대로 불만이 없지 않았다. 즉 평민들 중 대다수는 솔론이 제시한 경제력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3등급이나 4등급에 속했고, 이들은 개혁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뜻은 가상했으나 반대파의 강력한 압력에 못 견딘 솔론은 아테네를 떠나야했고 에게해 여러 나라를 이리저리 유랑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솔론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솔론은 실패한 개혁가의 비참한 말로의 역사적인 첫 페이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