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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 포스트구조주의적 인류학으로의 여정』(원제 Canibal
Metaphysics: For a Post-structural Anthropology 2014년 12월 출간)의 일본어판(2015년 10월 출간)
해설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한국에서 지식계는 물론 인류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인류학자이다.
다음의 글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을 전혀 알 수는 없고,
다만 그의 학문적 의의와 계보를 엿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먼저 공부해두어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안티나르시스』로 : 『식인의 형이상학』 해설
1970년대까지 현대사상 속에서 인류학은 매우 철학에 가까운 학문이었다.
그 속에는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발생한 유파이며, 그것은 항상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 전체를 아우를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반세기,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의 이론이 융성했고, 그 속에서 데리다와 스피박의 주장은 여러 방식으로
인류학과 관련된다.
일본 또한 민속학과 고유의 사상사의 발굴이 다방면에서 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인류학의 ‘이론’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류학 자신이 이미 탐구할 ‘미개’의 땅을 잃었다는 사정이 있을는지 모른다
(브루노 라투르가 ‘과학’ 인류학이라는 장르로 활약하고 있고 최근 우주인류학까지 선언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현저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류학은 진정 힘을 잃은 것일까?
특히 철학에 대해 혹은 철학이라는 유럽적인 지식세계의 내부에서 저항하는 강한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라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출신의 이 인류학자는 영어권에도 불어권
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의 상징인 브라질에서 출현한 이 인류학자의 존재는 다시금 인류학 이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연결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의 이론적 교착을
이뤄내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현대철학에서 아감벤 사상의 유행과 유사한 점이 있다.
벤야민과 푸코와 들뢰즈를 연결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매우 깊은 곳에서 로마적 종교성을 이끌어내었다.
이처럼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영미계의 인류학자인 스트라샌과 와그너, 그리고
프랑스계의 데스콜라와 라투르, 중국사상학자인 프랑소와 줄리안, 들뢰즈&가타리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연계하고 횡단한다.
그 속에서 그의 사상의 중핵은 물론 레비-스트로스이며, 나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배경에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있다.
그에 입각한 전개는 대단히 견실하다.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인류학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본래 일본은 영미권과 독일, 프랑스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제3자로서 이탈리아나 브라질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거의 누구도 그렇게 한 이는 없다(물론 발신하는 언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게다가 그 이상의 문제로는 그동안 스트라샌이나 데스콜라의,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저작마저
일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일본의 인문학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더 이상 따져들
수가 없다.
다만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번역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사정에 대해 조금
이라도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 서설은 이 정도로 해두자.
그의 이 책은 모든 점에서 현대철학의 성과를 인류학으로 받아 안고 독자의 개념설정을 시도한다는 의미
에서 극히 야심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좁은 범위에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를 들뢰즈&가타리를 통해 재독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들뢰즈&가타리가 이룬 철학지리학적인 탐구를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5장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의 포스트모던의 흐름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부당하게 경시되어왔다는 사정이 있다
(이 점은 푸코와 데리다가 일찍부터 사회과학화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조류는 실제로는 들뢰즈&가타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어 온, 애초부터 영국의 메를린
스트라샌(『증여의 젠더』)과 미국의 로이 와그너의 주장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라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지적한다.
나아가 프랑스 인류학과의 연관에도 그는 주시한다.
현재 프랑스 인류학은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과 이어지는 속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영향권 하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가 칭찬하면서도 비판하는 필리페 데스콜라(『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주장과 그에 연결되는
인류학의 본류의 논의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크게)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
이르기까지의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인 데스콜라 또한 그러한 것에 대해—그는 데스콜라의 업적에 대해 아낌
없이 상찬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등의 이론도 데스콜라와 연관시킨다—,
후기의 레비-스트로스가 들뢰즈&가타리의 특히 『천개의 고원』의 생성과 리좀의 논의와 깊게 중첩
된다는 것을 밝혀낸다.
토템적인 조합의 사고가 아닌 혼인=연계(alliance)라는 개념(그와 대립하는 것은 직선적인 계보(filiation)
이다)을 강조하며, 생물학적(베르그송)ㆍ인류학적(『신화이론』의 레비-스트로스)인 생성적 리좀성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후자의 논의를 확장시킨다.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들뢰즈&가타리의 인류학적 기술, 특히 『안티오이디푸스』를 인류학의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행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리좀과 생성이라는 관점이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지 않는 영미의 인류
학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이론』을 독해할 때에도, 미래 인류학의 논의를 추진해가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것을 그가 명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시도의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서두에 언급한 『안티나르시스』라는 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본래 그가 쓰고자 했지만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이며, 바로 이 책이 그 일부로 자리한다.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 신체와 식인이라는 테마도 이 개념으로 수렴된다
(당연히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자의 독자적인 패러프레이즈이다).
안티나르시스라는 개념은 극히 광대한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물론 포르투칼의 구식민지 출신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그는 상층계급에서 성장
했기 때문에 영어도 불어도 능숙하다),
비서양이라는 입장에서 인류학을 검토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칙으로서 제시된다.
서양인에게 인류학이란 언제나 ‘타자’의 탐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 대한 타자로 설정되며 타자 속에서 다른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기에
나르시스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이 탐구의 대상이든지, 서양적인 원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모든 관점의 중심이다.
인류학의 ‘성립’과 연관해서도 여지없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이 중심에 있다.
그런데 관찰대상이 되는 아마존의 인디오는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자신은 인간이자 문명인이고, 다른 문명권의 서양인이 비인간이다.
인디오는 당연히 서양인을 비인간으로서, 이물로서 관찰한다.
그들 자신의 고유의 기술이 있다.
여기서 인류학적 기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유럽의 관점도 아마존의 관점도 포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퍼스펙티브주의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의 관점—그 자신이 다자연주의의 아이디어를 공급하는—에서 보면, 동물도 관점이
있고 사자(死者)도 관점이 있다.
그는 동물이 인간을 보는 순간에는 동물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안티나르시스는 인간과 자기의 측면을 고정하고 거기에서 타자의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서양인에게는 서양인이 보는 관점이 있으며, 인디오에게는 인디오가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실재하고 그게 대해 다양한 문화적 상대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나 사자(死者)의 문화가 있으며 각각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되는 자연은 일의적(一意的)인 것으로 규정되고 만다.
