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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먼저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이 넘치시고 또한 삶의 영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축복이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축복드립니다. 우리 앞뒤 자고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죠. 그렇게 준비하는 4주간의 여정에는 매 주마다 각각 중요한 신앙의 주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주에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구원의 희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죠. 그것을 기억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세상을 보면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죠.
두 번째 주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다 말씀했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이야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샬롬 평안하냐라고 물으시는 것이죠. 예수님을 만나 얻어지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우리 내적인 평안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걸음걸음마다 복음을 나누는 평안의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이죠.
세 번째 주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자체가 기쁨이죠. 그래서 기쁨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주간이죠. 네 번째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는 한 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로 주제가 무엇이라고요? 기쁨입니다. 기쁨 기쁨인데 여러분 우리가 기다리는 구주 예수 예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고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겠다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는 것이죠. 단지 세상에서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르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고 그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과 이 땅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서 기쁨으로 나아갈 것인가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 기뻐하라 반복하여서 선포해 주었다는 것이죠. 즉 기뻐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서 기뻐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사실 세상적 기쁨도 참 많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은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 봐야 될 텐데 그 기쁨은 수십 개 주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십 개 주는 단어를 보니까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죠. 주 안에서 기뻐해야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해야 됩니다. 주 안에서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는 거죠.여기에서 주 안에서라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개념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먼저 주 안에서라는 이 표현을 통해서 기쁨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기쁨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이 무엇입니까? 죄사함의 기쁨이다라는 거 주 안에서 기쁨. 첫 번째 죄사함의 기쁨임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이런 찬양 고백하잖아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 지음을 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들 죄인이죠.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태어난 후손들,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우리 그러나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고 이 땅 가운데 살아가지만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 그것들을 다 떨쳐버릴 수 있고 우리가 승리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죠. 여러분 이 성탄의 계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 예수라는 그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잖아요.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죠. 예수라는 이 표현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여호와가 구원한다라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라고 된 이 발음은 이 신약 시대에 와서 국제 공영어인 헬라어를 통해서 예수라는 단어로 규정하게 되었죠.
특별히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천사들이 예수의 이름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 함께 읽어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메시아는 바로 자기 백성 저희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아는 사실이죠.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요 우리의 빈곤과 질병과 전쟁 등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원초적으로는 우리의 죄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다라는 사실이죠. 이것을 두고 우리의 삶의 문제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 그래서 이 죄의 문제 해결받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잖아요. 우리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 제가 읽어드릴게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합니다.
그렇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어 또한 갈라디아서 1장 4절에도 말씀해 줍니다. 우리 갈라디아서 1장 4절 말씀 넘어가나요? 하나님 제가 읽어드릴게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잖아요. 이 믿음의 사람들은 날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죄지음을 풀어놓는 지혜가 필요하다라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 우리 앞에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구나 다 어려움이 있잖아요. 세상엔 전쟁도 있고 세상에 여러 가지 풍파도 몰아치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문제도 있고 왜 없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문제들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복된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시편 32편 1 2절을 통해서 이러한 인생이 복되다라고 말해줍니다.
우리 같이 한번 시편 32편 1절, 2절 읽어볼까요?
다윗은 허물을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에 사함을 받는 자 여러분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죠. 죄가 있지만 죄를 가려워 주시는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가 복된 자가 된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이상 가장 복된 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한 자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사함을 받으셨습니까? 죄사함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이 이유만 가지고라도 기쁨으로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죄의 문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하고도 견딜 수 없는 이 죄의 문제 우리가 어떤 노력이나 고행으로 해서 풀어낸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은총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은혜이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죄사함을 통해서 기쁨을 묵상하고 묵상하다 보면 한 가지 연결고리가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죠. 예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주 안의 기쁨은 두 번째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창조하셨죠.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되어서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확정시켜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로마서 5장 8절 말씀인데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이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아주 놀라운 구절이죠.