나아가 그러한 ‘객체적’인 대상X 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손님에게 대접하는 맥주는 어떤 동물들에게는 피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대상으로서 부여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맥주이고 어떤 동물에게는 피인가 라고 묻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있는 맥주/피로서의, 그 자신이 다양체인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양체로서의 자연, 그 속의 잠재성 그 자체를 다자연주의는 긍정한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자연주의가 해석의 혹은 이문화적(동물의, 사자의) 관점의, 인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을 묻는다면 이렇다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동물에게는 동물이 인간이며, 사자에게는 사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학자는 현지인에게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장하는 다자연주의는 단순한 다문화주의의 자연화적 비전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다자연주의는 확실의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번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번역이 배반인 것처럼 어떤 이중의
뒤틀림을 예비하는 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번역이 본래 배반에 가까운 작용이듯이 생성으로서의 변용도 그렇게 찾아진다.
다자연주의에는 들뢰즈&가타리적인 잠재성의 다양체로서의 자연을 도입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변용이
언제나 일어난다.
우리 자신이 인간/비인간의 이행 그 자체이다.
신체의 중요성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점이란 본래 신체적인 것이다. 다자연적인 것이란 그 자신이 신체이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들뢰즈&가타리에서 마이너철학의 계보를 연결지음과 동시에 아메리카인디오 독자의
세계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으로 말하면, 토테미즘적인 분류를 넘어 어떤 샤머니즘적인 의례를 거쳐 포식의 인류학(아마존의
식인이라는 존재방식, 즉 신체를 먹는 존재방식은 alliance의 수행에서 중요하다)까지 확장된다.
포식을 통해 우리는 신체를 자신 안으로 거둬들이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어 다양체로 변용하는,
아니 본래 그와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는 그곳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러 안티나르시스의 혹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적인 다자연주의의 영역의 광대함이 밝혀
진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후기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중첩시킴으로써,
안티나르시스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티나르시스가 안티오이디푸스의 패러프레이즈라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오이디푸스
라는 그리스=서양적인 문화의 근원에 대한 아메리카인디오적인 자연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미도
상당히 강하다.
최근 프랑스사상(아니, 마르크스와 벤야민,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크리프케(Saul Aaron Kripke)까지
고려하면 서양현대사상 그 자체)의 축은 그리스사상 대 유대사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유대를
그리스에 대항하게 하는 것으로서 다루는 ‘타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브라질에서 발언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아메리카인디오를 포함한
타자이다.
그리스와도 예루살렘과도 일절 관련하지 않는 ‘타자’.
프랑소와 줄리안이 중국을 다루면서 말하는 ‘밖’을 연상시키는 그것.
다자연주의가 다문화주의를 뒤집은 것이 아닌, 이러한 거대한 대칭축을 포함하면서 그려내는 것으로서.
그렇다면 일본은? 줄리안의 중국과도 다른 일본은? 그에 대한 답은 이제 그가 아닌 우리가 내려야 한다.
이러한 광대한 인류학적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서, 진정 지구화라는 사태가 진행하는 시대에서 시작되었
기에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인류학에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들은 제각각 포루투칼어와 영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정은 크다
(이 책에서 필자 본인은 브라질 포루투칼어의 번역자의 이름을 들면서 불어판을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번역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같이, 글로벌세계에서 메이저언어로 마이너한
지역으로부터의 주장을 발신하는 전략은 앞으로 점차 커질 것이다.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를 읽어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좋든 싫든 들뢰즈&가타리의 사고가 단순한 유행이나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과학에서 그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리좀이든 다양체이든 그 자신으로서는 엄밀한 마이너과학의 개념으로서 읽힐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사고를 레비-스트로스 후기와 접합시킴으로써 그 잠재적인 힘을 원리적인 측면에서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를 수렴하면서 그리스적인 것이 아닌 자연, 즉 아폴론적이지도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아닌 자연, 경계의 자연에 그대로 관련하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유럽사상 일변도였던 ‘철학’이라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
(이 책 12장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친구’라는 개념의 유럽성이 비판되며, 아메리카인디오의
‘적’의 개념이 강하게 밀려나오는 등 이 책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메리카인디오와 그리스-유대의 자연이라는 광역의 논의를 영역으로 하는
이 책은 반드시 일본어의 비전을 밝혀줄 것이며, 그리하여 일본의 관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환기
시켜줄 것이다.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식인의 형이상학
1장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1.
나는 예전부터 내 분야의 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오마주로서 책을 쓰고 싶었다. 『안티 나르시스—마이너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라 이름 붙여질 책이 그것이다.
동시대의 인류학을 관통하는 개념적 긴장을 특징짓는 것이 그 책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곧 이 프로젝트에 모순이 있음을 알았다.
즉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안티 나르시스라는 주제의 탁월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세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허구 속 작품 혹은 보이지 않는 작품—그 최적의 해설자는 보르헤스이다—으로 남겨
두자고 결정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책 그 자체보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독자의 뛰어난 해석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쓰기보다 마치 타인이 그것을 쓴 것처럼 여기고 그 책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책, 『식인의 형이상학』은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책에 대한 소개서이다.
이 책은 몇 번이나 구상해왔던 것인데,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지면에서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나의 전문분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민족지적’ 현재—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인류학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민족에게 개념적으로 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함의는 정반대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류학 이론의 내부에 있는 차이[相違]나 변동은 대개 (오로지 역사-비판적인 관점에서) 인류학자가 속한
사회형태, 이데올로기논쟁, 지적세계, 학문적인 맥락의 차이와 국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일까?
인류학 이론에 의해 도입된 가장 흥미로운 개념, 질문, 실체, 행위자(agent)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혹은
민족, 집합체)의 상상력에서 그 원천을 찾아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퍼스펙티브를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 않을까?
인류학의 동요하는 오리지널리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세계와 ‘객체’의 세계에서 산출된 개념과 실천 간의 결합—항상 다의적이지만 종종 다산적이기도
하다—에야말로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질문은 인식론적인, 즉 정치적인 질문이다.
식민주의는 인류학을 하나의 역사적인 아프리오리로서 구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인류학이 그 인과응보의
순환을 닫아놓고 있음을 우리가 다소간 찬성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이제야
그 학문분야를 재구축하는 프로세스를 급진화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류학은 그 새로운 사명,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이론-실천을 전면적으로 떠안을 용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학은 당연히 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인류학자가 연구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닌—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그 무엇에 대해서든)—인류학의 지적 프로젝트가 그것에서 산출한 사회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일부의 범위에서는 다음의 설을 받아들여 왔다.
즉 인류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이국취향이고 미개주의이며 서양의 야비한 흥미와 관심에 따라 ‘타자’가
항상 ‘표상되거나’ ‘발명된’ 도착적인 무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이든 사회학이든 이러한 자만에 가득한 온정주의를 두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는 발언권을 주지 않으면서 이른바 타자를 변모시키고
만다.
주체적 환상이라고도 하는 것을 이중화하고 식민주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라는 객체적 생산
물의 변증법에 호소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욕에 모멸을 덧붙이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비서양적이고 전통
적인 민족에 대해 ‘서양적인’ 언설을 밀어붙인다 해도 우리의 ‘타자의 표상’을 미화할 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이론적인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자민족중심주의의 최종단계이다.
다름[他]에 대해서도 같음[同]을 보기 위해—즉 타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은 ‘우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결국 우리는 목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여정을 단축시키는 것에 만족
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 즉 우리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류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돌려 세운다’(Maniglier
2005b: 773-774).
왜냐하면 모든 이문화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실험을 감행하는 기회
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 속의 변화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문화는 그 연구에 기초해서 정식화되는 사회와 문화의 이론에 영향을 주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공생산(共生産)하는 사고로부터 온갖 귀결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기묘한 구축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내파하지 않도록 그 흔한 ‘작은 서사’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적인 고발을 하는 필자가 쓴 그대로 인류학은 항상 대상을 잘못 구축하는데, 비판에 직면한 그때부터
광명을 비추고 대상을 정직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과 타자』(Fabian 1983)나 그와 비슷한 그 외의 많은 논의로 경도되는 곳에서
우리가 인지적인 절망이라는 정체에 새롭게 직면하는 것은 사물 자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탓이거나
그도 아니면 타자가 보편적인 이성을 체현해서 미신(迷信)을 퍼뜨리는 케케묵은 신비주의적인 마술 탓인
지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선주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전의 저자들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선주민을 이국적인 대상으로 보고 보지 못하는 것에 의해—그들은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든 간에 인류학의 지나친 이국취향이 그 반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루스트는 시간과 타자에 대해 조금은 숙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직전의 그렇게 지나친 과거만큼 오래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인지-정치의 재귀적인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맹종하는 것 같은 관계성
속에 인류학을 끌어들이는 것, 즉 아첨하는 대항의식을 포함해서 이 두 과학이 설파하는 근대의 메타
서사를 떠안는 것이다(England et Leach 2000).
이 과학들은 세계의 모든 집합체의 실존에 관한 실험을 분석자의 ‘사고의 집합체’라는 관점에서 권위
주의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는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 지지해야 하는 것은 인류학은 자유로운 환경에 계속해서 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학은 거리의 기법에 계속해서 거해야 하며, 서양적인 혼에 감추어진 아이러니로부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서양이 하나의 추상이라고 한다면, 그 혼도 결국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밀어붙여온, 이성을 외재화하는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충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 멈출 수가 없는, 동일성이라는 갑갑한 개인실 너머의 이야기이다.
진정한 내(內 endo)-인류학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 분야의 절망적인 논제인데,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외(外 exo)-인류학—현실적인 중요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필드의 과학’—에 의해 촉발되어온
이론적인 환기장치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목적은 중요한 인류학 이론이 모두 선주민의 지적실천의 번역이라는 주장을
예증하는 데에 있다.
이 이론은 학문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대상의 위치’에 있는 집합체의 지적인 실천과 강한 구조적 연속
성을 가진다.
인류학 담론의 변용을 퍼포머티브하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학 담론은 본래 학문분야를 변용하는 조건을 내화한다.
즉 인류학에서 사실이란 (물론 이론적으로는)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에 대한 민족-인류학적 담론의 왜곡
이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이런 길을 가는 필자는 아메리카 연구를 하는 민족학자이다)라는 아마존
사람들의 관념을 예로 들어—이른바 손에 쥐고—봄으로써 『안티 나르시스』는 우리가 연구하는 집합
체의 고유한 사고스타일이 이 분야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스타일과 그 함의를 파헤쳐 검토함으로써 특히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낼 것이다.
개념의 새로운 인류학, 그것은 결국 인류학의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반(反)-실현하는 것인데, 그에 따라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의 존재론적인 자기규정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은 인간(그리고 비인간)의 사고를
인식의 장치들—분류, 서술, 판단, 표상…—로 환원한다기보다 훨씬 더 우선시된다.
‘비교존재론’(Holbraad 2003)으로서의 인류학—그것이 진정한 내재라는 관점이다.
사고에 대해 다른 사고를 한다는 이러한 작업의 기회와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념적인 상상력—
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집합체의 삶에 고유한 창조성과 성찰성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에
대한 인류학 이론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2.
이 책의 제목이 의도하는 것은 인류학이 이 분야에서 『안티 나르시스』에 걸맞는 위대한 책의 최초의
장들을 쓰기 시작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의 창설신화에서 중심인물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인류학의 성스
러운 수호자 혹은 악마적인 후견인의 후보자를 나르키소스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인 혹은 악마는 (특히 ‘철학적’이라고 말해지는 버전에서는) 인류학적 담론의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그들(우리이기도 하다), 비-서양, 비-근대, 비-인간—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징과 기준을
결정한다는 망상에 항상 지나치게 사로잡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서양적이며 비-근대적인 것으로서 타자를 구축하는 속에서 타자를 ‘가지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합리성, 개인주의와 기독교는 타자를 가지지 않을까?
(아마도 잭 구디에 대해서는 덜 조심해도 될 것 같다. 즉 알파벳의 에크리튀르와 혼자(婚資: 신부대와 지참금)에는 타자성이 없을까? 나아가 그러한 타자를 비-인간(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타자로서의 비-인간)으로
자아내는 속에서 당연히 크게 결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사의 혼, 랑가주, 노동, 열림, 금지, 니오터니(neoteny)[각주:1], 메타 지향성일까?