확증하셨다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드러내고 계신다. 입증하고 계신다라는 의미예요. 그런데 여기에 이 말씀을 보면 현재 능동형으로 쓰여져 있다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은 효력이 있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영향을 준다라는 것이죠.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 사건을 입증해내고 계신다는 거 여러분 그러니 죄인 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이 확증된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난 참 사랑해 내였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 놀라운 사랑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잖아요. 매우 드물지만 때로는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회가 문제가 되면 자신을 투신하기도 하고 막 그러면서 생명을 내어 던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정의 구현이라고 말하기가 쉽죠. 정의 구현을 위해서 자신이 선택한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떤 사람도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죠. 이 말은 의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게 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죄인을 위해서 버린다. 내 생명을 바친다. 이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도록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셨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제일 잘 아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줬잖아요. 한번 우리 함께 암송해 보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런데 그와 동일한 고백이 요한일서에도 있습니다. 우리 요한일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으로 함께 또 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요. 살리기 위해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거예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찬송으로 고백하잖아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어떤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그 사랑을 다 묘사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를 범한 영혼 구원하기 위해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우리의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할 수 없다. 측량할 수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송 할렐루야 우리의 신앙 고백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요. 이 세상을 살면서 상대적으로 조금 사랑을 덜 받을 수도 있고요.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동일하시며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믿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사함 허락하신 그 기쁨, 그리고 그것을 잘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시구나라는 걸 생각하다 보면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 안에서 기쁨은 세 번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쁨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지만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죠. 창조의 회복이죠. 창조의 회복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행의 회복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으니 그 이름을 뭐라고 했습니까? 임마누엘이라 오늘 찬양 가운데 아주 멋지게 낭독을 해 주셨잖아요. 임마누엘의 뜻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 그 말씀 성경 구절을 함께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인데요. 시작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아멘 여러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왜 믿는가라고 물으면 삶의 문제 때문에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에 좁히고 좁히고 좁히고 좁히면 결론이 뭐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천국 가기 위해서 나올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라는 것이 마지막 최종 선택지로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점을 던질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없는가라는 것이죠.
이 땅에 천국이 될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 이렇게 질문을 해볼게요. 천국이기 때문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곳이 천국입니까? 질문이 어려운가요?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곳이 천국입니까?
너무 잘 아시네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최초의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거기가 천국이죠. 하나님의 나라죠. 죄로 말미암아 거기서 쫓겨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결과가 죄의 결과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회복하시겠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의 신앙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함께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서 의롭게 만들어 의인과 의인이 만나는 것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것이죠. 그래서 독생자 아들 예수를 보내주시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식구가 되었다는 거예요. 가족이 되었다는 거예요. 함께하는 가족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3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물론 이제 총 33년이죠. 예수님이 함께하셨어요. 그 땅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말씀을 하셨죠. 내가 죽으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 예수님께서 돕는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는데 내가 죽고 나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성령의 은혜가 있는데 여러분 그 성령의 내주하심을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인데 다른 보세를 설명하고 다음에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습니다. 세상은요. 능이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함께하시겠다. 그 안에 계시겠다라고 말씀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했으니 우리 안에 누가 계셔요? 