이것들의 결여는 모두 상통한다. 왜냐하면 실제는 어느 것도 같기 때문이며, 문제는 바로 답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분할의 형식, 혹은 그와 마찬가지의 배제의 형식이 인종을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서양의 생물학
적인 유사관계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형식이 온갖 타종(他種)과 타민족을 일반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타자성으로 혼합해버린다.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타자와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를 자문하는 것은—타의 종, 타의 문화,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이다—이미 하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인간(에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인간’을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거나
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거나 인간존재는 자유로우며 불확정하다는 등은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명백히 역사적 이유를 갖지 않으며 은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응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고유성은 고유성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그에 응답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타자의 모든 고유성에 대한 무한의 권리를 부여했으리라.
‘우리’의 지적전통에서 천년을 이어져온 것, 바로 그것이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 없음에 의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한다.
결여, 유한성, 부재는 남은 생명을 위해 종(種)이 품도록 운명지어진 구별이다(마치 우리에게 그것을 믿게
하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무거운 짐, 그것은 보편적인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은 주지하다시피(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세계빈곤적’이다.
종달새는 말할 것도 없다…. 비서양의 인간에 대해서도 그것들에게는 세계 속에서 얼마 안되는 몫만이
할당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으로서 우리만이 완성된 인간,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장대한 미완성이며 세계의 억만장자이며,
세계의 저축가이며, ‘세계를 본뜨는 자들’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바로 모든 식민주의의 기원이다.
그에 따라 문제는 변화하며 그에 답하는 방법도 변화한다.
즉 마이너인류학은 거대한 분할에 저항하고 작은 다양체를 증식시킨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한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이다.
완성되고 마무리된 휴머니즘에 저항하는, ‘제한 없는 휴머니즘’(Manigler 2000)이며, 그것은 인간성을
예외적인 영역으로 두지 않는다.
다양체를 증식시켜야 함을 강조해 두겠다.
왜냐하면 여기서 데리다(2006)를 상기하는 것이 좋은데, 문제는 기호와 세계, 인격과 사물,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을 통합-분할하는 경계를 파기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안이함이나 일원론의 가벼움이라는 것은 융합주의의 곡선으로 구부러지며, 그것들을 ‘환원
하지 않는’(라투르) 것, 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윤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접어서 조밀화하고 무지개빛으로 빛나게 하며 구부려 꺾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일반화한 연속색채주의…”(Deleuze et Guatari 1980: 123).
연속색채주의, 이 구조주의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주의의 흐름과 얽혀있는 프로젝트가 작성된다.
3.
『안티 나르시스』 초고는 인류학의 학문분야를 근저에서부터 재생하는 책무를 짊어진 몇몇 인류학자
들에 의해 정성스레 개시되었다.
잘 알려진 저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작업은 미숙한 평가를 받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출신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하는 것은 우선 미국인 로이 와그너이다.
그의 공적은 ‘반전(reverse) 인류학’에 대한 풍부한 착상과 함께 ‘발명’과 ‘관습’에 관한 훌륭한 기호론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 개념의 비전을 그려낸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를린 스트래선은 페미니즘과 인류학을 교착시킨 탈구축-잠세화에 공헌했다.
그것은 바로 ‘선주민의 감성론’과 ‘선주민의 분석’이라는 발상-력을 제시한 것이며, 그것이 서양적 이성에
의한 멜라네시아적인 반(反)-비판이라는 이른바 두 개의 면을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포스트-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적 기술의 방식을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고뉴(Bourgogne)[각주:2] 출신의 브루노 라투르는 집합체와 ANT(행위자네트워크론)의 초존재론적
개념을 제출하고 ‘지금(근대)인 적이 없다’는 역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었으며 과학실험에 대한 인류학에 다시금 매력을 불어넣었다.
부작위 혹은 작위에 의한 오류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최근에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그 외의
많은 연구자들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러나 인용되든 말든 그들 앞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 분야의 과거에 눈을 돌려 과거를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로 시선을 향하고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바에 따라 루소를 창시자로 봐야 한다면,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구조주의에 의해
인간과학을 재구축하려한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인류학으로 이르는 도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잠재적
으로 ‘무근거화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이 도정은 ‘모세가 결코 그 훌륭함을 알지 못한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과 마찬가지’
이며, 아마도 그가 실제로는 나아가지 않은 도정이다. 인류학적인 지(知)는 선주민의 실천의 하나의 변용
으로 간주되고 ‘인류학은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탐구이다’(레비-스트로스 1958/
1954: 397).
그리고 그 10년 후에는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 정의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올 수밖에 없는 철학’
(Hamberger 2004: 345)의 안내자를 설정했다.
그것은 무제한성과 잠재성이라는 표지에 의해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친족연구에 관한 구조주의자의 유산을 총결산한
잡지 『인간』의 어느 권호의 후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강렬하고도 결정적인 다음의 코멘트를 남겨두었다.
사람과 신, 친구와 적, 내부자와 외부자라는 대립의 중립으로서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착상한 유연관계(類緣關係)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브라질의 동료들이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만한 사태를 끌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이 개념의 경향으로부터 어떤 결말을 가진 인상이 분명해졌다. 기쁘든 슬프든 어느 쪽이든 철학은 다시금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이국의 민족에 기대어 산발적으로 도움을 얻은 우리의 철학이 아니라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즉 그들의 철학이다. (레비-스트로스 2000: 720)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브라질의 동료들에 의해 정확하게 기술된 논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실제로 우리는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유연관계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관습을
민족지의 한 축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비-관계성의 양상에 대해 환기한 두 개의 철학—‘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구동시킨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사이에서 보이는 관계성이라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한 개략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기쁘든 슬프든 여하간 문제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혹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의 모호한
경계의 양측에 구성된 초영역적인 문제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 간에 다시금 확실한 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의 혁명은 이 수십년 간 생태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세계를 완전히 고난의 장소로 변형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 직전에 일어난 사고의 열광과 풍요의 그 짧은 시기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길이 있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에는 한편으로는 아마존의 사고에 기대는 것—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초’(Taylor 2004: 97)를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이며, 다른 한편으로 질 들뢰즈에 의한 ‘이단의’ 구조주의(Lapoujade 2006)에 기대는 것이다.
목적도 둘이다.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개념창조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류학이 문제이다. 조금 전 과거를 되돌아본 탐구의 의도는 회고적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있다.
어떤 가능성을 불러내는 것, 어떤 구름의 열린 틈을 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학문분야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지적인 프로젝트로서, 정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는 다른 결말—다소 과장되게 말하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1. 형태는 유생(幼生)인 채 성적으로 성숙(成熟)해지는 일. 유형 성숙(幼形成熟).
2. 프랑스 중부의 손(Saône) 강 우안의 지방.
퍼스펙티브주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으로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조금 어렵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고 그의 사상의 심오함에 매료될 것이다. 그의 논리가 명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사상보다 그의 시야가 훨씬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퍼스펙티브주의
1.
타니아 스톨츠 리마(Tânia Stolze Lima)와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는 관념을 제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학의 행적을 재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이념과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재형상화하는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는 이 지적혼란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이 표현이야말로 적절하다).
그 속에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적인 개념이 덧붙여지는데, 이 개념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현대철학의
어떤 프로그램의 의외의 파트너—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암약하는 선구자—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가능세계의 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 근대성의 엄청난 이항대립의 외부에서 일거에 만들어진 것,
혹은 모든 존재론적인 물음에 인식론적인 회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비판주의의 헤게모니의 종언을 확실히
고하며 ‘초월론적 경험론’과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깃발 하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고의 도주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포식의 형이상학’을 우주론적
으로 상정한 분석을 통해 명확해진다.
레비-스트로스의 요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이 형이상학은 결연관계를 보여주는 선주민의 범주의 강력한 사변적 생산성에서 그 가장 높은 표현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다른 개념, 즉 잠재적인 결연관계라는 개념으로 번역했다.
잠재적인 결연관계란 들뢰즈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의 ‘타자의 구조’라고 불렀던 특징적인 도식주의를
뜻한다.
즉 그것은 카니발리즘=식인이라는 기호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며, 이 세계의 주민을 상상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종들 간의 퍼스펙티브주의, 존재론적인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이 선주민의 또 하나의 인류학의 세 측면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서양의 인류학과 대칭적인 반대방향의 변용이다
—여기서 대칭적이라는 것은 라투르의 의미에서이며, 반대방향이라는 것은 와그너의 반전(reverse)의 인류학의 의미에서이다.
이 삼각형을 그려냄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우리[의 철학]’의 대극에 있는 ‘이국적인 사람들’의 철학의 윤곽을 분명히 묘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가타리 1991)의 제4장(「철학지리학」)에서 착수한 압도적인 프로그램을 현실적인 것으로 시도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례에서 가령 방법론적인 모호함이나 의도적인 다의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해도—언제든
그러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우리는 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2.
이 작업은 완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즉 현실에 내재하는 퍼스펙티브라는 다양체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아마존의 코스모폴리탄성에 관해 우리가 행한 탐구의 결과와 레비-스트로스가 『인종과 역사』에서 보고한 아메리카 대륙정복의 주제로 잘 알려진 우화 사이에서 어떤 공명이 인다는 것을 불현듯 간취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몇 년 후 앤틸리스 제도에서 스페인인이 선주민들에게 혼이 있는지를 조사
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물에 담가놓으려 했다. (레비-스트로스 1973/1952: 384)
이 저자는 이 인류학적인 갈등 속에서 어떤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찾아내었다.
즉 인간본성의 전형적인 출현이란 그들 자신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선천적인 탐욕은 인간성이라는 속성을 하나의 전체의 종(種)으로 확장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인데,
그러한 탐욕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인간성이라는] 속성 중 하나이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란 상식(필시 그것은 단지 통각이라는 계기에 불과하지만)과 같은 것이며 더 잘 분할된
세계의 문제이다.
교훈이 친숙하다고 해서 교훈의 엄숙함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같음에게서 다름은 (선주민의) 다름에게서 다름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나타나며, 같음은
부지불식간에 다름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분명 이 우화에 매료되었고 『슬픈 열대』에서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보족적으로 짓궂은 주름을 삽입한다.
양자 간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며, 타자의 인간성에 관한 조사에서 서양인은 사회과학을 채용하는
반면 선주민은 오히려 자연과학을 신용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선주민이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전자의 주장에 반해, 후자는 서양인이 신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남기며 끝낸다.
“나의 결론은 [양자가] 모두 무지하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선주민]의 행동이 더 인간에 적합하다”(1955: 81-83). 만약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례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타자에 관해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해도, 다름의 다름은 같음의 다름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참은 그 반대일 것이다.
실제로 선주민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관한 두 타자—동물성과 신성(神性)—간의 관계성은 우리가 기독교로
부터 승계받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사적인 대비는 타이노의 우주론적인 위계보다 오히려 우리의 그것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다.
여하간 이것은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매개(중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끌어
내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존재론의 체제는 서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체제와 다르다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신체와 마음에 대해 역전의 기호작용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앤틸리스 제도[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스페인인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차원이지만, 선주민에게 그것은 신체이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가진 것을 (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가진 것을 (동물이나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한지를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나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3.
로이 와그너(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이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매개가 된 멜라네시아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신체는 생득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존재론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자연’)의 차원에 속하며,
그러한 차원은 ‘관습적’인 기호화조작의 반(反)-발명적인 결과이다.
그에 반해 마음은 구축되는 차원에 있다.
그것은 ‘분화하는’ 기호화의 산물이며 “근본적인 구별을 넘어서거나 이 세계의 특이한 개체성을 구체화함
으로써 관습적인 세계를 명시하거나 구체화한다”(Wagner 1981: 42).
한편 선주민의 세계에서 혼은 “모든 사태에 관한 암묵의 습관적인 질서의 출현…으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혼을 가진 자가 타자(존재)와 비슷한 양태를 총합하며 나아가 그 양태의 피안에서 혼을 가진 자는
그들[타자]을 차이화한다”(같은 책 94).
반대로 신체는 행위자(agent)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생득적인 기반이나 ‘내재적인 인간성’의 보편성에 대항해서 만들어 내야하는 근본적인 형상이다
(같은 책 86-89).
첨언하면, 서양인들의 실천은 소여의 신체-물체(자연)의 기반으로부터 ‘혼을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문화를 분화하는 것)에 있다.
그에 비해 선주민의 실천은 소여의 사회-정신의 연속성으로부터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공간을 분화하는 것)에 있다.
후에 살펴보듯이 그것은 신화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된다.
와그너의 이론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치밀하고 매우 독창적이며 계몽적인 요약을 거부한다.
독자들에게 『문화의 발명』(Wagner 1981)의 일독을 권한다.