성령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이 우리의 삶을 도우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에게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며 성령의 전이 우리 삶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임마누엘로 보내신 하나님의 귀하신 사랑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을 소망하면서만 살아야 됩니까?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까? 천국을 누리며 사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 천국이 있어요. 우리 안에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와 함께 하시는 그러니까 여러분 그 안에는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게 맞아요. 그 날은 완성된 나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완성됐고 불완전하지만 우리 안에 함께 계실 때 우리는 천국의 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하이라.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거 마시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의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나니 내 죄를 다 덮어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의 자격을 얻게 된 거예요. 이 의의를 가진 자 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이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희락 기쁨이 넘친다라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기쁨을 놓치지 말고 우리의 삶을 향해서 완성되는 그날까지 기뻐하시고 기뻐하시고 또 기뻐하는 기쁨이 충만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요. 여러분 슬픔 걱정, 근심이 없는 나라라잖아요. 물론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슬픔 걱정, 근심이 있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이 있다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을 정리하면 예수님의 구속의 의미, 하나님의 크신 사랑 성령님의 메주 아시 좀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 매주 듣는 거 축도할 때마다 언급을 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성령님을 대조하시 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이것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주 안에서라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속성에서 오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첫 번째 인식하고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주 안에서는요. 주 안에서라는 울타리라는 것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세상의 모진 풍파와 세파가 몰아닥쳐도 주님 아니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복되다라는 거예요.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는데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요. 감옥에 갇혀 있어요. 실제 자신의 환경은 녹록지 않아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옥에서 뭐 했어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기뻐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기쁨을 권면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밖에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기뻐하고 기뻐하십시오. 기뻐하고 기뻐하십시오라면서 그들에게 권면해 주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죠.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또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안에 있다라는 사실 그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 안에서의 주님과의 교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거예요. 교제가 점점 멀어지고 소원해지면 결국에는 떠나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인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진짜 막 좋아 죽어서 못 살면요. 둘이 막 희희거리고 막 웃고 마주 보고 있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어요. 그렇잖아요. 과거에 그런 거 안 해보셨나요? 나만 해봤나 둘이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으면 좋잖아요.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행복하잖아요. 그게 진짜 사랑 아니겠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소원해지면 점점점점 세상의 삶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고 주 안에서의 기쁨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우리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집니다. 저는 별로 그 말 뜻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죠. 가당치도 않은 거죠. 사랑하는데 왜 헤어집니까? 사랑하니까 어떻게든 같이 있고 같이 시간을 보내야죠. 사랑하니까 덜 만나자. 사랑해서 덜 만날 수도 있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밤을 지새워라도 만나고 싶고 밤새도록 통화하고 싶은 거죠. 여러분 밤새도록 통화하면 어떤 줄 아십니까? 굉장히 피곤해요 안 해보셨군요 늦은 시간까지 오랫동안 통화를 하다 보면 피곤해요.
그런데 그 피곤이 기쁨을 이기지 못해요. 기쁨이 그 피곤을 이겨버린다니까요 물론 그것이 너무 지속되면 또 힘들고 조절을 해야겠지만 기쁨이 그만큼 더 충만하다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하는 그 마음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매우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것이고 말씀과 기도의 찬송의 자리가 끊이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사랑이 예배를 통해서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이 점점점점 멀어진다면 우리는 진실한 사랑 기쁨이라고 고백하기는 좀 맞지 않다 진실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예배의 자리를 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사랑의 깊은 시간을 위해서 말씀 보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찬양하는 시간이 점점점점 늘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2025년도는 예배가 생명이 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생명역 요즘 이 역을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하는데 생명력 매우 중요하죠. 생명 있는 교회는요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기쁨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2025년도 우리 교회는요. 살리는 예배 살아나는 예배 살아내는 예배 할렐루야 한번 따라해 봅시다.
살리는 예배 살아나는 예배 살아내는 예배 우리 예배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해야 되는 그리고 예배가 살아나는 것을 예배 현장 가운데 경험해야 돼요. 그리고 삶으로 살아내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5절을 좀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 마치려고 하는데 여러분 이 기쁨이라는 것은 나눌 때 배가 된다는 것이죠.