그 책의 설명은 매우 세밀한 동시에 성공적이다. 거칠게 말하면, 와그너의 기호론은 (인간 그리고 아마도
비인간에 관한) 실천의 이론이다.
그것은 상징화의 두 양태를 상호 재귀적으로 조작하면서 실천을 철저하게 일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실천이란 ⑴ 습관적 내지는 집합적인 (문자기호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그 속에서 기호는 ‘제시 대상’의 이질적인 평면으로 거슬러가는 한에서, 즉 기호가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고 간주되는 한에서 표준화된 맥락(의미론, 형식언어의 영역)에서 조직된다.
그리고 ⑵ 차이화하는 혹은 발명적인 (구체적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습관적인 상징화에 의해 표상되는
현상의 세계는 관습적인 대립을 소멸하면서 ‘그 자신에 의해 표상되는 상징’, 즉 상징과 제시 대상으로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선 주시해야 하는 것은 제시 대상의 세계—‘실재’—가 여기서는 기호론적인 효과로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기호의 타자란 ‘스스로를 표상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춘 다른 기호이다.
사건 내지는 기회로서의 현세적(現勢的)인 존재자의 존재양태는 토테고리(tautégorie)[각주:1]이다.
나아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양태 간의 대비는 그 자체가 관습화한 조작(그리고 지각)의 결과라는 것
이다.
발명과 관습의 구별은 그 자체가 관습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관습은 반(反)-관습으로부터 산출된다. 이 대비는 따라서 내재적으로 재귀적이다.
특히 인간문화는 근본적으로 상징화의 양태와 대립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문화는 ‘소여’의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행위와 발명에 대해 획득된 요소를 (습관적으로) 중시한다.
문화(관습에 대한 인간의 마이크로한 체계)는 행위자(agent)의 책임영역(‘구축된’ 세계)에 속한다고 정의됨
으로써 상징되며, 나아가 ‘소여’인 비-구축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귀속으로서의 반(反)-
구축이다)에 의해 상징된다.
문화적인 관습의 모든 총체의 핵심은 어떤 단순한 구별 속에 있다. 즉 비-관습화되거나 관습 그 자체의 비-관습화인 맥락의 타입—이것들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연히 분절화된다—,
그리고 ‘소여’ 내지는 ‘생득’이라는 관습적인 겉치레 하에서 ‘동기’로서 반(反)-발명되어야 하는 맥락의 타입 간의 구별이다. 본질적으로는 […] 두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동기 지어진 집합체(사회와 그 관습)를 ‘생득’으로서 항상 반(反)-발명하는 분화하는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사람들, 그리고 분화하는 동기를 반(反)-발명하는 집합적인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자들이다. (Wagner 1981: 51)
4.
앤틸리스 제도의 사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인류학의 교차배열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구별되기 시작하는 두 특징과 분명하게 일치한다.
첫째, 그는 예상외의 방법으로 애니미스트로서 새로운 (조금은 일방적이라고도 생각되는 방법으로) 정의된 존재론의 중심에 신체성의 이코노미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확인했다는 것은 이미 『신화학』에서 풍부하게 명시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즉 신화들의 변용의 어떤 신화적 변용이야말로 목적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엄격한 데카르트주의자와 변덕스러운 라블레주의자[각주:2]를 연결하는 하나의 산문이다.
그것은 비교에 의한 법신학적인 음울함(우리 분야를 만들어내는 권리와 의무, 질서와 원리, 범주와 ‘도덕적 인격’을 떠올려보자)에 의해 고통 받았던 우리 자신의 인류학의 망령과 같은 용어로 설명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器官)의 흐름과 물질적인 코드, 지각의 다양성과 동물로의 생성 등의 관점으로부터 형상되는 선주민의 인류학이다.
둘째, 그 덕분에 존재자의 잠재적인 차원(‘마음’)의 흔적 혹은 총칭 없는 지위에 관한 이론적 함의가 일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선주민의 지(知)의 구조적인 힘에 관한 주요한 전제로서 서양 인류학에 의해 묘사된 그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다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놓쳐버린 이미지를 쫓아내었다’.
이 이중의 비틀림, 즉 일상적인 실천에 부착된 물질주의와 사변적인 것, 애니미즘에 관한 심리주의자와 실증주의자라는 이중의 비틀림이야말로 라이프니츠, 니체, 화이트헤드, 들뢰즈에서 볼 수 있는 이러저러한 이름표와 연결된 철학적 명제와의 (적어도 증명됨과 동시에 구축되는) 유사함의 명목으로 우리가 ‘퍼스펙티브주의’라 부른 것이다.
5.
다양한 민족지학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거의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지적했을 뿐이지만—, 신세계의 많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란 시점(視點)의 다양성에서 구축된 것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
모든 존재자는 지향성의 중심이며, 그들은 다른 존재자를 그들의 특성과 각각의 능력에 의해 이해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제와 귀결은 가장 먼저 떠올릴 상대주의의 잘 알려진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은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간의 대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평면으로 정리된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관점에서 본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러한 저항은 한창 논쟁중인 존재론적 분할의 이식가능성을 의문시한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는 서로 달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 간의 분할—학문에서 마치 헌법의 제1조와 같으며, 그 속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의 오래된 모습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을 비서양의 우주론의 특정한 차원과 내재적인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한다면, 엄격한 민족학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자연’과 ‘문화’라는 두 범형과 나란한 속성, 즉 보편과 특수, 객체와 주체, 물리현상과 도덕, 사실과
가치, 소여와 창설된 것, 필연과 우연,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지도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의 우주론에 대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 특유한 표현을 지시하기 위한 ‘다자연주의’라는 표현을 활용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전자는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간의 상호 함의를 근거로 삼는다—한편으로는 신체와 실체의 객체적 보편성에 의해 보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시니피에(記意)의 주체적 고유성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인데, 아메리카 선주민의 개념은 그 반대로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양성을 상정한다.
‘문화’ 내지는 주체가 보편성의 형식을 그려내고 ‘자연’ 혹은 객체가 개별의 형식을 그려낸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민족지에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이러한 다양한 타입의 액터(actor)와 주체적인 행위자
(agent)—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후학적인 현상, 많은 경우에 대상, 그리고 인공물—가 정착한 세계를
기술하는 코스모폴리틱한 이론에 대한 참조로 넘쳐난다.
이것들 모두가 퍼스펙티브, 욕구, 인지를 배치하는 전반적인 총체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혼’과 유사한 것을 부여한다.
이 유사함은 거의 수행적인 통각의 동일한 양태를 포함한다.
즉 마음을 가진 동물과 그 외의 비인간은 ‘자신을 인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다’.
즉 지향적인 대상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측면을 가진 대상의 구성은 사회와 실재의 관계성에 의하며, 그것들은 재귀적이고 상호적으로, 즉 집합적인 대명사의 이중의 양태 하에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인간이 보는 것—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또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 제기된 철학적인 문제이다.
혼의 유사성은 이 혼이 표현하거나 지각하는 것과의 대립을 포함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 정령, 그 외의 우주적인 액터를 보는 방법은 이러한 존재자가 인간을 보거나 스스로를 보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이 토톨로지(Tautologie 동어반복)는 퍼스펙티브의 영도(零度)이다.
전형적인 인간, 그것도 규범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며 동물을 동물로서 이해
한다.
정령에 관해 말하면,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를 보는 것은 그 ‘상태’가 규범적이지 않다—병에 걸렸다거나 트랜스상태이거나 다른 부차적인 상태이다—는 것을 분명히 뜻한다.
사냥감은 인간을 정령이나 포식자로 보지만, 포식동물과 정령 측에서 보면 인간은 사냥감이다.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인간을 맥[각주:3]이나 멧돼지로 보고 죽인다’(Baer 1991: 224).
우리가 비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은 바로 그 자체로(그 각각의 동종의) 동물이나 정령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서 자신을 간취한다(혹은 생성한다).
그리고 그 버릇이나 특징은 문화적인 겉모습에 의해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음식을 인간의 음식과 같이 이해한다(재규어는 피를 옥수수 술로 보며,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는 등).
그것들은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식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으로 조직된다(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
조금 더 밀고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동물(대개의 경우 타자를 포함한 모든 것이며, 적어도 죽은 자를 포함한다)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비주의는 대개 재규어, 아나콘다, 독수리, 혹은 남미수리와 같은 대형의 포식자나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동물들이다.
또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들이다.
실제로 퍼스펙티브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이고 관계론적인 입장과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형이상학은 퍼스펙티브주의에 매우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그렇지만 그 상대적인 입장의 관계성 속에서 포식자의 힘의 서열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사실상의 인격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논점은 모든 동물종이나 존재의 모드가 그러하다는 것을 (권리상)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분류학(taxonomy), 분류, ‘민족-과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나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적(强度的)으로 인간이며, 잠재적으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신이 어떤 인간존재라는 것을 보여줄(인간존재로 변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잠세력이 문제이다.
‘인간인 것’ 그리고 ‘퍼스펙티브를 가진 것’, 그것은 정도, 맥락, 서 있는 위치의 문제이며, 어떤 종(種)인가라는 두드러진 고유성이 문제는 아니다.
어떤 비인간적인 존재는 다른 것보다도 더 완전한 방식으로 이 잠세력을 현실화하며, 나아가 그 가운데 특정한 존재자가 우리 종이 가진 잠세력보다도 더 우월한 강도를 가지고 그 잠세력을 보여준다.
이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이다(Hollowell 1960: 69).
게다가 이 문제에는 본질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aposteriori)한 (경험적인) 성질이 관련된다.
하찮은 존재자가 인간처럼 꾸밀 수 있는 더 적합한 행위자(agent)로서 (환상, 병마, 샤먼에 의해)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어떤 존재가 인격을 갖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어떤 우주론적인 도그마 이상으로, 무엇보다 ‘인격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존재자를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 그 무엇도 없다면—즉 생사회(生社會)의 다양체라는 점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규범이다.
즉 완전히 기묘한 것인데, 아마존 사람들은 무릇 있을 법하지 않은 형식으로 숨은 인간을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있을법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으로 보인다거나, 같은 종족이나 때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항상 가까지 있는 이웃에 대해 인간성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잘 알려진 자민족중심주의를 수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조건에 관한 우주론적인 독아론을 감수해왔던 옛 유럽(확실히 종(種)들 간의 간주체성이라는 위로를 통해 완화되고 있다)을 과감하게 탈마술화하는 고려로 향하면 우리가 다루는 이국적인 민족은 두 개의 유치한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게 된다.
즉 동족 간에 종종 매우 유사한 작은 차이와 완전히 다른 종들 간에 보이는 큰 유사함이라는 두 개의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그 속에서 타자는 무엇에도 이를 수 없다.
자민족중심주의와 애니미즘은 과대하든 과소하든 극단적인 것이다.
인격의 조건(인간의 형식이란 보편적인 통각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은 아마도 우리 종과 다른 집단을 ‘거절
하는’ 바로 그 때에 다른 종에게 ‘확장된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개념—내재적인 잠세력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
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그 상위에 있다. 인간성이란 동족이라는 입장에 관한 것이며,
집단의 재귀적인 모드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인간성은 포식자 혹은 먹이의 원초적인 입장과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퍼스펙티브의 타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른 집단, 다른 인간적인 다양체를 휘감게 된다.
이 유사성과 동족성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어떤 특정한 포식자의 차이라는 단호한 미결정성으로서 생성
되고 그에 선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친족관계의 프로세스는 바로 이렇게 구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착상을 주었던 것은 포식자의 내재적인 안정화로서의 ‘재생산’이며, 그 단호한 미완성
이며, 베이트슨(혹은 발리사람)이 말한 것처럼 ‘강도(强度)가 지속하는 평면’을 상찬하는 방식이다.
카니발리즘을 다루는 다른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추산한 동일성이라는 발상을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의거해서 완전히 정식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니발리즘의 문제성은 … 습관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삶이 정착하게 될 포식의 하한선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84: 144; 1971: 617 참조)
이것은 바로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교훈을 응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유사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차이는 제로로 향해간다”(레비-스트로스 1971: 32). 주지하다시피 ‘향해간다’는 동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타자를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는 ‘무엇도 무효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그 개념의 힘을 완전히 개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한까지 최소화될 때뿐이다.
예를 들어 쌍둥이 간의 차이가 그러하다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철학자들은 말한다(레비-스트로스 1991).
6.