기쁨은 나눌 때 배가 된다. 빌립보서 4장 5절은 이런 표현을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알게 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 그 받은 것을 나누라라는 거예요. 주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은 예수를 통해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다른 이웃과 나눌 때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대림절 기간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며 예수의 기쁨을 증거하는 시간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가정사를 제가 잘 오픈을 안 하는데 오늘 좀 해보겠습니다. 개인 스타도 있고요. 왜 그런지 모르는데 제가 전에도 고백했지만 이 탈모가 좀 오는 것 같아서 이거 어떡하지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이제 친구를 잠깐 만났는데 제 머리를 보니까 심각한데 그런 거 저는 사실 그렇게 외모에 그렇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냥 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지 그러는데 본인이 갑자기 이야기를 하면 내가 탈모제를 써봤는데 괜찮더라 괜찮더라라고 이제 저한테 소개를 해줬어요. 갓 땡땡땡이라는 제품인데 탈모 고증 치료제죠. 듣고서 이제 그래 뭐 그런 것도 있겠지 하고 있었는데 이제 머리를 진짜 손 보려고 김건은 시간이 있다가 앉았는데 성이 심각하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또 자극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제가 이제 김건태 씨한테 이런 걸 제가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게 나와서 바로 제가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약국에 가서 물어봤어요. 이게 시중에 광고되는 판 땡땡하고 같은 성분입니다. 이제 그렇게 얘기하는 근데 그거는 이제 광고가 나가니까 조금 더 비싸지만 좀 더 저렴하다 같은 효과가 있다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3주 전 정도에 제가 가서 하루에 3개씩 두 달 치더라고요. 먹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다음 주는 1일이나 새벽 예배에 나와서 저희 와이프가 이제 제가 주일날 올 때는 제가 잘 손질을 못하니까 머리를 이렇게 좀 만져주거든요. 그래도 좀 하고 나가야 되지 않겠냐고 그런데 2주 지난 때 이렇게 보더니 잔머리들이 보인대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괜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거예요. 우선은 이게 탈모 치료제가 효과가 있든 없든 그걸 떠나서 잔머리가 보인다니까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근데 잔머리가 한 2~3실치 됐다는데 제가 딱 따져보니까 3주 만에 2 3실치 될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미 이제 시작된 탈모가 오고 좀 괜찮아지기 위해서 나온 것들이겠죠. 어쨌든 그렇게 이렇게 하더니 와이프가 갑자기 나도 먹어야겠네 그러는 거예요.
이게 자신도 지금 이게 양이 줄어서 좀 걱정이라고 그러면서 그날부터 하나씩 이렇게 떼보고서 같이 먹으면 기쁨이 두 배지 그러는 거예요. 그렇지 나도 회복되고 당신도 회복되면 기쁨이 두 배 많네. 그리고 약을 이렇게 보니까 약이 점점 주는 거예요. 약은 주는데 그래 약은 줄지만 기쁨은 두배다. 그래서 그렇게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이 기쁨의 나눔에 있어서 이렇게 묵상을 하는데 이렇게 물질적인 거나 어떤 우리가 보여지는 것들을 나눌 때는 주는 현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복음은 주는 게 없더라고요. 하나님의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질 뿐이지 줄어들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나눌 때 내 안에 우선 기쁨이 생겨요. 여러분 제가 가끔 간증을 시키잖아요. 간증을 할 때 그게 준비할 때는 때로는 고민하고 해야 되지만 그거 나눌 때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해져요. 그것을 또 나누어 듣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도전받기도 하고 거기에서 같은 기쁨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면서 충분히 기뻐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세상적인 것들은 어쩌면 나누다 보면 손해도 있고 그것들로 인해서 막 고민도 되겠지만 하나님의 것은요. 하나님의 은혜는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어린이 찬송 중에 파이디온 찬양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런 가세 주면 주면 줄수록 자꾸만 자꾸만 커지는 우리 예수님의 사랑 너무너무 놀라워.
그래서 친구도 동생도 엄마 아빠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놀라운 사랑 다 노 주고 싶다. 이게 가사의 내용이 주면 주면 줄수록 풍성해진대요. 아이들이 찬양을 고백하는데 주고 주고 나니까 없어야 되는데 야 풍성하네.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친구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거죠.
여러분 이 성탄의 계절에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는 사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풍성함 은혜로 찾아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기쁨의 근원 되시는 주님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그 크신 은혜, 하나님께서 독생자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하심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그 동행 이것으로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주 안에서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이 주 안에서 나의 삶을 잘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 예배 가운데 말씀과 기도와 찬송 가운데 조금 더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더 나아가 이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해서 나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친구도 마음껏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