실제 비인간이 한편으로 비가시의 얼굴 형태를 한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의 다양한 차원에서 근저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맥락, 즉 샤머니즘에서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종들 간의 신체적인 장벽을 횡단하거나 이질적인 주체성의 퍼스펙티브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숙련된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이 자신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해내는 방식으로 샤먼이 그들[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낼 때, 샤먼은 종을 넘어선 대화에서 강력한 대화자의 역할을 확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서사를 말하기 위해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데, 그것은 속인(俗人)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접촉 혹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정치적 수완, 즉 일종의 외교를 요한다.
서양의 상대주의가 공적인 정치로서 다문화주의를 채용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먼적인 퍼스펙티브주의가 채용하는 것은 우주론적인 정치로서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어떤 인식의 모드를 함의한 행동의 모드이며, 혹은 오히려 인식의 어떤 특정한 이상(理想)이다. 그러한 이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양근대가 촉진한 객체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에 있다.
이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에게는 대상의 범주가 텔로스를 부여한다.
즉 인식하는 것은 ‘객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대상에 내재하는 것과 인식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힘이며,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부당하게 혹은 피하기 어려운 대상에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인식한다는 것은 탈주체화하는 것이며, 주체의 일부를 이상적인 최소상태로 감축하기 위해 객체 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일부를 명시하는 것이다(혹은 이목을 끄는 비판효과를 확보하기 위해 주체의 일부를 확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객체화의 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객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을 재인식한다.
그리고 주체는 ‘그것’이라고 하듯이 ‘외부로부터’ 자신을 생각해내는 데 성공할 때에 자신이 객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문다.
타자의 형식은 사상(事象)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완전히 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린다.
즉 인식하는 것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려져야만 하는 것의 시점(視點)을 입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상(事象) 속의 누구’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없다면, ‘왜’라는 물음에 지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
타자의 형식은 인격이다.
유행의 어휘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인격화 내지는 샤머닉한 주체화란 정신에 관한 현대철학자(내지는 현대정신에 관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지향적인 태도’를 보편화하는 경향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주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물리적’이고 ‘함수적’(Dennett 1978)인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의 인식론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완전한 객체적 표상에 이르기 위해 ‘주위의 지향성’을 영도(零度)로 감축하고자 하는 탐구를 저 멀리 하고, 완전히 그와 정반대에 거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인식은 시스템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행위자(agent)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통해, 지향성이 최대화된 상태에서 번득임을 조준한다. 샤머니즘은 정치의 기술이라고 우리는 주창한다.
오히려 이제는 정치의 기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샤머니즘적인 기술은 진정 각각의 사건을 행위로서, 즉 상태 혹은 무엇인가의 행위주체의 지향적인 속성의 표출로서 보는 데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성공은 대상이나 노에마(noema)[각주:4]에 속할 수 있는 지향성의 질서와 정비례한다.
하나의 실체 내지는 하나의 사상의 상태는 주체화, 즉 그것들을 인식하는 인간과의 사회관계의 현실화로
지연되지 않는다.
그것은 샤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즉 인식의 잔류물, 정확한 인식을 거스르는 ‘비인격적 요인’
이다.
반복할 것까지도 없지만, 우리의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은 반대의 의미=방향을 갖고 있다.
즉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상식의 지향적인 태도를 편리한 허구로서, 표적으로 삼는 대상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요소를 물리적인 프로세스로 분해할 수 없을 때 채용하는 무언가로 생각한다.
모든 작용을 사건의 인과연쇄로 환원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농밀한 상호작용(특히 원격
‘작용’)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근대의 자연주의적인 세계에서 주체가 불충분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객체라고 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인식론적인 습관이 따르는 것은 그 반대의 원리이다.
즉 객체란 불충분하게 이해되지 않는 주체이다.
여기서는 인격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기 위해서는 인격화해야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객체는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후자에서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식—하나의 정신의 형식,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주체와 분명한 관계성을 가지든지—즉 행위자의 ‘가까이’ 존재하는 무언가(Gell 1998)로서 규정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두 선택지에서 비인간적인 행위주체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식 하에서 지각한다는
이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초인간적인 주체성의 세계에 있는 ‘문화’의 해석 속에서 다양한 사건이나 ‘자연’의 대상을 사회의 행위주체성이 이끌어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무언가의 변용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다만 야만적인 사실이지만,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기술의 산물이며 고도로 세련된
행위이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에게는 ‘맥주’이며, 우리가 진흙이라고 보는 것을 맥은 멋진 의례의 장
으로 경험한다, 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인공물은 이러한 모호한 존재론을 구비한다. 그것은 객체이지만, 필연적으로 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응고된 행위와 같은 것이며, 비물질적인 지향성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떤 것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타자에게는 ‘문화’이다.
이것이 선주민의 교훈이며, 인류학은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시방편의 교환—문제가 된
어휘에 손대지 못하는 단순한 기호 변화—을 위해 소여나 구축된 것의 미분/차이적인 배치를 빼앗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온전한 차이’(Wagner 1981: 51)라는 것이 있다. 노골적인 초월성으로서 실천, 반인류학적인 순수한 타자성—구축될 수 없는 것, 정착하지 않는 것, 관습이나 담론에 반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세계와, 인간의 형식을 몸에 걸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내재적인 인간성의 세계와의 차이이다.
이러한 선주민의 세계의 의인화된 가설과 근본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소여가 아닌 것으로서 소여가 아닌 존재로서 인간을 ‘구축한다’는 집요한 인간중심주의적 노력이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것까지 포함해서 서양의 철학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이국적인 민족의 나르시시즘의 천국(혹은 디즈니판 인류학)이라는 판타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인간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선주민의 세계를 가까이에 두는 것도 아니고 활기를 부여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해두어야겠다. 모든 것이 인간인 장소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자이다.
우리의 인류학이 꿈꾸는 더 많은 세계는 하늘 위와 땅 밑에 있다.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며 모든 관계성은 사회적인 것처럼 이 다방향성을 우리 세계의 환상처럼 기술하는 것, 그 첫 번째 발명을 두 번째 습관으로 환원함으로써 이 둘을 통일하는 것, 그것은 양자 간의 관계성의 매우
단순한—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하찮은—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용이함은 결국 모든 종류의 복잡함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론적인 일원론은 최종적으로는 인식론적인 이원론—에믹과 에틱, 은유적과 자의적, 의식과 무의식, 표상과 현실, 환상과 진리 등—을 비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리적으로 유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히 두
양상을 통일된 상태로서 각각의 주민 간에 하나의 변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분할은 단일자연주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